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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C 광고에 이런 문구가 있다. “나는 나쁜 남자 감별법을 알려주는 UCC를 알아요”. 나쁜 남자(혹은 여자) 매뉴얼이 있어서, 그런 사람을 피해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문제는 어떤 유형이 나쁜 남자인지 판단이 어렵고, 어차피 상처는 (상대방의 문제와 무관한 나의/사회의)해석이라는 데 있다.
고통과 저항에 대한 기존 패러다임을 전복하는 감동의 명화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에는 주인공이 사랑한 네댓 명의 남자가 나오는데, 하나같이 최악이다. 폭력과 알코올은 기본. 다른 남자랑 자게 하고 돈벌어 오라며 성매매를 강요하고 여자 앞에서 자살하고…. 극장에서 나오면서 이 중 누가 제일 나쁜 남자일까? 생각해보았다. A를 떠올리는 데 몇초도 걸리지 않았다. 이 남자는 지금 생각해도 열불이 나는데, 자기가 욕망하는 남자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위해 그 남자가 사용한 여자를 자기도 사용해본다. 하지만 A는 마츠코를 때리지 않고 ‘위자료’까지 준 유일한 남자. 반면, 가장 진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나쁜 남자의 선물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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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전, 이런저런 이유로 서울을 떠나 충청도의 어느 조그만 읍에 머무르게 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20대의 마지막 해를 보내야 했다. 가족도 친구도 없었다. 정말 심심했다. 100년 전에 누군가가 이미 썼던 글을 마치 내 글인 양 끼적이거나, 이따금 눈에 띄는 절지동물들을 학살하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어쩌다 한국어가 그리워지면 유일하게 전파가 잡히는 채널인 교육방송을 켜놓고는 강사가 하는 말을 따라했다. 그렇게 몇달 지나니 턱 양쪽에 딱딱한 멍울이 느껴지면서 귓불에는 털이 나기 시작했다. 보름달을 보면 가슴이 환희로 부풀었다. 나는 조금씩 늑대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친구들과 어울려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의 왕자님으로 군림하던 지난 시절은 아득해지고, 사람이 평소에 어떻게 살아가는지 또 다른 사람들과는 어떻게 지내는지조차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결국 인간세계를 관찰하기 위해 내가 택한 방식은 영화 관람이었다. 인근에는 영화관이 없었으므로 자연스럽게 비디오 대여점을
[내 인생의 영화] <유로파> 박형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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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저잣거리를 휩쓴 유행어 중 하나는 ‘깡패’였다. 옛 신문을 들춰보면, 대략 1957년 초부터 ‘깡패’라는 단어가 등장하는데, 아녀자 폭행은 물론이고 화물열차 탈취까지 일삼던 불량 ‘어깨’을 정부가 대대적으로 단속하면서, 덩달아 ‘깡패’라는 말도 시중에 널리 유포된 것으로 보인다. 몇 가지 어원이 있긴 하나 깡패는 대개 ‘갱(gang)+패(牌)’라는 이상야릇한 합성에서 유래됐다는 목소리가 가장 높다. 백주대낮에도 무리지어 거리를 쓸고 다니며 못된 ‘깡’을 부리던 이들의 극성 때문에 “왜 인상 긁어! 배때기에 철판 깔았니?”라는 뜯어볼수록 험악한 문장까지 입에 오르내렸다. 이 무렵 ‘깡패’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두를 다투던 유행어는 ‘공갈마’. 구라치고 완력 써야 입에 풀칠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사람이 꼬이고 돈이 몰리는 극장이라도 개관할라치면, ‘나와바리’ 확보를 위한 깡패들의 힘겨루기가 오프닝 세리머니처럼 열렸다. 1958년 서울시 종로구 관수동에 위치한 세기극장 개관
[한국영화 후면비사] 구라 못 치면 맷집으로 버텨야 했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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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사 일로 바쁜지 아놀드 슈워제네거가 <터미네이터> 4편에는 출연하지 않기로 했단다. 듣자하니 4편에서는 존 코너가 저항군을 이끌고 기계부대와 일전을 벌인단다. 근육질 배우가 빠진 영화의 미래가 적이 걱정되지만, 할리우드영화의 문법상 어차피 최후의 승리는 인간의 것으로 끝날 터이니 인류의 미래에 대해선 안심해도 될 것 같다. 영화 <터미네이터>에서 펼쳐지는 황량한 상황은 발터 베냐민이 쓴 그 유명한 논문의 추기를 연상시킨다. 거기에는 마리네티의 미래파 선언문이 인용되어 있다.
