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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음이 빠르다. 2006년 한해에만 <달콤, 살벌한 연인> <호로비츠를 위하여> <조용한 세상>으로 잇따라 스크린을 두드렸던 박용우가 봄기운이 채 자리를 잡기도 전에 신경쇠약 직전의 남자가 되어 돌아왔다. 천형과도 같은 죄를 씻어내기 위해 마약 조직과 손을 잡고 또 다른 죄의 굴레에 빠져드는 남자, <뷰티풀 선데이>의 강 형사가 되기 위해 박용우는 8kg의 체중을 덜어내고, 크레인 끝에 매달려가며 징글징글한 독기를 품었다. “완전히 배설하는 듯한, 뜨거운 용광로에 들어갔다 나오고 싶다”고 말하던 그가 비로소 자신을 녹일 만한 장소를 찾은 걸까. “요즘엔 구할 수도 없는” 10년 된 ‘레자’ 점퍼를 걸치고 털털하게 스튜디오를 찾은 그의 모습에 웃음보다 강렬한 호기심이 앞선 것은 그런 까닭이었다. <혈의 누> <달콤…>을 거치며 쏟아진 스포트라이트의 세례, 뒤늦은 만큼이나 호들갑스럽던 조명 속에서 정작 그는 어떤 꿈을 꾸고
다양하게, 오래 오래 하고 싶다, <뷰티풀 선데이>의 박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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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고전영화를 인터넷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다. 한국영상자료원은 3월19일부터 5월20일까지 2개월간, 온라인 고전영화 기획전을 진행한다. 한국 공포영화, 한국영화속 여성, 한국영화속 서울의 풍경 등 3개의 주제로 열리는 이번 기획전에서는 KMDb 사이트를 통해 총11편의 한국고전영화와 각 영화에 대한 해설, 각 주제에 대한 전문가 대담 동영상을 볼 수 있다.
한국 공포영화 섹션은 한국 공포영화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 4편의 영화들로 구성됐다. 한국 공포영화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권철휘 감독의 <월하의 공동묘지>(1960)와 억울하게 죽은 여주인의 피를 빨아먹고 자란 고양이의 복수와 손자의 피를 빠는 할머니의 모습 등 충격적인 장면으로 한국 공포영화의 계보를 새롭게 쓴 이용민 감독의 <살인마>(1965) 그리고 신상옥 감독의 독특한 공포 영화 두 편이 함께 소개된다. 또한 한국영화사의 또 다른 주역인 여성을 집중조명하는 한국영화 속 여성섹션에서는
한국영화의 고전을 인터넷으로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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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전평화의 메시지를 알리는 제1회 반전평화영화제가 열린다. 이번 반전평화영화제는 국제 분쟁 문제에 대한 국내의 여론을 환기시키고, 분쟁 문제에 대한 평화적 해결과 국제 평화의 가치를 확산시키며, 반전평화 여론을 제고시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는 2006년 선댄스 영화제 3개 부분을 석권한 제임스 롱리 감독의 <조각난 이라크>(Iraq in Fragments). 한국에서 첫선을 보이는 이 영화는 2003년 2월과 2005년 4월 이라크를 찾은 감독이 담은 영상으로 구성됐으며, 정치적인 메시지나 강력한 주장 대신 성찰적이며 인상주의적인 관점을 드러낸다는 평가를 받은 바 있다. 이외에도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호텔 르완다> <노 맨스 랜드> 등이 상영될 계획. 오는 3월 23일과 24일, 양일간 열리는 제1회 반전평화영화제를 앞두고 정경섭 반전평화영화제 집행위원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 명함을 보니 민주노동당 마포
"분쟁 국가 대사관에서 항의해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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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이 20일 오후 7시(현지시간) 홍콩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안필름어워드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남우주연상, 시각효과상, 촬영상을 수상했다. <괴물>은 이번 시상식에서 5개부문에 올라 4개 부문을 수상한 것. 특히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정지훈을 비롯, <고 마스터>의 장첸, <돈>의 샤룩 칸, <묵공>의 유덕화, <내일의 기억>의 와타나베 겐과 경합을 벌인 송강호는 이번 수상으로 <괴물>로는 첫 주연상을 받게 되었다.
한편, <타짜>의 김혜수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임수정을 비롯해 공리, 미야자와 리에 등이 후보에 오른 여우주연상 부문에서는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의 나카타니 미키가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감독상에는 <스틸라이프>를 연출한 지아장커 감독이 선정되었다.
