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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붙박이로 카메라를 들고 있다보면, 남들은 모르는 배우들의 습관이나 버릇을 훔쳐볼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국경의 남쪽> 때는 차승원씨가 지루할 때면 손톱을 문다는 것과 굉장한 애연가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위 사진의 탈북장면 같은 경우에 차승원씨는 계속 다른 배우들과 함께 차 안에 있어야 했던 터라 테이크 중간에 짬이 나도 담배를 피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본인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반면 스탭들은 담배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으니 얼마나 흡연 욕구가 간절했을까. 애연가라면 누구나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거다. 결국 뒷문 열고 욕구 해결하는 차승원씨를 보게 됐는데, 탈북 앞두고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극중 선호의 심정이 전해졌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숨은 스틸 찾기] <국경의 남쪽> 어느 애연가의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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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상자료원이 중국전영자료관에서 발굴, 수집한 1930, 40년대 극영화들은 기록으로만 존재했던 역사를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는 기회다. 그간 부산국제영화제 등을 통해 공개된 여러 작품 중 네편이 <발굴된 과거>라는 이름의 DVD 박스 세트로 선보인다. 네 영화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말기에 만들어진 것들인데, 당시는 1940년 1월에 조선총독부가 조선영화령을 공포하고 조선영화인협회가 설립된 데 이어 1942년 9월에 조선영화주식회사가 발족할 때다. 영화인들의 생존권이 박탈당하고 기존 영화사의 재산이 모조리 빼앗긴 ‘신체제’하에서 조선영화는 일본의 전쟁수행을 위한 선전도구로 전락했다. 1930년 전후 조선영화의 민족저항주의나 ‘카프’가 강령으로 내건 ‘무기로서의 예술’ 같은 에너지라곤 찾을 길이 없는 네편 영화를 대하는 마음이 씁쓸할 수밖에 없다. 최인규의 1941년작 <집 없는 천사>는 거리 부랑아들의 생생한 삶과 그 아이들을 돌보는 남자의 가상한 노력을
슬픈 웰메이드, <발굴된 과거: 일제시기 극영화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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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활동 중인 감독 중 데카당스 미학의 계승자를 꼽으라면 단연 알렉산더 소쿠로프가 돋보인다. 죽은 비스콘티가 부활한 듯 그는 퇴폐적이고 타락한 질병의 세상에서 아름다움의 정수를 끌어올리고 있다. 몽상과 유령, 질병과 죽음의 검은 세상에서 그의 미학은 더욱 빛나는 것이다. 그의 작품들을 모아 상영하는 알렉산더 소쿠로프 특별전이 10월30일부터 11월4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린다(문의: www.cinemathequeseoul.org).
러시아의 무명감독이었던 알렉산더 소쿠로프가 서방에 이름을 알리게 된 데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향이 컸다. 타르코프스키는 소쿠로프가 70년대에 국립영화학교(VGIK)에 다닐 때 그의 스승이자 친구였다. “소쿠로프라는 젊은 감독이 있다. 거장이 될 재목이다. 정부의 탄압을 받아 정상적인 활동을 못한다. 서방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타르코프스키의 입을 통해 재목으로 지목된 젊은 감독 소쿠로프(1951~)는 서방 영화인들의 호기심을 잔뜩 자
미술, 죽음, 그리고 데카당스의 미학, 소쿠로프 특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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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양해훈이 누구기에?” 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양해훈 감독과 그의 장편 데뷔작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지난해 연말부터 올해 10월까지 잊을 만하면 되새겨지는 이름이었다. 2006년 서울독립영화제와 인디포럼에서 화제작으로 떠오른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는 올해 5월 전주국제영화제에서는 ‘관객영화평론가상’을 받았고, 지난 10월12일에 폐막한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와이드 비전 부문에서 상영되었다. 게다가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를 편집하던 도중에 만든 단편 <친애하는 로제타>는 한국영화로는 6년 만에 칸국제영화제 단편경쟁 부문에 선정되기도 했다. 하지만 영화제 순방의 해로 보낸 지난 시간이 양해훈 감독에게는 그다지 즐겁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영화제가 별로 재밌지는 않다. 나는 그냥 관객을 만나서 내 이야기를 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게 즐겁더라. 그외 다른 건… 글쎄… 축제가 끝나고 생기는 허망함이 오히려 짙은 것
[양해훈] “당분간은 현실에 발을 붙인 판타지를 만들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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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투명인간이다. 부풀린 환대와 호들갑이 오가는 술자리에서조차 사람들은 그녀를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한 미약한 몸짓. 그녀는 입가에 작은 점을 하나 그려 넣는다. 진정한 악몽은 그때부터 시작이다. 바이러스가 침투하듯 스멀스멀 영역을 넓혀가던 점들은 어느새 온몸을 집어삼키고, 건조하던 일상은 끈적한 환각의 미로로 탈바꿈한다. 소외와 고립을 공포의 키워드로 사용하는 것은 낯설지 않지만, 점이라는 범상한 소재가 거대한 악몽으로 변해가는 과정은 시각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바짝 소름을 돋우기에 모자람이 없다. 공포를 촉발하고 그것을 확장시키는 감각과 리듬이 돋보이는 <점>은 이정행씨의 첫 번째 연출작이다.
