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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아니 어쩌면 1997년. 나는 건축과 학생이었다. 학교에는 충실하지 못했지만, 여하튼 주요 관심사는 건축 혹은 도시와 연관되어 있는 모든 것들이었다. 많이 어설펐어도 열정은 있었던 것 같다(하긴 지금도 어설픈 것은 마찬가지다).
그때 이 영화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La Cite Des Enfants Perdus)를 봤다. 이유는 단순했다. 제목에 ‘도시’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영화에 대한 아무런 정보없이도 선택을 주저하지 않았다. 게다가 영화의 포스터에는 배낭여행을 떠났다가 우연히 찾아갔던 물 위에 떠 있는 도시, 몽생미셸(Mont Saint Michel: 프랑스 바스노르망디주 망슈현에 있는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편집자)의 이미지를 한껏 발산하고 있는 철제 섬이 몽환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십년이 넘게 흐른 지금, 이제는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의 이전 영화였던 <델리카트슨 사람들>을 비롯한 여러 영화들을 본
[내 인생의 영화] <잃어버린 아이들의 도시> -오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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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아직 아이였을 때, 팔을 흔들고 다니며, 시내가 강이 되고, 강이 되어 바다가 되었으면 했지. 아이가 아직 아이였을 때, 아이는 자기가 아이인지 몰랐고, 그에게 모든 것은 영혼이 있었고, 모든 영혼들은 하나였지. 아이가 아직 아이였을 때, 그는 아직 어느 것에도 견해를 갖지 않았고, 습관도 없었고, 책상다리로 앉았다가 뛰어다니기도 했고, 헝클어진 머리에 사진을 찍을 때 억지로 표정을 짓지도 않았지.” 영화는 페터 한트케의 시 <유년기의 노래>로 시작한다.
집단적 기억
천사는 어린이의 눈에만 보이기에, 베를린 쿠담의 번화한 거리에서 그를 보는 것은 오직 길을 건너던 사내아이, 그리고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 쌍둥이 소녀뿐이다. 천사가 서 있는 빌헬름 프리드리히 기념교회는 2차대전 때 폭격으로 파괴된 뒤, 전쟁의 참상을 증언하기 위해 복구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파괴된 교회의 현재를 통해 과거는 미래로 메시지를 던진다. 그로써 두번의 전쟁을 일으킨 민족의 집단적
[진중권의 이매진] 영화는 역사를 만드는 현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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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을 선물받은 적이 있다. 절벽 사이에 소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는 유리구였다. 돔의 이름은 ‘종을 떠난 종소리’. 쥐고 흔들면 하얗게 흩날리는 눈꽃이 천천히 낙하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동그랗게 밀봉된 고요. 유리구 안에는 절도 없고 종도 없었지만 종소리가 있었다. 그 소리는 떠나온 소리였고, 그래서 울림의 시원(始原)을 떠올리게 만드는 ‘소리없는 소리’였다. 오래전, 먼 곳에서 출발해 비로소 나에게 도착하는 소리. 그 자장의 끝, 가장 나중에 그려지는 동심원 바깥에 내가 서 있는 기분. 눈송이가 전부 가라앉으면 그걸 다시 흔든 뒤 잠자코 바라보기를 반복했다. 그러면 정작 종을 떠나온 것은 종소리가 아니라 나 자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잃어버린 것과 잃어버릴 것들이 떠올랐다. 믿기지 않을수록 되풀이하여 말하는 게 좋다고 했던가. 사람들이 스노볼 뒤집는 모습을 볼 때면, 그들 모두가 의외로 시시한 눈(雪)의 속도에 집중하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우리
[냉정과 열정 사이] 내 속에 공명하던, 그 소리없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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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월, 3주… 그리고 2일>과 <주노>는 동시대에 도착한 영화지만, 동시대로부터 날아온 편지는 아니다. <4개월…>의 시대적 배경이 1987년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정권이라면, <주노>의 배경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현재의 미국이다. 결혼하지 않은 어린 여자에게 어느 날 닥친 임신과 이에 대처하는 방식 혹은 태도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둘은 유사하다. 하지만 전혀 다른 영화다. 우연하게도 두 영화를 연달아 본 뒤 동일한 소재를 두고 고통과 유쾌함을 분열적으로 오갔다. 그 감정의 간극은 잊혀지지 않으면서 사람을 무척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었는데, 결론은 <4개월…>과 <주노>는 함께 읽어야 하는 영화라는 것이다. 시대적, 문화적 차이로 두 영화의 차이를 설명하는 건 가장 게으른 방식이다. 더욱이 <4개월…>은 1987년 루마니아 독재정권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도 보이지 않는 어딘가에서 여전히 벌
[영화읽기] 그래도… 삶은 계속 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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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과 낮>에 등장하며 포스터에도 사용된 쿠르베의 <세계의 근원>(1866)에는 벌거벗은 여인의 벌어진 사타구니가 그려져 있다. 외음부의 형상, 체모의 결까지 세밀하게 묘사된 이 그림은 포르노의 시대인 오늘의 눈으로 봐도 뻔뻔스러울 만큼 직접적이고 자극적이다. 하지만 그 감각적인 직접성은 동시에 당대에 대한 대담한 논평이다. 그 논평은 신과 영웅을 그린 ‘고결한’ 회화들의 위장된 외설성을 겨냥한다. 예컨대 역시 오르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1863). 여신은 마치 성애의 절정에 이른 여인처럼 발그레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고 온몸을 교태스럽게 비틀고 있다. 다만 그 모든 것이 비롯되고 귀결될 부위는 교묘하게 가려져 있다.
