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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이라는 고유명사는 종종 ‘장진스럽다’는 형용사의 용례를 통해서 설명돼왔다. 그러나 통념과 달리 장진 감독은 ‘장진스러움’에 머물지 않고 최근 몇년간 멜로(<아는 여자>), 스릴러(<박수칠 때 떠나라>), 액션(<거룩한 계보>) 등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며 영화적 외연을 넓혀왔다. 신작 <아들>에서 그가 마주한 것은 정통 드라마다.
강도살인죄로 복역 중인 무기수 강식(차승원)은 1박2일 동안 가족을 방문할 수 있는 귀휴 대상자로 선발되어 고향 집에 간다. 그러나 어머니(김지영)는 치매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아들 준석(류덕환)은 15년 만에 만나는 아버지가 낯설어 겉돈다. 얼어붙은 아들의 마음을 어떻게 녹일 수 있을까.
확실히 <아들>은 장진 감독이 새 영역에 스스로를 밀어넣은 작품이란 느낌을 준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면서, 장진 감독이 새 모습을 보였는지, 이전의 ‘장진스러운’ 특성은 얼마나 남아 있는지 따지는 것은 별
장진, 스스로 새 영역으로 밀어 넣은 작품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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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란자전거>의 주인공 동규는 어릴 적 사고로 한팔을 잃고 의수를 착용한 채 살아가는 장애인이다. 두팔이 온전한 일반 사람들과 달리 한팔이 없다는 자괴감으로 동규의 얼굴에는 늘 수심이 가득하고 허무함이 짙게 물들어 있다. 1시간30분이라는 상영시간 내내 장애의 아픔으로 수심이 가득한 주인공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수년 전 병문안 가서 보았던 한 장애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주인공 동규처럼 20대 청년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지병으로 몸이 약해서 바깥 생활을 거의 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는 자신의 몸조차 제대로 가눌 수 없어 모든 일상생활을 가족의 도움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해 외부세계와의 소통은 거의 단절된 채 20여년을 살아왔고 이제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의 얼굴에서는 슬픔도 기쁨도 찾아볼 수 없었고 인생의 허무함만이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하지만 <파란자전거>의 동규와 병실의 장애인은 얼굴 표정은 비슷하지만 장애 상
[영화읽기] <파란 자전거> 동정심 따윈 필요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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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복은 형사만 하는 게 아니다. 카메라에 걸리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쓰는 스탭들이야말로 잠복의 고수들 아닐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 임수정이 등장하는 이 장면도 스탭들의 잠복 솜씨가 맘껏 발휘된 경우다. 이동 촬영을 해야 했는데 일반적으로 배우의 머리 위에 붐을 내밀면 시커먼 그림자가 졌다. 결국 붐 오퍼레이터가 공중전화 아래 똬리를 틀고 사운드를 받아야 했다. 임수정의 환한 페이스가 아니었다면, 고난이도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이다.
[숨은 스틸 찾기]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잠복의 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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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산대교 위에서 찍었다. 높이는 15m쯤 됐던 것 같다. 안전장치를 다 지급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스탭들이 너무 불편하다면서 다 풀어버리고 일하더라. (배)두나씨가 이 장면 촬영 때 겁을 많이 먹었다. 강 위에 붕 떠 있다고 생각해보라. 봉준호 감독님이 몇번씩 좁은 교각 위를 걸어다니면서 안심시켰다. 두나씨 얼굴 보면 새까만데, 메이크업은 절반뿐이다. 먼지로 가득한 교각 통로를 지났더니 자연스럽게 머리도 헝클어지고 분장도 완성됐다.
[숨은 스틸 찾기] <괴물> 15m 상공의 악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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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사실. 안선영은 개그맨이다. <결정! 맛대맛> <TV 종합병원> <스타 골든벨> 등 쇼 프로그램의 단골 출연자이자 드라마나 영화에서 코믹한 감초 역할을 주로 맡아온 ‘웃기는’ 연예인이다. 그렇다면 <이대근, 이댁은>의 안선영은 어떨까. 늙고 지친 노인 이대근의 딸 경숙은 아버지를 가정 파탄의 주범으로 맹렬하게 몰아붙이고, “아버지 하나님 말씀”을 들어 어머니 제사상에 절 바치길 끝내 거부하는 극악스러운 여자다. 수다스런 웃음을 지우고, 대신 짙은 생활의 피로를 그려넣은 안선영의 얼굴. 의외라는 표현은, 이럴 때 적합하다. “남자들이 아내가 아이를 낳을 때, 뭐 감동받겠지 생각을 하다가도 막상 애가 나오면 다 운다고 하잖아요. 영화를 보는 제 마음이 그랬어요. 정말 바보같이 펑펑 울었어요.”
