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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괴살인범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여자의 사투를 그린 공포스릴러물. 최고의 주가를 누리는 여성 톱모델이 어딘가로 납치되어 고통스런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탈출하려 애쓰나 번번이 실패하고, 옆방에 감금된 남자와 힘을 합쳐 또 탈출을 시도한다는 내용이다. 영화는 첫 시퀀스에서 침대에 사지가 묶인 채 서서히 피를 뽑히는 희생자와 이 죽어가는 희생자를 대망치로 내려찍는 감금자를 보여준다. 서막이 제공하는 자극적인 공포와 스릴은 이후 얼굴에 염산 붓기, 오장육부 믹서로 갈아 주스 만들기, 귀여운 강아지 쏴 죽이기 등 더욱 다양하게 불쾌하고 수위 높은 아이디어들로 90여분간 개휴를 반복한다. <4.4.4.>는 완벽한 감시·통제체계가 마련된 공간 안에서 감금자와 피랍자가 벌이는 게임이며, 플롯의 앞길은 쉽게 내다보인다. 영화가 재미없고 기분 나쁜 건 그러나 뻔한 플롯 때문이 아니다. 게임의 운영자인 감금자 캐릭터에 무작정 강도 높은 클리셰들만 주렁주렁 달아놓고 일관성과 의도라곤 찾아볼
매력없는 감금자와의 게임 <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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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별의 목소리>로 국내에도 두터운 팬층을 확보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각본, 원화, 연출 등을 일임하는 1인 제작방식으로 파란을 일으킨 감독이 팀 작업으로 전환한 뒤 내놓은 두 번째 작품으로, 3개의 단편이 옴니버스로 구성되어 있다. 첫 에피소드 <벚꽃 이야기>는 전학으로 헤어지게 된 단짝 다카키와 아카리가 재회하기까지 과정을, 두 번째 에피소드 <코스모나우트>는 다카키를 짝사랑하는 카나에의 이야기를, 마지막 에피소드 <초속 5센티미터>는 성인이 된 다카키와 아카리의 후일담을 담는다.
세 단편을 아우르는 제목이기도 한 ‘초속 5센티미터’란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를 의미하는데, 감독은 그 밖에도 일상을 구성하는 다양한 속도들을 대입해가며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맞닿는 지점에 관해 이야기한다. 티끌 하나 묻어나지 않을 것처럼 순수한 사랑, 헤어짐과 애절한 그리움. 전작들을 관통해온 테마는 <초속
마음이 맞닿는 지점 <초속 5센티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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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사정원 전준오(황정민)는 새벽 2시30분 습관처럼 깨어난다.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려면 알코올이 필요하다.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못 견딜 것 같다”는 그의 악몽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것이다. 소년 시절, 그는 동생의 자살을 눈앞에서 목격했고, 그 원인에 일조했다. 출근 첫날, “자살해도 보험금을 받을 수 있나요?”라는 희미한 목소리의 전화 목소리를 향해 그는 ‘절대로 상담자 개인의 정보를 이야기하거나 감정을 표현하지 말라’는 근무 매뉴얼을 어기고 만다. 설사 보험금을 받을 수 있더라도 자살을 해선 안 되는 이유를 고언하는 그의 간절한 태도는 슬픈 과거에서 탈출하려는 본능 같은 것이다. 살아가도 될 만한 인간의 그 무언가를 믿고 지원하지 않고서는 버틸 재간이 없다. 그 미덕을 노출하는 순간, 이건 지독한 약점이 되어 공포의 게임을 호명하게 되고 그 자리에 초대받는다. 사람을 구하기 위한 안전망인 보험이 사람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로 돌변하는 역설의 대결이 시작되는 것이다.
냉기가 흐르는 사이코패스 <검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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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아 감독은 여성의 욕망에 천착한다. <김진아의 비디오 다이어리>와 <그 집 앞>에서 그녀의 화두는 침묵하는 여성의 욕망을 수면 위로 떠올려 형상화하는 일이었다. <두번째 사랑> 역시 그런 맥락에 있지만, 자기고백 색채가 짙었던 전작들에 비해, 정통멜로의 관습을 비교적 충실히 따라가며 차분히 극적 긴장을 쌓아올리는 작품이다.
