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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리비안의 해적>. 전편들을 안 본 상태에서 3편을 보는 것은 피곤한 일. 그래도 3시간에 가까운 지루한 상영 시간 동안 눈뜨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간간이 나오는 인상적 장면들 덕분이었다. 물고기떼처럼 죽은 자들의 사체가 물의 표면 바로 아래로 미끄러지듯이 배 옆을 스치고, 죽은 자들의 보트가 저마다 등불을 밝히고 고요한 밤바다를 별밭으로 만들며 영원의 시간 속으로 흘러간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저주를 받아 영원히 바다를 방랑한다는 ‘플라잉 더치맨’의 모티브였다.
저주받은 뱃사람
죽은 자들이 배를 타고 물을 건너는 모티브는 튜턴족의 민담에 나온다. 게르만의 신화에도 죽은 영웅을 배에 태워 땅에 매장하거나 물결에 실어 바다 위로 띄워 보내는 관습이 언급된다. 어두운 바다 위에서 죽은 자가 탄 배를 만나면 기분이 어떨까? 뱃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던 유령선의 전설은 어쩌면 이와 관련이 있을지 모르겠다. ‘플라잉 더치맨’은 이렇게 전세계에 널리 퍼진 전설들 중 하나
[진중권의 이매진] 영원히 바다를 떠도는 망자의 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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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는 상관없는 시상식에 흥분했던 적이 두번 있다. 한번은 마틴 스코시즈가 <에비에이터>로 아카데미 감독상 후보에 올랐을 때고 다른 한번은 이번 칸영화제에서 전도연의 수상 소식이었다. 이유는 달랐다. 전자의 경우 <에비에이터>는 별로였지만 노친네가 하도 물 먹는 게 안쓰러워서 이번에는 탔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시상식을 지켜봤다. 이런 꼬라지를 본 옆의 선배는 “스코시즈가 평생 아카데미상 못 받아도 니 인생보다는 천배 나으니까 니 인생이나 챙겨”라고 일갈했다.
새벽에 잠까지 설치면서 전도연의 수상 소식을 확인했을 때 내 기분은 촌스럽지만 ‘정의는 승리한다’류의 만족감이었다. 누구 말마따나 전도연은 지난 10년간 가장 중요한 단 한명의 여배우이기 때문이다. 이번 수상이 그렇게나 흐뭇했던 걸 보면 그런 그녀가 톱클래스라고 불리는 다른 여배우들과 두루뭉술하게 엮이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있었던 것 같다. 전도연의 수상 소식을 듣고 떠오른 게 <해피엔드>의
[냉정과 열정 사이] 벗어야 할 때 벗는 그녀가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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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_ “일상적인 작은 행동도 긴장이 감돌게 연출했어요” vs 이동진_ “영화의 테크닉으로 웃음을 선사한다는게 놀랍죠”
좀비 콤비님(이동진 lifeisntcool@naver.com)이 입장하셨습니다.
뜨악한 녀석님(김혜리 vermeer@cine21.com)이 입장하셨습니다.
뜨악한 녀석님의 말(이하 녀석) : <뜨거운 녀석들>은 <새벽의 황당한 저주>를 만들었던 팀의 새 영화입니다. 과도하게 유능한 런던 경찰관이 미운털이 박혀 하품나는 시골로 발령받는데 그곳에서 예상 못한 사태를 맞아 대활약하는 이야기죠. 가만 보아하니, 에드거 라이트 감독 일당은 확실히 장르를 좀비로 만들어버리는 재주가 있는 것 같아요. ^0^ 이런 생각도 했어요. 영국은 ‘미지근한 녀석들’의 나라라고 자타가 공인하잖아요? ^^; 그런 배경에서 제리 브룩하이머식 장르영화를 하자면, 궁색하지만 이 길밖에 맞는 길이 없었겠다 싶더라고요.
