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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그러지 않습니다. 그들은 대개 자해하거나 자신의 아이 혹은 남자친구를 살해하지요.”
<브레이브 원>의 성실한 형사 머서는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명제를 남자의 전유물이라 여기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대사가 일반 명제로 성립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항의는 일단 접어두고, 백번 양보하여 이렇게 말해보자. 적어도 조디 포스터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녀들 중 한명’이 아니었다고. (우정출연으로 영어만큼 능숙한 불어 실력을 뽐낸 영화 <인게이지먼트>를 제외하면) 포스터의 최근작 네편은 모두 스릴러물이었다. 집을 침입한 사내들을 물리치고, 비행기에서 아이를 구해내고, 웬만한 거물들은 자신의 수족처럼 부리더니, <브레이브 원>에서는 복수를 위해 총을 들었다. 스릴러는 자신과 세상의 어둠을 마주할 수 있는 몇몇 여배우에게만 허락되는 장르다. 조디 포스터는 그중에서도 드물게, 비좁은 장르의 영역을 자신의 힘으로 넓혀왔다. <양들의 침묵
[조디 포스터] 무엇에도 지지 않을 용기있는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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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피에르 고랭의 표현을 빌자면 영화의 역사에는 두 종류의 영화가 존재한다. 그 하나는 ‘이디엄의 영화’로 이는 기존의 관습적 언어를 재구성해 테크닉을 활용, 삶의 갈등을 표현하고 감동을 만들어내는 영화다. 다른 한 편 ‘그래머의 영화’가 있다. 영화의 문법, 영화 언어의 문제를 고민하는 영화로 이는 어떻게 영화에서 새로운 창조적 언어가 가능할 것인지, 세계를 향한 이미지가 어떻게 창조될 수 있는지와 같은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영화다. 다소 이분법적으로 말하자면 영국의 영화감독 피터 그리너웨이의 작업방식은 후자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겠다.
영화의 문법을 사유하는 그리너웨이의 작업방식을 고려할 때 21세기에 그가 만들어낸 삼부작 <털시 루퍼의 여행가방>은 지극히 야심적인 작품으로 기록될 것이다. 차이는 있지만 고다르, 혹은 크리스 마르케처럼 그리너웨이는 그만의 방식으로 20세기의 문명사를 결산, 혹은 분류하고자 했다. 이 연작은 멀티미디어적인 기획으로, 가령 <털
<야경>으로 부산 찾은 피터 그리너웨이의 작품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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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천을 아느냐고 질문받으면 열에 아홉은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다시. 사진을 보여주고 이 사람을 짚으면 이제 그는 우리가 다 아는 배우가 된다. 체구는 이를 데 없이 왜소하고 눈은 좀 째졌고 목소리는 그다지 위엄있지 않으며 벗겨진 머리조차 풍족함의 상징과는 거리가 먼, 조촐한 인상의 이 사내. 그의 회고에 따르면 처음 그가 서른이 넘은 나이에 대책없이 연극판을 기웃거릴 때 연극계의 선배들은 “보장은 없지만…” 굳이 하겠다니 시켰고, “좀 하다 나가겠지” 하는 눈치를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보장된 세계를 찾아나서는 대신 무대에서 스크린으로 행동반경을 넓혔다. <서편제> 이후 스크린에서 김기천을 목격하는 일이 많아졌고 그때마다 그는 이내 나왔다 금방 사라지는 조역으로만 등장했지만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으며 잊기는 더 어려웠다. 그를 흠모하여 <주먹이 운다>와 <짝패>에 기용하기도 했던 류승완 감독은 “이상한 비애를 희극적인 방식으로
[김기천] 변죽으로 복판을 울리는 사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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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스(클라이브 오언)는 한 임신부가 총을 든 킬러에게 쫓기는 것을 보고 얼떨결에 거대한 사건에 휘말려들게 된다. 언제 어디서나 당근을 씹어대는 그는, 당근으로 상대방의 목을 관통하고 눈을 찌르는 등 기상천외한 액션을 펼치는 무뢰한이다. 그 임신부가 막 낳은 아이를 보호하게 된 그는 옛 연인이자 화류계의 여왕 퀸타나(모니카 벨루치)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급기야 두 사람은 또 다른 킬러 허츠(폴 지아매티)에게 함께 쫓기게 된다. 그러면서 스미스는 신생아들을 둘러싼 섬뜩한 음모가 정치권과 연루돼 있음을 알게 된다.