기계화와 가속화
“전쟁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전쟁은 방독면, 화염방사기와 소형탱크 등을 빌려 버림받은 기계에 대한 인간의 지배를 굳건히 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전쟁은 오래 꿈꾸어온 인간 육체의 금속화 과정의 시대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 전쟁은 아름답다. 왜냐하면 전쟁은 총탄의 포화와 대포의 폭음, 사격 뒤의 휴식, 향기와 썩는 냄새 등을 합해 교향곡을 만들기
[진중권의 이매진] 기계의 반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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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하면 적(敵)이 많아진다. 아니꼬운 시선으로 꼬나보거나 누가 더 센지 자웅을 겨뤄보려는 외부의 적뿐만 아니다. 세상에서 내가 제일 잘난 것처럼 느껴지는 자만심, 내가 아니면 누가 지구를 구하겠느냐는 식의 지나친 공명심은 내부의 적이다. 안팎의 적들이 덤빌 땐 어떻게 하면 되느냐고? 그야 쉽다. 맞서 싸우면 된다. 적과의 일전을 통해 그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재확인하고 자신을 한층 더 잘 알게 된다. 우리의 스파이더 맨, 피터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이토록 잘난 인간의 최측근, 즉 배우자나 연인의 심정은 어떨까. <스파이더맨 3>를 보면서 피터 때문이 아니라 메리 제인 때문에 가슴이 미어졌다. 기쁜 사랑을 할 때 여자의 얼굴빛은 환하게 피어나는 법이다. 꿈이 있어서 더 아름다운 여자 메리 제인. <스파이더맨 3>의 초·중반 피터가 스파이더 맨이 된 뒤 어쩌면 가장 즐겁고 화려한 시절을 구가할 동안, 그녀의 표정은 점점 생기를 잃고 눈가의 그늘은 깊어만
[냉정과 열정사이] 영웅의 애인은 외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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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인물을 영화의 주제로 삼을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무엇에 중심을 두어 어떻게 가지치기를 할 것인지를 확실히 인지하는 태도다. 그 태도가 있어야만, 사실을 허구로 완전히 각색할 때나, 역사를 새롭게 재해석할 때나, 사실이라고 믿어져온 것을 의심해볼 때나 영화의 설득력이 생긴다. 이건 역사적 인물을 다루면서 역사 대신 인물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비난과는 별개의 문제로, 감독은 거기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며, 무엇에 책임을 지고자 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피아 코폴라, 당신은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겁니까? 영화를 본 뒤, 상상해본 그녀의 세련된 대답은, ‘나는 역사적 강박에서 벗어나 십대 소녀인 마리 앙투아네트, 그녀만을 보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 한가운데 내던져졌던 인물에게서 그처럼 쉽게 역사를 지워버리는 권리가 감독에게 있는지의 의문을 제쳐두고서 그녀의 대답을 들여다보자. 영화는 ‘마리 앙투아네트’라는 여자를 얼마나 철저히 깊게 보고 있는가? 그러나 영화가 보고
[찬반논쟁] 남다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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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앙투아네트>의 중간쯤에 보면 오래간만에 동생 마리 앙투아네트를 만나러 프랑스에 온 요제프 2세가 동생의 방에 있는 과자를 먹는 장면이 있다. 한입 베어 문 그는 얼굴을 찡그리며 외친다. “도대체 넌 이런 걸 어떻게 먹니?”
그러게 말이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나오는 케이크들과 과자들은 결코 먹음직스럽지 않다. 그것들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핑크색이며 한입 삼켜도 슈거 러시로 머리가 핑 돌 정도로 달아 보인다. <마리 앙투아네트>를 보고 나온 관객 때문에 극장 주변 케이크 가게의 매출이 오르지 않았다는 건 거의 확신해도 된다.