가정이 불안정한 백인 중산층 유부녀(베라 파미가)와 생존이 불안정한 동양인 하층민 남자(하정우)의 사랑은 말하자면, 애초 사랑을 가로막는 모든 장벽들로 촘촘히 둘러싸인, 이미 비극적 결말을 내재한 것이다. 계급과 인종은 이 비극적 멜로의 씨앗이기는 하지만, 영화는 인물들의 힘으로 거둬낼 수 없는 그 장벽에서 이야기를 끌어내지는 않는다.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불가능한 사랑에 빠져드는 두 남녀의 심리적 변화와 겉잡을 수 없는 욕망 그 자체다. 그러나 영화는 인물들의 내면에 함께 동요하지 않고 시종일관 고요한 시선을 유지한다. 인
세련된 불륜 <두 번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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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영화 <스파이더 릴리>에서, 끝내 만나야만 할 운명의 연인은 샤오리(양승림)와 다케코(양락시)다. 섹스를 포함한 여성과 여성의 멜로드라마 <스파이더 릴리>는 성적 정체성을 한번도 화제로 테이블에 올리지 않는다. 레즈비언이라는 주인공들의 존재 조건은 보름밤 달처럼 거기 태연히 놓여 있다. 영화 표면에 드러난 이야기만 보면, 샤오리와 다케코가 이겨내야 하는 주요한 장애는 불행한 가족사,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죄책감과 열등감이다. 현실적인 관객이라면 넘겨짚을 수도 있다. 유년의 나쁜 추억에 대한 샤오리와 다케코의 고착은 어쩌면, 그들이 해결해야 할 한층 중대한 문제를 설정함으로써 섹슈얼리티를 상대적으로 가볍게 받아들이려는 자기 보호의 몸짓인지도 모른다고.
샤오리는 오랫동안 할머니와 단둘이 살아왔다. 그녀는 인터넷에 동영상 블로그를 만들어 성인용 사이트에 서비스한다. 밤마다 자신의 초라한 방에다 꾸민 예쁜 스튜디오에서 가발을 쓰고 춤추며 로그인한 사람들에게 명랑
레즈비언 로맨스 <스파이더 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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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쿠엔틴 타란티노를 떠올릴 것이다. 두 번째 장편 <새벽의 황당한 저주>에 이어 <뜨거운 녀석들>을 내놓은 에드거 라이트는 <저수지의 개들>을 만든 뒤 <펄프 픽션>으로 곧바로 승천하던 무렵의 쿠엔틴 타란티노를 보는 듯하다. 두 감독은 모두 유희정신을 기본 동력으로 삼고,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잡다한 지식과 취향을 양 날개 삼아, 재기 넘치는 영화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라이트가 타란티노의 아류인 것은 아니다. 그는 좀더 친근하고 유머러스하며 정치적이다. 길고 긴 재담을 늘어놓거나 이리저리 비틀어낸 구조의 묘미를 즐기는 것보다는 신과 신 사이의 연결 방식에 훨씬 더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란티노의 영화가 점점 더 심플해지는 데 비해서 라이트의 영화는 점점 더 복잡해진다.
어느 날 갑자기 좌천되어 한가로운 시골 마을 샌포드로 가게 된 엘리트 경찰 니콜라스 엔젤(사이먼 페그). 대니 버터맨(닉 프로스트)과 콤비를 이룬 엔
파시즘에 맞서는 열혈 경찰 <뜨거운 녀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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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재는 잊혀진 이름이다. 1996, 97년만 해도 그녀는 주목받는 신인 여배우였다.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으로 <씨네21>의 표지를 장식했던 것도 이 무렵.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등에 거푸 출연하며 백상예술대상, 영화평론가협회상 등을 받았던 그녀는 그러나 이후 결혼과 함께 배우 생활을 접었다. “한번은 큰딸이 예전에 <아름다운…> 비디오 재킷을 보고서 왜 딴 남자랑 누워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엄마 일할 때 찍은 거야, 하고 서둘러 궁색한 변명을 하긴 했는데….” <말아톤>에서 초원이의 담임선생님으로 잠깐 나온 것을 빼면, 지난 10년 동안 김지현 감독의 단편 <연애에 관하여>(2000)와 곧 개봉하는 전수일 감독의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 출연작의 전부다. “찍으면서도 개봉할 줄 몰랐어요. 감독님은 이 말 들으면 서운해하실지 모르지만.”