<거침없이 쏴라! 슛뎀업>은 그야말로 예측을 불허하는 액션영화다. 아니 때론 너무 어이가 없어서 예측하는 것조차 무의미하다. 당근을 이용한 과격한 액션은 물론, 아이를 등에 업고 쌍권총을 날려대는 등 과거 홍콩 누아르의 과잉된 총격전을 더욱 극단적으로 연출한 장면들의 연쇄는 말 그대로 거침이 없다. 정말 ‘말도 안 되는’ 현란한 액션들의 연속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거침없는 액션의 질주 <거침없이 쏴라! 슛뎀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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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인 오스틴은 우리의 새로운 셰익스피어처럼 보인다.” <워싱턴 포스트>는 ‘제인 오스틴: 러브스토리’라는 기사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정말로 “제인 오스틴 우주”라고 불러도 무리가 없을 세상에 살고 있다. 키라 나이틀리가 주연했고 조 라이트 감독이 연출한 영화, 콜린 퍼스가 크게 인기를 얻은 <BBC> 드라마에서 그치지 않고 발리우드판 영화로까지 이식된 소설 <오만과 편견>부터 <엠마> <이성과 감성> <설득> 등 오스틴의 소설들은 수차례 영상물로 완성돼 널리 사랑받았다. 줄리언 제럴드 감독의 <비커밍 제인>은 아예 제인 오스틴의 실제 삶을 스케치하려는 영화다. 존 스펜스의 전기 <비커밍 제인 오스틴>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에는 오스틴의 작품에서 참고한 듯한 장치나 인물들이 군데군데 등장하니, 이번 기회에 그녀의 삶에 대해 복습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1. 생애
1775년 영국 햄프셔에
[알고 봅시다] 여인들의 새로운 셰익스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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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리양 감독이 최근 폐막한 서울국제영화제에 맞춰 한국을 찾았다. 서울영화제에서 선보인 <맹산>은 인신매매범에게 속아 산골 마을에 신부로 팔려가 겁탈당한 뒤 갇혀 사는 한 여인이 자유를 향해 탈출을 벌이는 이야기를 그린다. 올해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상영돼 5분 이상의 기립박수 세례를 받았던 이 영화는 중국 광산에서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상황을 생생하게 묘사한 데뷔작 <맹정>(2003)의 연장선 위에 놓여 있다. 거듭되는 실패와 갖은 고초 속에서도 자유를 위해 산골을 탈출하고 또 탈출하려는 <맹산>의 여주인공은 마흔이 넘은 나이에 데뷔했지만 묵묵하게 “중국의 현실을 고발하고 최하층민들의 삶을 보여주는” 영화를 꾸준히 만들고 있는 리양 감독 자신인지도 모른다. 2003년 부산영화제와 올해 칸영화제에 이어 세 번째 만남을 갖게 된 것은 그런 궁금증을 시간의 여유를 가진 채 풀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칸영화제에서 만났을 당시 <맹
[리양] “순수했던 사람들의 인성이 변하는 모습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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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의 세계대전, 현대의 비합리성을 증명하는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 나치즘, 분단과 통일과 그로 인한 후유증까지 이어지는 냉전과 탈냉전의 상처…. 이 정도면 서구사회가 걸어온 근현대의 모든 그늘이 독일에 집중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다. 10월10일부터 14일까지 필름포럼에서 열리는 ‘독일 다큐멘터리 특별전: 과거를 바라보며’의 의도는 그 이름만큼 명확하다. 지구 반대편의 동시대 관객으로서는 교과서와 신문에서 간간이 접했던 그들의 육성을 들어볼 수 있는 기회이며, 그들 못지않게 파란만장한 현대사를 살아온 우리로서는 영화가 역사와 시대를 이야기하는 방법의 다양성과 가능성에 대한 성찰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주한독일문화원과 필름포럼 등이 공동 주최하는 이번 행사는 올해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같은 제목으로 상영된 특별전을 고스란히 옮겨온 결과물. 대부분 2000년 이후 만들어진 총 10편의 영화가 세개의 섹션으로 나뉘어 관객을 만난다. 각각의 섹션을 연대별로 살피자면, 나
