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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박 캐스팅] <인디아나 존스4> 크리스탈 해골의 정체는?
[대박 캐스팅] <인디아나 존스4> 크리스탈 해골의 정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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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발병한 '리퍼 바이러스'로 수 백만명이 죽자
발생지역을 봉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25년 후 바이러스가 재 발생하고 봉쇄했던
격리지역에 생존자가 있다는 사실에
여전사 '이든 싱클레이어'(론다 미트라)와 함께 팀을 만들어
치료제를 찾으러 간다.
2030년의 미래와 중세시대 두 시대를 그리고 있는
<둠스데이:지구 최후의 날>은 오는 6월19일날 개봉할 예정이다.
동영상을 보시려면 동영상보기를 클릭해주세요.
[개봉작 NEW] <둠스데이 : 지구 최후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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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장 유월은
생맥주가 땡기기 시작하는 시절.
전국 美 쇠고기 반대 6·10 촛불집회
마음 울린 양희은과 안치환의 노래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경찰, 세종로에 시위차단용 컨테이너 설치
쥐 보호하려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
아예 청와대에 명박산성 세워라.
그리스 칠 잊지 말고.
촛불집회 간 정운천 장관, 소통 불발
장관님, 집회 안 오셔도 돼요.
30개월 이상 쇠고기와 내장 수입 막아주세요.
그걸로 족해요.
온라인 시위… 1시간째 청와대 홈페이지 다운
페이지 다운되니 jpg.파일 올려놓는 센스.
클릭 안 되는 그림판 홈페이지라니.
‘분노의 촛불’ 전세계 외신보도 잇따라
Boys,
be MB shuts.
뉴라이트 임헌조 맥도날드 발언 논란
광대 로날드군!
자네도 사내라면 임 열사 100억달러 소송관광!
가짜 쇠고기 다시다 350만명분 유통
100일간 쑥과 마늘만 먹어도
안심할 수 없을 듯한 이 먹을거리 불안.
정부, “공공요금 인상 최소화·시기 분
[이주의 한국인] 내 고장 유월은 생맥주가 땡기기 시작하는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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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의 별명은 ‘검투사’(라고 한)다. 2007년 6월 한-미 FTA 협상이 타결된 직후 보수언론들이 일제히 그의 별명이 검투사라고 보도했다. 죽을 각오로 협상에 임했다는 뜻이겠지. 90년대 말에 외교통상부 출입하다 몇번 김 본부장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별명은 ‘무사’였다. 날카롭게 올라간 눈매와 깡마른 얼굴상 때문이었다.
근데 6월12일 미국산 쇠고기 추가협상을 위해 미국으로 간다는 그의 얼굴에 검투사나 무사의 ‘필’은 없었다. 담판 지으러 가기보다는 애걸하러 가는 사람처럼 보였다. 기자들의 쏟아지는 질문에도 10분 만에 황급히 자리를 떴다.
포털 다음의 이날 ‘이슈 검색어’ 순위 25권 안에 쇠고기 추가협상에 대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김종훈’도, ‘쇠고기’도, ‘추가협상’도 없었다. 포털 네이버 인기검색어 30위권 안에도 들지 못했다. 누리꾼은 이렇게 이날 정부의 발표를 한마디로 ‘쌩깠다’. ‘재협상’이란 단어가 빠진 정부 발표는 관심도 없다는 뜻
[오마이이슈] 미국이냐 국민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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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독재다.
온통 촛불 이야기다. 이 칼럼에서도 벌써 몇주째 연속이다. 연일 신문의 칼럼들과 방송의 논평들 역시 매한가지다. 양초 말고 다른 걸 들어보려던 나 역시 굴복했다. 다른 이야기는 생뚱맞으리라. 그럴 용기가 없다.