많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실. 안선영은 개그보다 연기를 먼저 시작했다. 경성대학교 연극영화과를 졸업한 그는 대학 시절 워크숍
개그가 연기에 물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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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멈춘 순간, 이야기가 시작된다. 숀 엘리스 감독의 영화 <캐쉬백>은 주인공 벤의 내면을 빌려 시간을 정지한다. 흐름이 끊긴 이미지는 순간의 힘을 타고 끊임없이 확장되고, 주인공의 시선은 공간을 자유롭게 탐색한다. 동명의 단편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 <캐쉬백>은 패션 사진작가 출신 감독의 작품. 영화는 정지된 이미지를 유영하며 한편의 이야기를 완성시킨다. ‘시간을 팔아 돈을 버는(cash back)’ 주인공과 시간을 조작해 영화를 완성한 감독. 숀 엘리스는 누구일까.
숀과 사진
“새롭고, 모던한 룩(look). 지금까지는 보지 못했던 대담한 이미지.” 잡지 <레인지 파인더>의 주디스 벨이 숀 엘리스의 사진에 대해 남긴 평이다. 11살 무렵부터 흑백사진 작업을 시작한 엘리스는 “셔터 스피드, 조리개, 정확한 노출”보다 자신의 감정, 즉흥성에 기인한 사진 찍기를 즐긴다. <I.D.> <더 페이스> <아레나> &l
[알고 봅시다] 재치 만점 이미지의 주인공은 패셔니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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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 세월이 흘렀다. 97년 <홀리데이 인 서울>의 조연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차승원은 이제 한국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배우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스무편에 가까운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볼 때 눈에 띄는 것은 두개의 상반된 이미지다. <신라의 달밤> <광복절특사> <선생 김봉두>이거나 <혈의 누> <국경의 남쪽>이거나. 다시 말해 웃기거나 혹은 진지하거나. 극과 극에 서 있는 영화 속 차승원 캐릭터를 코믹 승원과 심각 승원으로 가상 설정했다. 그리고 두 가지 캐릭터를 모아보았더니 진지하면서도 코믹한 신작 <아들>에 이르렀다.
활동 무대
코믹 승원 주로 한줌의 가오도 허용되지 않는 토속적인 환경에 던져진다. 바닷가건 산골이건 태어날 때부터 나이 먹을 만큼 먹을 때까지 줄곧 시골에 박혀사는 인생이거나(<신라의 달밤> <이장과 군수> <귀신이 산다>), 한
[VS] 두 얼굴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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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4월30일 오후4시30분
장소 필름포럼
이 영화
한 여름날 우연히 자그마한 상어를 잡은 어부 영철(구성환)은 친구 준구(홍기준)가 살고 있는 대구로 향한다. 살고있는 어촌을 나서는 명분은 친구에게 상어를 보여준다는 것이지만, 대도시를 향하는 그의 마음 속에는 다른 꿍꿍이가 있다. 그러나 카드판에 매달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는 준구는 영철의 연락을 무시하고, 영철은 상어가 등 가방을 메고 찜통같은 도시를 헤맨다. 한 공원에서 땀을 닦던 영철은 교도소에서 출소했지만 가족들이 살고있는 집을 찾지 못해 떠돌고 있는 유수(홍승일)를 만나게 되고, 이상한 행동을 하고 있는 미친 여자 은숙(김미야)도 만나게 된다. 불량배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해 밴 아기를 잃었던 은숙은 도시의 열기 속에서 썩어가는 상어살의 냄새를 맡고 자신의 아이라고 착각하곤 영철을 무섭게 쫓는다. 영철은 유수와 함께 은숙을 피해다니며 애타게 준구를 기다린다. 이들 도시 속 상어는 과연 푸른 바다로 돌아갈 수
악취가 진동하는 세상, 비상구는 있다: <상어> 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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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계급적, 성적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을 조화로운 환상 속으로 밀어넣고 관객에게 위안을 주는 안정된 형태의 극영화는 어쩌면 형식적으로 포르노그래피보다 더 위험한지도 모른다. 포르노는 소기의 목적을 위해 직설적인 화법과 분절된 서사를 구사하며 매우 작위적이고 인공적인 세팅을 전면에 드러냄으로써 이것은 가상이라는 사실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영상 실험과 새로운 영화문법을 찾아내기 위한 시도들을 계속해온 독일 감독 하룬 파로키의 문제의식도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지난해 전주영화제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그의 대표작을 올해 전주영화제 ‘영화보다 낯선’ 섹션과 5월1일부터 6일까지 열리는 시네마테크 특별전에서 만나볼 수 있다.