배우와 감독 사이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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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웃어주는 남자는 위험하다. 훈훈한 외모의 소유자인 그가 섹스만 찾는 속물도 아니라면 그의 미소에서 함정을 의심해봐야 한다. 영화 <러브 & 트러블>의 잭스(브리트니 머피)는 자신의 직장에 새로 들어온 파올로를 그런 눈초리로 바라본다. 선한 외모와 균형잡힌 몸매는 그렇다고 쳐도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느끼하게 치근덕거리지도 않는 남자라니. 잭스는 자신의 이상형을 찾았다고 외치는 대신 아예 그를 게이로 단정짓는다. 물론 그녀의 어설픈 ‘게이다’는 이성애자치고 잘생기고 몸매 좋고 성격도 좋은 남자가 없다는 경험적 논리인 동시에 사랑에 빠지기 두려워하는 자신의 무의식이 작동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파올로를 연기한 산티아고 카브레라의 외모는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섬세한 눈빛에는 이해심이 가득하고 입가에 밴 미소는 경건한 느낌마저 자아낸다. 드라마 <히어로즈>에서 그가 손과 발을 붓으로 찔려 신음할 때 많은 시청자가 예수
모두에게 미소짓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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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침대에 눕는 순간 살아 움직인다. 낮에는 몰랐던 시계의 초침 소리, 냉장고의 기계음들이 들리기 시작하고 온갖 잡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회상과 상상과 공상을 일삼는다. 뇌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주문을 외워야 한다. 자야 한다, 자야 한다, 자야 한다. 단편 <자야 한다>는 어느 날 이 주문을 외우게 된 한 여자의 번민이 뒤섞인 하룻밤을 묘사하는 영화다. 헤어진 남자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온 여자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그러나 심란한 마음을 다잡으려는 그녀에게 잠은 더한 고통이다. 남편과 싸우는 옆집 아줌마의 목소리는 옛 남자와 결혼한 신부의 조롱처럼 들리고, 윙윙거리며 울리는 냉장고 소리는 난데없이 화가지망생의 비루한 일상을 되새겨놓는다.
<자야 한다>가 묘사하는 잠은 자신의 시계과 다른 이의 시계를 맞추는 시간이다. 20대 후반의 주인공이 잠자리에서 겪는 고통은 곧 다른 이의 시간보다 늦게 흐르는 자신의 시간에 대한 비관이다. 그녀에게는 자기 또
[이달의 단편 14] 김주리 감독의 <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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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어떻게 영화와 만나는가? 극장에 가서 만나거나 TV나 비디오로 만나는 것이 일반적인 경험이겠으나 그것만으로 영화와 만났다고 하기는 석연치 않다. 스크린에 명멸하는 빛의 스펙트럼은 극장을 나서는 순간 꿈을 깨듯 잊혀지기 십상이고 한번 본 영화도 정확히 기억하기란 쉽지 않아서 볼 때마다 새로운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사람들이 흔히 영화를 보고 나서 타인과 얘기를 나누거나 글을 쓰는 것은 그처럼 짧게 스쳐가는 인상을 붙잡기 위해서일 것이다. 과연 방금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고 싶다! 영화평론은 그래서 시작된 일일 것이다.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에 썼던 앙드레 바쟁의 표현을 빌리면 방부처리를 해서 미라로 만들어서라도 언젠가 혼이 찾아와 되살아나길 기원하는 것이다. 오늘날 영화평론이 철학, 심리학, 문화인류학 등 여러 갈래 학문과 교류를 맺으며 출발점을 알아보기 힘들게 변했다 해도 근본은 다르지 않다. 영화는 기록되고 연구되고 토론의 대상이 됨으로써 영
[편집장이 독자에게] 영화평론의 존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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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8일 ~ OPEN RUN | 홍대 벨벳 바나나 클럽
“이 작품은 서두에 불과합니다!” 연극 <관객모독>은 일종의 선언으로 시작한다. 사실 이어지는 내용들이 모두 선언이다. 배우들이 빠르게 내뱉는 대사를 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언뜻 들리는 한마디의 대사가 말해주듯 <관객모독>에는 “뭔가 부정하려는 의도”가 있다. “여러분이 일찍이 듣지도 못했던 걸 여기서 듣게 되리란 기대는 마십시오. 또 보지 못하던 걸 보게 되지도 않을 겁니다. 여러분이 극장에서 늘 보고 듣던 것들을 지금 여기선 보지도 듣지도 못할 겁니다.” <관객모독>은 말로는 관객을 모독하고 행동으로는 객석과 무대 사이의 벽을 희롱하면서 기존의 연극과 관객의 관람 태도를 부정한다.
