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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영화평론가 정성일씨와 인터뷰에서 지아장커는 <스틸 라이프>에 관해 “사라져가는 기억과 싸우는 영화”라고 말했다. 중국 인민폐 10위안에 새겨질 정도로 아름다운 산수로 유명한 싼샤가 거대한 댐 건설로 파괴되는 현장을 보여주는 이 영화는 보지 않으면 믿지 못할 광경을 펼쳐 보인다. 철거 중인 텅 빈 건물 한가운데 뻥 뚫린 창문 밖에서 거대한 건물 하나가 폭발로 순식간에 무너지는 데도 영화의 두 남녀는 동요하지 않는다. 지금껏 그들에게 주어진 삶이 어제까지 존재했던 모든 것이 사라져도 놀라지 말라고 가르쳤기 때문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16년 전 헤어졌던 아내를 찾아 나선 사내 한산밍이 싼샤에 도착하자마 경험한 일을 돌이켜보라. 마술을 보여줬으니 돈을 내라고 협박하는 자들에게 사내는 망설임없이 칼을 들이민다. 하루에도 2~3번씩 그런 협박을 받아본 적 있다는 투로 자연스런 한산밍의 동작은 지금 중국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일들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일상임을 알려
[편집장이 독자에게] <스틸 라이프>와 대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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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자면 기획에 참여한 기자들도 부천영화제 초청작들을 전부 다 보지는 못했다. 아니, 볼 수가 없었다. 33개국 215편에 달하는 영화를 일주일 만에 보기란 도무지 가능한 일이 아닌 것이다. 어쩔 도리 없이 박스 가득한 테이프를 밤낮으로 틀어놓고 응시하던 기자-좀비들의 뺨을 열렬하고 강렬하게 작렬해버린 영화들만 딱 24편 골라냈다. 사실 부천판타스틱영화제란 게 원래 ‘취향’만으로 똘똘 뭉친 영화의 천국과 지옥 아니었던가. 그러므로 여기 소개하는 24편의 영화들은 순전히 <씨네21> 기자들의 취향으로 골라낸 변덕스런 리스트의 일부다.
[제11회 부천영화제 가이드] 판타스틱에… 홀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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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거절할 수 없다> 쓰치야 겐지 지음/ 좋은책만들기 펴냄
다운시프트족이 유행이라고 한다. 밤을 새운 만큼 보장되는 높은 연봉, 사람들에 치이지만 남들 다 알아주는 직책보다 돈 덜 받더라도 삶을 즐길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다운시프트족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여유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월급이 적고 일은 고되고 많은 직장을 누구인들 선택하고 싶겠는가. 원치 않았으나 제멋대로 빡빡해지는 인생, 지칠 때면 나른한 말투로 장동민처럼 “그까이꺼, 대충”이라고 내뱉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쉽게 거절할 수 없다>의 저자 또한 그런 사람이다. 쓰치야 겐지는 도쿄 오차노미즈여대의 철학교수인데, 자신이 제자들과 가족들에게, 지인들에게 얼마나 무시당하며 사는지, 그러거나 말거나 자신은 얼마나 효율적으로 명예와 일로부터 도망다니며 살고 있는지를 들려준다. 끊임없는 투덜거림의 연속인 듯, 느슨한 듯 보여도 뼈가
사회적 허약체질의 당신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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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명진-green home’전 | 7월4~14일 | 노화랑(02-732-3558)
“초록 식물을 워낙 좋아합니다. 그림에 등장하는 풍경은 살고 있는 동네의 일상풍경. 그 익숙한 풍경들을 낯설게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은 그 주변의 자연환경을 임의로 컨트롤하고 구조마저 변경해 사물화시키고 있잖아요. 작품 속에 손가락을 닮은 캐릭터는 스스로 독립된 정체성을 잃고 획일화된 인간들의 모습이고요. 가느다란 실은 뭔가를 만들 수 있는 최소 단위라고 할 수 있는데, 길게 늘어진 그 실타래는 인간만의 쉼터나 임의의 파라다이스를 만들고 있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모습은 결국 자신만의 아지트를 거미집처럼 짓고 있는 모양새가 아닐까요?”