하룬 파로키는 이미지를 조작하는 힘과 그것에 의해 만들어지는 통일된 세계관이 얼마나 일상화된 폭력인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자신의 다양한 작업을 통해 그것을 폭로해왔다. 마치 한편의 논문 같은 느낌을 주는 그의 작품들은 현대사회에서 오락적 기능만 지나치게 부
세상의 이미지에 반기를 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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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에 열린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일본에 1 대 2로 지고 있던 8회말 1사 3루의 아슬아슬한 상황. 김재박은 방망이를 짧게 쥐고 번트를 가져다 댔다. 사실 야구 문외한들이 보기에 번트란 건 그리 폼나는 행위가 아니다. 게다가 그는 투수가 높이 외야로 던진 공을 맞추기 위해 다리 긴 양서류처럼 폴짝 뛰어오르고 말았으니, 팀을 승리로 이끈 깜찍한 포즈는 한국 야구사에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현재 LG야구단 감독을 맡고 있는 김재박은 요즘도 “번트는 야구의 기본”이라고 말하는 모양이다. 장쾌한 홈런도 아니고, 시원한 안타도 아니고, 번트가 야구의 기본이라고?
더 나아가서, 박규태 감독은 <날아라 허동구>를 통해 “번트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격”이라고 정의한다. 열한살짜리 허동구(최우혁)는 아이큐 60이 안 되는 학습 지진아. 동구가 제일 좋아하는 일은 급우들의 컵에 물을 따라주는 일이다. 주전자만 보면 신이 절로 난다. 하지만 권위적인
번트는 홈런보다 더 귀중한 행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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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가 출연하고 영화배우가 연출하는 연극? 맞는 말이다. 영화배우를 겸하는 연극연출가가 제작과 연출을 도맡고 영화배우를 겸하는 연극배우가 연기한다! 이제 조금 더 정확하다.
연극 <죽도록죽도록>(김은성 작, 박광정 연출. 5월2~9일 대학로 정미소극장)의 열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극단 파크의 사무실 겸 연습실은 비대칭 풍경을 띠었다. 조영진, 정해균, 임영식 세 배우의 또박또박 떨어지는 대사들이 에너지의 파고를 줄였다 높였다 하는데 민무늬 연못처럼 잔잔하다 무시무시하게 휘몰아치는 폭풍처럼 극과 극의 자유 변신을 수없이 되풀이한다. 고작 빗자루를 들었다 놨다 들썩이고, 추리닝 같은 옷만 걸치고 왔다갔다 할 뿐인데. 2차원 평면 스크린이 제아무리 THX 돌비서라운드로 중무장해도 살냄새 풀풀 나는 연극무대의 이런 에너지의 매혹을 당해내기 어렵다. 아니, 이런 배우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맛보게 하는 무대가 끊임없이 출몰한다는 게 연극의 수렁 같은 매력이다.
그런데 소박
살냄새 풀풀 나는 연극무대의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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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극락도 살인사건> 살인사전의 비밀은?
[정훈이 만화] <극락도 살인사건> 살인사전의 비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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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영화에 대한 가장 소박한 나의 생각 중 하나는 영화에 내재된 상업적 혹은 예술적인 질이 그 영화가 얼마나 널리 상영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가장 큰 요소라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 후반 한국에 와서, 영화들의 강점에도 불구하고 어디로도 가지 못한 많은 좋은 한국영화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결국 연락 및 운반망의 요소와 경제적인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되었다. 현재 한국영화를 전세계에서 볼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그 영화들이 “더 좋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 영화들을 떠받치기 위해 잘 기능하는 시스템을 만들려고 열심히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현대 중국영화들을 보면서 이 사실을 다시 떠올렸다. 지난 2년간 나는 ‘보통’ 중국영화들에 대한 개인적 선호가 생겼다. 즉 거대예산의, 국제적인 출자를 받은 장이모나 첸카이거의 서사극도 아니며, 지아장커 같은 6세대 감독들의 저예산 독립영화도 아닌 주류 상업영화들 말이다. 이런 영화들은 대부분 어디로도 나가지
[외신기자클럽] 보통 중국영화들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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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영화극장(NFT)이 그간의 리모델링을 마치고 BFI 사우스뱅크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개관했다. 이번 꽃단장은 9천만파운드의 예산을 들여 퀸 엘리자베스 홀, 헤이워드 갤러리, 국립극장 등 인근의 복합 예술단지를 재정비하는 계획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국립’이라는 무거운 이름을 간판에서 떼어내면서 ‘사우스뱅크’라는 지역적 성격을 강화한 점은 그간 별다른 국가지원 없이도 착실히 성과를 이루어낸 템스강 북쪽의 바비칸센터에 대한 템스강 남쪽의 대응이기도 하다. 새로운 간판에 어울리도록 워털루 다리 그늘 밑으로 향해 있던 출입구도 위치를 바꾸어 현대식 유리 건축물로 외양을 달리하면서 ‘열린 공간’임을 한껏 뽐내고자 했다. 내부 또한 상당한 변화를 맞이했다. 기존에 있던 세개의 상영관을 비롯해 아카이브 열람이 가능한 미디어테크, 미술가들이 만든 영화의 상영 및 멀티미디어 작품 전시를 위한 갤러리, 스튜디오, 프로젝트 공간 등을 갖춤으로써 디지털에 의해 변화한 영화의 면모를 적극적으로 껴안고자
[런던] NFT, BFI 사우스뱅크로 새 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