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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 무당이 굿을 한다. 무릎 아래가 잘린 채 피를 흘리며 장단에 맞춰 미친 듯 춤을 춘다. 다리가 잘려나간 무릎에서는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흰자위를 드러낸 채 두눈은 이미 다른 세계를 우러른다. 뒷마당에는 화덕에 양은솥이 올려져 있고, 그 안에는 잘려나간 무당의 두 다리가 들어 있었다. 아직까지 머릿속에 남아 있는 어린 시절의 영상이다.
현실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꿈에서 본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선명하다.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심지어 삶아지는 다리에서 풍기는 역겨운 냄새까지 코끝에 걸린다. 어린 시절의 기억에는 이렇게 현실이라고 믿을 수 없는 영상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때 세계는 꿈과 현실이 하나로 뒤엉켜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흔히 ‘백일몽’이라고 부른다.
아득한 옛날, 꿈은 현실이고 현실은 꿈이었다. 주술을 통해 꿈은 현실이 되고, 현실은 꿈속에 예고되었다. 프레이저는 주술을 동종주술과 감염주술로 구별한다. 주술의 이 두 형태는 프로이트가 말
[진중권의 이매진] 영원한 소년이 꾸는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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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보다 여드름이 더) 많았던 소녀 시절, 잡지사 기자가 되고 싶었다. <하이틴> <여학생> <주니어> 등의, 여중고생들을 타깃으로 삼은 월간지들이 동네 서점가를 풍미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홀로 상상에 빠지곤 했다. <여학생>의 근사한 소파에 앉아 근사한 연예인과 인터뷰하는 근사한 내 모습을. 망상을 한없이 발전시키다 보면 판단력을 잃게 된다. 나는 마침내 한시가 아까워서 못 견디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래, 잡지사에는 학생 리포터가 필요할지도 몰라. 정 안 되면 사무보조라는 것도 있잖아? 기자가 되는 데 아무런 쓸모도 없어 보이는 수학이나 생물 따위를 공부하는 대신 바로 실무를 배워야겠다는 열망에 불타오른 나머지, 직접 부딪쳐보기로 했다.
나름대로 각본도 짰다. ‘김혜수와 이상아를 합친 것처럼 예쁜 친구가 있다. 성격이 무척 소극적인 이 아이를 데리고(지가 무슨 매니저라고?) 귀사를 방문하여 표지 모델 카메라 테스트를 받겠다. 담당기
[냉정과 열정 사이] 직업의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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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특한 이름으로 선정된 5개 영화사 중 3곳이 홍보·마케팅사다. 제작사나 투자사, 배급사에 비해 비교적 규모가 작고 자유롭기 때문인지 홍보·마케팅사 중에는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는 특이한 명칭이 많았다. 누구나 한번쯤 궁금증을 가졌을 법한 래핑보아는 영어 표기를 보지 않으면 은근 헷갈릴 이름. 랩하는 가수 보아도, 랩하는 보아뱀도 아닌 웃는 보아뱀(Laughing Boa)이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어린 왕자>에 나오는 보아뱀의 유머 버전을 연상하면 제일 적당할 듯. 의외로 “술자리에서 농담처럼 나온 이름”으로 “특별한 의미는 없다”고. 반면 유쾌한 확성기는 회사의 특성을 잘 살린 명칭이다. 공동대표인 류순미 실장이 싸이더스에 있을 때 속해 있던 팀의 별명이 확성기였다는 점에 착인했다. 입에 확성기를 대고 외치듯 정보를 퍼뜨린다는 의미다. “일 역시 웃고 떠들며 즐겁게 하는 사람들임을 강조”하기 위해 “유쾌한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였다”고 장보경 대표는 설명했다. 오락실은
[충무로 작명소] 독특한 영화사 작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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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에게서 태어난 유래명시형