송명진의 그림은 시간이 멈춘 녹색 풍경이다. 흔히 녹색은 파릇한 생명력이나 생동하는 에너지의 상징이다. 하지만 송명진의 붓끝에선 일상의 풍경이나 녹색마저 낯설게 느껴진다. 친숙하면서도 왠지 생경한 낯섦. 상반된 두 가지의 감정을
시간이 멈춘 녹색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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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아나토미> KBS2 일요일 오후 11시40분
미국영화나 드라마의 제목을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문법과는 상관없이 the, of, for 등 덜 중요한(?) 단어들이 사라지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원제 <Grey’s Anatomy>에서 소유격(’s)이 빠져 만들어진 <그레이 아나토미>도 그 대표적인 예. 물론 그렇다고 반드시 <그레이스 아나토미>라고 했어야만 한다는 규칙은 없다. 하지만 이 미국 드라마의 원제가 1858년 영국의 헨리 그레이가 출간한 유명한 해부학 서적인 <Henry Gray’s Anatomy of the Human Body>를 줄여서 부르는 <Gray’s Anatomy>임을 고려한다면, <그레이 아나토미>라는 작명은 어찌됐건 다소 어색하게 들리는 것이 사실이다.
조금은 불만족스러운 우리말 제목과는 상관없이, <그레이 아나토미>의 인기는 미국만큼이나 국내에서도 대단
[이철민의 미드나잇] ‘닥몽’의 경쾌한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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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 EBS 7월7일(토) 밤 11시
킨(데미언 루이스)은 6개월 전 어린 딸이 납치된 뒤, 정신분열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딸을 찾기 위해 뉴욕 거리를 방황하며 마약과 알코올에 의존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영화는 딸의 생사여부나 납치된 경로 혹은 킨이 딸과 보낸 행복했던 과거에 대해서조차 언급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딸을 잃어버린 장소와 뉴욕의 뒷골목을 맴도는 한 남자의 외로운 걸음에 핸드헬드로 동행한다. 그는 딸을 데려간 누군가와 혹은 그 사건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라 딸을 지켜내지 못한 자기 자신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죄의식. 그는 스스로를 벌하고 있다. 영화는 중반까지 특별한 사건을 만들지 않으며, 모든 것을 잃은 뒤 처절하게 홀로 삶을 꾸려가야 하는 남자의 내면에 집중한다. 카메라는 남자를 바짝 따라가며, 그를 낡은 호텔이나 공중 화장실처럼 폐쇄된 공간으로 밀어넣고 숨막힐 듯한 공기 속에서 그의 고독과 고통을 끄집어낸다. 그러나 이토록 자기 세계에 고립되
고독의 방, 슬픈 남자와 성숙한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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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 버라이어티쇼의 ‘끝장’을 추구한다는 MBC <무한도전>이 어느새 탄생 2주년을 스르륵 돌파했다. 무모하게 무한대의 도전을 감행하는 기본 성격 때문인지 노화를 잊은 채 여전히 예능프로그램의 지존으로 군림 중이다. 특히 6월23일과 30일 유 반장(유재석) 이하 식스 멤버가 필리핀으로 룰루랄라 휴가를 떠난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제작진의 마수(?)에 걸려 인적없는 섬에 상륙해 고군분투하고 말았다는, ‘정말 몰랐을까’ 싶은, 믿거나 말거나의 특집 ‘무인도 에피소드’는 다시 한번 시청자의 허파에 바람을 듬뿍 공급하며 <무한도전>의 마력을 되새김질했다.
앞으로 얼마나 오래 이 프로그램이 “‘하자’ 캐릭터들의 도전은 계속돼야 한다”는 당위성을 납득하게 만들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는 두고두고 박수를 받아도 족할 것이다. 유익함에 대한 예능프로그램의 콤플렉스를 벗어던졌다는 것과 한국식 ‘오리지널리티’를 품었다는 것이 그것이다.
