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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 10월13일(토) 밤 11시
서른으로 가는 길목, 스물아홉살의 여인들은 왜 그토록 불행한가? 아니, 스스로 기꺼이 불행을 껴안고 서른이 자신을 집어삼키는 순간을 상상하며 두려움에 떠는가? 일찍이 누군가는 서른에 이미 잔치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누군가는 심장이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 같다고 고백했고, 또 누군가는 9회말 투아웃이라고 외쳤다. 그뿐인가. 요즘처럼 책 안 읽는 시대에도 불티나게 팔리는 ‘여성자기계발 백서’는 여자 나이 스물아홉에서 서른을 인생의 전환기, 무언가 대대적인 변혁을 실행해야만 하는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이라고 재차 강조한다. 이러한 무서운 가르침 앞에서 언니들은 어이없게도 십대 소녀 시절을 향수하거나, 세상을 냉소하며 무력감에 빠지거나, 서른 이후에 모든 것을 걸며 미친 듯이 자기투자에 몰두한다. 아무튼 스물아홉 먹은 여인은 스물아홉 번째 해를 살지 않고 과거를 살거나 미래를 산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 모든 건 상술이다. 텔레비전과 책과 글들은 스물아홉
스물아홉의 성장통, <파니 핑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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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만과 편견> <센스, 센서빌리티> <설득> 등. 제인 오스틴의 여자들은 항상 돈과 사랑을 두고 겨룬다. 극성인 어머니와 예의와 이성에 따라 행동하려는 딸의 구도로 벌어지는 싸움이지만 이는 그 시대 여성들이 고민해야 하는 상반된 두 가지 요소를 반영한다. 가부장 중심적인 사회에서 좋은 가문과 결혼해 지극히 평범한 삶을 이어갈지, 자신의 감정과 사랑을 존중해 결혼의 상대자를 고를지. 간혹 ‘그래봤자 시집 잘 가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냐’는 비판이 있기도 하지만 이는 동시에 제인 오스틴의 여자들이기에 제기할 수 있는 문제다. 현실을 고민한다는 건 현실을 불편하게 느낀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결혼할 나이가 됐지만 남자보다 글쓰기에 관심이 더 많은 여자 제인 오스틴(앤 해서웨이)은 런던에서 온 법학도 톰 리프로이(제임스 맥어보이)와 사랑에 빠진다. 처음엔 자신의 글을 비판했던 리프로이에게 반감이 컸지만 그가 건넨 H. 필딩의 소설 <톰 존스>
제인 오스틴 되기의 어려움 <비커밍 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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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닉 우먼>
국내 미 방영
미국 <NBC> 수요일 밤 9시(동부 기준 시각)
추석 연휴 기간에 갑자기 생긴 출장 때문에 찾은 뉴욕은 새로운 시즌의 시작을 알리는 각종 미국 드라마의 옥외 광고들로 가득 차 있었다. 기존 방영되던 시리즈 중에서는 도시가 도시인 만큼 <CSI: 뉴욕>의 광고물들과 함께 첫 번째 시즌에서 대박을 건진 <히어로스>와 <덱스터>의 옥외광고물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특히 <덱스터>는 타임스스퀘어 한복판에 ‘미국이 가장 사랑하는 연쇄살인범’이라는 커다란 부제와 함께 피묻은 얼굴을 한 채 씨익 웃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내걸어 행인들의 시선을 잡아당기는 중이었다.
