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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는 침대에 눕는 순간 살아 움직인다. 낮에는 몰랐던 시계의 초침 소리, 냉장고의 기계음들이 들리기 시작하고 온갖 잡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회상과 상상과 공상을 일삼는다. 뇌를 잠재우기 위해서는 주문을 외워야 한다. 자야 한다, 자야 한다, 자야 한다. 단편 <자야 한다>는 어느 날 이 주문을 외우게 된 한 여자의 번민이 뒤섞인 하룻밤을 묘사하는 영화다. 헤어진 남자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온 여자는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다. 그러나 심란한 마음을 다잡으려는 그녀에게 잠은 더한 고통이다. 남편과 싸우는 옆집 아줌마의 목소리는 옛 남자와 결혼한 신부의 조롱처럼 들리고, 윙윙거리며 울리는 냉장고 소리는 난데없이 화가지망생의 비루한 일상을 되새겨놓는다.
<자야 한다>가 묘사하는 잠은 자신의 시계과 다른 이의 시계를 맞추는 시간이다. 20대 후반의 주인공이 잠자리에서 겪는 고통은 곧 다른 이의 시간보다 늦게 흐르는 자신의 시간에 대한 비관이다. 그녀에게는 자기 또
[이달의 단편 14] 김주리 감독의 <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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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어떻게 영화와 만나는가? 극장에 가서 만나거나 TV나 비디오로 만나는 것이 일반적인 경험이겠으나 그것만으로 영화와 만났다고 하기는 석연치 않다. 스크린에 명멸하는 빛의 스펙트럼은 극장을 나서는 순간 꿈을 깨듯 잊혀지기 십상이고 한번 본 영화도 정확히 기억하기란 쉽지 않아서 볼 때마다 새로운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사람들이 흔히 영화를 보고 나서 타인과 얘기를 나누거나 글을 쓰는 것은 그처럼 짧게 스쳐가는 인상을 붙잡기 위해서일 것이다. 과연 방금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알고 싶다! 영화평론은 그래서 시작된 일일 것이다. ‘사진적 영상의 존재론’에 썼던 앙드레 바쟁의 표현을 빌리면 방부처리를 해서 미라로 만들어서라도 언젠가 혼이 찾아와 되살아나길 기원하는 것이다. 오늘날 영화평론이 철학, 심리학, 문화인류학 등 여러 갈래 학문과 교류를 맺으며 출발점을 알아보기 힘들게 변했다 해도 근본은 다르지 않다. 영화는 기록되고 연구되고 토론의 대상이 됨으로써 영
[편집장이 독자에게] 영화평론의 존재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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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8일 ~ OPEN RUN | 홍대 벨벳 바나나 클럽
“이 작품은 서두에 불과합니다!” 연극 <관객모독>은 일종의 선언으로 시작한다. 사실 이어지는 내용들이 모두 선언이다. 배우들이 빠르게 내뱉는 대사를 다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언뜻 들리는 한마디의 대사가 말해주듯 <관객모독>에는 “뭔가 부정하려는 의도”가 있다. “여러분이 일찍이 듣지도 못했던 걸 여기서 듣게 되리란 기대는 마십시오. 또 보지 못하던 걸 보게 되지도 않을 겁니다. 여러분이 극장에서 늘 보고 듣던 것들을 지금 여기선 보지도 듣지도 못할 겁니다.” <관객모독>은 말로는 관객을 모독하고 행동으로는 객석과 무대 사이의 벽을 희롱하면서 기존의 연극과 관객의 관람 태도를 부정한다.
지난 5월17일부터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양동근의 <관객모독>이 홍대에도 새로운 둥지를 마련했다. 동네 분위기에 걸맞게 홍대앞 버전의 무대는 소극장이 아닌 클럽이다. 관객은 클럽에 놀러온 듯 자유롭게
보지만 말고 즐겨~ 양동근 연출의 <관객모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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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 더글러스 에이브람스 지음, 랜덤하우스 펴냄
돈 주앙의 일기가 발견되었다. 스페인의 황금시대인 1593년 세비야에서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일기다. <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의 첫 대목, 저자인 더글러스 에이브람스의 이름으로 적힌 일종의 서문은 ‘진짜일까?’ 하는 호기심을 유발한다. 사실 돈 주앙이 실존 인물인지가 여전히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임을 감안하면 돈 주앙의 친필 일기 존재는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지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가 소설이라는 점이다. <돈 주앙의 잃어버린 일기>는 진짜일까 아닐까 궁금하게 만드는 도입부부터 팩션 특유의 호기심 자극에 능하다.
