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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요새 내가 사는 유일한 낙인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과 한때 열광했던 애니메이션 <심슨네 가족들>, 영화 <좋지 아니한가>는 같은 맥락에 놓여 있는 작품들이다. 전통적으로 가족영화가 걸어왔던 기치인 ‘희생과 헌신’을 신발장 앞 발매트로도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좋지 아니한가>는 이 연관성을 숨기지 않는다. 영어 제목은 <심슨네 가족들>(원제 더 심슨스)을 연상시키는 <심스 패밀리>이고, 거리 홍보 포스터에서는 <거침없이 하이킥>의 캐릭터와 영화의 등장인물들을 짝짓기했다. 그러니 나의 기대는 하늘을 찔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기대가 높아서였을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허전했다. 실망하거나 지루한 것도 아닌데 허전한 느낌. 아무것도 안 보고 나온 것 같은.
서로 다른 장르를 수평비교하는 것은 무리지만 화법의 세련됨이나 가족을 바라보는 태도의 참신함에서 분명히 &
[투덜군 투덜양] 21세기형 모범가정의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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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특히 문학은 더이상 읽지 않는다는 한국에서도 파올로 코엘류의 소설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려나간다. 그의 작품은 기독교에 입각한 종교적 성찰을 현대인의 삶에 쏙쏙 대입할 수 있는 경구 같은 문체로 매력적인 고통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멋진 그림과 함께 한 구절쯤 인용해 블로그에 올리기 좋은 문장들로 이루어진, 삶에 지친 영혼에 신경안정제 역할을 해주는 그의 98년작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가 일본 감독 호리에 게이에 의해 영화화됐다. 영화는 원작이 있던 곳으로부터 먼 거리를 이동했지만, 전 인류의 보편적인 관심사인 ‘자살’이라는 소재와 영화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간적 배경인 유럽풍의 인테리어로 국적을 탈색시킨 정신병동 덕에 둘 사이의 문화적 차이가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
원작에서 스물네살이었던 베로니카는 영화에서 스물여덟의 토와(마키 요코)가 된다. ‘모든 걸 다 가지고 있지만, 아무것도 없으니까’라는 이유로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한 그녀는 정신병동에서 깨
삶을 달래주는 달콤한 위안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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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스릴러도 좋지만 내공보다 욕심이 앞서면 곤란하다. <푸코의 진자> 중엔 디오탈레비와 아르덴티 대령이 수의 신비를 논하며 성당기사단에 관해 추론하는 장면이 있다. 성당기사단원 수인 36을 분해하고 더하고 곱하며 역사를 관장하는 신의 조화를 짜맞춰내는 이 대목에서 이들은 순수한 지적 쾌감을 넘어서는 신성한 황홀경에 빠진다. <푸코의 진자>의 기지는 기기묘묘한 숫자놀음을 절묘한 지적 감동으로 받아들일지 썰렁한 궤변으로 넘길지를 독자의 몫으로 남기지만, 짐 캐리의 심각한 스릴러 <넘버 23>은 줄곧 “이거 봐, 정말 교묘하지?”라는 믿음을 강요하다 썰렁하게 끝난다.
월터 스패로우(짐 캐리)의 평온한 일상은 부인 아가사(버지니아 매드슨)가 사온 한권의 책으로 무너진다. 저자도 출판사도 불확실한 극중 소설 <넘버 23>은 “숫자 23의 법칙이 만물에 들어 있다”는 기묘한 망상 이야기다. 월터는 주인공 핑거링에 대한 묘사에서 이상한 기시감을 느
수 논리의 융단폭격 <넘버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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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빼꼼’은 EBS와 투니버스에서 방영된 TV시리즈 <빼꼼>으로 이미 스타덤에 오른 ‘코믹 배우’다. 2~3분 내외의 단편인 <빼꼼> 시리즈에서 주연한 이 백곰 캐릭터는 쇼핑몰 회전문에 끼거나 러닝머신 위에 올라 허둥대며 웃음을 자아낸다. 논버벌 애니메이션(non-verbal animation)이라 대사는 “웅? 웅? 우어어~”가 전부. 100% 국내 기술의 3D그래픽으로 창조된 백곰의 실수연발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빼꼼> 시리즈는 2002년 프랑스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 주목받은 단편 <아이 러브 피크닉>을 TV시리즈화한 작품으로, 이미 영국 <BBC>, 미국 카툰네트워크, 프랑스 M6 등 20개국에 수출 계약을 체결한 ‘성공한’ 상품이기도 하다. <빼꼼의 머그잔 여행>은 임아론 감독의 RG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TV 시리즈 공개 이전인 2002년부터 준비해온 장편 프로젝트다.
