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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시(蟲). 문자대로 해석하면 ‘벌레’인 그것은 <무시시>의 세계에서는 정령에 가까운, 초자연적인 존재다. 인간과 함께 살아왔으되, 특수한 능력을 가진 이들의 눈에만 보이는 무시는 때론 인간의 몸에 침입해 병을 낳거나 기이한 자연현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무시와 인간을 중재하며, 어긋난 흐름을 되잡는 역할을 하는 이가 바로 벌레 선생 ‘무시시’다. 독특한 세계관과 기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300여만부의 판매고를 올린 우루시바라 유키의 만화 <충사>는 국내에도 8권까지 출간되며 다수의 팬을 확보하고 있다.
<충사>를 실사영화로 옮긴 <무시시>는 <아키라> <스팀보이> 등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명성을 얻은 오토모 가쓰히로의 손에서 탄생했다. 에피소드를 하나씩 펼쳐가는 만화를 한편에 압축하면서 영화는 주인공 깅코(오다기리 조)의 사연에 초점을 맞췄다. 어린 시절 무시에 의해 기억을 잃고 무시시가 된 깅코가 자신의 과거를 깨
원작의 빛을 잃은 벌레들 <무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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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하지 아니한 바 아니었다. 고졸은 돼야 한다는 보스의 명령으로 시작한 <두사부일체>(2001)와 대학은 가야 한다는 보스의 명령으로 시작한 <투사부일체>(2005)에 이어, 이제 계두식(이성재)은 “FTA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는 보스의 명을 받고 대기업 입사를 준비한다. <상사부일체: 두사부일체3>의 배경은 전편들보다 더 큰 가능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가 대기업과 조폭사회를 그려내는 방식에는 별다른 차이점이 없는데, 사실 스무살 넘은 성인들에게 체육복을 입혀놓고 담력시험을 시키는 한국 대기업의 연수문화와 조폭들의 신고식이 뭐 그리 다를 게 있겠는가. 그래서 전편들이 사회의 모범집단인 학교와 비모범집단인 조폭의 문화적 충돌을 통해 유머를 생산하는 데 골몰했다면 <상사부일체…>는 ‘여기나 저기나 추접하고 유치하긴 마찬가지네?’라는 투다.
여하간 대기업에 당당히 입사한 계두식은 조직의 미래를 위해 기획실에 들어가 글로벌 경영
조폭영화는 산으로 간다 <상사부일체: 두사부일체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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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길 위에 내몰린 한 사이 나쁜 부부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근처의 모텔에 찾아가 날이 밝을 때까지 하룻밤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고속도로를 일부러 벗어난다, 차를 낯선 사람의 손에 맡긴다, 고장난 차를 버리고 음산한 모텔에 들어간다. 이 사이 나쁜 부부가 심야에 행하는 선택들은 하는 족족 최악의 선택이 되고, 그 하룻밤은 그들에게 불가피한 최악의 밤이 된다. 어쩔 수 없이 낯선 모텔에서 하룻밤을 함께 보내야 하지만 이들을 기다리는 것은 푹신하고 에로틱한 침대가 아니라 폭력과 외설을 예감케 하는 시선들이다. 그들은 객실에 놓인 녹화 테이프를 본 뒤 자신들이 곧 스너프 필름의 희생자가 될 것임을 알게 된다. 탈출을 시도해보려 하지만 그들의 모든 행동은 카메라를 통해 낱낱이 공개되고 있으며, 차도 없이 낯선 곳에서 탈출할 방법은 없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지하철과 지하세계를 적극 활용한 전작 <컨트롤>로 한정된 공간 사용법을 보여준 님로드 앤탈 감독은, <베이컨
피없는 폐쇄적 공포 <베이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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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중반의 여성 제이미(마거릿 모로)는 상품에 이름을 지어주는 네이밍 전문가다. 그는 활달한 성격과 귀여운 외모를 가졌지만 연애생활만큼은 절망적이다. 몇번 잠자리를 같이 한 뒤 전화기에 일방적인 이별 메시지를 남긴 채 떠나는 남자들에게 질려버린 제이미는 오랫동안 지속되는 진실한 사랑을 갈구하고 있다. 시낭송회를 찾았다가 자신의 교수이자 시인인 존(내빈 앤드루스)과 연인이 된 제이미는 TV쇼 진행자 믹(브라이언 F. 오번)에게도 호감을 갖게 되면서 삶의 희망적인 변환점을 맞는 듯 보인다. 하지만 우유부단한 존과 헤어지고, 믹과의 관계도 지지부진해지자 그는 다시 우울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 나이가 될 때까지 남자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한 제이미는 ‘깊은 사랑’을 맺을 수 있을까.