“여자의 욕망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죽지 않아.” 돈 주앙은 그런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남자다. 36살이 된 돈 주앙은 일기에 삶을 기록하는 목적을 분명히 밝히고 시작한다. 그는 열정의 기술과 여성의 성스
돈 주앙이 알려주는 작업의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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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 채널CGV 월요일 밤 12시
미국 드라마, ‘미드’가 우리나라 드라마와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몇년에 걸쳐 동일한 배우가 동일한 등장인물로 출연하는 이른바 ‘시즌’ 시스템이다. 1994년 시즌1을 시작으로 2004년 시즌10까지 무려 238편을 동일한 6명의 배우들이 만들어낸 시트콤 <프렌즈>는 미국식 시즌 시스템의 대표적인 예다. 2001년에 시작해 얼마 전 시즌6을 끝낸 <24>, 1998년부터 시작해 6개의 시즌으로 마무리한 <섹스 & 시티>, 1993년부터 9개 시즌을 방영하며 2002년에 종영한 <X파일> 등도 빼놓을 수 없는 장수 미드들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안녕, 프란체스카>, <논스톱>, <학교> 등이 시즌 제도를 흉내내긴 했지만, 제목만 같을 뿐 주연배우들 대부분 바뀌면서 일관된 흐름을 이어가진 못했다. 드라마를 사전에 제작해 방송하고 시즌이
[이철민의 미드나잇] 시청자 낚기의 진수는 바로 이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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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6월23일(토) 밤11시
<금발 소녀의 사랑>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1975), <아마데우스>(1984), <래리 플린트>(1996), <맨 온 더 문>(1998) 등으로 유명한 밀로스 포먼의 초기작에 속한다. 뒤의 작품들이 할리우드로 정치정 망명을 떠난 뒤 만들어졌다면, <금발 소녀의 사랑>은 체코 뉴웨이브의 대표작들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어느 노동자 소녀의 좌절된 로맨스라고 부를 만한데, 포먼은 여기에 1960년대 체코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을 간접적으로 엮어 넣는다. 체제에 대한 비판을 개인의 욕망과 결부지어 보여주는 포먼 특유의 방식은 이 초기작에서도 두드러진다.
금발머리 처녀 안둘라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그녀는 동료들과 무도회장을 찾고 남자들을 만나지만,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던 중, 안둘라는 젊은 피아니스트 밀다를 만나 하룻밤을 보내고 사랑에 빠진다
어느 노동자 소녀의 좌절된 로맨스, <금발 소녀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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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밤마다 활주로를 달리는 MBC ‘에어시티’호는 현재 높이 날진 못하고 있다.
이정재와 최지우라는 선남선녀가 왕림하고, 제작비도 제법 들여(60억여원) 스케일도 ‘빵빵하다’는 이 드라마는 입국 수속을 밟기 전만 해도 눈이 휘둥그레질 신세계로 안내해줄 것 같은 설렘을 안겼지만, 여행의 절정은 비행기를 타기 전까지라는 말처럼 이륙하자마자 픽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중반을 넘어선 현재 소수의 집중적인 열광과 다수의 관성적인 지지 어느 쪽에도 선명하게 자리를 매기지 못한 상태다.