우연히 마법의 펜던트
착한 애니메이션 <빼꼼의 머그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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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퍼 애니스톤이 브래드 피트와 갈라서지 않았더라도 이 결별 스토리에 캐스팅됐을까, 제니퍼 애니스톤이 빈스 본과 달아오르지 않았다면 이 엇박자 애정극이 그렇게 화제가 됐을까, 하는 1차원적 눈초리를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개인 누구에게나 사랑의 발견은 100만볼트짜리 아드레날린 주사이며, 이별의 확인은 전 우주의 죽음을 알리는 선고다. 무수히 변주를 반복하는 사건의 디테일이 문제일 뿐이다. <브레이크 업: 이별후애(愛)>는 짜릿한 연애 발생사를 최대한 간략하게 처리한 채 애정의 데드맨 워킹을 길게 주시하는 남녀상통지사다. 물론 사도마조히즘 로맨스는 아니다. 바람나거나, 불치병에 걸리는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별예방 참고서로 삼을 만한 드라마다.
게리(빈스 본)는 시카고 거리를 누비는 관광 가이드답게 지칠 줄 모르는 유쾌한 입담과 에너지의 소유자다. 브룩(제니퍼 애니스톤)이 게리의 당찬 작업 스타일에 반한 배경에는 청담동 스타일의 갤러리에서 성질죽이고 봉급쟁이 큐레이터
이별예방 참고서 <브레이크 업: 이별후애(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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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태수는 마약조직의 보스 구양원(문성근)의 돈을 강탈해 용케 도망친다. 태수를 쫓던 조직은 그 대신 일란성 쌍둥이 동생 태진을 붙들어간다. 그렇게 동생과 헤어진 태수(지진희)는 19년이 흐른 뒤에야 태진의 행방을 알게 돼 만날 약속을 정한다. 하지만 약속장소에서 동생을 기다리던 태수는 누군가가 쏜 총에 의해 태진의 머리가 관통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되고, 엄청난 충격에 휩싸인다. 어릴 적부터 싸움을 잘했고 성인이 된 뒤에도 ‘수’라는 이름의 특급 해결사로 활약해온 태수는 태진의 신분으로 위장한 채 철저한 복수를 노린다.
신영우의 만화 <더블 캐스팅>을 바탕으로 한 최양일 감독의 영화 <수>는 쌍둥이 동생 행세를 하는 태수가 태진의 죽음 뒤에 가려진 비밀을 파헤치고 응징하는 과정을 담는다. 태수는 태진이 다니던 경찰서 강력팀에 들어가게 되고, 동료 형사인 미나(강성연)가 태진의 애인이었음을 알게 된다. 태수는 또한 ‘수’를 뒤쫓고 있는 강력팀 형사(이기영)의
복수심 그 자체의 잔인성과 무한성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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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을 갖지 못한 자의 집착, 그리고 살인. 파트리트 쥐스킨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는 코로만 세상과 소통할 수 있었던 한 남자의 굴곡 많은 일대기다. 생선 비린내가 진동하는 프랑스의 한 시장 골목. 장 바티스트(벤 위쇼)는 생선이 토막째 잘려나가듯 탯줄이 잘려 버려진다. 하지만 지독한 생선 냄새는 바티스트의 예민한 후각을 자극하고, 바티스트는 ‘진드기’ 같은 생명력으로 자신의 출생을 알린다. 아기를 버리다 걸린 여인은 시장 사람들에 의해 사형대로 보내지고, 죽음을 맞는다.