“어느 날 몸을 보니 전에 없던 점이 생겼더라. 이 점이 늘어나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본 것이 발상의 출발이었다. 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인간관계가 넓어졌지만, 대부분 형식적인 것에 그치는 것 같다는 회의도 있었고. 그런 생각들로부터 영화가
[이달의 단편 18] 이정행 감독의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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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은 마치 이명세 감독이 그려내려는 dreaM과 Magic의 철자 M의 교집합이 만들어낸 것 같은 제목이다. 누구나 자신이 꾸었던 꿈을 정확하게 기억해내기란 힘든 법이고, 그 꿈이란 초현실적인 마술과도 같은 것이기에 그 둘은 마치 서로를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M이라는 철자가 보여주는 정확한 좌우대칭의 형태도 이와 묘하게 들어맞는다. 이명세 감독 스스로도 “영화를 보면서 커다란 혼돈에 빠지는 경험을 할 것”이라며 “그 혼돈에서 깨어났을 때 정말 좋은 꿈을 꿨다는 생각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M>은 이명세 감독이 카메라로 써나간 ‘꿈의 해석’쯤 된다 할 것이다. 그것은 또한 최근 한국영화의 전반적인 흐름과 비평 담론 속에서 박광수, 이창동 감독으로 대표되는 사실주의 경향의 대세를 향한 당대 최고의 스타일리스트 이명세 감독의 고집스러운 반격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그리 비중이 크지 않은 적이 있었던(?) 김보연 정도를
꿈결 같은 스타일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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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하지 않은 건 모두 환각이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엄마와 함께 지냈던 마사야(오다기리 조)는 언제나 지속되고 있는 것만이 진짜라고 말한다. 도쿄 중심에 우두커니 서 있는 도쿄타워나, 자신이 무엇을 해도 항상 뒷바라지를 해주는 엄마(기키 기린)나, 액자에 담긴 자신의 졸업장 등. 릴리 프랭키의 소설 <도쿄타워,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를 영화로 옮긴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는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의 차이를 통해 한 남자가 자신의 삶을 반성하는 이야기를 담는다. 마사야의 삶에서 변하는 건 항상 상처를 남기고, 변하지 않는 건 상처를 치유한다. 다른 여자의 품에서, 항상 어딘가를 떠돌아다니는 아빠(고바야시 가오루)는 마사야를 도쿄로 올려 보내지만, 도쿄에 도착한 마사야는 철없는 생활 속에 탕진된다. 엄마가 보내준 학비와 생활비는 술과 도박, 여자에 쓴다. 영화는 마사야가 엄마의 암 소식 이후 정신을 차리고 일을 하며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소중
한 남자의 눈물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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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니스트>의 이자벨 위페르처럼 <포미니츠>에서 피아노를 치는 두 주인공은 얼음장 아래 정념의 덩어리를 숨기고 있는 여인들이다. 여든살의 독신녀 트라우데 크뤼거(모니카 블라이브트로이)는 여죄수 교도소에서 30년째 피아노를 가르치고 있다. 대가 빌헬름 푸르트뱅글러의 유망한 제자였던 그녀는 2차대전 중 사랑하는 여인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살해되는 것을 목격한 이후, 감정을 깊은 곳에 묻고 건조하게 살아왔다. 트라우데의 가라앉은 내면을 흔드는 것은 자학적 발작을 일삼는 거친 죄수 제니(한나 헤르츠슈프룽)의 폭풍 같은 연주다. 재능있는 딸을 모차르트로 만들기 위해 몰아붙인 아버지에 대한 반항으로 집을 뛰쳐나왔던 제니는 무책임한 남자친구와 연루된 살인사건으로 수감됐다.