청와대로 가려던 시민에게 경찰이 물대포를 쏘고 특공대를 투입했던 게 6월1일 새벽이었다. 그날 아침 인터넷으로 조·중·동 뉴스사이트를 읽으며 나는 진한 실망감을 느꼈다. 여전히 촛불집회를 불법으로 몰아서가 아니었다. 그 반대였기 때문이다. 철없는 시민이 아닌 철없는 대통령을 타이르는 쪽으로 변해갔다. 날이 갈수록 조·중·동답지 않은 논조를 연출했다.
단적인 예로, 6월3일자 <중앙일보>를 보자. 3면에서 집중분석을 했다. MB에겐 지금 다섯 가지가 없다고. 그 다섯 가지란, 소통이며 포용이며 겸손이며 성찰이며 신사고란다. 한달도 되기 전 “김용선 교수도 미국 쇠고기 즐겨 먹는다”라는, 신문 편집사에 길이 남을 엽기적 헤드라인을 1면에 실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죽 쒀서 쥐밥 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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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31일 촛불시위에 참여한 이모(28·회사원·서울시 보문동)씨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해 명확한 견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 사람들과 구호를 외치고 노래 부르는 것이 즐거워 시위에 나온다’고 말했다.” 지난 6월2일자 C일보 사회면 기사의 끝부분에서 발견한 문장이다. 서울 보문동에 사는 스물여덟살의 회사원 이모씨가 저 문장을 그대로 말했을 리 만무하다. 예상되는 취재과정은 다음과 같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어떤 측면이 가장 우려되세요?” “거기에 대해서 그렇게 잘은 몰라요.” “그런데 오늘은 어떻게 나오게 되셨어요?” “즐겁잖아요.” “어떤 부분이요?” “구호를 외친다거나, 노래를 부른다거나.” 이모씨가 항의해본들 아무 소용없다. 인용된 멘트가 모두 그의 입에서 나온 건 사실이니까.
기자들은 다 저렇게 일하냐고? 완전 그렇다. 나는 4년4개월 동안 218번의 마감을 하면서 만날 그랬다. 말 한마디 나눈 적 없는 해외 영화인에 대한 몇 페이지 기사를 쓸 때면 두툼
[오픈칼럼] 야마 찾아 삼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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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가 세계영화 시장을 석권한 것은 1차대전 때부터다. 유럽영화가 전쟁으로 침체기에 빠졌을 때, 유럽과 세계의 극장에선 미국영화가 넘쳐났다. 전쟁이라는 변수가 컸지만, 무엇보다도 영화 자체가 대중의 요구를 크게 만족시켰다. 유럽의 관객은 특히 그리피스 같은 멜로드라마 감독들이 보여주는 눈물 나는 이야기에, 또 맥 세네트 같은 코미디 감독이 펼치는 포복절도할 개그장면에 환호했다. 그러자 이런 영화들이 계속하여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버스터 키튼은 좀 달랐다. 다른 영화인들이 여전히 ‘무엇을’ 만들 것인가에 몰두할 때, 그는 ‘어떻게’ 만들 것인지를 고민했다. 다시 말해, 영화 매체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 장본인으로 버스터 키튼은 기록되는 것이다.
스크린 속으로 들어가는 영사기사의 이야기
이른바 ‘성찰적’(reflexive)인 영화가 나온 것으로, 마냥 세상을 비추기만 하던 영화가 드디어 자기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는 성숙한 태도를 보였다. <셜록 주니어>(19
[걸작 오디세이] 코미디로 풀어낸 메타시네마의 효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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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처음으로 얼굴을 접했을 때 ‘와! 세상에 이렇게 예쁜 사람이 있네?’ 하는 생각이 들고 한대 얻어맞는 것처럼 머리가 꽝 하고 울리는 그런 외모를 가진 사람요. 물론 그 효과가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습니다. 길어야 몇년 정도면 끝이죠. 그렇다고 그 미모가 완전히 없어지는 건 아니지만 익숙해지면 처음의 꽝 하는 효과는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어떤 때는 왜 처음에 그런 감정을 느꼈는지도 잘 기억이 안 날 때도 있고. 그럼 좀 슬프죠. 대상이 누구건 그 꽝 하는 감정은 꽤 즐거운 경험입니다.