향이 결핍된 남자의 발달된 후각, 어머니의 죽음을 뒤로한 채 이어간 목숨. <향수…>의 주인공 바티스트의 삶은 결핍에서 시작한다. 식성이 좋고 인간의 향이 없다며 구박받던 고아원 생활에서도 그가 세상 모든 물건의 향을 맡으며 소통을 시도할 수 있었던 건 그에게 향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꽃에서 나는 향, 죽은 쥐에서 나는 향, 나뭇조각과 돌맹이에서 나
소설 내용에 충실한 영화 <향수: 어느 살인자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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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 PD인 석호(최원영)는 어느 날 술에 취한 채 아는 동생인 채영(김푸른)에게 전화를 건다. 보고 싶어서 전화했다며 운을 뗀 뒤, 이내 사귀고 싶다는 본색을 드러낸 석호는 다음날 채영을 만나 합의에 성공한다. 물론 석호의 진짜 본색은 채영과의 섹스다. 은근슬쩍 스킨십을 시도해보지만 채영은 그저 “나중에”, “다음에”를 반복하거나 “내가 그렇게 쉽게 보여?”라며 화를 낼 뿐이다. 영화는 다시 석호의 통화장면으로 돌아가 또 다른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채영은 사실 또 다른 남자친구 선수(이정우)와 이미 모텔을 드나드는 사이. 채영은 선수에게 석호가 ‘그냥 아는 오빠’라고 말하지만, 선수 또한 ‘그냥 아는 누나’들이 많은 이름 그대로의 선수다. 어느 날 클럽에서 만난 연상녀 지연(고다미)과 하룻밤을 보낸 선수는 채영과 데이트를 즐기는 사이에도 지연과 지속적인 만남을 갖는다.
애인 있는 남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남자는 아버지도 아니고, 군대고참도 아니고 그녀의 ‘그냥 아는 오빠’다.
섹스로 연결된 다각형의 남녀관계 <내 여자의 남자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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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엿보기와 엿듣기를 다루는 영화는, 예상치 못한 심리적 유대의 이야기로 전개되곤 한다. 역전된 스톡홀름 증후군(인질이 납치범에 동화되는 현상)과 비슷한 증상이, 엿듣고 훔쳐보는 쪽에 나타나는 것이다. 크지슈토프 키에슬로프스키 감독의 <사랑에 관한 짧은 필름>에서 건너편 집 여자를 엿보는 남자 토멕은, 보는 것을 아는 것과 동일시했고, 다시 그것을 사랑과 혼동했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컨버세이션>에 나오는 고독한 도청 전문가 해리는, 그런 함정을 알았기에 자신이 엿듣는 내용에 무관심하려고 노력했다. 비록 실패했지만.
통일 5년 전 1984년의 동독을 배경으로 한 <타인의 삶>에서 도청은, 공무다. 1980년대 중반 동독에서는 9만명이 넘는 비밀경찰(슈타지)과 약 17만명의 정보원이 활동했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밀고로 유지되는 세계에서는 더 끈덕지게 의심하는 자가 유능한 멤버다. 주인공 게르트 비즐러(울리히 뮈헤)는
기이한 우정의 연대기 <타인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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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준호 감독의 <괴물>이 중국 박스오피스에서 2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이 영화의 제작사 청어람은 3월8일 중국에서 개봉한 <괴물>이 현재까지 916만 위안(약 11억원)의 수입을 올렸다고 밝혔다. 청어람에 따르면, 중국 배급 관계자들은 <괴물>이 개봉 2주차에 접어들어서도 관객들의 지지를 꾸준히 얻고 있어서 장기상영도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중국 신문 <성시쾌보>(城市快報)의 3월15일자는 <괴물>의 3월 돌풍이 매섭다는 이야기를 전하면서 특수효과와 감동적인 이야기를 흥행비결로 꼽았다. 중국에서 <괴물>의 흥행열기는 3월20일 홍콩에서 열리는 아시안필름어워드의 결과에 따라 더 증폭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괴물>은 미국 시장에서도 의미있는 반응을 얻고 있다. 3월9일 미국 전역에서 개봉한 <괴물>은 개봉 2주차 주말 박스오피스 27위에 올랐으며, 18일까지 누적수입 69만 달러를