<마리 앙투아네트>의 과자들은 어른들의 음식이 아니다. 당도에서부터 모양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아이들을 위한 것이다. 그건 다시 말해 영화 내내 이 케이크와 과자들을 꾸역꾸역 먹어대는 주인공 마리 앙투아네트가 결코 성인 수준의 정신연령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말도 된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찬반논쟁] 듀나, <마리 앙투아네트>를 지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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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배우 송혜교는 요즘, 촬영 때보다는 편안하지만 6월6일 영화 개봉을 앞두고 긴장과 걱정이 뒤섞인 채 있고, 두 번째로 경험해보는 영화 홍보 스케줄에 “이 직업이 노가다가 아닐까”를 자문 중이다. 표지 촬영과 인터뷰가 있던 5월15일 화요일 저녁, 송혜교는 세 군데 매체와 인터뷰를 치르고 온 터였으며 전날 월요일에도 타 매체 표지 촬영 및 인터뷰로 진을 뺀 뒤였다. 그러나 세상의 프로페셔널들은 심신의 피곤함을 핑계로 일에 소홀하지 않는다. <파랑주의보> 촬영현장에서부터 이어져 온 인연이라고, 스튜디오에 도착해서는 “어머,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 하고 활달한 인사를 건넨다. 낭랑한 친밀함에 기자는 가슴이 떨렸다.
영화계를 이제 막 알아가고 있는 프로페셔널 연기자 송혜교는 지금 자신의 두 번째 영화 <황진이>로 다소 무거운 부담들을 한꺼번에 떠안고 있다. 그중에는 본인의 의지와 전혀 무관한 것들도 있다. 어떤 고민들일까. 영화배우 송혜교를 둘러싼 세 가
세 가지 고민에 대처하는 혜교의 자세, <황진이>의 송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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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각본에서 자주 발견되는 특징이란 없을까? 이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놓은 책이라도 있으면 좋겠지만 그런 건 없다. 그 영화들을 한번에 관통하는 불변의 진리도 없다. 그러니 믿거나 말거나 식으로 10가지 지침을 임의로 작성해본다. 하지만 이 가설이 정석은 아닐지라도 참조는 될 만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초대한 각본가들의 영화를 통해 한번 들여다보자.
1. 새로운 영웅을 영접하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에는 영웅이 빠지는 일이 거의 없다. 프로프의 서사학과 조셉 캠벨의 신화학을 적절히 섞어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을 위한 실용적 안내서>라는 지침을 만든 뒤 할리우드 실세들에게 돌려 실제로 유행시킨 스토리 분석가 크리스토퍼 보글러는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라는 책에서 “모든 스토리는 신화, 민담, 꿈, 그리고 영화에서 보편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몇 가지 구조상의 공통요소로 구성되어 있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그것을 영웅의 여행이라 통
[할리우드 대작 시나리오 작가] 시나리오 쓰기 10가지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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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 포터> 시리즈의 스티브 클로브스
HeSTORY
<해리 포터> 전 시리즈를 각색(<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 제외)해온 스티브 클로브스에 대한 진실 하나. 그는 각색 제안을 받을 때까지 이 책의 존재조차 몰랐다. <해리 포터와 마법사의 돌>에 예견된 흥행 파워에 어울리지 않게도, 그는 지독하게 ‘안 팔리는’ 작가였다. 24살의 데뷔작으로 숀 펜, 니콜라스 케이지가 주연한 <젊음의 초상>(1984), 형제 피아니스트와 여가수의 기묘한 긴장감을 나른한 재즈 음악에 녹여낸 <사랑의 행로>(1989), 텍사스의 자판기 수리공과 아버지의 어긋난 관계를 그리스 비극의 형식에 담은 <악몽>(1993) 모두, 평단은 적당히 반응했고 대중은 철저히 외면했다. 이후 7년 동안 절필한 그는 처음 도전한 소설 <원더 보이즈> 각색으로 비로소 전환점을 맞는다. 젊은 나이에 성공을 맛본 뒤 매너리즘에 빠진 소설가
[할리우드 대작 시나리오 작가] 스티브 클로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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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덤 오브 헤븐> <디파티드>의 윌리엄 모나한