연인의 못다 핀 재능이 전쟁 속에 스러져버린 비극을 목격한 트라우데는 제니를 콩쿠르에 내보내 그녀의 천재성을 살려내고자 한다. 하지만 불신에 찬 젊은 피아니스트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두 여자는 서로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노래하는 건반 <포미니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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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다기리 조의 출연작 중 유일하게 일본 박스오피스 1위에 올랐던 영화 <오다기리 죠의 도쿄타워>는 2006년 일본을 휩쓴 도쿄타워 신드롬의 영화판이다. 대중적이지 않은 배우 오다기리 조가 어떻게 대중의 마음을 울렸는지 그 비결은 이 영화의 원작이 된 소설 <도쿄타워 엄마와 나, 때때로 아버지>에 담겨 있다. 일본인들의 꿈과 향수, 평생의 고향 어머니에 대한 눈물이 유머와 함께 묻어나는 이야기. 2006년 한해 일본을 울린 도쿄타워의 뒷이야기를 소개한다.
도쿄 드림의 상징, 도쿄타워
‘연인과 함께 도쿄타워에 갔을 때 불이 꺼지면 그 사랑은 영원하다’는 믿음이나, 에쿠니 가오리가 소설 <도쿄타워>에서 묘사한 금지된 사랑의 피난처처럼 요즘 일본 젊은이들은 도쿄타워를 단지 낭만적인 장소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1970년대에 청춘을 보냈던 일본의 중년들에게 도쿄타워는 꿈의 상징이다. 고도로 발전하기 시작한 당시 일본의 경제상황과 맞물려 수많은 젊은이들이
[알고 봅시다] 일본을 울린 눈물의 힘은 원작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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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듣고 그저 평범한 핑크영화를 기대했다면 실망할지도 모르겠다. 제제 다카히사 감독의 <욕망의 거미줄: 시세이2>에는 섹스신이라고 부를 만한 장면이 단 한컷도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여자의 몸에 문신하는 남자의 손길과 칼날이 피부를 파고들 때마다 신음을 토해놓는 그녀의 얼굴만이 화면 가득 전시된다. 마사지사인 아메미아(요시이 레이)는 최면 스프레이를 이용해 오랫동안 감시해온 세이즈(유게 도모히사)를 납치한다. 세이즈가 눈을 뜬 곳은 어두컴컴한 방 안. 도망칠 수도 없는 폐쇄된 공간에서 아메미아는 그녀에게 문신을 그리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피투성이 남녀를 담은 잔인하고 끔찍한 풍속화를 보면서 알 수 없는 욕망을 느낀 여자는 그 제안을 기꺼이 수락하고, 그는 며칠 동안 공들여 그녀의 등에 그림을 새기기 시작한다. 등장인물이라곤 단 두명뿐인 이 영화는 주인공 남녀가 문신과 풍속화를 놓고 벌이는 기묘한 선문답에 오롯이 기대 있다. 사토 히사야스 감독의 <욕망의 거미줄:
인간의 내면에 집중하는 핑크영화 <욕망의 거미줄2: 시세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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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 my be my baby~.” 추억의 멜로디가 귓가를 간질이는 곳. 빛바랜 정겨움으로 서대문 로터리를 지키고 선 단관극장, 드림시네마에 20년 전의 기억이 둥지를 틀 준비를 하고 있다. 87년 한국 극장가를 달궜던 <더티 댄싱>이 개봉 20주년을 맞아 11월23일 다시 스크린을 찾게 된 것이다. 오랜 집념으로, 세월을 건너뛴 재회를 계획한 것은 <더티 댄싱>의 열렬한 팬이자 ‘즐거운 시네마’의 대표로 드림시네마를 운영 중인 김은주씨. <더티 댄싱> O.S.T가 울려퍼지는 극장에 그와 나란히 앉아 남다른 팬심의 사연을 들었다.
-<더티 댄싱>에 어떻게 그토록 빠지게 됐나.