어쩌면 가장 평범한 형태의 명칭일 듯. 모기업 등 영화사의 모태가 되는 명칭을 그대로 반영한 형태를 말한다. CJ엔터테인먼트, CGV, 롯데엔터테인먼트, 롯데시네마 등이 대표적인 예. 롯데엔터테인먼트, 롯데시네마는 말할 것도 없이 롯데그룹의 일부임을 명시한 명칭인 반면, CJ엔터테인먼트는 CJ그룹의 다른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제일제당(Cheil Jedang)의 이니셜을 딴 것이다. 그렇다면 CGV는 어떻게 만들어진 이름일까. 한국의 제일제당(CJ), 홍콩의 골든하베스트(Golden Harvest), 호주의 빌리지로드쇼(Village Roadshow), 3사가 합작한 형태로 탄생한 CGV는 씨제이 골든빌리지의 이니셜을 의미한다. 1999년 제일빌리지라는 명칭으로 설립돼 투자사와 주주가 변경되는 등 변화를 겪으면서 1999년 씨제이빌리지, 2001년 CGV로 바뀌었다가 2002년 CJ CGV로 굳어진다. MK픽처스 또한 영화사의 합병으로 탄생한 이름이다. 2
[충무로 작명소] 다섯 가지 유형으로 보는 영화사 작명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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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는 분야의 창조성 때문일까. 충무로에는 유독 눈길을 끄는 이름들이 많다. 청어람, 백두대간, 신씨네, 필름있수다, 오락실, 래핑보아, 유쾌한 확성기, 올댓시네마, 스폰지 등. 어떤 명칭은 금방 알 것 같지만 어떤 명칭은 도통 짐작이 가지 않는다. 하긴 그 의미를 알아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가벼운 외양과 달리 제법 진중한 풀이를 새긴 것도, 큰 포부를 담았으리라 짐작했건만 의외로 소박한 것도 있다. 하지만 어떤 이름이든 고심해서 고른 것인 만큼 지향하는 영화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을 보여주지 않을까. 가치관이라는 표현이 너무 거창하다면, 적어도 영화사를 세우며 마음에 품었던 소박한 바람이나 취향 정도는 충분히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 영화사 명칭을 충무로의 지형도를 가늠할 지표 중 하나로 받아들인다 해도 우스울 것이 없다. 게다가 단어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충무로 브랜드네이밍도 꽤 근사한 목록을 갖췄다. 너무 유명해 익숙한 이름부터, 귀에도 입에도 낯선 생소한 이름,
[충무로 작명소] 충무로 간판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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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 “<익사일> 같은 영화를 보면 ‘액션을 더이상 뭘 새롭게 찍겠어?’라는 오만방자함이 박살나요.”
이동진 “오래된 클래식 액션영화의 묘한 인상이 있어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님(김혜리 vermeer@cine21.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이크! 스타일님(이동진 lifeisntcool@naver.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이크! 스타일님의 말(이하 이크) : 죄송, 이제야 막 들어왔어요.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님(이하 시체) : 으악, 놀래라! 망했다. 이번주 개봉작에 실려나온 시체 숫자 세고 있었는데, 부르시는 바람에 어디까지 셌는지 까먹었잖아요. T-T
이크: 진짜 많이 죽는 장르는 사실 공포가 아니라 액션이죠. <람보2> 같은.
아무: 끙, 그렇죠. 하지만 그 경우는 죽음보다 파괴에 가깝게 느껴지니까요.
이크: 대량사상이라면 재난영화도 있네요. <딥 임팩트>가 최다사상자 영화인가요? 참, <지구를 지켜라!>
[메신저토크] <익사일>은 극도로 순수해서 숭고한 장르영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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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방울토마토>의 배우 신구와 함께한 톡톡 튀는 인터뷰입니다.
관객의 재미있는 질문과, 배우의 톡톡튀는 답변! 씨네21에서만 볼 수 있는 2원 생중계!
<동영상 보기> 버튼을 눌러 주세요.