<이지 섹스, 이지 러브>는 현대(특히 미국)사회에서 사랑을 나눈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주는 영화다. 사랑에 곤란을 겪는 것은 비단 제이미뿐만이 아니다. 남편으로부터 배
사랑 나누기의 어려움 <이지 섹스, 이지 러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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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똥개> <태풍> 등 곽경택 감독의 두 글자 제목은 이번에도 여전하다. 그 스스로는 자신의 첫 번째 멜로영화라 한다지만 누가 봐도 <사랑> 역시 곽경택 스타일의 부산누아르영화다. 싸움을 통해 더욱 우정을 키워가는 짐승 같은 남자 고교생들, 부둣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프로’ 폭력배들간의 세 싸움, 그리고 돈 앞에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예의 등 <사랑>은 곽경택 감독의 과거로의 회귀를 보여준다. 이처럼 <태풍>(2005) 이후 절치부심한 그는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살려낼 수 있는 세계로 선회했다. 좀더 이야기를 펼치자면, 가장 가까이 연상되는 영화는 역시 곽경택 감독에게 가장 큰 영광을 안겨줬던 흥행작 <친구>(2001)다. <친구>에서 면회실의 칸막이를 앞에 두고 “왜 그랬는데?” “쪽팔리서”라고 대화를 주고받던 남자 친구들이, 이번에는 똑같은 상황에서 “사랑하나?”
곽경택 감독의 여전한 부산 누아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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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시간에 걸친 수다보다 기억에 남는 것은, 심금을 울리는 음악에 5분 동안 함께 귀기울였던 순간이 아닐까. 모든 예술을 통틀어 음악을 가장 위대한 예술로 꼽는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블록버스터의 땅 미국에서, 최강의 블록버스터 시즌을 나름의 방식으로 돌파한 인디영화 <원스>는 음악의 힘을 겸허히 인정하고, 이를 영화적으로 표현할 최선의 방법을 모색했다. 평단과 관객으로부터 고른 호응을 얻은 <원스>의 리뷰 중 상당수는 “이런 영화에 대한 첨언은 일종의 배신”이라며 영화 자체에 대한 말을 아낀다.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다. 사랑스러운 영화와 사랑스러운 음악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싶다면 일단 극장으로 향할 것이요, <원스>가 지닌 매력의 배경이 궁금하다면 114쪽 기획기사를 참고할 일이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도 꿈을 잊지 못해 날마다 더블린 번화가에서 거리의 악사를 자처하는 남자(글렌 한사드)는 자신을 버리고 런던으로 떠나간 옛 여자를
리얼리즘 뮤지컬영화 <원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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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추석은 한국영화의 대목으로 꼽힌다. 특히 올해는 4일 연휴라 극장가의 기대가 크고, 여름 동안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때문에 몸을 사렸던 탓에 추석 연휴를 노리고 개봉하는 한국영화가 많다. 