좀비콤비님의 말(이하 좀비) : 에드거
[메신저토크] “<뜨거운 녀석들> 덕분에 오랜만에 웃어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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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니스는 일본 남자배우계의 보물창고다.” 일본의 영화감독 이누도 잇신의 표현처럼 일본의 대표적인 남자 아이돌 연예소속사 자니스사무소는 일본 남자배우계의 끊임없는 물줄기다. 팀 결성과 CD 데뷔 이전의 연습생이 활동하는 자니스주니어를 바탕으로 다양한 짝짓기로 여러 형태의 조합을 구성하는 스타 양성 과정은 자체가 하나의 탄탄한 시스템. 노래와 댄스가 주요 활동 분야지만 드라마와 영화, 연극까지 해내며 아이돌답지 않은 면모를 보여주는 아이돌도 꽤 많다. 1999년 결성돼 올해로 데뷔 9년째를 맞은 댄스그룹 아라시(嵐)도 아이돌의 영역을 조금씩 확장하고 있는 그룹. 2001년 11월부터는 자니스사무소에서 설립한 아라시의 개별 레이블 제이스톰 아래서 그들만의 노선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누도 잇신 감독이 연출한 영화 <황색눈물>은 <피칸☆치 LIFE IS HARD 하지만 HAPPY> <피칸☆☆치 LIFE IS HARD 그래서 HAPPY>에 이어 아라시의 멤
스크린을 강타하는 오색 폭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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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진_ “<시간을 달리는 소녀>는 순정이라는 말이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vs 김혜리_ “애니메이션인데도 ’연기’가 좋았어요”
이번주만 같다면 님(이동진 lifeisntcool@naver.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시간이 딸리는 소녀 님(김혜리 vermeer@cine21.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시간이 딸리는 소녀님(이하 딸리는)의 말: (-.-) (_*_)(-.-)(_*_) (*_*) 데구르르 콰당!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번주만 같다면 님(이하 같다면)의 말: 오늘, 사상 최강의 작명이십니다. 그려…. ^^
딸리는: (멍든 데를 만지며)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보자마자 떠오른 닉네임이에요. 그런데 눈물 콧물 훔치며 보는 통에 생각은 많이 못하고 봤네요. -_-
같다면: 앗, 울기까지? 어떤 장면이었나요?
딸리는: 주인공 마코토가 친구 치아키에 대한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고 지내다가, 그가 곁에서 사라질 거라는 사실을 깨닫
[메신저토크] 성장이란 결국 시간을 뛰어넘는 것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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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지 늑대인지 구별하기 힘든 어둠 직전의 시간을 프랑스 사람들은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건 오히려 자신의 존재를 투명하게 인식하는 짧은 시간이다”라고 감독 전수일은 밝힌 적이 있다. 프랑스인의 존재와 인식에 대한 격언이 한국으로 넘어와, 그것도 유년 시절 자신의 집을 찾아 종일 마을을 헤맨 뒤 결국 허탕을 치는 한 실향민 2세의 이야기로 넘어와 역사의 시간을 기억하는 애달픔이 되고야 만다. 술에 취한 주인공 남자는 술집 주인을 붙들고 엉뚱하게 묻는다. “아주머니, 제가 어디 살았는지 아세요?”
부산의 영화감독 상규(안길강)는 고향 속초에 사는 숙모가 6·25 때 헤어진 숙부를 찾으러 중국 옌지에 가는 데 동행이 되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여행길 고속버스 안에서 상규는 우연히 눈에 들어온 여자 영화(김선재)에게 관심이 쏠린다. 속초 민박집에서 영화를 다시 만난 상규는 잃어버린 동생을 찾으러 태백에 가는 중이라는 그녀의 여행을 따라 나선다. 거기서 그들을
쓸쓸한 여행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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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괴살인범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한 여자의 사투를 그린 공포스릴러물. 최고의 주가를 누리는 여성 톱모델이 어딘가로 납치되어 고통스런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탈출하려 애쓰나 번번이 실패하고, 옆방에 감금된 남자와 힘을 합쳐 또 탈출을 시도한다는 내용이다. 영화는 첫 시퀀스에서 침대에 사지가 묶인 채 서서히 피를 뽑히는 희생자와 이 죽어가는 희생자를 대망치로 내려찍는 감금자를 보여준다. 서막이 제공하는 자극적인 공포와 스릴은 이후 얼굴에 염산 붓기, 오장육부 믹서로 갈아 주스 만들기, 귀여운 강아지 쏴 죽이기 등 더욱 다양하게 불쾌하고 수위 높은 아이디어들로 90여분간 개휴를 반복한다. <4.4.4.>는 완벽한 감시·통제체계가 마련된 공간 안에서 감금자와 피랍자가 벌이는 게임이며, 플롯의 앞길은 쉽게 내다보인다. 영화가 재미없고 기분 나쁜 건 그러나 뻔한 플롯 때문이 아니다. 게임의 운영자인 감금자 캐릭터에 무작정 강도 높은 클리셰들만 주렁주렁 달아놓고 일관성과 의도라곤 찾아볼
매력없는 감금자와의 게임 <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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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그녀의 고양이> <별의 목소리>로 국내에도 두터운 팬층을 확보한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신작. 각본, 원화, 연출 등을 일임하는 1인 제작방식으로 파란을 일으킨 감독이 팀 작업으로 전환한 뒤 내놓은 두 번째 작품으로, 3개의 단편이 옴니버스로 구성되어 있다. 첫 에피소드 <벚꽃 이야기>는 전학으로 헤어지게 된 단짝 다카키와 아카리가 재회하기까지 과정을, 두 번째 에피소드 <코스모나우트>는 다카키를 짝사랑하는 카나에의 이야기를, 마지막 에피소드 <초속 5센티미터>는 성인이 된 다카키와 아카리의 후일담을 담는다.