[talk talk talk] 신구의 톡톡 튀는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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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엄(마르티나 게덱)과 앙드레는 아들 닐스와 그의 여자친구 리비아(스베아 로드)를 데리고 여름휴가를 떠난다. 미리엄은 열두살이라는 나이에 비해 지나치게 성숙한 리비아가 처음부터 마음에 걸린다. 아들과 보트를 타러 나갔던 리비아는 빌이라는 남자와 함께 돌아와 그를 가족에게 소개한다. 이때부터 어린 연인들과 미리엄 그리고 빌과의 미묘한 긴장관계가 시작된다. 아들의 친구이자 아직은 미성년자인 리비아를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시작된 미리엄의 간섭은 점차 그녀가 빌에게 이성적으로 끌리게 되면서 이상한 라이벌전으로 변질되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평범하고 안전해 보였던 한 가족의 여름휴가는 욕망이 교차하는 심리전으로 탈바꿈한다. 처음에 보호자적인 태도를 취했던 미리엄이 점차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관계의 권력구조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모습을 통해 인간의 이중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일체의 인위적인 사운드를 배제함으로써 이 영화는 욕망의 줄다리기를 일체의 심리적 과장 없이 담담하게 드러낸다
욕망의 줄다리기 <미필적 고의에 의한 여름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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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의 악극으로도 잘 알려진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켈트인의 전설에서 비롯되어 비극적 사랑의 원형으로 끊임없이 회자되어온 이야기다. 리들리 스콧과 토니 스콧 형제가 기획과 제작을 맡은 영화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으로 비극에 이르는 연인이라는 고전적 뼈대를 차용하되, 그 위에 로마 멸망 뒤 영국과 아일랜드의 대립이라는 시대적 맥락을 입혔다. 아일랜드가 부족 단위로 흩어진 영국을 지배하던 시대, 영국의 통합을 도모하는 군주 마크(루퍼스 스웰)의 손에서 키워진 트리스탄(제임스 프랑코)은 전투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장례절차에 따라 바다에 띄워 보내진다. 해안가에 떠내려온 트리스탄을 발견한 아일랜드의 공주 이졸데(소피아 마일즈)가 그를 살려내고, 두 사람은 서로의 신분을 알지 못한 채 사랑에 빠진다. 정치적인 음모와 배신, 어긋난 사랑의 파국 등 익숙한 요소들로 조합된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눈에 띄는 새로움을 찾아보기란 힘들다.
견고하게 빚어낸 세공품 <트리스탄과 이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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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 순도 100%의 액션영화 한편을 보았다. 여기에는 불순물이 전혀 없다. 오로지 스타일만으로 만든 <익사일>은 넋이 나갈 정도로 매혹적이기도 하고,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터무니없기도 하다. 그게 무엇이든, 극단에 도달하는 순간의 어떤 경지 같은 것이 이 영화에 있다.
<익사일>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명확한 작품이다. 스타는 있고 캐릭터는 없다. 스타일은 있고 플롯은 없다. 카메라는 있고 시나리오는 없다. 동사는 있고 접속사는 없다.
그러면, 이 영화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대체 어떤 내용이냐고? 조직을 배신했다는 죄목을 뒤집어쓰고 피신해 있는 아화의 집으로 옛 친구 넷이 찾아오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먼저 방문한 두명은 그의 안전을 지켜내기 위해서 온 것이고, 나중에 온 두명은 조직의 명령을 받아 그를 처단하기 위해서 온 것이다. 한참 뒤에 아화가 집으로 돌아오자 다섯 사람은 서로 총을 쏘기 시작하지만, 아화의 하소연을 듣고 예전의 우의를 되찾는다. 이
