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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3월18일(일) 오후 2시20분
세기의 걸작을 두고 이렇게 말하는 게 민망하기는 하지만, <소매치기>는 제대로 된 ‘소매치기’의 교본처럼 보인다(기차역에서 소매치기 일당이 벌이는 치밀하고 조직적인 행위의 연쇄를 보라!). 로베르 브레송은 그렇게 찍었다. 브레송은 소매치기를 소매치기로 만든 환경의 필연성, 이를테면 빈곤이나 외적 결핍 따위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는 소매치기의 요동치는 심리를 재현하는 데도 그리 애쓰지 않는다. 그렇다고 소매치기 행위를 멋진 갱들이 대낮에 총싸움을 벌일 때처럼 드라마틱하게 미화하는 것도 아니다.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소매치기의 주체가 되는 ‘어떤’ 손들만을 끈질기게 응시한다. <소매치기>는 손에서 시작해 손으로 끝나는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특정 인물의 손이 아닌 ‘어떤 손’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 손은 익명적이며 아무런 감정도 싣고 있지 않지만, 매우 섬세한 촉수를 지니고 우아하게 움직인다. 정교
로베르 브레송이 보여준 마지막 희망의 빛, <소매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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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재전> 3월7∼20일 인사아트센터 1층 02-736-1020
쌀알의 유쾌한 외도 현장을 목격한 기분이다. 차분히 밥상에나 올라야 할 쌀알들이 형형색색 캔버스 화면과 만나, 20세기 대표적인 인물들의 아이콘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미술가 이동재(33)는 ‘쌀알작가’로 통한다. 2002년 ‘농업과 예술’을 접목한 기획전에 참여하면서 쌀을 작품의 제작 재료로 쓰기 시작했다. 그에게 쌀알은 단지 식량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어쩌면 오랜 시간 축적된 인류의 문화적, 사회적 역사가 함축된 캡슐인지도 모른다. 이동재가 주목한 20세기 아이콘은 인물이다. 마릴린 먼로, 앤디 워홀, 마더 테레사, 루이 암스트롱, 마오쩌둥, 존 레넌, 백남준, 헤밍웨이, 피카소…. 한 시대를 풍미한 대표적인 인물상은 그대로가 인류 현대사의 또 다른 얼굴이며, 각각의 주인공들은 각계의 활동 배경을 대신한다. 예술가로서의 앤디 워홀이나 피카소, 정치가 마오쩌둥, 종교인 마더 테레사, 음악인 존 레
쌀알의 유쾌한 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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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만들기의 비밀> 니콜라스 T. 프로페레스 지음/ 한길아트 펴냄
영화연출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영화만들기의 비밀>은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원제 <영화 연출 기초>라는 말에 걸맞게 구체적인 사례와 이론적 접근의 균형을 맞춘 책이다. 저자 니콜라스 T. 프로페레스는 1969년 베니스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한 <마침내 자유를>의 연출, 촬영, 편집을 했으며, 엘리아 카잔 감독의 <방문자>에서 촬영, 편집, 프로듀서로 일했고 컬럼비아대학 영화학과에서 20여년간 영화연출을 강의했다. <브로크백 마운틴> <와호장룡>의 각본과 제작에 참여한 제임스 샤무스는 이 책이 “영화를 어떻게 연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실제 영화를 만들 때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려준다”고 평하기도 했다. 실제로 <영화만들기의 비밀>에서는 연출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 신 분석, 리허설
영화 연출의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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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에서 재주를 가장 잘 피우는 사람은 누굴까? 적은 돈으로 할리우드에서 성공했다고 책까지 쓴 로저 코먼? 하지만 코먼도 다른 사람 영화의 아이디어를 훔치기도 하며 일가를 이룬 멜 브룩스 앞에선 기죽을 법하다. 데뷔작 <프로듀서스>는 그에게 작가적 재능 또한 있다는 걸 일찍이 증명한 영화인데, 브룩스는 자기가 만든 최고 걸작을 뮤지컬 버전으로 탈바꿈해 대성공을 거둔 뒤 브로드웨이 무대를 이끈 수잔 스트로만에게 메가폰을 맡겨 풍자와 패러디가 넘치는 새로운 영화로 만들었다. 어딘가 꿀꿀한 구석이 없지 않았던 ‘68년 원작이 게이 트렌드를 업고 울긋불긋한 옷을 걸친 건 그렇다 쳐도, 브룩스가 직접 맡은 음악은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것 같다는 혐의가 강해 오리지널이라 부르기엔 어색한 게 사실. 하지만 이 모든 게 다 그의 장기인 걸 어쩌겠나. 영화가 끝난 뒤 불쑥 등장해 “나가, 끝났다니까!”라고 고함치는 어리광쟁이 팔순 영감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필자가 브룩스 이야기