한편 새롭게 시즌을 시작하는 드라마의 광고들도 많았는데, 70년대 인기 시리즈인 <소머즈>(The Bionic Woman)의 리메이크로 기대를 한몸에 받은 <바이오닉 우먼>(Bionic Woman>)과
[이철민의 미드나잇] 소머즈는 부활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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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의 초고를 악보에 옮겨적는 과정을 뜻하는 제목의 영화 <카핑 베토벤>은 베토벤 교향곡 중 최고작이자 최후작인 <합창>이 만들어질 당시, 여류작곡가 지망생이 함께했다는 가정에서 출발한다. 외모는 물론 거동 하나하나까지 베토벤의 환생인 듯한 에드 해리스, 베토벤과 교감하는 총명한 여인으로 눈을 반짝이는 다이앤 크루거의 연기는 물론 발군이지만, <카핑 베토벤>의 가장 큰 감동은 뭐니뭐니해도 <합창>의 초연장면을 커다란 스크린이며 풍부한 사운드로 감상하는 순간에 있다. 여성예술가의 존재 자체가 불가능했던 지난 예술사에 대해 재기어린 반문을 던지는 아그네츠카 홀랜드(<유로파 유로파> <비밀의 화원>)의 복화술 또한 의미심장하다.
베토벤에게 매료되다 <카핑 베토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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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라 멀비가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라는 유명한 논문을 <스크린>이란 잡지에 발표한 것은 1975년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거의 30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사람들은 멀비라고 하면 우선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고 현재에도 계속해서 읽히고 있는 그 논문부터 자동적으로 떠올린다. 비록 그동안 멀비가 그 논문으로 계속 돌아와 수정하고 확장하는 작업을 했지만 한편으론 이것 또한 부당한 일로 여겨진다. <1초에 24번의 죽음>이란 멀비의 최근 저서는 이런 생각부터 떠올리게 된다. 이 책에서 우리는 굳이 ‘남성적 응시’에 대한 가혹한 이론 안에만 갇혀져 있지 않은 멀비, 그러면서 도발의 목소리보다는 성찰의 목소리를 내는 멀비를 보게 된다.
<1초에 24번의 죽음>이란 책은 우선 그 흥미진진한 제목부터 눈길이 가게 한다. 이것은 시네필이라면 대략 짐작하겠지만 장 뤽 고다르의 영화에서 가져온 것이다. <작은 병정>(1960)에서 고다르는 ‘영화란
지금, 영화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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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장 공관에 설치된 1000호 크기 소나무 작품,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유난히 아꼈던 화가라고 잘 알려진 강연균(65) 화백. 그는 45년째 수채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물로 그리는 수채화야말로 친환경적이고 과학적인 예술”이라고 말하는 그의 수채화 사랑은 유별나다. 그래서일까, 그림으로 전하고 싶은 메시지 역시 “가장 착한 것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을 이롭게 다투지 않고 뭇사람이 싫어하는 곳에 자리한다. 그러므로 도에 가깝다”라는 <노자도덕경>의 한 구절이라고 한다.
수채화는 미술을 처음 접하게 되는 첫 관문. 어릴 적 미술 수업을 통해 수채화를 그려보지 않은 사람은 한명도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림을 이해하고 친숙해지는 데 수채화만한 화법이 드물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나 편하게 수채화를 다룬다고 해서 수채화가 다른 미술 기법에 비해 훨씬 수월하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무궁무진한 응용기법을 가장 많이 지닌 것 또한 수채화일 것이다. 가령 수채화는 맑고
물빛으로 그린 가을의 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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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카 베인(조디 포스터)은, 세상에서 가장 안온하고 아름다운 도시 뉴욕을 예찬하는 라디오 DJ다. 또 그녀는 연인 데이비드(나빈 앤드루스)와 결혼을 앞둔 행복의 정점에 서 있다. <브레이브 원>의 첫 소절은 넘치게 감미로워, 참혹한 비극의 전조임을 대번 눈치챌 수 있다. 청첩장을 고르던 날, 에리카와 데이비드는 센트럴 파크로 산책을 나섰다가 불한당 패거리들에게 이유없이 습격당한다. 무자비한 구타는, 데이비드의 숨을 끊고 에리카의 육신을 짓이겨놓는다. 요즘 뉴욕의 치안 상태에서는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단지 기념하고 자랑하기 위해 범행을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하는 불량배들의 행태는, 이 영화가 요즘 이야기임을 강변한다. 3주간의 혼수상태에서 에리카가 깨어나면, 영화는 곧장 그녀의 주관에 밀착한다. 겨우 회복한 에리카가 거리로 나서면 카메라는 휘우뚱 기울고 음향은 거슬리게 과장된다. 그녀의 눈에 이제 모든 행인은 잠재적 야수다.