세 단편을 아우르는 제목이기도 한 ‘초속 5센티미터’란 벚꽃이 떨어지는 속도를 의미하는데, 감독은 그 밖에도 일상을 구성하는 다양한 속도들을 대입해가며 사람과 사람의 마음이 맞닿는 지점에 관해 이야기한다. 티끌 하나 묻어나지 않을 것처럼 순수한 사랑, 헤어짐과 애절한 그리움. 전작들을 관통해온 테마는 <초속
마음이 맞닿는 지점 <초속 5센티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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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험사정원 전준오(황정민)는 새벽 2시30분 습관처럼 깨어난다.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려면 알코올이 필요하다.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못 견딜 것 같다”는 그의 악몽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 것이다. 소년 시절, 그는 동생의 자살을 눈앞에서 목격했고, 그 원인에 일조했다. 출근 첫날, “자살해도 보험금을 받을 수 있나요?”라는 희미한 목소리의 전화 목소리를 향해 그는 ‘절대로 상담자 개인의 정보를 이야기하거나 감정을 표현하지 말라’는 근무 매뉴얼을 어기고 만다. 설사 보험금을 받을 수 있더라도 자살을 해선 안 되는 이유를 고언하는 그의 간절한 태도는 슬픈 과거에서 탈출하려는 본능 같은 것이다. 살아가도 될 만한 인간의 그 무언가를 믿고 지원하지 않고서는 버틸 재간이 없다. 그 미덕을 노출하는 순간, 이건 지독한 약점이 되어 공포의 게임을 호명하게 되고 그 자리에 초대받는다. 사람을 구하기 위한 안전망인 보험이 사람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로 돌변하는 역설의 대결이 시작되는 것이다.
냉기가 흐르는 사이코패스 <검은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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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아 감독은 여성의 욕망에 천착한다. <김진아의 비디오 다이어리>와 <그 집 앞>에서 그녀의 화두는 침묵하는 여성의 욕망을 수면 위로 떠올려 형상화하는 일이었다. <두번째 사랑> 역시 그런 맥락에 있지만, 자기고백 색채가 짙었던 전작들에 비해, 정통멜로의 관습을 비교적 충실히 따라가며 차분히 극적 긴장을 쌓아올리는 작품이다.
가정이 불안정한 백인 중산층 유부녀(베라 파미가)와 생존이 불안정한 동양인 하층민 남자(하정우)의 사랑은 말하자면, 애초 사랑을 가로막는 모든 장벽들로 촘촘히 둘러싸인, 이미 비극적 결말을 내재한 것이다. 계급과 인종은 이 비극적 멜로의 씨앗이기는 하지만, 영화는 인물들의 힘으로 거둬낼 수 없는 그 장벽에서 이야기를 끌어내지는 않는다. 영화가 집중하는 것은 불가능한 사랑에 빠져드는 두 남녀의 심리적 변화와 겉잡을 수 없는 욕망 그 자체다. 그러나 영화는 인물들의 내면에 함께 동요하지 않고 시종일관 고요한 시선을 유지한다. 인
세련된 불륜 <두 번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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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영화 <스파이더 릴리>에서, 끝내 만나야만 할 운명의 연인은 샤오리(양승림)와 다케코(양락시)다. 섹스를 포함한 여성과 여성의 멜로드라마 <스파이더 릴리>는 성적 정체성을 한번도 화제로 테이블에 올리지 않는다. 레즈비언이라는 주인공들의 존재 조건은 보름밤 달처럼 거기 태연히 놓여 있다. 영화 표면에 드러난 이야기만 보면, 샤오리와 다케코가 이겨내야 하는 주요한 장애는 불행한 가족사,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죄책감과 열등감이다. 현실적인 관객이라면 넘겨짚을 수도 있다. 유년의 나쁜 추억에 대한 샤오리와 다케코의 고착은 어쩌면, 그들이 해결해야 할 한층 중대한 문제를 설정함으로써 섹슈얼리티를 상대적으로 가볍게 받아들이려는 자기 보호의 몸짓인지도 모른다고.