원작 연출자가 맡은 음악이 어때? <프로듀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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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 나이트 샤말란의 <언브레이커블> 이후 작품들은 <식스 센스>의 꽉 짜여진 구조를 뒤집는 작업에 가깝다. 갈수록 논리적 설명은 사라지고, 이야기는 허술할 정도로 엉성하며, 결말은 극적이기는커녕 미지근할 뿐이다. 샤말란의 영화는 언제나 믿기 힘든 상황을 설정한 뒤 역으로 그것에 대한 믿음을 질문한다. 유령, 슈퍼맨, 외계인, 괴물을 거쳐 도착한 요정 세계인 <레이디 인 더 워터>는 믿음의 근거를 제시하는 데 도무지 관심이 없는 것 같지만, 샤말란은 ‘그렇다 해도 믿어야 한다’고 말한다. 무언가를 믿는다는 건 이성적인 분석과 비판에 앞서 고스란히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이 부재하는 시간 속에서 샤말란은 자기 영화가 그 시험대가 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 설령 <레이디 인 더 워터>가 샤말란이 딸의 잠자리에서 들려준 동화 이상이 아니라 해도 이런 뚱딴지같은 생각을 접을 마음은 없다. 어떤 진실은 믿는 자에게만 보일 테니까 말이다. 이상할
믿음에 대한 샤말란의 또 다른 질문, <레이디 인 더 워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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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시사회장에서 배창호는 자신도 영화를 몇년 만에 본다고 했다. <정> 때와 달리 그는 사뭇 들뜬 모습이었다. 배창호가 시스템 밖에서 고독한 작업을 펼친 지 이제 10년이다. 과거 화려한 시절을 누린 그가 자칫 옹색한 처지를 곰삭힌 영화를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러나 <길>은 참으로 고요하고 속되지 않은 작품이었으며, 사랑에는 비겁했으나 삶에는 성실했던 장돌뱅이의 길을 따라간 영화는 개인의 소박한 역사와 진중한 로드무비를 고집스럽게 완성해놓았다. 영화는 결국 감독을 닮는다. <길>은 남자가 마을 어귀로 등장하는 것으로 시작해 그가 길 밖으로 사라지면서 끝나는데, 한국적 미장센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깨닫기 위해 그 두 장면만으로도 족하다(필자의 일천한 경험으로선, 이만희와 임권택 이후 그 같은 장면을 보지 못했다). <길>은 이 시대의 영화들로부터 가장 먼 곳에 위치해 있지만, 작금의 영화가 정작 필요로 하는 무
배창호 감독의 영화 소개에 가슴 뭉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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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EBS 국제다큐멘터리 페스티벌(EIDF)이 페스티벌 기간 중 EBS-TV를 통해 방송될 다큐멘터리를 공모한다. 공모대상은 2005년 1월 이후 제작된 논픽션 필름 혹은 비디오 작품으로, 한국에서 상업적인 용도로 개봉되거나 방송되지 않은 작품이어야 하며 길이는 상관없다. 출품을 희망하는 자는 2007년 5월 31일까지 출품신청서와 함께 EIDF 사무국(서울시 강남구 도곡2동 463)으로 발송하거나 방문 제출하면 된다. 출품신청서는 EIDF 홈페이지(www.eidf.org)에서 다운받을 수 있으며, 홈페이지를 통한 온라인 접수나 이메일 접수(eidf@ebs.co.kr)도 가능하다. 선정된 작품은 EBS TV를 통해 방영되며, EIDF 경쟁부문인 <페스티벌 초이스>의 최종후보작을 놓고 심사를 받게 된다. <페스티벌 초이스>의 시상내역은 대상에 미화 10,000달러, 다큐멘터리 정신상에 미화 7,000달러, 심사위원 특별상에 미화 5,000달러, 시청자상에 미화
제4회 EBS 국제다큐멘터리 페스티벌 출품작 공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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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이 만드는 신개념 시리즈 만화책 <POPTOON>과 함께하는
만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의<내 인생의 만화>를 소개한 영상입니다.