독일 근현대사의 그늘을 마주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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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단침입> Breaking and Entering
영국영화협회 회장인 앤서니 밍겔라가 정작 영국이 배경인 영화를 거의 찍지 않았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밍겔라는 <무단침입>을 찍으면서 데뷔작 <유령과의 사랑> 이후 오랜만에 런던으로 돌아갔다. 게다가 직접 쓴 오리지널 각본으로 작업한 것 역시 데뷔작 이후 처음이었으니 여러모로 감회가 새로웠을 법하다. 이탈리아에서 이민 온 가족 출신인 밍겔라는 어렸을 때 힘들게 살았으나, 성공한 예술가의 삶을 사는 지금의 그에게 빈민가의 삶을 접할 기회는 드물다. 밍겔라는 다양한 언어와 민족과 계층이 혼재하는 바깥세상과는 상관없는 양 좁은 영역 안에 묻혀 사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뒤 고백하듯이 <무단침입>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살고 있는 곳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익숙한 행동반경 밖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한번 겪고 나면 그동안 무지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한 <무단침입
네 이웃과의 소통을 두려워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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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음
이프 유 원트님(이동진 lifeisntcool@naver.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음악남녀님(김혜리 vermeer@cine21.com)이 입장하셨습니다.
음악남녀님의 말(이하 음악): 오늘은 음악영화 <원스>와 곽경택 감독의 <사랑>을 이야기하고 <인베이젼>에 관한 소감을 덧붙이겠습니다. <원스>를 보고 나서 자꾸 머리에 맴도는 노래가 있어요. 양희은씨의 <옛날에 옛날에>라는 곡인데요. “옛날에 옛날에 사랑을 했는데 그 사랑이 사랑일까 내가 몰라 물었더니 사랑이 아니란다.” 이런 노랫말이죠.
이프 유 원트님의 말(이하 이프): “옛날 한 옛날에 얼간이 살았는데…”로 시작하는 노래는 생생히 떠오릅니다만. 제 대화명도 <원스>에서 받은 감동을 그대로 무릎 꿇고 올리는 오마주입니다. 여주인공이 밤거리에서 부르던 노래의 제목이죠. 영화 속 노래들이 다 좋지만 특히 그 곡이 그리도 가슴에 꽂히더이
[메신저토크] “두 사람의 절절한 소통을 눈 앞에서 목격하는 느낌을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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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장르를 넘나들며 V무비에서 메이저영화까지 가리지 않고 한해에 두세편의 영화를 만들어내는 미이케 다카시 감독의 <용이 간다>는 독특한 스타일의 영화다. 플레이스테이션2 성인용 게임 <용과 같이>( 龍が如く)를 영화화한 작품인데, 보통 게임에 기반을 둔 영화들이 매끄러운 스토리 전개로 게임의 단절적인 서사를 넘어서려는 태도를 보이는 반면에 미이케의 작품은 과장된 캐릭터와 개연성에는 크게 구애되지 않는 게임의 속성을 영화에 고스란히 끌고 들어왔다. ‘영화가 예술이 아니라 엔터테인먼트다’라며 감독의 자의식이 지나치게 드러난 영화는 ‘재미없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감독의 태도를 반영이라도 하듯이 이 영화는 재미를 위해 다소 황당무계한 에피소드들을 빠른 속도로 이어나간다.
스즈키 세이준의 <도쿄 유랑자>의 주인공이 다시 살아 돌아온 것 같은, 전설적인 야쿠자 키류 카즈마(기타무라 가즈키)가 10년간의 복역을 마치고 카무로쵸에 돌아오자마자 은행에 보관되어
‘싸나이’들의 액션 <용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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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마스크는 소품용으로 준비했던 게 아니다. 기념사진 한장 찍으려고 했더니 너무 밋밋하다며 봉태규씨가 <광식이 동생 광태>의 김현석 감독이 착용하고 있던 마스크에 먼저 입을 그려넣었다. 그렇게 주거니받거니. 감독은 배우의 입을, 배우는 감독의 입을 만드는 걸 보면서 감독은 카메라 뒤에서 배우의 입을 열게 하고, 또 배우는 스크린에서 감독 대신 입을 여는, 서로 공생의 관계임을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물론 감독과 배우 이전에 인간적인 통함이 깔려 있다면 공생은 더욱 쉬울 것이다. 봉태규씨는 촬영이 없어도 현장에 나와서 감독님의 말벗은 물론 PS2를 함께하는 등 내조를 톡톡히 했다.”
