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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항쟁이 마련한 한국 민주주의의 원(原)공간은 일반민주주의 너머의 체제를 더듬어 찾는 유혹의 공간이기도 했다. 시민항쟁의 바람을 타고 일기 시작한 정치적 자유의 물결 위에서 이미 혁명의 멀미를 겪은 세력도 있었겠으나, 마르크스주의에 젖줄을 댄 노동운동의 일부 주체들은 ‘진짜 혁명’을 꿈꾸고 있는 듯 보였다. 1871년의 파리코뮌이나 1917년의 볼셰비키 집권 같은 혁명 말이다. 혁명 러시아를 본떠 동유럽에 들어선 체제들이 내부 모순과 세계자본주의의 압력으로 거북이 등딱지 꼴이 돼가고 있던 그 순간, 얄궂게도 한국에서는 그 체제를 희망의 종착역으로 삼은 관념의 레일들이 속성으로 깔리고 있었다. 현실사회주의 체제의 실상에 대한 정보가 모자랐던 탓이기도 했을 테고, 오래 지속된 유사파시즘 체제에 대한 반작용의 힘이 컸던 탓이기도 했을 테다. 지금 돌이켜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사회운동권의 일부 담론은 ‘한국혁명의 임박’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런 시대착오는 현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복거일 & 노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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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시간으로 방송을 보지 못했더라도, 다음날 아침까지만 기다리면 ‘핵심 체크’는 가능하다. 대통령의 국정연설보다 흥미롭고 따근따근한 ‘말말말’의 공장은 자칭 ‘비호감 월드’이고, 신개념 토크쇼로도 불리는 MBC <황금어장>의 코너 ‘무릎 팍 도사’다. 그런데 거침없는 질문과 솔직한 대답으로 매회 화제를 뿌리는 이 프로그램을 ‘발언 발췌’형 기사로 충분히 안다고 여겨서는 곤란할 것 같다. 무릎 팍 도사는 어떤 3D게임 못지않게 입체적일 뿐 아니라 시청자의 반응도 실시간으로 감지하는 ‘인터랙티브’ 형이기 때문이다.
무릎 팍 도사가 토크쇼의 변종이라는 얘기는 두말하면 잔소리다. 신해철, 이승철 등의 과거사를 광장에 까발려 토크거리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분명 파격이다. 주부 대상 아침 정보 프로그램 같은 신파 토크쇼나 조롱으로 뒷담화의 쾌감을 자아내는 <정재용의 순결한 19>와 달리, 무릎 팍 도사는 면전에 ‘스타 님’을 앉혀놓고 맨투맨으로 무안을 주고, 약점도 꼬집
진정한 토종 버라이어티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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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절라도’ 출신이다. 광주에서 났고, 거기서 20년 가까이 살았다. 흔히 지연은 혈연, 학연과 함께 한국사회를 좀먹는 3대 원흉으로 꼽힌다. 혈연이나 학연은 끔찍이 싫다. 하지만 지연만큼은 좀 남다르다. 대학 다닐 적에 호남향우회로부터 장학금 한번 받아본 적 없다. 우승을 8번이나 거머쥐었던 해태로부터 사인볼 하나 얻은 적 없다. 그런데 왜 그럴까. 이유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해본 적은 없다. 다만 ‘광주 만세’를 외치면서도 뒤가 근지럽지 않았던 건, 그곳이 예전부터 잘살았던 도시가 아니라 여전히 못사는 동네이기 때문일 것이다. 잘났다고 떠드는 것보다 못났다고 물러서지 않는 것이 훨씬 윤리적이고 생산적인 행동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투리는 어떻게든 고치고 싶었다. 낭랑하고 조근조근한 표준어를 갖고 싶었다. 대학 다닐 무렵만 해도 사투리를 거의 쓰지 않았다. 아니, 그렇게 추정된다. 어쨌든 사투리를 쓰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소개팅 출정시에 상대
[오픈칼럼] 사투리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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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개봉작을 소개하는 [개봉작 NEW]
이번 회에는 지난 5월 10일에 개봉한 <못말리는 결혼> 입니다
전통 계승을 몸소 실천하는 풍수지리가 지만(임채무)의 외동딸 은호(유진)와 강남 큰손 말년(김수미)의 외아들 기백(하석진)이 어느날 패러 글라이딩을 타다가 묘하게 얽혀 연인으로 발전한다. 그런데 문제는 달라도 너무 다른 양쪽 집안 부모님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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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작 NEW] 못말리는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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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경비구역 JSA> 촬영 때 남양주종합촬영소에서 찍은 사진이다. 가짜지만 진짜였으면 하는 마음에서 찍었다. 사진 그 자체로 매력을 찾긴 어렵지만,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소중하다. 송강호씨와 이병헌씨에게 영화처럼 남과 북 군인들이 한데 어울려 기념사진을 찍어두는 게 어떠냐고 했는데 흔쾌히 응해주었다. 판문점에서 스탭들이 밥을 먹는 사진도 통일을 바라는 마찬가지 바람에서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다시 들여다보게 되는 사진들이다.”