제시카 알바를 처음 보았을 때도 전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전 이 배우를 어린이 TV시리즈 <플리퍼>에서 처음 봤습니다. 아직 파릇파릇한 틴에이저 시절이었는데, 애가 화면에 나오자마자 TV 앞에 멍하니 앉아 있던 사람들의 눈이 갑자기 또렷해졌던 게 아직도 기억납니다. 알바의 외모가 주는 효과는 그만큼이나 즉시적이었어요. 거의 설탕 한 스푼이 주는 쾌락과 같았죠.
[듀나의 배우스케치] 제시카 알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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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아임 낫 데어>는 펠리니의 <8과 1/2>이 아니다. 물론 토드 헤인즈는 펠리니에게서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게다가 영화 중간에 펠리니의 <카사노바>에서 가져온 니노 로타의 음악을 시침 뚝 떼고 쓰기까지 한다. 마치 자, 지금 저는 펠리니를 베끼고 있습니다, 라고 노래라도 부르듯이. 그러나 여기에는 창작의 위기도 없고, 그렇다고 상황도 없다. 혹은 승화시켜야 할 그 어떤 목표를 가진 것도 아니다. 토드 헤인즈의 목표가 있다면 전기의 무효화라고 할 만한 유머 안으로 밀어넣는다. 유머? 그렇다. 왜냐하면 <아임 낫 데어>에는 끝내 누가 말하고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답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끈질기게 이 영화에서 어떤 깊이나 너비를 찾으려는 이들을 실망시킨다. 토드 헤인즈는 여기서 영화의 어떤 표현의 방법을 확장하려고 만든 것이 아니다. <아임 낫 데어>가 유일하게 목표로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밥 딜런을 무의하
[전영객잔] 거기 없는 것을 어떻게 불러낼 것인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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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는 욕망이 지적 유행이었고, 지금은 애도가 트렌드이다. 대상을 바꿔가면서 앞을 다퉈 장례식에 열중하고 있고, 새로운 리빙 데드를 찾아서 두리번거리고 있다. (그저 단지 들뢰즈에서 데리다에로, 혹은 지젝에서 아감벤으로 아카데미 안의 명품이 시즌 패션을 바꾼 것이 아니라면) 왜 갑자기 상실이 그렇게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있는 것일까? 실패가 예정된 존재론. 타자에 대한 채무. 그런데 무엇을 빚지고 있는가? 대차대조표 안의 납골당 앞에서 이미 삼켜버린 타자를 토해내기 위해 자아는 왜 그렇게 고통받고 있는가? 성공적인 애도와 불충분한 애도 사이의 숨바꼭질. 이미지들이 날뛰고, 환영이 세상을 감싸고 있으며, 유령이 떠돌고 있다. 그 안에서 무엇이 도래하고 있는가? 그 뒤에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가? 주어로서의 무엇과 목적어로서의 무엇. 둘 사이의 차이. 어제까지 정신분열증이 자본주의를 시적으로 정의하고 있었다면(들뢰즈-가타리의 니체적인 그 아름다운 문체), 이제 세계화를 설명하는 증
[전영객잔] 거기 없는 것을 어떻게 불러낼 것인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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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에 도착하자마자 소파에 축 늘어지는 품새가 여간 피곤한 모양이 아니다. 하룻동안에 이미 15건의 인터뷰를 시간차공격처럼 척척 해치웠다는 말을 들으니 살짝 겁이 난다. 이 배우 설경구, 까칠할 때는 꽤 까칠한 인간인데 피곤에 절어 비협조적으로 나올까 걱정이 된다. 아니나 다를까 “어휴, 힘들어. 나 그냥 갈게. 당신 마음대로 써줘”라고 말한다. 약간 부아가 나 “그럼 가시든가”라고 농을 던지니 자세를 곧추세우며 “일하자, 일!” 한다. 빈둥대다가 결국 사건에 임하면 악다구니로 밀어붙이는 강철중처럼 그는 자연스레 감기는 눈꺼풀을 치뜨며 대화를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설경구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 중 하나라고 평가했던 강철중이라는 캐릭터를 다시 입는 소감부터 물어봤다.
