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궁녀>는 지엄한 경고의 목소리로 시작한다. “궁녀로 궐에 들어오면 살아선 궁을 나가지 못한다”, “궁녀가 정절을 지키지 못하면 참형에 처한다”. 영화 속의 궁녀와 영화 밖의 관객에게 궁녀의 삶이 가진 비통함을 일러주는 이 목소리는 배우 김성령의 것이다. 1988년 미스코리아 진으로 당선된 뒤 영화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로 연기생활을 시작했지만, 그녀에게 <궁녀>는 자신의 두 번째 영화였던 <숲속의 방> 이후 15년 만의 영화계 복귀작이다. “정말 너무하지 않나? 왜들 그렇게 안 찾아주시던지… 내가 그 15년을 울면서 보냈다니까. (웃음)” 그녀의 말대로 극중에서 감찰상궁으로 분한 그녀의 연기는 지금껏 좋은 배우가 없다고 투덜거리던 한국 영화계가 얼마나 게을렀는지를 깨닫게 만든다. 궁녀들의 잘못을 단속하고 궁궐의 소란을 막는 한편, 그 자신도 권력에 기대려는 욕망을 품은 감찰상궁은 ‘쥐불이글려’라는 궁녀들만의 입단속 행사를 주관
[김성령] “어느 순간 나도 오기 같은 게 생기더라”
-
“그는 경이롭게 강한 동시에, 완벽하게 무력하다. 그가 눈을 열면, 그 영혼에 빨려들어갈 것만 같다.”(폴 해기스)
“그는 제임스 딘과 같다. 유연하고, 아름다운.”(존 싱글턴)
“그는 강하고, 육체적인 동시에 당신의 가슴을 섬세함으로 찢어놓을 수 있는 남자다.”(닐 조던)
그가 얼마나 대단한 남자인지는 몰라도 행복한 남자임에는 틀림이 없다. 적어도 최근 2년 동안 테렌스 하워드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달콤한 꿈을 꾸고 있는 남자였다. <크래쉬>와 <허슬 앤 플로우>. 두편의 영화로 돌풍처럼 들이닥친 스포트라이트는 그의 삶을 온통 장밋빛으로 바꾸어놓았다. 점심 식사 중에 조지 클루니가 다가와 “영화 잘 봤다”며 인사를 건네고, 언론은 “새로운 덴젤 워싱턴”에 앞다투어 헤드라인을 할애했다. 그리고 열기에 기름을 끼얹듯 조디 포스터가 다가왔다. “내가 지난해 본 최고의 영화 두편에 당신이 모두 나왔어요. <크래쉬>와 <허슬 앤 플로우>.
[테렌스 하워드] 너무 늦게 발견된 남자
-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의 마지막은 어떤 숭고미를 다룬다. 이 영화는 알려진 대로 소설가 최인호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으며, 70년대부터 명배우이자 감독이자 제작자로 활동하는 하명중이 연출이다. 작가 최호는 실버타운에 있는 자신의 처소를 뛰쳐나와, 뉴타운 개발이 진행 중인 구파발로 달려간다. 그의 돌발 행동을 이끄는 코드는 ‘알라뷰’라는 삐뚤삐뚤한 글자로, 곧 우리는 플래시백에 의해 최호의 유년기로 이끌려가는데, 거기에는 막내아들 최호가 개성댁으로 부르는 어머니(한혜숙)가 있다. 꼬마 최호는 귀엽고 다정한 소년이다. 병상의 아버지에게 신문 소설을 읽어주고, 발 마사지를 해준다. 글을 곧잘 읽는 이 소년은 나중에 어머니가 대문호가 될 최 작가라고 자랑스러워하는 젊은이로 성장한다. 소년 최호가 대학생으로 성장하면서 개성댁이라는 칭호는 이 여사로 바뀌는데, 어머니를 어머니로 부르지 않는 이런 별칭만큼이나 둘의 관계는 별다르다. 아버지에게 바쳤던 예의 서비스를 최호는 충실하게
어머니의 두 가지 유산
-
지난해 여름, <씨네21>은 <어깨너머의 연인> 촬영을 앞둔 이미연을 만난 적 있다(<씨네21> 557호). <중독> 이후 4년이라는 긴 시간의 공백이 궁금해서 마련한 자리였다. 하지만 당시 인터뷰 기사를 더듬어보면, 지난 침묵의 이유보다 앞으로의 대화에 대한 기대가 가득하다. 홍경표 촬영감독과 희수 역의 이태란을 직접 섭외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던” 에피소드를 보자. 이미연이 <어깨너머의 연인>에 대해 얼마만큼 애착을 갖고 있는지를 단박에 보여준다. “연애하면 결혼해야 한다”고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사고를 갖고 있다는 이미연은 “섹스는 단지 영양제일 뿐”이라고 여기는 정완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본인도 궁금했을 것이다. 하지만 개봉이 미뤄지면서 결과를 보기란 쉽지 않았다. “정확한 내막이야 모르죠. 일본에서 투자를 받은 작품이라서 그런가. 영화를 오래했어도 배급쪽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게 없어서….” 정완이라는 캐릭터를 벗은 지