닐 조던 감독의 관심사는 애인 죽인
범죄와의 개인적인 전쟁 <브레이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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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만화] <인베이젼> 외계인들, 사막에 운집하다
[정훈이만화] <인베이젼> 외계인들, 사막에 운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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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가 왔다. 전편 <박치기!>에서 60년대 교토를 활보하던 조선의 젊은 주먹이자 재일 한국인인 안성(이사카 슌야)은 이제 교복을 벗고 성인이 되었으며 어린 아들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도쿄로 이주한 뒤 동분서주하며 살아가고 있다. 아내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다. 그 즈음 동생 경자(나카무라 유리)는 우연히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연예인의 길을 걷게 된다. 안성과 경자의 현재 이야기가 전개되는 사이, 그들의 회상을 통해 안성의 아버지 진성(송창의)이 어떻게 징병거부와 탈영을 거듭하다 고향땅 제주도를 떠나 일본에 정박하게 되었는지가 덧붙여진다.
<박치기! 러브&피스>는 전편과 많은 부분 다른 시도를 한다. 연출은 여전히 이즈쓰 가즈유키가 맡고 있지만 그 밖의 주요 역은 모두 다른 배우들로 교체되었다. 캐스팅의 여건을 제외하더라도 새로운 배역의 힘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어한 제작 의도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편에 비해 그리 성공
재일 한국인, 스스로의 이야기 <박치기! Love &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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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미술’이란 용어는 영국의 미술 행정가 존 윌렛이 1967년 <도시 속의 미술>(Art in a City)이란 책에서 처음으로 사용했다. 이 시기에 건축계에서는 예술가로서의 건축가가 아닌 사용자 중심(Action Planning)의 설계방법이 등장했고, 의료계에서도 의사 중심의 의료체계에서 환자 중심의 의료체계(People-centered medicine)로, 건축이나 미술, 의료계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장르에서 ‘공공성’이란 개념을 정의하기 시작했다. 당시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 공유되었던 공동체적 가치를 찾는 이러한 노력은 이후 유럽을 열정의 시대로 몰아넣었던 ‘68혁명’으로 표출된다.
당연히 존 윌렛의 ‘공공미술’은 전시장 안에 갇힌 미술품들을 바깥으로 끌어내려는 단순한 시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윌렛은 전시장 안의 미술과 전시장 밖의 미술을 철저하게 구분하며 ‘공공미술’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즉, 전시장 미술이 화상과 큐레이터, 컬렉터 등의 소수의 전문가들을 위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더 낮은 예술가, 더 넓은 공공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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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만한 사람들을 알테지만 <씨네21>에서 함께 발행하는 <넥스트 플러스>는 아트플러스 극장에서 개봉하는 영화들을 소개하는 잡지다. <씨네21> 기자 중 몇명이 이 잡지를 만드는 전담반으로 배치돼 맹활약(?)하는 중인데 올해 봄쯤이었나, 동기 기자에게 바통을 넘겨받은 내가 <넥스트 플러스>팀에 합류했다. 가장 큰 어려움은 1주에 한번씩 돌아오는 <씨네21> 마감에, 2주에 한번씩 돌아오는 <넥스트 플러스> 마감이 겹친다는 것. 게다가 ‘관객 IN 아트시네마’라는 작은 고정꼭지를 전담하고 있는 나로선 매번 극장가를 돌며 인터뷰이를 유치해야 하는 부담 역시 만만치 않다.