머리 크고 많이 먹
무모하고, 무리있지만 가능성 무한대의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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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록밴드라고 불리고 싶지 않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어요.” 4인조 밴드 도나웨일의 리더 윤성훈(31, 기타)이 말한다. “모던록이라는 단어가 주는 한정된 가치나 컨셉 같은 게 싫었던 것 같아요.” 윤성훈과 함께 곡을 쓰는 유진영(28, 보컬 및 키보드)이 맞장구를 친다. 테이블 구석에서 언니, 오빠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다영(20, 베이스)은 고개를 끄덕인다. 이들과의 인터뷰 자리는 확실히 저마다 각각인 사람들과의 만남이란 느낌이 한번에 와닿는다. “예전에는 가사보다도 사운드의 감성과 뉘앙스를 더 중시했다”는 윤성훈과 “가사는 당연히 좋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는 유진영. 윤성훈은 스물한살 때 286비트 컴퓨터로 기타, 베이스, 드럼을 모두 넣어 밴드 음악을 만들었던 게 자신의 첫 자작곡이고, 유진영은 고1 때 친구에 관한 가사를 입혀 완성한 곡이 자신의 첫 자작곡이다. 유진영은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예민했던 사춘기 때부터 음악을 하기로 마음을 굳혔었다고 한다. 그는 이번 앨범에서
[인디 뮤지션 3인] 의 도나웨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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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의 음색이 사람의 울음소리를 닮아서인가. 지난해 11월 ‘모던 가야금 정민아’라는 카피 아래 발매된 정규앨범 <상사몽>을 듣고 있으면 뮤지션 본인이 우울하고 슬픔이 많을 거란 생각이 든다. 둥글고 부드러운 인상을 지닌 그는 엉뚱하고 웃음이 많다. “곡을 쓸 당시에는 생각보다 별 감정이 없어요.” 7개 트랙이 실린 EP 형식 앨범 <애화>의 동명 타이틀곡 제목은 그의 어머니 존함을 따서 지어진 것인데 정작 작업하는 동안엔 곡 쓰는 일에만 몰입하다 나중에야 ‘아, 엄마 생각이 나네’ 하며 그제야 주위 사람들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그는 애절한 정서보다는 한 발짝 떨어져서 대상을 보는 처연한 정서가 좋다.
정민아는 국악고등학교와 한양대 음대 국악과를 졸업했다. “죽도록 노력해서 남들 가는 좋은 길을 가려고 할 땐 한번도 일이 풀린 적이 없었”다. 국립국악원에 8번 낙방하고 텔레마케터로 생계를 꾸려온 시절은 여러 기사에 실린 스토리. 그는 안양의 모 라이
[인디 뮤지션 3인] <상사몽>의 정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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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일 없고 아는 것 별로 없는 백수지만 아무대나 들이대는 무대뽀 정신의 화신이자
액션영화 매니아인 ‘신셩일’과 영화에 관한 것이라면 모르는 것 없이 척척박사인 별나고
착한 용 ‘용식이’의 귀여운 티격태격 속에 소개되는 본격 순위 코너 [용씨네]!
이번 회의 주제는 [최강 총격전 BEST 5]!
신셩일과 용식이의 요절복통 순위발표, 어디 한번 들어볼까요?
<동영상보기> 버튼을 눌러주세요.