제1회 아시안필름어워드 수상 결과
*작품상 - <괴물&
<괴물>, 아시안 필름 어워드에서 4관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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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라노체>는 <아이다 호>, <엘러펀드>, <라스트 데이즈>를 찍은 구스 반 산트 감독의 1985년 장편 데뷰작이다. 청춘영화이자, 퀴어영화이자, 이주민영화인 <말라노체>는 흑백화면의 느슨한 프레임 속에 젊은 날의 들뜸과 불안정함을 고스란히 담는다. 영화의 내용은 미국인 청년이 멕시코 불법이민자 소년에게 반해 그와 그의 친구들을 쫓아다니는 게 전부이지만, 이런 줄거리는 별반 중요하지 않다. 그들이 돌아다니는 거리의 풍경과 그들의 내면 공기가 더욱 중요하다. 영화의 화면들은 마치 사진전의 사진들처럼 깊은 '푼크툼(punctum ; 코드화 될 수 없는 사진의 작은 요소가 보는 이의 마음을 강렬하게 찌르는 것)'을 남긴다. '말라노체'는 '나쁜 밤'이라는 뜻으로, 임상수 감독의 <눈물>에 나온 대사, '나쁜 잠'과 비슷한 의미이다. 어쩌면 '소수자적'이라 할만한 특유의 미학과 정치학을 구사하는 구스 반 산트의 영화를 좋아하
[전문가 100자평] <말라노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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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나 전쟁은 상대방의 존재가 자기 인식과 깊이 연결해 있어서 본래 승부를 가릴 수 없는 모순된 행위다. 우리-속국-동맹-적은 나를 중심으로 한 동심원이지 배타적 범주가 아니다. 나-연인-연적도 마찬가지다. 자타 경계를 구별하기 힘들기 때문에 사람들은 “내가 저런 인간에게 목을 맸단 말인가”라며 사랑이 끝난 뒤 자기 모멸감으로 괴로워하고, “겨우 계집애랑 붙으란 말이냐”, “세계 최강을 상대로…” 식으로 모든 싸움에서 상대의 ‘체급’을 확인한다.
군수산업체나 안보 국가처럼 전쟁이 존재해야만 먹고살 수 있는 정체(政體??)들은 언제나 전쟁의 불가피성을 설파할 수밖에 없는데, 이 과정에서 온갖 모순어법이 등장한다. 대개 전쟁사는 “몹쓸 놈들(적)이 우리를 침략했지만, 우리는 용감하게 맞서 물리쳤다”고 기록하고 있다. ‘평화’시에는 적을 과대평가하고 자신을 과소평가하지만, ‘전시’에는 전과를 과장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의 일부 보수층이 북한에 대해 절대적 우월감을 과시하면서도 (공격자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약자의 테러, 강자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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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아르바이트 동료였던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연락이 끊긴 지 제법 오래인지라 반가움이 앞섰다. 우리는 안부를 나눈 뒤 서로의 새 일터에 대해 이야기했고, 한참 뒤에야 친구는 어렵게 용건을 밝혔다. 대학원에 진학한 지 1개월도 채 안 돼 지도 교수와 ‘불미스러운 일’이 생겼다는 것. 잠자리 요구를 거절하고 나니 더이상 조교로 머물 수가 없더라는,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 진부한 스토리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우리는 긴 통화를 했다. 그러다가 함께 아르바이트를 했던 그 여름, 우리를 끈끈하게 유대시킨 불쾌한 추억도 자연히 화제에 올랐다.
그곳엔 관리자랄까 매니저랄까, 정확한 직책은 알 수 없는 모씨가 있었다. 모씨는 좋은 사람이었다. 그의 배려 덕에 알바는 즐거웠고 허세없이 인생 경험을 조근조근 풀어내는 그의 이야기에 귀기울이는 것도 재미가 쏠쏠했다(지금도 그의 순수한 호의는 의심하지 않는다). 신뢰는 그렇게 형성됐다. 그러다 사건이 생겼다. 처음엔 그의 언행을 제대로 이
[오픈칼럼] 누구라도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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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山一家.’