HeSTORY
윌리엄 모나한이 각본가로 크레딧을 올린 영화는 단 두편. 그중 한편은 12세기 예루살렘을 배경으로 포스트 9·11 시대를 은유한 기이한 역사활극 <킹덤 오브 헤븐>으로 개봉 당시 평단과 관객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했고, 아카데미 각색상과 골든글로브 각본상 등 10여개의 트로피를 안겨준 <디파티드>는 홍콩 누아르의 화려한 부활을 선포한 <무간도>를 리메이크한 결과물이다. 그의 독창성을 보여줄 만한 필모그래피는 아니라며 고개를 갸웃거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2007년 현재 모나한이 관여하고 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된’ 프로젝트는 <쥬라기 공원4>를 포함하여 모두 다섯개. 19세기 초 버버리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트리폴리>를 비롯하여 한때 스탠리 큐브릭의 차기작이었던 영화, 마르코 폴로의 전기영화, 요르단에서 활동하는 CIA 요원에 대한 리들리 스콧
[할리우드 대작 시나리오 작가] 윌리엄 모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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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렉> <캐리비안의 해적>시리즈의 테드 엘리엇과 테리 로시오
HeSTORY
디즈니랜드 근처에 살던 두 고등학생이 훗날 그곳의 놀이기구를 ‘원작’으로 세계적 히트 영화를 만들 줄 누가 알았으랴. 지금 할리우드에서 가장 잘 나가는 시나리오 콤비인 테드 엘리엇과 테리 로시오의 파트너십이 시작된 건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동네 뒷산에서 자칭 R등급(‘한심한’을 뜻하는 Ridiculous의 R) 영화를 찍으며 놀던 두 악동은 1978년 고교 졸업과 함께 프로 각본가의 꿈을 키운다. ‘어떤 일이든 10년만 버텨내면 그 분야의 최고가 된다’는 믿음 하나로 테니스 강사, 비디오 촬영기사 등의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각본을 쓴 두 사람은 판타지 코미디 <리틀몬스터>(1989)로 어렵사리 메이저 할리우드 스튜디오에 데뷔한다. 콤비의 재능이 꽃핀 것은 1992년 개봉한 <알라딘>부터다. 2001년 오스카 각본상 후보에 오른 <슈렉>과 2002
[할리우드 대작 시나리오 작가] 테드 엘리엇, 테리 로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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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시리즈, <배트맨 비긴즈>의 데이비드 S. 고이어
HeSTORY
데이비드 S. 고이어가 처음 썼던 각본은 90년에 나온 장 클로드 반담 주연의 <지옥의 반담>이다. 저예산인 건 둘째치고 그의 상상력과 어울리지 않았다. 고이어는 몇편을 지나 <크로우2: 천사의 도시>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그 다음 작품 <다크 시티>의 각본을 위해 연출자 알렉스 프로야스가 그를 데려가면서 진정한 발판을 얻었다. 말하자면 고이어의 출세작이 탄생한 셈이다. 좀더 확실하게 그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유명 작가 대열로 올려놓은 것은 <블레이드>다. 고이어는 3편까지 만들어진 <블레이드> 시리즈를 통해 프로듀서와 감독으로도 입지를 넓혀간다(하지만 각본가로만 쓸 만하다는 말이 심심치 않게 들린다). 고이어는 원작에 없던 블레이드의 스승 위슬러를 창조하여 영화에 넣었고, 그게 도리어 원작 시리즈에 반영되는 등의 영향력도 발휘했
[할리우드 대작 시나리오 작가] 데이빗 S. 고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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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레스트 검프> <인사이더> <굿 셰퍼드>의 에릭 로스
HeSTORY
30년 이상 경력의 1945년생 시나리오작가 에릭 로스의 전성기는 13년 전 <포레스트 검프>에서 시작됐다. 아카데미 각본상 수상 이후 기록적인 실패작 <포스트맨>과 로버트 레드퍼드와의 불화로 화제가 된 <호스 위스퍼러> 등을 거치면서 다소 위태로운 모습을 보였지만, 마이클 만(<인사이더> <알리>), 스티븐 스필버그(<뮌헨>) 등과 굵직한 이야기를 통해 호흡을 맞추면서 재기한다. <뮌헨>과 <인사이더>는 미국 내 각종 영화상 각본상에 후보로 오르기도 했다. 최근에는 그가 숱한 감독을 거치며 12년 동안 품고 다녔던 <굿 셰퍼드>가 개봉하면서 현대사의 첨예한 정치적 갈등을 주된 배경으로 하는, 혹은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 선 (제작비가 아니라 영화의 심리적 측면에 있어) 대작 전문
[할리우드 대작 시나리오 작가] 에릭 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