물론 이 꼭지의 취지 자체는 아주 훌륭하다. 씨네큐브, 미로스페이스, CQN명동, 스폰지하우스 중앙, 스폰지하우스 압구정 등. 각 극장들을 순회하면서 느끼는 것인데 작은 영화를 보려는 관객은 그리 많지 않다. 멀티플렉스와는 달리 상영관에 들어가려고 길게
[오픈칼럼] 관객 IN 아트시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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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만화의 5할을 영화에서 배웠다. 건담이 아니라 SF영화들을 보면서 SF만화를 생각했고 영화 연출책을 읽으며 만화의 연출을 연구했다. 결국 대학원도 영화쪽을 선택했고 짧은 시간이지만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학업은 일본에서 연재를 하면서 중단해야 했다). 영화는 내 만화의 5할이기 때문에 결국 내 인생의 5할이다.
그리고 그 영화에서 가장 많은 것을 중학 2학년 때 얻었다. 그해 초, 극장에서 <에이리언2>를 보고 돌아와선 그리던 만화를 폐기하고 처음부터 다시 그렸다. <영웅본색2> <프레데터> <로보캅> <다이하드>를 여름에서 겨울에 걸쳐 봤다. 그중 특히 <프레데터>가 나의 만화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전해에 소년들 사이에서 <영웅본색>의 캘린더(명함처럼 생긴)는 최고가를 달렸다. 그래서 나는 극장에 홀로 <영웅본색2>를 보러 갔다(데뷔하기 전까지 언제나 혼자 영화를
[내 인생의 영화] <프레데터> -만화가 박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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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락 안 받고 몰래 찍은 뒤 삼십육계 줄행랑치면 도둑촬영. 귀한 배우 스케줄 맞추느라 허겁지겁 오케이 부르면 날림촬영. 그렇다면 ‘조각보’ 촬영은 뭘까. 도대체 ‘조각보’가 무엇이기에,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 한국영화를 망치는 원흉이라고까지 지목됐을까. 1970년 11월3일에 열렸던 한국영화인협회 제7차 임시이사회. 긴급소집한 영화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위장합작영화를 충무로에서 몰아내야 한다면서, “한·홍 합작영화치고 위장합작 아닌 영화는 한편도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은 당시 극장 상영 중이던 <아빠는 플레이보이>(명보극장 개봉, 관객 수 2만3969명) 등을 지목하며, 몰지각한 영화 제작자들이 ‘야바우적 방법론’을 동원해 홍콩제 영화를 한·홍 합작영화로 둔갑시켰다고 비판했다. 이른바 ‘조각보 촬영’은 ‘야바우적 방법론’의 최신 기술. <아빠는 플레이보이>와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던 <2대 검왕>처럼 영화사에서 한국 배우(이자영)의 성을
[한국영화 후면비사] ‘짝퉁’ 영화 전성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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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지난해 이맘때, 누군가는 영화가 연애를 걸어온다며 행복하게 하소연했지만, 나는 망설이고 있었다. 습한 무더위와 영화 한편이 불러일으킨 소란과 정치와 종교의 파노라마를 애써 견뎠을 뿐인데, 여름은 어느덧 가버렸다. 공포영화보다 끔찍하고 액션영화보다 자극적인 온갖 사건들 틈에서 이상하게도 눈은 점점 더 무뎌지고 있었다. 불길한 징조. 추석을 겨냥해서 극장에 걸린 영화들을 흘낏 지나치면서 그 영화들과 대면하는 순간을 어떻게든 미뤄야겠다고 중얼거렸다. 그러나 어쩌다보니, 결국, 추석을 겨냥한 거의 모든 (한국)영화들을 보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가을의 첫 번째 다짐을 철회하며 여섯편의 영화를 떠돈 뒤, 2007년 후반기, 아니, 정확히 말해 <디 워>와 <화려한 휴가> 이후 한국영화의 몇 가지 흐름을 발견했다. 그 흐름을 읽어내는 일은 흥미로웠지만, 스크린 앞에 쓸쓸하게 앉아 있던 나는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매번 예의 바르게 사양하고 싶었던 이 가을
[영화읽기] 한국영화, 불길한 징조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