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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추신으로밖에 말하지 못할 만큼 용기가 없다. 세실리아 아헌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P.S 아이 러브 유>는 부끄럽다고, 귀찮다고, 티격태격하느라고 일상의 뒤편으로 미루어놓았던 말 ‘사랑해’가 세상 어떤 말보다도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영화다. 갑작스런 남편 제리(제라드 버틀러)의 죽음으로 혼자가 된 여자 홀리(힐러리 스왱크)는 슬픔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싸웠던 기억과 충분히 사랑하지 못한 후회 속에서 하루하루를 그저 흘려보낸다. 그러던 그녀에게 남편의 편지가 도착한다. 죽기 전 제리가 준비해두었던 이 편지들은 며칠에 한통씩 홀리에게 배달되는데 홀리는 이후 편지의 말들을 따라 1년의 세월을 산다. 남편과 함께한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사랑하고, 완성할 수 없는 그 사랑의 불완전함을 하소연하며 눈물 흘린다. 영화는 제리의 편지를 따라, 홀리의 후회를 따라 하염없이 과거와 현재를 오간다.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도 길어지면 서서히 짜증이 나는 법. <P
긴 러브레터 < P.S 아이 러브 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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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 졸업 뒤엔 대입이 있고, 대입 뒤엔 취업이 있고, 취업 뒤엔 결혼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당연한 듯 짊어지고 사는 삶의 굴레는 대개 한 모양이다. <꿀벌대소동>의 첫 시퀀스가 주는 생각은 엉뚱하게도 그런 것이다. 똑같은 옷들이 즐비한 옷장에서 옷을 고르고, 똑같이 생긴 친구들과 모여 졸업식을 치르자마자 일제히 한 기업에 취직해 평생 한 가지 일을 하고 산다는 게 <꿀벌대소동>이 묘사하는 모든 꿀벌의 운명. 배리(제리 세인펠드)는 그런 규격에 맞춘 듯한 삶을 원하지 않는다. 영화가 짚어주는 그들의 현실이 묘하게도 우리의 것을 강하게 환기해, 배리의 열망이 쉽게 이해된다.
바깥세상에 나간 배리는 꽃집을 운영하는 여자 바네사(르네 젤위거)와 친구가 된다. 꿀벌이 인간의 말을 하고, 사법제도 등 인간사회의 시스템에 무리없이 합류하며, 그 사실이 다시 사람들에게 별탈없이 수용된다는 이야기의 몇몇 전제는 일종의 엉뚱함으로 여길 수도 있지만, 인간이 양봉업으로
유재석의 더빙 연기 도전 <꿀벌대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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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 수도인 사라예보의 한 마을 그르바비차, 에스마(미르자나 카라노비크)는 12살 난 딸 사라(루나 미조빅)와 함께 살고 있다. 사라는 아버지가 보스니아 내전 당시 전사한 전쟁영웅으로 굳게 믿고 있다. 에스마는 하나뿐인 딸에게 먹이기 위해 주머니를 탈탈 털어 농어를 사고, 수학여행 경비 200유로를 마련해주기 위해 주변 여기저기에 손을 내민다. 시내 한 클럽의 웨이트리스로 고되게 일하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건 오직 사라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라는 전사자 가족의 경우 수학여행 경비가 면제된다는 사실을 알고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전사 증명서를 떼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에스마는 증명서 발급을 차일피일 미룬다. 화가 난 사라는 엄마에게 대들고, 이윽고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게 된다.