[숨은 스틸 찾기] <공동경비구역 JSA> 통일의 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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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달 전 아이들을 데리고 도쿄에 간 적이 있다. 돌아오기 전날이었다. 우에노공원과 도쿄대 캠퍼스를 둘러보고 나니 2월의 해는 많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침부터 걷느라 지친 아이들은 그만 호텔로 돌아가고 싶은 눈치였다. 욕심 부릴 계제가 아니었다. 혼고 산초메역이었나. 도쿄대 앞 지하철역에서 숙소가 있는 고탄다쪽으로 갈 노선도를 살피고 있는데, 역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오차노미즈역. 바로 다음 역이었다.
나는 이 역을 안다. 도심 한복판을 흐르는 강을 끼고 서 있는 역. 붉은색 아치형 철교 아래로 자그마한 터널이 있고, 다시 그 옆을 가로지르는 또 하나의 철길까지 모두 세개의 노선이 겹치며 흘러가는 곳. 히지리바시(聖橋)라는 다리에 서면 강과 함께 색색의 전철들이 겹치며 흘러가는 풍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철교 아래로, 누군가가 토해낸 듯 문득 터널을 빠져나와 다시 시간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전철의 흐름을 보고 있노라면 거기 세상의 비의 한 자락이 잠시 그렇게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
[내 인생의 영화] <카페 뤼미에르> -정홍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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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렉’(shrek)이라는 제목을 듣고 떠오른 것은 ‘공포’와 ‘경악’이라는 뜻의 독일어 단어(Schreck). 실제로 독일어와 히브리어가 섞인 유대인의 언어 ‘이디슈’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슈렉>은 <미녀와 야수> 같은 동화의 전형성을 파괴한다.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는 놀라운(?) 반전이 말해주는 것은 한마디로 ‘생긴 그대로 자신을 긍정하라’는 것. 너무나 정치적으로 올바른 이 메시지가 <슈렉>이 인기를 끄는 비결은 아닐 것이다.