[이미연] 언니가 돌아왔다
-
-
이 영화에 대한 세간의 평은,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입 닥치고 즐기기나 해”다. 맞는 말이다. 산문으로 이 영화가 주는 쾌감의 속도와 강도를 쫓아가려는 건 혹은 그것과 대결하려는 건 언감생심. 말해지는 순간 말은 백전백패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는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달콤한 패배인가. 혹은 부끄럼없는 패배인가. 질문의 각도를 바꾸면, 어떤 영화는 윤리적인 질문을 요구받고, 어떤 영화는 요구받지 않는가. 패배할 것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말해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유독 이 영화에 질문을 멈추는가.
1990년대 초반, 한국의 영화광들 사이에 화질 나쁜 복제 비디오테이프로 선댄스를 경악케 한 <저수지의 개들>(1992)이 은밀히 유통됐을 때 쿠엔틴 타란티노는 새로운 시대의 영웅적 전사였다. 인물들은 시체를 앞에 두고 낄낄거렸으며, 붉은 페인트는 프레임을 흘러 넘쳤다. 자유분방하고 수다스럽고 외설적이고 잔혹한 그의 영화는 죄의식과 계몽에 질식했으며 상상력과 취향
영화의 선정적 자질을 숨기는데 성공함으로써 윤리적으로 실패한 <데쓰 프루프>
-
중국은 2007년 400편이 넘는 장편영화를 제작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숫자는 단지 정부 영화부처에서 상영인가를 받은 영화들, 즉 극장 배급을 목적으로 한 합법적 영화들만을 센 것이다. 텔레비전용 영화와 HD영화, 무인가 영화들까지 포함한다면 제작편수는 적어도 1.5배는 더 많아질 것이다.
2001년 중국은 단지 71편의 인가 영화를 제작했다. 펑샤오강의 <거장의 장례식>, 장위안의 <사랑해>, 황지엔신의 <엄마는 갱년기>, 장양의 <지난날> 같은 인정받는 감독들이 만든 손꼽히는 영화들이 이때 나왔다.
낮은 제작수준에도 불구하고 이해는 새로운 세대의 흥미로운 감독들이 나온 주목할 만한 해였다. 카오바오핑의 <절대적 감정>, 리지시안의 <왕수선의 여름>, 루추안의 <사라진 총>, 멩치의 <눈오는 날>, 텡후아타오의 <100>, 장이바이의 <스프링 서브웨이> 등의 데뷔작이
[외신기자클럽] 대륙의 새로운 빛
-
소니 피디 150으로 찍었다고 한다. 필름을 버리고 HD로 달려가는 이즈음 데이비드 린치는 이제는 아마추어 수준의 디지털 동영상 카메라로 간주되는 카메라로 3시간짜리 영화를 촬영했다. 2006년 2년 반 정도의 제작기간을 가진 뒤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영됐고, 데이비드 린치는 DVD 배급도 자신이 독자적, 독창적으로 해보겠다고 이 영화의 제작을 맡았던 프랑스의 카날 플러스에 제안했다. 제작과 배급, 양자의 독보적 길을 찾는 중인 것이다. 나는 이 포스트 셀룰로이드 시대에 데이비드 린치가 럭셔리 HD가 아닌 소니 피디 150으로 겹겹으로 구성하고 다시 해체하는 이미지와 굉장한 사운드 디자인이 오케스트레이션 해내는 음향과 분노, 공포, 유머가 뒤섞인 소리의 세계 그리고 이 카메라가 거의 침투할 듯이 가깝게 근접해 로라 던의 ‘말처럼 길고 마른’ 얼굴을 와이드 앵글로 잡아내는 것에 넋을 잃었다. 3시간 동안 마음을 졸이며 난 이 예측 불가능한 영화가 주는 긴장을 즐겼다. 넋을 잃을 수밖에 없
<인랜드 엠파이어>를 통해 본 데이비드 린치의 디지털 영화 세계
-