<그르바비차>는 두 모녀 사이에 숨겨진 비밀을 품고 시작하지만 사실 그것을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보스니아에서 나고 자란 야스밀라 즈바니치 감독은 단도직입적으로 세르비아군이 저
여성과 평화에 대한 영화의 진정성 <그르바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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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풀어 설명하면 이런 식이다. ‘1989년 12월22일 오후 12시8분, 당신은 시청 광장에 있었습니까?’ 질문의 함의는 다음과 같다. 김일성 정권을 모델삼아 27년간 루마니아를 지배했던 독재자 니콜라이 차우세스쿠에 반대하는 대규모 저항이 벌어졌고, 헬기를 통해 도주하려던 그의 모습이 생방송을 통해 전국에 방송되어 독재자의 몰락으로 기록된 그 시점. 혁명이 시작된 서쪽 국경지대에서 멀리 떨어진 루마니아의 작은 동부 도시에서 당신은 어떤 혁명을 겪었는가.(영화의 영어 제목은 ‘12시8분, 부카레스트의 동쪽’) 이건 무한 변주가 가능한 질문이다. 1980년 5월18일, 1987년 6월10일, 혹은 2002년 그 여름… 당신은 어디서 무엇을 했습니까. 사건 위주의 역사 기술이 범하는 숱한 오류가 시작된, 과정과 결과의 연속선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는 가능성과 위험요소를 쉽게 간과해버리는 그 질문. 단호하고 유머러스하게 하나의 질문을 파고드는 이 영화는 전세계의 모든 관객이 각자의 역사
동유럽식 유머의 힘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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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피에르 멜빌의 <그림자 군단>은 2차대전 때 프랑스에서 활약했던 레지스탕스 이야기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독립군을 그린 작품이라고 할까. 이런 유의 영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은 독일군이나 일본군에 잡혀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다. 적과 우리 편을 가르는 데 있어서 극악한 폭력은 단순하고 직접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그림자 군단>에서 심금을 울린 대목 가운데 하나는 그런 장면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독일군에 잡혀 의자에 묶인 인물이 등장하고 막 고문을 시작하려는 찰나 장면은 전환된다. 잠시 뒤 얼굴에 피멍이 든 인물을 볼 수 있지만 결코 고문행위는 직접 묘사되지 않는다. 반면 이 영화는 레지스탕스가 배신자를 처단하는 장면에서 카메라를 돌리지 않고 지켜본다. 독일군의 지배에서 프랑스를 구한다는 대의명분이 무색하게 이 장면에서 레지스탕스는 마피아 같은 폭력조직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들 역시 살인자인 것이다. 상식적인 선악 이분법을 무너뜨리는 이런 장면 연출은 중
[편집장이 독자에게] 무엇을 찍지 말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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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많고 탈 많은 여정 끝에 한나라당의 이명박 후보가 제17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지난 10년 동안 대한민국을 이끌어온 수장들과는 다른 기조를 지닌 터라 곳곳에서 변화의 바람을 전망하는 중이다. 매번 정치와는 거리를 두려하는 영화계도 변화의 시점에서 자유롭지는 않은 분위기다. ‘실용정부’를 표방하며 경제회복을 제1 과제로 내건 이명박 정권은 한국 영화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아직은 인수위원회도 꾸려지지 않았고, 아울러 발표된 구체적인 계획도 없다. 나도는 건 기대와 우려 혹은 무관심뿐이지만 그 안에서 이후 5년의 한국 영화계를 바라보는 밑그림을 살펴봤다.
“약속만 지켜준다면 발전적인 방향으로 갈 것이다.” 선거 전 각종 간담회와 토론회에서 이명박 당선자를 만났던 여러 영화인들은 “우려했던 것보다는 합리적인 지원정책이 펼쳐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지난 2007년 11월26일 열린 문화산업정책간담회에서 이명박 당선자와 문화정책에 관해 토론했던 이현승 영화진흥위원회 부위원
[쟁점] ‘실용’탄 장착한 MB기, 위기 날려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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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레이미 감독, 스릴러로 회귀하다
<스파이더 맨> 시리즈의 샘 레이미 감독이 다음 행보를 드러냈다. 형제인 이반 레이미와 함께 시나리오를 쓴 초현실스릴러 <나를 지옥으로 끌고가>를 2008년 초 연출하기로 한 것. <버라이어티>는 “<이블 데드> 시리즈와 <그루지> 시리즈를 만든 레이미가 가장 친숙한 장르로 회귀한다”고 전했다. 의지에 반해 초능력을 갖게 된 남자에 대한 이야기 <나를 지옥으로 끌고가>는 <저주>라는 이름으로 초고가 쓰여졌으며 폭력적이지 않으면서도 서늘한 분위기를 전달할 것이라고 알려졌다.