<슈렉>이라는 메타텍스트
<슈렉>에는 일화가 따라다닌다. 가령 파콰드 영주의 얼굴이 디즈니사의 사장을 닮았으며, 그가 사는 성(城)은 디즈니랜드를 패러디한 것이다. 실제로 드림웍스의 설립자 제프리 카젠버그는 디즈니사에서 떨어져 나오는 과정에서 그들과 법적분쟁까지 겪었단다. 그래서 디즈니사에 복수하려 <슈렉>을 만들었다는 얘기까지 떠도나, 이 설의 진위에 관계없이 <슈렉>이
[진중권의 이매진] 쿨미디어의 뜨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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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같은 사람은 꿈만 꾸는 걸 다 해본, 그래서 부러운 사람이 이창동이다. 그는 아이들을 가르쳤고, 소설을 썼으며, 영화를 만든다(그리고 이건 별로 부럽지 않은데, 장관의 명예도 누렸다). 데뷔 10주년인 올해, 그가 영화로 복귀해 만든 <밀양>의 칸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칸의 정치적 행보를 볼 때 그의 수상 여부는 익히 짐작된다)을 기념하듯, 전작 세편의 DVD 박스세트가 출시됐다. 그의 영화는 별다른 스타일을 추구하지 않고 어쩌면 문학적 담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도 같아 밋밋하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쉽다. <밀양>을 본 건 이창동 영화의 매력이 딱히 무언지 헤아리던 중이었다. <밀양>은 스크린을 가득 채운 하늘을 앞서 세번 보여준다. 세상의 하늘이 다 똑같다지만, 한눈에 한국의 하늘임이 느껴졌다. 그 아래 놓인 세상이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일진대, 그게 일산 신도시가 되었건(<초록물고기>), 1980년 5월의 광주가 되었건(<
전작 세편에 관한 이창동의 진지한 고백, <이창동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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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개봉작을 소개하는 [개봉작 NEW]
이번 회에는 지난 5월 10일에 개봉한 <경의선> 입니다
지루하고 반복된 일상 속에서도 성실함을 잃지 않고 일하는 지하철 기관사 만수(김강우 분)에게는 얼마 전부터 자신의 열차를 기다렸다가 간식거리와 잡지를 건네는 한 여인이 있다. 가족도 동료도 인지할 수 없을 만큼 매번 바뀌는 열차운행시간을 어떻게 알고 매일같이 정확한 시간에 기다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등장은 어느덧 만수의 일상에 활력이 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예기치 못한 열차 투신 자살 사건으로 큰 충격과 혼란에 빠진 만수는 특별휴가를 받고 경의선 기차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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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작 NEW] 경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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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상상을 해본다. ‘서로 사생활은 존중해야지’라는 쿨함도, ‘당신은 영원한 나의 반쪽’이라는 콩깍지도 없는 관계에서 이런 상상의 날개를 펴는 건 사실 쉽지 않다. 설마인 거지. 설마 키도 작고 돈도 없고 성격도 별로인 그를 누가 좋아하겠어, 설마 파리바게트에서 케이크 사고 신라제과 앞도 못 지나가는 소심한 그가 무슨 연애를. 그런데 사랑은 교통사고처럼 다가오고 불륜은 뺑소니처럼 지나가니 설마는 언제라도 사람을 잡을 수 있다, 고 무수히 많은 TV드라마와 영화는 말한다.
그래서 다시 돌아가 만약 배우자에게 애인이 생겼다면? 일단 열받겠지만 굳이 TV를 통한 선행학습을 반사적으로 따라하지 않는다면 분노 못지않게 궁금증이 뭉게뭉게 피어오를 것 같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 이 지루하고 그저그런 인간에게서 불륜의 가시밭길을 함께할 매력을 발견했을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 아무런 삶의 활력도 없는 인간에게 이런 열정을 불어넣었을까? 참 이상한 건 그렇게 많은 불륜 드라마
[냉정과 열정사이] 내 마누라 꾄 놈이 누구냐고,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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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인들이 인터뷰 때 자랑스럽게 애기하는 것이 있다. 자신이 권투선수 캐릭터를 연구하려고 몇달 동안 실제 권투선수와 생활했다, 형사 역을 위해 현직 형사들을 수개월 따라 다녔다는 등 영화의 리얼리티를 위해 치열하게 연구했음을 흔히 들을 수 있다. 이런 피나는 노력은 영화에 그대로 반영되어 영화의 진정성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장애인 영화만은 예외인 것 같다. 제작진이 장애인 캐릭터를 연구하려고 몇달 이상을 장애인과 생활한 경우는 실제 초원이의 모델인 발달장애인을 1년 이상 연구했다는 <말아톤> 이외에는 들은 기억이 없다. 대다수 제작진은 기껏해야 몇주 정도, 그것도 실제로 장애인들의 생활 속에 들어가 연구하는 데는 극히 짧은 기간만을 투자하는 것 같다. 이렇게 장애인에 대한 연구가 미미한 가운데 만들어지는 작품 수준은 불을 보듯 자명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IQ 60의 11살 아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 <날아라 허동구>도 제작진의 장애
[영화읽기] 장애인, 당신들이 사회에 적응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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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신 개봉작을 소개하는 [개봉작 NEW]
이번 회에는 지난 5월 23일에 개봉할 <밀양> 입니다
아들과 함께 죽은 남편의 고향을 향해 가던 신애의 고장난 차가 카센터의 종찬을 불렀다.