샤오리는 오랫동안 할머니와 단둘이 살아왔다. 그녀는 인터넷에 동영상 블로그를 만들어 성인용 사이트에 서비스한다. 밤마다 자신의 초라한 방에다 꾸민 예쁜 스튜디오에서 가발을 쓰고 춤추며 로그인한 사람들에게 명랑
레즈비언 로맨스 <스파이더 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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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라도 쿠엔틴 타란티노를 떠올릴 것이다. 두 번째 장편 <새벽의 황당한 저주>에 이어 <뜨거운 녀석들>을 내놓은 에드거 라이트는 <저수지의 개들>을 만든 뒤 <펄프 픽션>으로 곧바로 승천하던 무렵의 쿠엔틴 타란티노를 보는 듯하다. 두 감독은 모두 유희정신을 기본 동력으로 삼고, 대중문화 전반에 대한 잡다한 지식과 취향을 양 날개 삼아, 재기 넘치는 영화를 만들어왔다.
하지만 라이트가 타란티노의 아류인 것은 아니다. 그는 좀더 친근하고 유머러스하며 정치적이다. 길고 긴 재담을 늘어놓거나 이리저리 비틀어낸 구조의 묘미를 즐기는 것보다는 신과 신 사이의 연결 방식에 훨씬 더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타란티노의 영화가 점점 더 심플해지는 데 비해서 라이트의 영화는 점점 더 복잡해진다.
어느 날 갑자기 좌천되어 한가로운 시골 마을 샌포드로 가게 된 엘리트 경찰 니콜라스 엔젤(사이먼 페그). 대니 버터맨(닉 프로스트)과 콤비를 이룬 엔
파시즘에 맞서는 열혈 경찰 <뜨거운 녀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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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재는 잊혀진 이름이다. 1996, 97년만 해도 그녀는 주목받는 신인 여배우였다. 우는 것 같기도 하고 웃는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으로 <씨네21>의 표지를 장식했던 것도 이 무렵.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 등에 거푸 출연하며 백상예술대상, 영화평론가협회상 등을 받았던 그녀는 그러나 이후 결혼과 함께 배우 생활을 접었다. “한번은 큰딸이 예전에 <아름다운…> 비디오 재킷을 보고서 왜 딴 남자랑 누워 있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어요. 엄마 일할 때 찍은 거야, 하고 서둘러 궁색한 변명을 하긴 했는데….” <말아톤>에서 초원이의 담임선생님으로 잠깐 나온 것을 빼면, 지난 10년 동안 김지현 감독의 단편 <연애에 관하여>(2000)와 곧 개봉하는 전수일 감독의 <개와 늑대 사이의 시간>이 출연작의 전부다. “찍으면서도 개봉할 줄 몰랐어요. 감독님은 이 말 들으면 서운해하실지 모르지만.”
배우와 감독 사이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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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에게 웃어주는 남자는 위험하다. 훈훈한 외모의 소유자인 그가 섹스만 찾는 속물도 아니라면 그의 미소에서 함정을 의심해봐야 한다. 영화 <러브 & 트러블>의 잭스(브리트니 머피)는 자신의 직장에 새로 들어온 파올로를 그런 눈초리로 바라본다. 선한 외모와 균형잡힌 몸매는 그렇다고 쳐도 자신의 일에 충실하며 느끼하게 치근덕거리지도 않는 남자라니. 잭스는 자신의 이상형을 찾았다고 외치는 대신 아예 그를 게이로 단정짓는다. 물론 그녀의 어설픈 ‘게이다’는 이성애자치고 잘생기고 몸매 좋고 성격도 좋은 남자가 없다는 경험적 논리인 동시에 사랑에 빠지기 두려워하는 자신의 무의식이 작동한 결과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파올로를 연기한 산티아고 카브레라의 외모는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섬세한 눈빛에는 이해심이 가득하고 입가에 밴 미소는 경건한 느낌마저 자아낸다. 드라마 <히어로즈>에서 그가 손과 발을 붓으로 찔려 신음할 때 많은 시청자가 예수
모두에게 미소짓는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