중국 내 할리우드영화 금지령 무너지나
중국의 할리우드영화 개봉 금지령이 무너질 조짐이다. 중국의 영화 수입을 주관하는 차이나필름그룹은 2008년 1월17일 <행복을 찾아서>를 150개 디지털 스크린에서 개봉할 계획이라고 밝혀, 2008년 5월까지 외화를 일체 개봉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한
[해외단신] 샘 레이미 감독, 스릴러로 회귀하다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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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이 할리우드 바람에 휩싸인 한해였다. 2007년 중국 박스오피스에서 할리우드영화가 벌어들인 수익이 전년도와 비교해 37.6% 증가했다고 12월21일자 <스크린 데일리>가 발표했다. 2007년 중국에서 개봉한 20편의 외화 중 최고의 수익을 올린 영화는 <트랜스포머>로, 총 3700만달러를 벌어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1998년 <타이타닉>이 세운 4천만달러의 기록에 이어 중국 박스오피스 사상 2번째로 높은 수치다. <트랜스포머>의 뒤를 이어 2위를 차지한 것은 <스파이더 맨3>로 2천만달러의 수익을, 3위는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으로 1900만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그 밖에 <캐리비안의 해적: 세상의 끝에서> <007 카지노 로얄> <박물관이 살아있다!> <닌자거북이 TMNT>가 각각 4, 5, 6, 7위를 차지한 것으로 집계됐다. 1위부터 4위까지 영화들이 올린
할리우드, 대륙을 장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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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의 영화계가 신음하고 있다. 지난 8개월 동안 자국 영화인들의 뜨거운 시위를 촉발시켰던 타이의 새로운 영화법이 2007년 12월21일 마침내 국회를 통과했다. 1930년에 제정된 기존의 영화법을 대체하게 될 ‘영화 및 비디오에 관한 법안’은 타이 최초의 영화 등급제를 골자로 하고 있다. 즉, 교육적인 목적을 가진 영화는 P, 전체 관람가 영화는 G, 그리고 13세, 15세, 20세 이하 관람 불가로 상영 등급이 나뉘게 되는 것. 문제는 이러한 등급제가 타이 정부의 영화 검열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등급 심의 과정에서 “사회의 질서와 도덕성을 어지럽히거나 국가의 안보와 자존심에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되는” 작품들은 상영이 금지된다는 것. 더불어 영화 심의 과정에 정부 관계자들은 물론 경찰청장이 심의위원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펜엑 라타나루앙, 위시트 사사나티앙 등 간판급 감독들을 포함한 타이의 영화인들과 예술가들은 법안이 상정될 때부
[what’s up] 창작의 자유를 막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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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가협회에 이어 <뉴욕타임스> <타임> <시카고 선타임스> 등 미 언론에서 활동하는 주요 평론가들도 2007년 최고의 영화 목록을 공개했다.
<시카고 선타임스>의 로저 에버트가 꼽은 올해 최고의 영화는 <주노>. 실수로 임신한 십대 소녀를 다룬 코미디다. 로저 에버트는 “진지한 영화들이 넘쳐났던 올해 이 가슴 따뜻한 코미디를 꼽은 이유”에 대해 “진정 위대한 코미디영화이자 지혜롭고, 날쌔며, 매력적이고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정말, 정말, 정말 재미있다”고 극찬했다. 2위는 <노 컨트리 포 올드멘>, 3위는 시드니 루멧의 스릴러 <데빌>(원제 <Before the Devil Knows You’re Dead>)이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먼과 에단 호크가 주연한 이 영화는 부모의 보석점을 털이하는 두 형제 이야기. 이어 에버트는 <어톤먼트>, 할레드 호세이니 소설을 원작으로 한 마크 포스터의
평론가가 선택한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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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지금 공사 중이다. 무엇을 복원하는 공사와 무엇을 새롭게 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구조선총독부 건물이 헐려나가는 것을 시작으로 경복궁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고, 청계천 고가도로가 해체되었다. 그와 맞물려 세운상가 재개발이 발표되었고, 서울시청의 신축안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광화문 광장 계획안이 시민들에게 공개되었다. 사실 서울이 이렇게 공사판이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하철 공사로 끊임없이 땅을 파헤쳤고, 그전에는 (지금도 여전하지만) 아파트 공사에 도로공사, 거기다 보수공사까지 서울은 개발의 몸살을 앓아왔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서울의 상황만은 아니었다. 전국이 그랬다. 그런데 90년대 이후 벌어지는 서울시의 건축사업은 그 이전과는 사뭇 다르다. 90년대 이전에는 경제논리에 치우친 개발사업이 주였다면 90년대 들어와서는 주로 복원 사업이 가장 주요한 이슈가 되어왔다.