씨네21 독자여러분이 좋아하는 만화도 리플로 달아 주세요.
이번 영상은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꽈당민정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있는 서민정 씨가 소개한 입니다.
서민정의 <내 인생의 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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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일을 대표하는 프로덕션 디자이너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된다. 2007전주국제영화제는 영화제 기간 중인 4월 28일부터 30일까지 한·중·일 대표 프로덕션 디자이너 3명의‘프로덕션 디자이너 마스터클래스’를 목원대학교의 후원으로 진행한다. 프로덕션 디자이너는 미술 감독의 영역을 넘어서서 세트, 배경, 의상, 소품, 활자 등 한 영화의 시각적인 부분을 총체적으로 책임지는 전문가. 이번 마스터 클래스에는 <국경의 남쪽>과 <타짜> 등의 작품에서 미술을 맡은 양홍삼 미술감독과 장이모, 첸카이거 감독의 영화를 비롯해 지난 2001년에는 <무사>에도 참여했던 후오팅샤오, 그리고 <피와 뼈>로 제28회 일본아카데미상 최우수 미술상을 수상했던 이소미 도시히로 미술감독이 선정됐다.
지난 2004년부터 시작된 전주국제영화제 ‘마스터클래스’는 프로그램 관련 학술행사‘JIFF 클래스’중 하나로, 영화 제작 현장의 일급 전문가들을 초청, 그 분야
한중일 대표 프로덕션 디자이너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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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3월 13일
장소 신촌 메가박스
이 영화
고시생 민우(남궁민)는 골목에서 우연히 마주친 수연(민지혜)에게 한눈에 반하지만 말 한번 붙이지 못하고 음울한 시선만 보낸다. 남자친구와 모텔에 들어간 수연을 스토킹하던 날, 민우는 귀가 중인 그녀를 충동적으로 성폭행하고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시간이 흐르고 민우는 다시 수연을 찾고, 수연은 그가 범인이란 사실을 모른 채 그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한편 강력반 베테랑인 강형사(박용우)는 대형 마약 거래 현장을 급습해 조직의 보스 조상태(김동하)를 감옥에 넣고 마약의 상당량을 가로챈다. 식물인간이 된 아내를 위해 또다른 범죄조직과 결탁해 병원비를 마련하려는 것이다. 얼마 후 감옥에서 출소한 조성태가 복수의 손길을 뻗어오자 궁지에 몰린 강형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수연에게 정체를 들킨 민우 역시 가혹한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말말말
"영화를 정말 만들고 싶었는데, 이날이 오기까지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내가 어떤 영화를
'사랑'이 용서받는 날? <뷰티풀 선데이> 첫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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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의 소설 <검은 꽃>은 20세기 초 멕시코로 이민가는 한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마치 사회의 아르케노아처럼 인천 항구에서 남미로 향하는 배를 타는 이들은 도둑놈부터 양반까지 조선사회 각양각색의 사람들로 이뤄져 있다.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일단 ‘성지’에 가면 풍족하게 살고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과장광고를 믿고 몸을 커다란 기선에 싣는다. 그들은 긴 여행의 과정 속에서 점점 자신들이 감행하는 모험의 규모를 짐작하게 된다. 자신들의 지위를 누리지 못하는 양반들은 좌절하고, 농민, 노동자와 나머지 사람들은 그나마 처음부터 적응을 위한 노력을 하지만, 그들도 새로운 환경에 완전히 적응하기가 쉽지만은 않다. 끈기와 노력 끝에 한인들은 그럭저럭 살림을 꾸리고, 그 사이에 식민화가 되어버린 고국을 위해 독립운동까지 벌인다. 이 이야기는 소설이지만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처음 이주노동자로 하와이, 멕시코 등에 간 한인들에 대한 실화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그들의 경험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하와이의 모기와 흡혈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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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술은 말걸기에서 출발한다. 몸으로, 말로, 글로.