-<공공의 적>의 형사 강철중을 다시 연기하는 건 어땠나.
=나쁘진 않았다. 검사 강철중보다는 좀더 비어 보이는 형사가 나았다. 권력을 가진 자가 공공의 적을 잡는다는 건 매력이 없지 않나. 경찰이
[설경구] “요새 다 힘든데 강철중이라고 살기 편하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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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물에 만족하나.
=스탭들과의 기술시사를 5월30일에 했고, 6월1일에는 점검 차원에서 혼자 영화를 봤는데 관객과의 정면승부에서 질 것 같지는 않더라. 코미디를 위해 여러 가지 장치를 마련해놓았는데 내가 의도했던 데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썰렁한 반응이 나오면 나는 죽는 건데 말이다. 혼자 마지막으로 점검하면서 마음이 편안했다.
-사실상 <공공의 적>의 2편인 셈인데 어떤 점에 염두를 뒀나.
=<공공의 적>은 내가 만들었지만 이성재가 연기했던 악당 캐릭터가 좀 불편했다. 강철중이라는 캐릭터는 좋은데 그에 비해 적은 너무 단순했다. <공공의 적2>의 정준호도 가진 자라 자신이 나쁜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악당이었다. 반면 <투캅스> 1편은 굉장히 자연스러운 웃음이 있었다. 웃지만 그냥 막 웃어넘기는 그런 영화는 또 아니었다. 그래서 <공공의 적>의 캐릭터가 좋으니까 그 캐릭터에 <투캅스> 스타일을 얹어보자는 생각을 했
[강우석] “이걸로 안 되면 나는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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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중: 공공의 적 1-1>(이하 <강철중>)은 강우석 감독 개인에겐 카운터펀치 같은 의미를 갖는 영화다. 오로지 상업영화, 오락영화를 만들어왔던 그는 <실미도> 이후 <공공의 적2>와 <한반도>를 만들면서 노선을 급선회했다. 그는 이들 영화를 통해 세상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거침없이 직설화법으로 외쳤지만, 평단은 물론이고 대중적 반향 또한 그의 기대를 밑돌았다. 그가 <공공의 적>의 사실상 직계 후손이라 할 수 있는 <강철중>을 만들기로 작심했던 것은 이 같은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자신이 가장 잘 만들어왔다고 자부하는 오락영화, 상업영화를 통해 감독으로서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지난 6월2일 기자 시사를 통해 첫선을 보인 <강철중>에 대한 일차적인 반응은 그의 의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편이다. 다양한 비판도 제기되지만 대체로 ‘무난한 오락영화’라는 의견이 나오고
<공공의 적>의 속편 <강철중: 공공의 적 1-1>의 성취와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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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만의 컴백이다. <공공의 적>(2002)에서 관객을 웃기고 울렸던 강철중 형사가 마침내 복귀한 것이다. <공공의 적2>(2005)가 있긴 하지만 그 영화 속 강철중은 세상에 대해 ‘메시지’를 내지르는 사명감 투철한 검사였다. 무식하고 게으르지만 일단 뭔가를 물면 절대 입을 벌리지 않는 미친 개 같은 캐릭터 강철중이 <공공의 적>의 진정한 매력이었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공공의 적2>는 시리즈 영화로서 정통성을 부여하기 어려웠다. ‘공공의 적1-1’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강철중>은 그런 면에서 <공공의 적>의 적자(嫡子)에 해당한다. 과연 <강철중>은 <공공의 적>을 어떻게 계승하고 있나. 그리고 어떻게 차별화하려 하는가. 그 성취와 한계를 짚어본다. 강우석 감독과 설경구의 인터뷰도 함께 싣는다.
<강철중: 공공의 적 1-1> 미친 개 강철중의 컴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