[용씨네] 최강 총격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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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이 지나면 3집까지는 냈을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거, 프로젝트 하고 싶어요. 노래하는 사람으로서의 즐거움이 있다는 걸 알았거든요.” 임주연은 잘 웃는다. 말하기 전에 적절한 단어를 생각하듯 큰 눈을 깜박거리며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하지만 말투는 느릿하고 놀리고 싶을 정도로 솔직하다. 단정하고 정리가 잘된 첫인상의 노래와는 다르게 빈틈이 많은 것 같지만 그렇다고 허술해 보이지는 않는다. “이한철씨가 문예진흥기금 신청을 넣었는데 덜컥 선정이 된 거예요. 그래서 정말 안 하면 안 되는구나, 그래서 앨범 작업을 했어요”라는 그녀가 데뷔한 계기도 흥미롭다. 과제로 제출한 <가려진 마음>을 들은 정원영 교수가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 나가보라고 했을 때 그게 뭐냐고 되묻던 그녀는 ‘상 타면 돈 받는다’는 정 교수의 말에 냉큼 출전해 상도 타고 돈도 받았다. 서울예대 실용음악과에 입학한 직후부터 봄여름가을겨울의 세션으로 활동하며 사랑과 평화의 송홍섭과 인연을 맺은 그녀는 그로부
[인디 뮤지션 3인] <상상>의 임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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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음악을 발견한다는 건 좋은 사람을 발견해 사랑에 빠지는 것만큼이나 설레는 일이다. 정말 좋은 음악이 대중과 만나지 못하고 묻혀버리는 게 안타까운 것도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그런 인연을 놓칠 까닭이다. 그래서 이들을 소개해보려고 한다. 사실 우리나라에서는 인디신과 오버그라운드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인디신의 기대주 3인’이라는 제목은 다소 거칠지만, 홍대 라이브 클럽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뮤지션들을 이른바 ‘인디뮤지션’이라고 부르는 것에 따랐다. 드라이하고 굵직한 모던록을 추구하는 임주연, 국악과 재즈와 발라드 사이에서 쉽고 감동적인 음악을 들려주는 가야금 연주자 정민아, 다소 진부할 수 있는 외피 속에 성숙한 사운드와 정서를 갖고 있는 밴드 도나웨일이 그들이다. 한정된 채널로 인해 더 많은 대중과 만날 기회가 적은 이들의 음악이 이 지면을 통해 당신에게 좋은 인연이 되기를 바란다.
[인디 뮤지션 3인] 너의 목소리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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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소품팀에서 그냥 필름으로 소품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었다. 하지만 폴라로이드 사진이 더 어울릴 것 같더라. 알츠하이머 환자인 수진은 기억을 잃어가고 있는데, 단 하나밖에 없는 사진이고 복제가 안 된다는 점에서 폴라로이드 사진이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표현하는 데 적절할 듯싶었다.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스틸을 촬영하면서도 군데군데는 일부러 폴라로이드로 찍곤 했다. 나에게도 매번 똑같은 영화가 찾아오는 건 아니니까. 소품용 사진을 찍을 때는 배우들도 무척 즐거워했다. 마음에 들어하는 사진들은 그냥 주기도 했고. 그런 과정에서 폴라로이드 사진들이 배우와 나 사이에 좋은 매개물이 된 것도 같다.
[숨은 스틸 찾기] <내 머리속의 지우개> 폴라로이드 활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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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는 표지라고 할지 모르겠다. 왜 지금 김민희였냐고 묻는다면 ‘너무 궁금했다’고 말하는 게 가장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잡지모델로 시작해 CF, 드라마, 영화를 아우르던 지난 10년 동안 그녀는 1페이지 이상의 인터뷰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 검색창을 가득 메운 기사들은 대부분 그녀의 사생활을 들추거나 몸매를 찬양했고, 패션 스타일을 품평했다. 김민희 자신은 “처음 만난 사람과 편하고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눈다는 게 어렵기 때문”에 사양한 인터뷰가 많았다고 하지만 어쩌면 우리의 시선 자체가 그녀의 입을 닫아버렸는지도 모른다. 비로소 사람들이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했던 건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 <굿바이 솔로>에서 미리를 연기했을 때였다. 사랑을 찾아 가족을 버린 미리는 바보 같은 사랑에 웃고 울던 노희경의 여자들과 다를 바 없는 인물이었고, 사람들의 우려와 달리 김민희는 온몸으로 웃고 울며 미리를 완성해냈다. 과연 그녀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드라마의 종영
굿바이 미리, 굿모닝 아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