며칠 전 회식 자리였다. 소맥, 양맥 칵테일 이어달리기로 사위가 혼미해진 게 대략 새벽 2시. 낼 후회하기 전에 지금 집으로 가야 해, 라고 아득한 내면의 소리가 들려왔건만 발걸음은 후배가 앞장선 클럽으로 향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살아남은 자는 남2 여2. 대충 어색한 몸놀림이 시작된 지 10분이나 지났을까. 건장하고 기장 긴 두 사내가 우리 사이로, 아니 후배 여기자들 앞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자세는 매우 적극적이고 노련했는데 부비부비 준비운동이 있다면 이런 게 아닐까 싶었다. 당황스러웠던 건 그 준비동작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남자2를 조금도, 아니 전혀 의식하지 않겠다는 태도였다. 애초 파트너가 아니었으니 선택은 여자가 하는 게 맞다, 는 패배의식에 휩싸여 전투를 포기하고 그냥 자리로 돌아왔다. 약간 화도 난 듯했다. 다행히 어여쁜 후배가 나를 다시 무대로 이끌었고(너 사회생활 좀 되겠다), 그 뒤로 몸싸움에서
[오픈칼럼] 말걸기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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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선천적으로 냄새를 맡지 못한다. 아니, 냄새의 형태를 아예 모른다고 봐야 할 것이다. 거동이 불편하신 할아버지가 바지에 변을 보셨을 때 ‘머리가 좀 아프네’ 하고 느낀 게 내 평생 느낀 냄새의 전부이다. 이러니 향수는 물론, 소독차 냄새, 커피 향 등 아예 냄새와 관련된 기억이 있을 리 없다. 냄새에 관한 기억이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실연 뒤에 상대의 냄새로 그의 기억을 함께 떠올린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내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냄새에 관한 기억을 꾸며내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참 부끄러운 기억들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이 비 냄새가 난다며 창밖을 가리키거나, 꽃 향기 좀 맡아보라며 꽃을 내밀었을 때 난 당혹함을 감추고 ‘음, 좋다!’ 하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친구들이 하수구 냄새나 비린내를 맡고 코를 쥘 때 나도 시간차를 두고 코를 쥐었다. 반에서 누군가 방귀를 뀌었을 때 그 냄새를 추적하는 아이들이 마치 셜록 홈스처럼 보
[이창] 두 번째 소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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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당히 뒷북스러운 얘기다 싶긴 하다만 그럼 좀 어때, 본 코너가 남보다 한 시간 빠른 뉴스도 아니거늘이라는 핑계로 뒷북 한번만 더 치고자 한다.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개봉되었어야 했다. <아버지의 깃발>과 함께 말이다. 아니다. 이건 이렇게 고쳐서 얘기하는 편이 맞겠다. <아버지의 깃발>은 <이오지마에서…>와 함께가 아니라면 개봉되지 않는 편이 나았다. 사실 필자는 <아버지의 깃발>을 보고 난 뒤, 막판에 제대로 끊지 못하고 나온 숙변자의 찝찝함을 떨쳐낼 수 없었더랬다. 그 정체 모를 찝찝함을 문장으로 바꾸면 ‘아냐, 분명 뭔가가 더 있을 텐데…’쯤이 될 텐데, 여기에서 말하는 ‘뭔가’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이오지마에서…>였던 것이다.
물론 <아버지의 깃발>은 그 자체로도 훌륭무쌍한 영화다. 하나 따지고 보면 <아버지의 깃발>은 그 하나만으로는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얘기를 온전하게 담지 못
[투덜군 투덜양] 반쪽짜리 명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