추석시즌을 겨냥한 한국영화 가운데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벌써 ‘관객에게 드리는 글’을 내보내며 추석연휴까지 극장가에서 버티기 어려울 것 같다는 호소를 했다. 추석이 끝난 뒤 누가 웃고 울지 짐작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냥 묻어두기 아까운 영화가 한편 있어 얘기를 꺼낸다. 방송다큐로 소개됐던 실화를 소재로 만든 <마이파더>는 대단한 미학적 야심은 없지만 대중영화로서 눈여겨볼 미덕이 있는 작품이다. 영화를 보기 전 이야기만 들었을 때 <마이파더>는 기대할 게 별로 없는 영화 같았다. 입양아 애런 베이츠가 친부모를 만나고 싶어 한국에 왔다가 아버지를 만났는데, 흉악한 살인을 저지른 사형수였다는 실화에서 연상할 수 있는 게 뻔해 보였다. 사연은 기가 막히지만 결론
[편집장이 독자에게] 제임스 파커 혹은 애런 베이츠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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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고 싶은 말이 진짜 목구멍까지 찼거든?” “피곤하다, 피곤해!” 매섭게 오가던 연인들의 말다툼은 끝내 단호한 결별 선언으로 일단락을 맺는다. 그러나 이야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남자의 목구멍을 파고든 카메라는 얽힌 내장들 대신 방과 방을 오가며 기기묘묘한 이미지들을 펼쳐놓는다. 어항을 벗어난 물고기들이 허공을 유영하고, 여자의 다리 사이에서 호전적으로 이를 딱딱거리는 입이 돋아난다. 성적인 상징들로 충만한 잠재 의식의 터널을 빠져나오면, 관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현실의 섬뜩한 반전이다.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합성해 독특하고도 불편한 이미지를 선사한 <목구멍 속 금붕어>는 고창민씨와 마리 김씨, 두 사람의 합작품이다.
“서로 알게 된 건 올 5월이다. 같은 데서 강의를 하다가 MT를 갔는데 벌칙 파트너였다. (웃음)” 디자인정글아카데미의 강사로 각각 캐릭터애니메이션과 모션그래픽을 가르치던 마리 김씨와 고창민씨는 MT로 안면을 튼 뒤, ‘번개’로 친목을 다지고,
[이달의 단편 17] 고창민, 마리 김 감독의 <목구멍 속 금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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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지켜라!>의 유인원 출현장면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한 장면에서 따온 거다. 장준환 감독이 스탠리 큐브릭을 너무 좋아해서 만들어넣은 오마주이다 보니 영화에서는 잠깐 등장하는데도 불구하고 엄청난 공을 쏟았다. 신하균이 직접 연기하겠다고 나섰고, 변산반도에서 2박3일 로케이션을 했으며, 유인원 분장을 위해 무려 2천만원을 들였다. 인조가죽 소재의 유인원 분장은 신하균의 얼굴 치수까지 다 재서 만든 그야말로 ‘특수’ 분장이다. 눈 부위를 파서 신하균의 눈빛이 고스란히 나와야 한다고 해서 더 정성을 들였다. 지금 보면 뼛조각 내리치는 간단한 연기지만, 당시 감독과 배우 두 사람의 표정은 진지하기만 하다. 진지함으로 치면 장 감독이 우주선 안에서 실은 안드로메다 왕자인 백윤식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도 못지않다. 하긴 유인원이나 외계인과 통하려면 이 정도 진지함은 기본 아니겠나.”