이 드라마에 따르면 인천국제공항이라는 ‘에어시티’는 짐작보다 더 거대하고 살벌한 곳이다. 만남과 헤어짐, 일탈과 ‘다시 제자리로’가 교차하는, 인간사의 소소한 감성이 물결치는 ‘비행기역’이 아니라 국제 범죄조직이 드나드는, 그래서 나라의 안전을 위해 역사적 사명을 띤 공항과 국정원 요원들이 24시간 경계 태세를 늦출 수 없는 제2의 국경인 것이다. 그러나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서도 사랑은 꽃피
인천의 활주로는 넓게 비어 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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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이 모든 것을 블랙홀처럼 흡수해가는 시대다. 거대 포털들이 제공하는 정보의 범위와 양이 막강한 것도 사실이지만, 근본적으로는 ‘닫힌 검색’을 제공하는 시스템 탓에 말로는 웹 서핑을 한다면서도 사실상 특정 사이트의 울타리 밖을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하지만 조금만 눈을 돌리고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한다면, 포털의 폐쇄적인 세계 바깥에서 보석 같은 정보들을 제공해주는 사이트들은 무수히 많다. 그중에서도 한국 네티즌에게는 상대적으로 낯선, 영문 사이트 중 유용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꼽아봤다. 이미 전세계적인 지식창고로 자리잡은 위키피디아를 비롯해 미술, 음악, 스포츠 등 각 분야에서 알찬 지식을 제공하거나, 특이한 발상으로 흥미를 돋우는 사이트들, 즐겨찾기에 즉각 한 자리를 내주어도 아쉽지 않을 9곳의 인터넷 정거장을 향해 여행을 떠나보자.
INTELLIGENCE: 정보, 소식, 의견까지 꼬리를 무는 지식의 만물상
위키피디아 www.wikipedia.org (한국어판 h
클릭!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즐겨찾기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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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치볼 장면(위)은 전라남도 광양에 내려갔을 때 찍은 것이다. 저녁 먹기 전이었는데 현장에서 세팅하는 동안 대기하면서 (조)승우씨가 캐치볼을 했다. 최동훈 감독님은 뒤에서 심판이라도 보는 듯한 포즈로 휴대폰을 꺼내 찍는데 그 모양이 재밌었다. 그냥 시간 때우려고 저러는구나 싶을지 모르겠지만, <타짜>를 찍는 동안 최동훈 감독님은 배우와 캐릭터를 끊임없이 손안에 넣고서 혼합하며 즐기는 양반이라는 걸 깨달았다. 배우들 또한 나를 뽑아먹으면 뽑아먹어보라며 기꺼이 자신을 드러냈고. 아래 사진은 스탭들을 찍어 홈피에 올리기 좋아하는 김혜수씨가 DSLR로 최동훈 감독님을 찍는 장면. 감독님도 질세라 휴대폰을 꺼냈는데, 흡사 감독과 배우의 기싸움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숨은 스틸 찾기] <타짜> 장군 하면 멍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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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깃발> Flags of Our Fathers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Letters from Iwo Jima
새로운 전쟁영화가 없을 거라 생각했을 때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블랙 호크 다운>이 나왔다. 두 영화는 전쟁영화를 미적 차원에서 바라보게 만들었다. 그런데 거대한 스펙터클이 오감을 만족시킬수록 전쟁은 초현실적인 대상으로 바뀌었고, 뛰어난 영상미에 탄성이라도 지를라치면 괜히 죄의식을 느껴야 했다. <아버지의 깃발>에서도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일부 장면이 연상되기는 하지만, CG를 입힌 영상은 60년 전에 만들어진 <이오지마의 모래 언덕>의 전투장면보다 날것의 느낌이 오히려 덜한 게 사실이다. 그래서 전투장면을 통해 뭉클함을 얻고 싶은 사람에겐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어울리지 않는다. <아버지의 깃발>과 <이오지마에서 온