순도 100%의 액션영화 <익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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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용한 스릴러와 호러영화는 관련 정보를 미리 알고 본다 해도 재미가 크게 훼손되지 않는다. 심지어는 스포일러조차 큰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 영화 스스로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센트>는 네발로 기며 어둠을 더듬는 영화다. 암중모색의 쾌감을 제대로 연출한 이 영화의 어둠은 진짜다. 그 속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모를수록 <디센트>는 짜릿하다. <디센트>의 한글 제목을 붙인 사람은, 원제의 의미 ‘하강’과 ‘전락’ 중 하나만 고르기 난처했을 것이다. 영화 속 여섯 여자들은 지하 동굴을 탐험하는 느린 하향운동을 하고 거기서 고립된 채 맞이한 재앙을 통해 동물적인 상태로 굴러 떨어진다. 인물을 동굴에 들여보내기까지 닐 마셜 감독은 적당한 시간을 들여 심리적 복선을 깔고 많은 캐릭터를 최소한 스케치한다. 여자친구들과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겨온 세라(쇼나 맥도널드)는 래프팅 여행 중 끔찍한 사고를 당한다. 1년 뒤. 세라의 기운도 북돋울 겸 그룹의 리더 주노(내털
암중모색의 쾌감 <디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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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한 피범벅
<도살자> The Butcher/ 김진원/ 한국/ 2007년/ 76분/ 금지구역
<도살자>를 본 관객은 배우들의 신변과 영화를 만든 데빌그루브픽쳐스가 도대체 어떤 일당인지 궁금해질 것이다.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던 한 부부가 어느 도살장에 끌려온다. 이곳에는 돼지머리를 가진 괴물을 주인공으로 스너프영화를 찍는 도살업자가 있다. 그는 괴물의 희생양이 될 사람들의 머리 위에 카메라를 매달아놓고 그들의 사지를 절단하며 영화를 찍는다. 끌려온 사람들의 머리에 4대, 도살장에 1대, 도살업자의 목에 1대씩 달려 있는 총 6대의 카메라는 <도살자>의 공포감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몸에 달린 카메라는 고통과 함께 흔들리고, 거친 사운드는 대사보다 비명을 더욱 강렬하게 전달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작정한 고어영화인 <도살자>는 공포감 조성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잔혹함까지 놓치지 않는다. 톱에 갈리며 죽어가는 사람의 비명이 귀청을
[제11회 부천영화제 가이드] <도살자> <바람 속의 질주> 外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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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보다 무서운 인간이 여기 있다
<다이어리> Diary/ 옥사이드 팡/ 홍콩/ 2006년/ 86분/ 부천 초이스
타이의 옥사이드 팡이 호러물의 재주꾼임을 보여주는 소품이다. 그닥 새롭지 않은 소재로 출발선을 잡고서, 게다가 적당한 복선과 관습적인 카메라워크를 지극히 제한된 공간 안에서 펼치는 것만으로 기승전결의 맥을 만들어낸다. 귀신은 없으나 귀신보다 무서운 인간이 있다. 선천적 악마 사이코패스는 아니다. 후천적으로 앓은 사랑의 후유증이 위니의 몸뚱이를 감싸고 있다. 그녀가 기괴한 기운을 내뿜으며 불길해 보이는 목각 인형을 만들어내는 건 저주의 영혼을 불어넣겠다, 는 의지가 아니라 그나마 스스로를 위로하는 소일거리다. 그녀의 본업은 예쁜 뷰티숍의 점원이다. 그곳에서 나와 상당량의 생선과 고기를 사고, 그 생선과 고기를 어두컴컴한 부엌에서 칼로 다지며 요리를 만드는 건 저주의 카니발 의식이 아니다. 사랑하는 남자 세스를 위한 애정 행위다. 문제는 그 세스가 떠나버렸다는
[제11회 부천영화제 가이드] <다이어리> <미러마스크> 外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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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장르의 기막힌 혼합
<클라우드> The Cloud/ 그레고르 슈니츨러/ 독일/ 2006년/ 105분/ 월드 판타스틱 시네마
두세 가지 장르를 배배 꼬인 전선줄처럼 뒤섞어가는 장르 혼합은 다반사가 된 지 오래다. 하지만 장르의 흐름이 이야기의 맥락을 타며 급변하거나 리듬을 타면서 경계를 그어가는 그 자체가 재미를 주는 작품은 많지 않다. 마치 세 토막의 장르를 무처럼 동강내 시미치 뚝 떼고 딱딱 이어붙인 듯한 <클라우드>는 언뜻 매끈한 할리우드영화 같다. 거침없이 장르적인 연출이지만 언어와 건축물, 그리고 그 주인인 사람이 명백한 독일산이다. 처음은 밝고 명랑한 십대 학원물이다. 한나는 등교보다 늦잠 자는 게 좋고, 여자친구와의 수다도 좋지만 핸섬한 남자에게 눈이 돌아가는 평범한 소녀로, 부유한 집의 외아들 엘마와 가벼운 사랑의 암초를 헤치고 눈을 맞춘다. 그걸 키스로 확인하는 순간 요란한 사이렌이 울린다. 두 번째 장르, 암울한 재난영화의 시작이다
[제11회 부천영화제 가이드] <클라우드> <블랙 쉽> 外 8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