구조선총독부 철거는 역사 복원사업이었고, 경복궁 복원 역시 문화·역사 복원사업이었다. 그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서울은 지금 복원공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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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끼야-. 저 남자는 어쩜 저렇게 아티스틱하면서도 지적일까. 분명 어지간해선 화도 안 내고 자상한데다가 환경주의자에다 페미니스트일 거야! 너무 멋져, 너무 멋져, 너무 멋져x100!!”
얼마 전 <팝툰>의 만화 <플리즈, 플리즈 미>를 보다가 푸핫 웃어버렸는데 이런 장면이었다. 주인공 구애리가 클럽에서 미남 DJ를 바라보며 맘속으로 째져라 비명을 지른다. 구애리가 이 남자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석사논문 준비하느라 앨범 작업이 늦어지고 있어요”라는 멘트 한마디와 그의 스위트한 외모뿐이지만 구애리의 상상적 기대는 그 몇 조각 단서를 이어붙여 이 남자를 고학력 중도진보 성향 여성의 판타지로 만든다. 만약 구애리가 이 DJ와 계속 이어졌다면 그녀는 상상 속의 그의 이미지에 부합하는 사실만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사실은 ‘자체 필터링’했을 것이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지부조화’ 현상의 일종인데, 사소한 대목이었지만 공감이 번뜩이는 이야기였다(아무튼 구애리는 이
[오픈칼럼] 애정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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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여섯달 동안 미친 듯이 사랑했다. 두어개 계절을 품에 안고 지냈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녀의 넘치는 사랑에 그는 행복해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전광석화와 같은 이별통보를 받고 왜? 왜? 왜? 를 외치며 괴로워한다. 또 같이 걷던 거리, 같이 먹던 식당, 같이 이야기하던 조그만 포장마차, 오로지 자신의 영역이었던 공간에 침범한 그녀의 기억들에, 너는 그랬니 나는 그랬어라며 나를 보여주고 너를 알아가던 소중한 그놈의 기억들로 괴로워한다. 축약하자면 남자는 추억과 의문으로 괴롭다.
남자는 기억 때문에도 괴롭지만 이별통보 하루 전까지 사랑을 쏟아내던 그녀가 왜 갑자기 이별통보를 했을까에 대한 의문이 풀리지 앉는다. 의문은 점점 커져 남자의 뇌를 터뜨릴 것 같다. 하루 전 간단한 통화에서도 이별의 징조는 없었다. 아니 있었던가.
“나는 노란 튤립을 좋아해.” 통화 중에 남자는 말했다. “어… 정말… 노란 튤립을 좋아해? 나는 너무 싫어하
[내 인생의 영화] <라탈랑트> -김종관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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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보러 남산 가세.” 1969년 7월21일. ‘가슴을 죄는 TV 시청’을 위해 남산 야외음악당에는 무려 10만명의 서울시민이 운집했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을 두눈으로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낙도와 산골 사람들도 “TV를 보겠다”고 도시로 향했고, 심지어 “텔레비전 구경을 위해 관광객을 싣고 가던 버스가 전복되는 사고가 벌어지기도 했다”. ‘인간이 달을 걷고 돌아오는’ 그 역사의 순간을 두눈으로 확인하기 위한 열망 때문에 거리와 극장은 텅텅 비었다. 경찰과 신문사는 달 착륙 문의전화로 마비상태였다. 닐 암스트롱이 세기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양복점, 주점, 다과점, 음식점 등은 ‘아폴로’로 상호를 바꿨다. 심지어 “보행을 뜻하는” ‘11호 자가용’이라는 유행어까지 나돌았다.
“지금으로부터 천년 후의 영화란? 전쟁도 영화로 하고, 연애도 영화로 한다. 그뿐인가. 정사까지 영화를 이용해서 수정하는 천년 후의 남과 여를 픽션으로 구경해보자.” 1970년 3월 <영화잡지>에
[한국영화 후면비사] 천년 후엔 사랑도 죽음도 스크린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