‘하나의 광산, 하나의 가족’이라고 영화는 해석한다. 광산촌 소녀들은 도쿄에서 온 선생님을 “이방인”이라고 부른다. 자신들을 하나의 가족이라고 부를 만큼 단단한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반은 공동의 고립감. 그들을 오해하고 폄하하는 외부의 시선은 그들을 ‘하나의 가족’으로 완성한다. 그런데 하나의 가족인 광산촌 사람들은 폐광으로 해체될 위기에 놓였다. <훌라걸스>는 거기서 시작한다.
열심히 살아온 탄광촌 사람들은 억울하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시대가 그들을 ‘뒤처진 사람들’로 만들었다. 석탄의 시대가 거하고, 석유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역사적 소임을 다한 공동체는 흔들린다. 변화를 거부하고 과거에 머무를 것이냐, 불확실한 변화에 미래를 걸어볼 것이냐, 공동체는 분열한다. 공동체는 하와이를 흉내낸 온천을 만들고 훌라춤을 추어서라도 새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미래파’와 광산촌의 역사와 전통을 사수해야 한다는 ‘역사파’가 충돌한다. 그곳에도 청춘들이 있다. 한
[이창] 훌라걸스는 제2, 제3의 이상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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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완전 멋진데!”라는 만트라를 아무리 반복해봤자 영화 <엘 토포>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36년 전에 그곳에 있어야만 했다. 당신이 이른 아침 만취 상태로 8번가 아래에 위치한 황폐한 극장에 있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바로 그럴 때, 내 장담컨대,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 감독의 대작이 신비의 대상에서 즐김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비록 조도로프스키 감독의 영화가 극장주인 벤 바렌홀츠의 승리라 해도 말이다.
조도로프스키 감독의 쉽게 정의내리기 힘든 멕시코영화를 1970년 현대미술관(MOMA)에서 발견한 사람이 바렌홀츠다. 그는 자정에 상영하는 영화표를 예매했다(주말엔 새벽 1시에 시작했다). <빌리지 보이스>에 실린 광고 문구와 마찬가지로, “다른 어떤 방식으로 상영되기엔 너무나 묵직했기” 때문에 그는 자정을 택한 것이다. 자정용 영화 역사상 전무후무하게도 <엘 토포>는 일주일 동안 밤 내내 상영되었다. 놀라운 입소문을 타고 흥행을
[영화읽기] 당신은 거기에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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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겨움을 불러일으키는 공포는 희극과 전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종잡을 수 없는 괴물이 등장하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은 오래된 <매드>(Mad) 잡지 더미에 비견할 만한 무정부적 난장판을 보여준다. B급 감성의 익살이 가득한 광대극으로서 봉 감독이 만들어낸 첨벙거림 자체가 일종의 괴물이라 하겠다. 이 영화는 한국 역사상 최고 수익을 거둔 영화이다. 지난 5월에 칸에서 처음 선보인 이후 관객은 마치 라면을 먹듯 이 영화를 후루룩 소리내며 마셔댔다.
<괴물>의 주요한 매력은 공중제비를 하는 육식성 돌연변이 점액질 덩어리에 있다. 잡지 <매드>가 한때 ‘더미’(Heap)라 불리는 쓰레기더미에 생명을 부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괴물>은 강탈당한 땅의 입속에서 끄집어져 나온 점액질 덩어리를 제시한다. 이 살인 올챙이는 물고기처럼 수영할 수 있고, 곤충처럼 겅중거릴 수 있고, 스티븐 스필버그의 맹금류처럼 뛰어다닐 수도 있다. 1
[영화읽기] 살인 올챙이의 비릿한 공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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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의 이별이다. 다른 이를 향한 남편의 마음을 인정하고 소리없이 등을 돌렸던 그가 이번에는 남편이 너무나 ‘FM’이라는 이유로 결별을 선언했다. <연애시대>에서 <쏜다>로, 브라운관에서 스크린으로, 문정희는 연거푸 감우성과 헤어짐의 만남을 가졌다. “그렇고 그런 공무원에, 반듯하게 살아온 남자의 부인이 가질 수 있는 답답함이 무엇일까, 그 입장이 돼서 고민해보려 노력했어요. 단지 삐치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억눌러왔던 것이 비죽비죽 튀어나오는 느낌을 내고 싶었죠.” 숨막히는 일상 속에서 끊임없이 일탈을 꿈꾸었으되, 오히려 남편의 극단적 일탈에 뒤통수를 맞는 아내. 문정희가 <쏜다>의 경순이 된 데는 무엇보다도 인연이 강하게 작용했다. <바람의 전설>로 한솥밥을 먹은 박정우 감독과 김수로, <야수>로 낯을 익힌 강성진, 그리고 <연애시대>의 감우성까지. “타이밍이 운명”이라는 생각에 망설임은 없었지만, 사실 두
단아한 그녀의 ‘별짓’, <쏜다>의 문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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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신문을 보니 경찰이 여수 ‘외국인보호소’ 화재참사에 대해 ‘방화’라고 결론을 내렸다고 발표했단다. 확실한 증거는 없단다. “증거는 없지만 방화임에 틀림없다.” 이 얼마나 놀라운 문장인가! 있지도 않은 작가의 있지도 않은 인용하며 천연덕스레 그럴듯하게 말하는 보르헤스의 소설에 버금가는 놀라운 문장이다. 사실 이를 누가 반박할 수 있으랴! 화재현장도 감추어놓고, 감시카메라 테이프도 공개하지 않으며 하는 말이니, 우리는 그저 믿을 수밖에 없다. 피해자가 바로 가해자였다는 이 놀라운 역설은, 미리 알려지지 않아 반전의 묘미를 살릴 수만 있었다면, 정말 훌륭한 보르헤스풍의 소설이 될 뻔했다.