인도필름연합(Film Federation of India)은 비두 비노드 쇼프라 감독의 영화 <에클라비아-더 로열 가드>를 오스카 최고 외국어영화상에 출품하기로 결정했다. 기존까지 인도 영화계는 그해 박스오피스 성적이 가장 좋은 영화를 오스카로 보냈었다. 하지만 필름연합의 올해 결정에 대해서 잡음이 끊이질 않고 있다. 쇼프라의 영화가 흥행 부진과 작품성의 빈약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는데도 오스카 출품작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이 그 이유다. 지난 3월에 개봉했던 이 영화는 인도 영화계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배우 아미타브 바흐찬을 비롯해 산자이 두트, 세이프 알리 칸 등 발리우드에서 좀처럼 한자리에 모이기 힘든 유명 배우들이 함께 출연해 화제를 모았지만 정작 흥행에서는 참패했다. 게다가 평론계마저 외면해 50억원의 제작비를 무색하게 만들며 3주 만에 간판을 내렸다. 인도의 유명 영화제작자인 파흘라즈 니할라니는 “이번 필름연합의 결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다”며
[델리] 오스카 가는 게, 상 타는 것보다 더 힘들어…
-
햇볕이 사라진 여름의 서울에서 세편의 한국영화를 보았고 세번의 <애국가>를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두번의 <애국가>와 한번의 <아리랑>이다. 두번은 극장 밖으로 거대하게 울려퍼졌고, 한번은 극장 밖에선 들을 수 없었다. 이상한 일은 이렇게 우렁찬 <애국가>가 막상 동포 20여명이 외국에서 인질로 억류돼 있는 현실의 사건을 둘러싸고는 울려퍼지지 않았으며 종종 그 반대로 냉혹한 비난이 그 인질들을 향해 가해졌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혼란스럽고 복잡하다. 이것은 다수의 감성적 애국주의와 소수의 합리주의의 대립만은 아닐 것이다. 제도/비제도, 다수/소수, 주류/비주류, 기성질서/하위문화를 둘러싸고 새로운 분화와 대립이 형성되는 와중에 <애국가>는 불려지거나 불려지지 않았다. 비평의 일을 포기한 채, 영화 속에서 울려퍼진 <애국가>를 듣고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렸다.
누가 진정한 애국자인가를 묻는 <애국가>
첫 &l
그 <애국가>들은 누구를 호명하는가
-
소니 그룹, 새 영화 레이블 런칭
소니그룹이 영화 제작 레이블 스테이지6를 런칭했다. 스테이지6는 1천만달러 이하 저예산영화를 연간 10~15편가량 배급하는 제작사로, 영화가 마무리되면 극장 개봉, TV 방영, DVD 출시 등 배급방법을 결정하는 시스템을 갖췄다. 현재, 스테이지6의 라인업에는 <스타쉽 트루퍼스2> <아트 오브 워2>, 공포영화 <베이컨시>의 전편 등이 올라 있으며, 발 킬머가 캐스팅된 <컨스피러시>, 배우 토머스 제인의 연출 데뷔작 <다크 컨트리> 등이 포진한 상태다. 배급 플랫폼에 대해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둔 새로운 제작 시스템에 관해 산업 내에서는 긍정적인 반응이 많으며, “스튜디오들의 진화 과정”으로 보고 있다.
TV시리즈 <공룡왕국> 영화화
추억의 외화 <공룡왕국>(Land of the Lost)이 스크린으로 모험의 무대를 넓힌다. 1994년 KBS를 통해 국내에도 방영된 TV
[해외단신] 소니 그룹, 새 영화 레이블 런칭 外
-
신종 B급 장르가 출현했다. 올해 미국에서 제작돼 DVD 시장으로 직행한 영화 <트랜스모퍼>. 외계에서 날아온 기계 악당들과 인간이 맞서 싸운다는 줄거리의 이 영화는 로봇 아가씨들과 사랑에 빠지는 미친 과학자, 싸구려 플라스틱 총으로 촬영한 총격신, 레즈비언들의 이야기를 담은 서브플롯 등을 포함하고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를 염두에 둔 것이며,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그것과 전혀 무관한 B급 오락영화다. 10월7일자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따르면 이 영화를 칭하는 장르명은 ‘목버스터’(mockbuster). ‘mock’(놀리다)과 ‘blockbuster’의 합성어다.