[숨은 스틸 찾기] <지구를 지켜라!> 유인원, 외계인과의 은밀한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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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셋째주 주말은 조디 포스터의 <브레이브 원>이 극장가를 점령했다. 뉴욕의 한 라디오 기자가 센트럴 파크에서 집단 폭행 당한 후 한 사람씩 복수하는 내용으로, 2755개 스크린에서 개봉해 1401만달러의 개봉수익으로 정상에 올랐다. 2년에 한 번씩 주연한 영화를 개봉하는 포스터의 <브레이브 원>은 2002년 <패닉 룸>의 3천만달러, 2005년 <플라이트 플랜>의 2500만달러와 비교하면 주춤한 개봉성적을 보였으나, 여름 극장가의 몰아치기가 끝나고 10월 오스카 예비 경쟁작들의 레이스가 시작되기 전이라는 시기적인 특성을 감안하면 중간은 했다는 평이다. 닐 조던 감독이 연출한 <브레이브 원>의 관객은, 출구조사 결과, 55%가 여성관객이었으며 이중 75%가 30세 이상인 것으로 나타났다. 복수를 다루는 영화가 남성 관객에게 인기가 있는 데 반해, 주연 배우인 조디 포스터가 여성관객 그 중에서도 30세 이상의 연령층에게 소구했다는
조디 포스터의 <브레이브 원> 1위, <디 워>는 4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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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리서치 라이브러리(ARL: Animation Research Library)는 간판도 없이 미국 LA 주택가 어딘가에 숨어 있었다. 담쟁이덩굴로 둘러싸인 자그마한 건물의 외양은 무척 수수해 처음 온 사람이라면 평범한 가정집이려니 여기고 모르고 지나칠 것 같았다. ARL은 지난 80여년 동안 디즈니에서 제작한 40억점 이상의 애니메이션 자료를 보관·복원하는 곳. 디즈니 관계자는 ARL이 디즈니 본사도 아닌 외딴곳에 자리한 이유가 외려 “그 중요성”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건물은 월트 디즈니가 애니메이션 작업을 처음 시작한 1920년대 작품부터 <인어공주> <알라딘> 등 비교적 최근작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애니메이션의 원화와 스케치는 물론 <팀 버튼의 크리스마스 악몽> <라이온 킹> 등 애니메이션 캐릭터 모형을 비롯한 관련 자료를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었다. 그림 자료의 가치와 정보 유출의 위험을 고려해
[현지보고] 디즈니의 역사는 섭씨 12도에서 잠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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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태왕사신기>가 마침내 지난 9월10일, 브라운관 정벌에 나섰다. 3년 6개월의 제작기간, 약 500억원대의 제작비, <모래시계>의 김종학-송지나 콤비의 재결합, 여기에 1인 한류기업 배용준의 합류 등 <태왕사신기>는 그 위용부터가 남다른 작품이었다. 하지만 제작과정 중 <태왕사신기>는 배용준과 제작진간의 불화설, 표절 논란 등 숱한 소문에 시달렸다. “<디 워>도 많은 찬반양론이 있었는데, <태왕사신기>도 비슷한 논란이 있으리라 생각한다”는 김종학 PD의 말처럼, 한국 드라마 역사상 최고의 제작비를 들인 <태왕사신기>는 현재 몸값에 걸맞은 거대한 논란의 중심에 놓여 있는 상황이다.
<태왕사신기>는 고구려의 왕인 광개토대왕의 일대기를 멜로와 판타지를 접목시켜 그린 드라마다. 총 24부작에 불과하지만 <태왕사신기>가 다루는 시간의 양은 매우 방대하다. 건국신화 속 환웅이 광개토대
[쟁점] 광개토대왕의 정벌은 성공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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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권순분여사 납치사건> 할마시 국밥의 비밀
[정훈이 만화] <권순분여사 납치사건> 할마시 국밥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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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기독교영화제(SCFF)가 10월1일(월)부터 5일(금)까지 하이퍼텍 나다, 동숭교회, 대학로 문화공간 엘림홀에서 열린다. 2003년 ‘기독교, 영화를 만나다’라는 기치 아래 탄생해 올해로 5회를 맞이한 SCFF의 슬로건은 “보시니, 참 좋았다”로,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세상을 향한 긍정의 시선을 발견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가 담겨 있다. ‘기독교영화제’라는 이름으로 인해 거리감이나 위화감을 미리 앞세울 필요는 없다. 영화제의 목적을 선교 등의 종교적인 영역에 국한시키지 않겠다는 본연의 취지는 올해에도 여전하다. 사랑과 나눔이라는 기독교의 근본 정신 아래 경계를 넘나드는 다양한 작품들이 마련됐다.
개막작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18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노예무역 폐지에 앞장섰던 정치인 윌리엄 윌버포스의 생애를 그리는 작품이다. 당시 아프리카 노예의 노동력을 발판 삼아 경제를 유지하던 영국에는 국익을 이유로 노예무역의 비인간성에 눈을 감는 이들이 다수였다. 비웃음과
영화 속에 강같은 사랑 넘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