그런데 그는 왜 방화했을까? 왜 자신의 죽음을 야기할 사태를 ‘저질렀을까?’ “그는 원래 또라이였다”는 식의, 훌륭한 소설을 망칠 발상을 끌어들이진 말자. “그는 왜 범죄자가 되었나? 범죄자가 될 성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동어반복적인 답은 맹구 같은 봉숭아학당의 학생들에게나 어울릴 것이
[영화읽기] 개 같은 나라, 개 같은 경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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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권리이지, 의무가 아닙니다.”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의 영화 <씨 인사이드>의 샘 페드로는 조용히 외친다. 사지가 마비된 채 침대 속에 갇힌 그는 자신의 죽음을 위해 세상과 맞선다. 어린 시절 바다에 몸을 던졌고, 수심이 깊지 않았던 관계로 몸에 충격을 받은 남자. 하지만 그 외침은 결코 선동적이지 않다. 잔잔한 바다에 물결이 일듯, 그는 “사회의 문제가 아닌, 개인의 삶”을 생각할 뿐이다. 안락사라는 논쟁적인 문제를, 샘 페드로라는 실존 인물의 삶에 녹여낸 영화. 그 속에서 바다의 정적을 연기한 배우는 스페인의 국민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이다. 출세작인 <하몽하몽>의 종마 같았던 모습을 생각하면, 55살의 중년 남성 샘 페드로는 결코 ‘바르뎀적’(bardemic)이지 않다. 짙은 흙빛의 머리카락은 숱이 많이 없어졌고, 넓은 이마와 강한 얼굴은 부드러운 윤곽으로 새 자리를 잡았다. ‘못생겼지만 멋지다(feo-quapo)’는 그만의 수식어도 이제는 바뀌어야
겸손함과 지혜를 겸비한 배우, <씨 인사이드>의 하비에르 바르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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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씬 시티>의 원작자이자 공동 감독인 프랭크 밀러의 그래픽 노블을 각색한 <300>은, 자칫 논란을 불러올 수도 있는 작품이다. 일단 서구인이 아니라면, 페르시아 왕과 병사들을 잔인한 야만인으로 그린 것에 불쾌할 수 있다. <300>의 그리스 세계는 ‘이성과 정의의 유일한 희망’이지만, 페르시아는 타국을 침략하고 노예를 착취하는 탐욕스러운 전제국가이다. 하지만 고대의 페르시아는 그리스 이상으로 이성적일뿐 아니라, 너그러운 국가였다. 또한 페르시아를 따지기 이전에, 스파르타가 과연 칭찬받을 만한 법과 질서를 가지고 있었는가, 도 생각해야 한다. 스파르타는 노예에게 가장 가혹한 노동과 형벌을 가한 나라였다. 잭 스나이더 감독 역시 “영화는 스파르타인의 시각에서 그려지지만, 실제 역사에서 그들의 문화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고 말한다. ‘작거나 약하거나 병색이 있거나 기형이면 버려’지고, ‘굳세고 강한 자만이 스파르타인으로 불’리는 스파르타의 사회체제는 명백
[영화읽기] 너무도 황홀한 하드보일드의 껍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