=개봉 당시 중학생이었다. 너무 보고 싶었는데, 미성년자 관람불가였기 때문에 번번이 극장에 들어가질 못했다. 거의 포기를 했었는데, 신촌에서 앙코르 상영을 한다는 말을 듣고 화장하고 모자를 쓰고 갔다. (웃음) 정말 눈물을 흘릴 정도로 좋더라. 태어나서 그렇게 재
[스폿 인터뷰] “영화 틀면… 아마 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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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서 3년을 대충 때운 뒤 쫓겨나다시피 졸업할 무렵 마음은 얼마나 스산한가. 게다가 자신을 불러줄 대학도 없는 청춘이라면 이 겨울은 하염없는 추위로 가득한 것일 게다. 겨울날을 배경으로 하는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가 보는 이를 유난히 춥게 만드는 까닭 또한 스크린 속 살풍경보다는 주인공들의 심상에 고드름처럼 끼어 있는 서늘한 기운 때문이리라.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별다른 일을 하지 않고 지내는 제휘(임지규)의 마음속 한기는 어둠과 함께한다. 그는 방의 창을 모두 가려놓은 채 어둠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가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이라곤 가끔 아파트 단지를 쏘다니는 것과 익명의 존재들로 가득한 인터넷뿐이다. 순간이동 마술에 심취해 있는 그는 자신을 향해 주문을 외우기도 한다. “타.파.피.카.” 그 겨울 어느 날, 제휘는 우연히 장희(윤소시)라는 소녀를 알게 된다. 어딘가 엉뚱하지만 허물없이 그를 대하는 장희 덕에 제휘는 세상 바깥을 향해 한발을 내딛기 시작
스무살의 무게 <저수지에서 건진 치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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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은은 막연히 오래된 느낌을 주는 사람이다. 포털 사이트가 제공하는 필모그래피에 따르면 그의 연기자 데뷔는 2003년 드라마 <요조숙녀>다. 이전 경력이 정말 없나 싶어 확인차 되물으니 그게 맞다고 대답해온다. 예전에도 비슷한 말을 들었다며, “제가 고등학생 때 데뷔한 줄 아는 분도 계시더라고요”라고 한다. 평범한 인상이 고민일 것 같았던 이영은은 어릴 때 오히려 자기 얼굴이 “진한 것 같아서 그게 콤플렉스였다”고 한다. “왠지 동남아쪽 같은 인상 있잖아요. 처음에 데뷔할 땐 메이크업도 그런 쪽으로 신경써서 하는 편이었어요. 눈썹도 밝게 하고 머리도 밝은 색으로만 염색하고. (웃음)” 그리고 덧붙인다. “제가 봤을 때 미의 기준은 약간… 이요원씨 같은 스타일? 어딘가 약간 흐리면서 깨끗한 게 제 눈엔 예쁜 것 같아요.” 이렇게 말하면서 웃는 이영은은 사랑스럽고 깨끗한 스물다섯. 누가 보더라도 충분히 예쁠 사람이다.
발랄하고 소탈한 인상의 이영은은 누군가의 여동생 이미
[이영은] 속 깊은 여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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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자고 던질 농담을, 죽자고 덤비며 말하는 상황은 민망하다. 이종격투기 챔피언인 폭력 남편(박상욱)에게 링 위에서의 한판을 제안하는 하은(도지원)의 도전기 <펀치레이디>가 그렇다. 남편과는 눈도 못 마주치는 아내에게 하이킥과 길로틴초크를 구사하는 남편을 리얼하게 묘사한 첫 시퀀스. 이를 목격한 딸이 악에 받친 욕설을 퍼붓자 머리를 향해 재떨이를 던진다. 이건 씁쓸한 농담도 아니고 현실의 아픈 반영도 아니다. 여자들의 고된 운명에 대한 영화적 묘사라고 믿는 심각한 오해일 뿐이다. 사태는 점점 심각해진다. 악마 같은 남편과 대결하다 링 위에서 죽는 첫사랑을 본 하은은 얼떨결에 남편에게 대결을 제안한다. 놀이방을 만들기 위해 낡은 도장을 인수한 수현(손현주)은 지도를 부탁하는 하은을 어쩌다보니 받아들인다. 집에서 쫓겨난 딸과 손녀에게 신세지는 하은의 철없는 어머니(김지영)는 알고보니 병을 숨기는 처지다. 21세기 미련상의 강력 후보감 하은이 매서운 여전사로 변신하는 계기는 모두
한참은 잘못 찾은 번지수의 비애 <펀치레이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