지난 5월17일부터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양동근의 <관객모독>이 홍대에도 새로운 둥지를 마련했다. 동네 분위기에 걸맞게 홍대앞 버전의 무대는 소극장이 아닌 클럽이다. 관객은 클럽에 놀러온 듯 자유롭게
보지만 말고 즐겨~ 양동근 연출의 <관객모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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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 더글러스 에이브람스 지음, 랜덤하우스 펴냄
돈 주앙의 일기가 발견되었다. 스페인의 황금시대인 1593년 세비야에서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일기다. <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의 첫 대목, 저자인 더글러스 에이브람스의 이름으로 적힌 일종의 서문은 ‘진짜일까?’ 하는 호기심을 유발한다. 사실 돈 주앙이 실존 인물인지가 여전히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임을 감안하면 돈 주앙의 친필 일기 존재는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가 소설이라는 점이다. <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는 진짜일까 아닐까 궁금하게 만드는 도입부부터 팩션 특유의 호기심 자극에 능하다.
“여자의 욕망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죽지 않아.” 돈 주앙은 그런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남자다. 36살이 된 돈 주앙은 일기에 삶을 기록하는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시작한다. 그는 열정의 기술과 여성의 성스
돈 주앙이 알려주는 작업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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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채널CGV 월요일 밤 12시
미국 드라마, ‘미드’가 우리나라 드라마와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몇년에 걸쳐 동일한 배우가 동일한 등장인물로 출연하는 이른바 ‘시즌’ 시스템이다. 1994년 시즌1을 시작으로 2004년 시즌10까지 무려 238편을 동일한 6명의 배우들이 만들어낸 시트콤 <프렌즈>는 미국식 시즌 시스템의 대표적인 예다. 2001년에 시작해 얼마 전 시즌6을 끝낸 <24>, 1998년부터 시작해 6개의 시즌으로 마무리한 <섹스 & 시티>, 1993년부터 9개 시즌을 방영하며 2002년에 종영한 <X파일>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장수 미드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안녕, 프란체스카>, <논스톱>, <학교> 등이 시즌 제도를 흉내내긴 했지만, 제목만 같을 뿐 주연배우들 대부분 바뀌면서 일관된 흐름을 이어가진 못했다. 드라마를 사전에 제작해 방송하고 시즌이
[이철민의 미드나잇] 시청자 낚기의 진수는 바로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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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6월23일(토) 밤11시
<금발 소녀의 사랑>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5), <아마데우스>(1984), <래리 플린트>(1996), <맨 온 더 문>(1998) 등으로 유명한 밀로스 포먼의 초기작에 속한다. 뒤의 작품들이 할리우드로 정치정 망명을 떠난 뒤 만들어졌다면, <금발 소녀의 사랑>은 체코 뉴웨이브의 대표작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어느 노동자 소녀의 좌절된 로맨스라고 부를 만한데, 포먼은 여기에 1960년대 체코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을 간접적으로 엮어 넣는다. 체제에 대한 비판을 개인의 욕망과 결부지어 보여주는 포먼 특유의 방식은 이 초기작에서도 두드러진다.
금발머리 처녀 안둘라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그녀는 동료들과 무도회장을 찾고 남자들을 만나지만,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던 중, 안둘라는 젊은 피아니스트 밀다를 만나 하룻밤을 보내고 사랑에 빠진다
어느 노동자 소녀의 좌절된 로맨스, <금발 소녀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