드디어! ‘이오지마 전투’의 두 영화를 함께 감상할 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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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고전영화를 주로 소개해온 시네마테크 부산에서 ‘동시대 유럽 거장전’이 6월21일부터 7월8일까지 개최된다. 영도(0°)에서 비등점까지, 미카엘 하네케에서 알렉스 데 라 이글레시아까지의 유럽 거장들이 품고 있는 ‘우리 시대’의 온도다. 이 압도적인 라인업에 실감이 안 날 수도 있다. 동시대 유럽 영화를 이끌어가는 대가들의 가슴 뛰는 작품들로 꽉 짜여져 있으니. 짭짤한 부산의 바닷바람 맞으며 볼 수 있는 이 특별전에는 따뜻한 지중해의 햇살이나 노천카페에서 마시는 감미로운 커피, 뭐 이런 유럽은 없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들로 구성되는 낯선 삶의 실존감과 무게감이 거친 화면을 통해 말 그대로 육박해올 뿐. 유럽의 거장들이 현실을 해부하는 시선은 그야말로 하드코어적이다. 카메라 앞에서 현실의 거칠고 적나라한 세부들은 숨김없이 노출되며, 그렇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외설적이다. 이 영화들에는 어떤 강요되는 윤리도 없다. 그것은 영화가 던지는 무거운 질문을 받고 돌아가는 관객에게 무책임하게 던
올리베이라부터 알랭 기로디까지, 동시대 유럽 거장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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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에이전트 CAA와 계약을 맺었고 파라마운트사와 새 영화도 준비 중이다. 이제 전업감독 해야지. 3년째 강의했던 학교 수업도 이번 학기를 마지막으로 끝낼 예정이다. 감독이 연출로 밥 먹을 수 있으면 선생 노릇 안 해도 되지 않겠나. (웃음)” <두번째 사랑>을 만드는 동안 김진아 감독은 몸이 몇개라도 부족할 만큼 바쁘게 살았다. 이 영화를 만드는 동안에도 하버드대학 영상예술학부 초빙교수로서 매 학기 두 과목씩을 가르치는 일은 계속해야 했다. 여름방학 동안 25회차로 촬영하고 학기 시작한 뒤로는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 강의하고, 목요일에 뉴욕으로 날아가 편집하고, 다시 주말에 보스턴으로 오는 살인적인 일정을 보냈다. 고된 땀이 빚어낸 결과물은 결이 고운 멜로드라마로 나왔다. 백인 여성이 두명의 한국계 남성 사이에서 자기의 욕망을 찾는 내용이다. 한·미 제작사의 실험적인 합작품이자 뉴욕 독립영화의 일면을 보여주는 영화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진아 감독 편에서 본다면, 1
사랑에서도 가장 중요한 건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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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1월 어떤 인터뷰에서 이누도 잇신 감독은 60년대 청춘의 이야기, 모녀의 이야기, 고양이를 기르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앞의 두 작품은 올해 4월과 5월 각각 <황색눈물>과 <비잔>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뒤의 고양이 이야기는 현재 <쿨쿨 자는 건 고양이랍니다>란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 동시에 세편을 구상하는 감독의 심보란 무엇일까. 시간적으로, 육체적으로 그게 가능할까. 하지만 이누도 감독은 2005년에도 <터치> <우리 개 이야기> <메종 드 히미코> 등 3편을 연출했고, 2004년과 2003년에는 각각 두편의 영화를 발표했다. 촘촘한 필모그래피를 채우는 풍부한 상상력과 넘치는 창작력? 하지만 이누도 감독은 의외로 너무도 싱거운 답변을 남긴다. “그냥 상황에 따라 되는 대로 찍고 있어요.”
실제로 그의 필모그래피는 촘촘함과 동시에 불균질하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
멈추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시간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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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 : 6월 18일 오후 2시
장소 : 롯데시네마 애비뉴엘
이 영화
주인공 사라는 친구들과 떠났던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자동차 사고로 남편과 딸을 잃는다. 그로부터 1년 후, 아직 상실의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사라를 위해 다섯명의 친구들이 애팔래치아 산맥의 동굴 탐험을 계획한다. 안내원 격인 친구 주노를 따라 지옥의 목구멍같은 동굴로 하강(Descent)한 일행. 그러나 모험의 즐거움은 금새 아스라진다. 동굴의 입구가 함몰되자 여섯명의 여자들은 무시무시한 어둠 속에 갇히게 되고, 어딘가에 있을 탈출구를 찾아헤메던 중 더욱 소름끼치는 공포가 시작된다. 오랫동안 동굴속에서 진화해온 인간형 육식동물들이 신선한 살코기를 찾아나선 것이다.
100자평
공포영화는 사실 단순한 것이다. 복잡하게 장치를 만든다고, 엽기적인 장면들을 나열한다고 섬뜩해지는 게 아니다. <디센트>는 아주 단순하게, 폐쇄 공간 속에 여성들을 몰아넣고, 외부의 괴물들을 이용하여 내부의 악몽을 자극
공포의 자이로드롭 <디센트> 첫 공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