[숨은 스틸 찾기] 현석이 동생 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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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는 두개의 이야기로 직조된 공포 멜로다. 김민숙 감독이 맡은 첫 번째 부분에서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논개의 이야기가 재해석된다. 만약, 일본 장수를 껴안고 절벽에서 뛰어내렸던 논개의 시도가 실패로 끝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영화는 일본군에 연인을 잃고 복수를 다짐하던 한 여인이 그마저 실패한 뒤, 혼령이 되어 지상을 떠돈다는 설정으로 시작한다. 그녀의 한은 핏물이 되어 일본 장수 기무라 주변을 맴돌고 그는 점차 광기로 치닫는다. 감독이 밝힌 대로 영화는 역사적인 관점을 취하는 대신, 사랑을 둘러싼 인간의 내면을 심리적 공포를 통해 재현하는 데 공을 들인다. 특히 나비를 모티브로 사랑, 죽음, 광기 등의 관념을 형상화하는 영화의 미학은 눈여겨볼 만하다. 상상력 역시 기발하지만, 짧은 시간에 방대한 이야기를 끌어안다보니 종종 비약적인 전개가 거슬린다. <편지> <산책> 등을 연출했던 이정국 감독이 만든 두 번째 이야기는 과거에서 현재의 시점으
욕망이 빚어낸 공포 멜로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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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칙한 그림자가 온 지구면을 덮고 있는 요즘, 채털리 부인의 해피엔딩을 향해 데이비드 매킨지 감독의 <어사일럼>은 이렇게 묻는다. “욕망을 억압하는 신분사회로부터 ‘영원히’ 도망갈 수 있을까? 정신과 의사와 교도관들이 지배하는 ‘어사일럼’(정신병에 걸린 범죄자들의 수용소)의 ‘외부’라는 것이 있기나 한가?”
1950년대 영국 북부의 한 ‘어사일럼’. 정신과 의사인 남편(휴 보네빌)을 따라 아들 찰리와 함께 사택으로 이주해온 스텔라(나타샤 리처드슨)는 무료하기만 하다. 출세주의자에 질투심 가득한 남편은 일에만 몰두하고 다른 의사 부인들과의 친교는 의례적이기 때문이다. 어느 날 사택 정원을 가꾸던 에드가(마튼 크소카스)와 그녀의 눈이 마주치고, 둘은 걷잡을 수 없는 관계로 치닫는다. 줄거리의 앞부분은 감시의 눈길을 피해 둘이 벌이는 긴박감있는 옥외정사에 할애되고, 후반부는 연이은 두 남녀의 탈출과 탈출 이후의 여정에 할애된다.
고전이 된 <채털리 부인>의 도
채털리 부인의 해피엔딩 <어사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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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라드 장르로 편곡된 ‘영웅 판타지 칸타빌레’가 안방극장의 사극 메뉴를 감미롭게 물들이고 있다.
현재 MBC <태왕사신기>, MBC <이산> 등 제작진과 캐스팅의 솔깃한 크레딧으로 그 어느 때보다 배부른 사극의 풍년기를 장식하고 있는 주자들은 광개토대왕의 빛나는 정복사나 정조대왕의 개혁적인 리더십 같은 교과서식 밑줄긋기보다 일단은 영웅의 연인화(化)로 더 매혹의 광채를 반짝이고 있다.
<태왕사신기>의 배용준과 <이산>의 이서진은 도포자락으로 왕자 복근을 가리고 반갈래로 묶거나 단정하게 상투를 틀어올려 시점이 과거임을 증거하고 있지만, 그것만 털어내면 ‘타임머신’의 격차와 역사적인 실재성을 뛰어넘는다. 무엇보다 발성은 우렁차고 볼 일이라는 사극 남자주인공의 선 굵은 전형도 깼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젖은 눈빛으로 권위의 마초형 영웅이 고린내 나는 골동품임을 확인 사살한다. 태자, 혹은 세손 상태로 영웅의 병아리 시절을 관통 중인 이
말랑말랑 로맨스 대왕님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