<괴물> 2주연속 중국 박스오피스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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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기술 발전의 산물이고 19세기 말의 발명품이다. 영화의 예술성은 비교적 나중에 드러났는데 짐작건대 그전까지 영화를 보러가는 사람들은 발명품 전시회를 찾을 때와 비슷한 마음가짐으로 극장을 찾았을 것이다. 영화가 발명품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종종 오해가 벌어지곤 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이다. 20세기 초의 사람들이 <매트릭스>나 <반지의 제왕> 같은 영화를 상상할 수 없었다는 걸 생각하면 타당한 얘기이지만 꼭 맞는 얘기는 아니다. 피터 잭슨의 <킹콩>이 수공업적 특수효과로 만든 1933년작 <킹콩>보다 우월하다고 말한다면 그건 누구나 수긍할 만한 주장이 아니다. 거꾸로 기술 발전이 영화 고유의 예술성을 파괴한다고 믿는 경우도 있었다. 유성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소리의 등장에 반대했다. 정돈된 시각예술을 혼돈의 현실로 밀어넣는 시도라 여겼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술 발
[편집장이 독자에게] 무성영화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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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아무도 규정하지 않았던 19세기 말, 인간의 신체와 접촉은 기록의 주요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후 인간의 몸은 필름 그림자의 중심부에서 밀려났다. 영화가 산업으로 자리하면서 관객은 대상의 나열보다 그것과 이야기의 결합을 원했으며, 윤리와 종교라는 억압과 수치라는 형벌이 인간의 육체를 드러내는 데 제약을 가한 결과, 사진과 회화에 등장하는 모습 그대로의 육체를 필름 위에선 확인할 수 없게 됐다. 신체의 아름다움은 옷과 이야기 뒤로 숨어야만 했다. 얼마 전 DVD로 출시된 제임스 브로튼과 케네스 앵거의 작품들은 인간의 신체와 시의 기록으로서의 영화가 아방가드르영화와 언더그라운드영화 속에 존재해왔음을 보여준다. 브로튼의 영화가 주류사회의 관습으로부터 해방된 인간이 되찾은 사랑과 평화 그리고 자유의 시적 표현이라면, 앵거의 영화는 게이의 정체성을 사춘기의 미성숙·마법·오페라·팬터마임·팝 등과 버무려놓은 꿈 혹은 환상이다. 둘은 ‘쾌락’이란 주제를 공유했는
[해외 타이틀] 쾌락을 말하는 인간의 몸과 시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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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두 편의 영화 <300>과 <고스트 라이더>가 북미 박스오피스 상위권을 지키고 있는 가운데, 코믹스를 원작으로 하는 또 한편의 영화 <닌자거북이 TMNT>가 3월23일 미국 개봉을 앞두고 있다. 1990년 <닌자 거북이>를 시작으로 1993년까지 모두 3편이 실사 영화로 제작됐고, 이번 미국 개봉을 앞둔 <닌자거북이 TMNT>는 CGI를 이용한 애니메이션으로 선을 보일 예정. <…TMNT>를 연출한 TV CGI 전문가 출신의 케빈 먼로 감독은 "원작에 바치는 오마쥬로 좀 더 위엄있는 광경에서 거북이들을 그려내고 싶었다"고 연출 의도를 밝혔다. 3편까지는 거북이들을 연기하기 위해 고용된 무술가들이 엄청난 부피의 고무 인형옷 속에 들어가서 연기해야 했으나, 시리즈의 4번째 영화인 <…TMNT>에서는 컴퓨터 그래픽으로 작업된 4마리의 거북이들이 지붕 위를 타고 밤하늘을 가르고 맨하탄의 하수구
닌자거북이들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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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4월, 한-미 자유무역협정 토론회장. AV산업은 협정에서 제외된다던 한국쪽 수석대표는, 협상대표가 스크린쿼터에 관한 특별 규정도 모르냐는 눈총을 받자 “미국인들이 볼 영화를 만들면 될 것 아니냐”고 되묻는다.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의 첫 단락에 나오는 장면이다.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에서 제목을 따온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는 열일곱명의 다큐멘터리 작가가 모여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를 질문하면서 영화가 현실 인식에 눈감지 않고 변화의 의지를 따를 것임을 밝힌 작품이다. 비정규직 노동자, 사학법 개정, 양심적 병역거부, 여성 농민, 평택 대추리 등 현실의 단면들을 들여다본 작가들은 ‘한국이 미쳐가고 있다’고 진단했는데, 며칠 전엔 한-미 FTA 8차 협상이 ‘잘’ 마무리됐다는 뉴스 보도가 있었고, 스크린쿼터는 원상회복되지 않고 있으며, 그외에도 악질들이 이끄는 대세가 뒤바뀌기란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그 밑에 묻힌 진실과 미
우리가 사는 세상에 관한 진실의 목소리,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