렉카차를 타고 밀양으로 들어가는 세 사람.그러나 아직 그들은 모른다...
신애는 피아노 학원을 열었다. 이제 통장엔 아주 작은 돈이 남았을 뿐이지만, 꿀리고 싶지 않은 그녀는 이웃들에게‘좋은 땅을 소개해 달라’며 새 생활을 시작한다. 남편의 고향에 덩그러니 정착한 그녀를 측은하게 보는 이들에게 “저 하나도 불행하지 않아요”라고 애써 말하며, 씩씩하게 군다. 그러던 어느날, 아들 준이 죽었다. 숨바꼭질을 그렇게 좋아하던 아이는 그렇게 영영 나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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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봉작 NEW]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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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거미 인간의 추종자이며 샘 레이미 전문가라고 굳게 믿는다면 한 가지 도전해볼 만한 과제가 있다. <스파이더 맨> 시리즈의 어디쯤 이 남자가 등장하는지, 어떤 모습으로 나왔다 금방 사라지는지 맞혀보는 것이다. <스파이더 맨> 시리즈의 또 다른 신화, 브루스 캠벨을 알아보자.
1. 연극에서 영화로
브루스 캠벨은 1958년 6월22일 미국 미시간주 버밍엄에서 세 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지역에서 연극을 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고 8살에 곤충 역할(벌써 곤충과의 인연이!)을 맡아 호연(?)을 보였고, 열네살에는 <왕과 나> 연극에서 왕자 역을 맡아 노래 솜씨를 선보인 적도 있다. 하지만 그는 무대 위 연기보다 영화쪽에 큰 관심을 갖고 되었고, 동네 친구들과 함께 슈퍼8mm 등으로 영화를 찍기 시작했다. 고등학생이 된 브루스 캠벨은 평생을 같이할 괴짜 친구 한명을 드디어 만난다.
2. 평생지기 샘 레이미
브루스 캠벨과 샘 레이미가 만난 것
[알고 봅시다] ‘스파이더 맨’보다 더 중요한 이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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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어:그럼 다음 영화로 넘어갈까요? ‘다음’ 영화로는 <넥스트> 만한 게 없죠? (히힛)
장모:^_^ 그러고보니 이 영화의 제작, 주연인 니콜라스 케이지도 코폴라가의 일원이네요.
무어:그런데 이 영화 진짜 용두사미 아닌가요? 클라이맥스가 이렇게까지 맥빠지는 영화는 참 오랜만인 것 같아요. 사실 시작은 꽤 근사하잖아요. 특히 주인공이 2분 뒤 미래를 볼 수 있기에, 초반에 카지노에서 경찰을 따돌리고 유유히 탈출하는 장면이 멋졌죠.
장모:<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라스베이거스에 니콜라스 케이지가 그런 식으로 돌아가다니! 그 장면은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예언자를 데리고 톰 크루즈가 쇼핑몰을 빠져나가는 신과 닮았죠.
무어:리 타마호리 감독은 점점 하향세인 것 같아요. 할리우드로 잘못 간 대표적인 감독이랄까요. <전사의 후예>에서는 헉 소리나게 좋았는데, 점점 더 영화가 뻔해지고 있죠. 그런데 이 영화의 설정에 대한 이야기를 안 할
[메신저토크] 시대착오는 자막이 전담하고 있네요 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