목버스터 <트랜스모퍼>를 제작한 곳은 ‘어사일럼’이라는 B급 호러 전문제작사. 이곳은 지난해 <다 빈치 보물> <스네이크 온 어 트레인> 등 또 다른 목버스터를 역시 DVD용으로 제작·판매해 짭짤한 수익을 거둔 바 있다.
[What's Up] 신종 B급 장르의 출몰
-
‘인도영화=발리우드’ 공식이 무너지고 있다. 12개가 넘는 공용어를 가진 인도에서 한 가지 언어로 만들어진 영화들이 산업 전체를 대표한다는 것 자체가 어폐다. <워싱턴포스트>는 10월8일 떠오르는 인도의 지방 영화산업을 ‘올리우드’(Ollywood)라는 이름으로 소개했다. 올리우드는 첸나이 지방을 일컫는 코담바캄의 ‘콜리우드’, 말라얄람어를 사용하는 케랄라 지방의 ‘말리우드’ 등 발리우드를 제외한 6개 지방의 영화산업을 통칭하는 말이다. 독특한 스타일의 발리우드영화가 해외에 먼저 알려지면서 인도영화를 대표하게 됐지만, 연간 제작편수 800편 중 발리우드영화는 200편 정도에 불과하다. 나머지 600편가량을 책임지는 올리우드는 지난 10년간 제작편수가 2배로 급증했고, 투입비용 대비 월등한 수익률을 보이며 르네상스를 맞았다.
최근 인도의 비평가들은 해외 대도시에서 부유한 생활을 만끽하는 NRI(Non-Resident Indians: 인도 외 지역 거주자)를 내세운 발리우
이젠 올리우드가 인도 대표 선수
-
아프가니스탄에 억류된 인질들, 남아시아의 이재민 문제가 염려스러운 습한 우기 속, 8월의 첫주다. 올해 한국영화에 대한 근심이 유난한 가운데 김지훈 감독의 <화려한 휴가>와 황규덕 감독의 <별빛 속으로>는 한편으로는 글로벌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양자간 협정인 FTA가 주도하려는 금융경제가 주조하는 세계 문화 속에서 한국영화의 자리를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작품들이다.
소박한 화법의 <화려한 휴가>
<화려한 휴가>의 역설은 두말할 필요없이 사실 화려하지 않다는 점이다. 100억원이 들긴 했지만 이 영화는 그 자본으로 분 치장을 보여줄 생각은 그다지 하지 않는다.
나도 많은 사람들처럼 이 영화의 소박한 어법에 마음을 둔다. 서울이 아닌 지역의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다양한 계층의 관객과 함께 평일 오후에 이 영화를 보았다. 혼자 극장에 가면 대부분 모서리 의자에 앉아 본다. 영화가 시작되자 어둠 속에 두명의 아주머니가 좌석을 찾지
그 시대를 기억한다는 것
-
이상한 일이다. 디지털의 시대가 도래하기 오래전부터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는 필름을 오늘날에야 디지털적이라고 부를 만한 무차별적인 상상력의 캔버스로 다루었다. 인간의 신체는 곤충과 몸을 섞고, 기계와 성교하며, 환각은 현실을 밀어내고, 가상은 실재와의 경계를 지웠다. 목적의식과 윤리에서 완전히 해방된 환각과 착란에의 미치광이 같은 탐닉, 기계 혹은 곤충으로 변형된 성기 혹은 항문의 형상에 대한 페티시즘과 혐오, 폭력과 섹스 그리고 죽음에의 매혹, 정액처럼 혹은 침처럼 흘러내리며 멈추지 않는 쓰기와 고쳐쓰기와 덧쓰기 그리고 저절로 쓰여지기의 끝없는 순환. 하나의 신 안에서조차 고정된 의미작용을 멈추고 내부에서부터 불안정화와 변형을 강박적으로 거듭하기. 크로넨버그에게 변치 않는 진실이 있다면 <네이키드 런치>의 서두에 잠언처럼 등장하는 하산 이븐 사바의 말일 것이다. “진실이라는 건 없다. 모든 것은 허용된다.”(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산 이븐 사바가 이슬람 테러리즘과 자살특공대의
폭력에 대한 인간의 욕망을 질문하는 영화 <폭력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