쿠르베는 위장이 불가능한 앵글을 택하고 심지어 모델의 두 다리를 벌려 그 많은 ‘고결한’ 그림들이 그토록 다양한 방식으로 가렸던 질과 체모를 화폭의 한가운데 놓는다. 게다가 얼굴은 시트로 가려져 있다. 그
[전영객잔] 목적지 없는 여행의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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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 is Dope
http://www.cinemaisdope.com/
각종 포털 사이트의 데이터 서비스가 방대해지고 체계화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내가 원하는 영화의 이미지를 얻기란 쉬운 게 아니다. 더욱이 고전영화나 제3세계 영화의 경우 가로 사이즈 1000픽셀 이상의 때깔 좋은 화상을 찾는다는 건 사막에서 바늘 찾기와 마찬가지. Cinema is Dope는 그런 사막에서 질 좋은 미네랄워터를 공짜로 마실 수 있는 오아시스와 같은 블로그다. 192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10년 단위로 차곡차곡 모아놓은 고화질의 영화 월페이퍼들은 방문자를 열렬한 카피레프트 지지자로 만들기에 모자람이 없다. 특히 무성영화 3인방 중 찰리 채플린에 비해 세세한 얼굴 생김새조차 볼 수 없었던 해럴드 로이스와 버스터 키톤의 얼굴을 고화질로 접하는 순간은 감동 그 이상이다. 운영자인 블레이크는 ‘트위치 필름’이란 온라인 영화매체의 필자로 일본, 유럽, 남미 등 비할리우드영화에 대한 애정이 각
[영화블로그 15선] SPECIALIST_ 특성화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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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만 년의 인간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살았을까. 선사시대에 대한 상상력이 스크린으로 옮겨진 <10,000 B.C.>가 3월 둘째주 주말 미국 극장가를 점령했다. 전세계 20개 국가에서 동시에 개봉한 <10,000 B.C.>는 미국을 비롯, 스페인, 멕시코, 독일, 호주 등 19개 국가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주말 3일간 벌어들인 수입은 미국에서만 3573만달러이고, 전세계 수입은 6100만달러에 달한다. <인디펜던스 데이> <투모로우>의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가 4년 만에 내놓은 연출작으로, 부족에 닥친 위기와 사랑을 지키려는 청년의 영웅담이다. 주연으로 출연한 스티븐 스트레이트나 카밀라 벨 모두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다. 원초적 자연과 고생물들을 스크린에 포착하기 위해 1억달러에 달하는 제작비가 투입됐으나 평단에서는 일관되게 혹평을 보냈다. 개봉 첫주 극장을 찾은 관객의 대부분이 남성인 것으로 알려졌다.
2위는 신
선사시대 블록버스터 <10,000 B.C.> 3570만달러로 1위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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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BEATS
http://cinebeats.blogsome.com/
그녀의 사랑 고백을 들어보자. CINEBEATS는 60, 70년대 영화와 뜨거운 사랑에 빠진 한 여성의 블로그다. 호러영화의 열렬한 팬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영화광의 길을 밟아왔노라고 이야기하는 운영자는 80년대 후반부터 자유기고가로 활동해왔으며 이제는 마흔줄에 접어든 중년 여성이다. “세상에 영화는 넘쳐나지만, 내가 싫어하는 영화에 대해 쓰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인생은 그러기엔 너무 짧잖아”라고 이야기하는 그녀는 자신이 영화의 “황금기”로 평가하는 60, 70년대에 오롯이 블로그를 헌납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 데보라 카, 리 마빈 등 왕년의 스타들을 회고하는 촉촉한 시선도 즐겁지만, 운영자의 시야가 할리우드의 울타리 안에 갇혀 있지 않았다는 점이 흐뭇하다. 특히 70년대 일본 핑크영화에 대한 꼼꼼한 포스팅은 영문 블로그에서는 접하기 쉽지 않은 방대한 정보들을 담고 있다. 아마
[영화블로그 15선] FILM BUFFS_ 영화광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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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servations on Film Art
http://www.davidbordwell.com/blog/
시네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기웃거렸을 그 책들. <영화예술> <세계영화사> 등 영화 교과서의 정전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미국 영화학자 데이비드 보드웰의 블로그. 공저자이자 부인인 크리스틴 톰슨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머리말이 언제나 ‘Kristin Here-’ 혹은 ‘DB Here-’로 시작돼 부부가 주고받는 연애편지를 보는 듯 묘한 감흥이 일기도 하지만, 일단 포스팅을 읽기 시작하면 금세 영화 세미나에 참석한 듯한 느낌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주로 현대영화를 둘러싼 다양한 이슈들을 매우 긴 호흡으로 성찰하는 이 블로그는 재빨리 결론만 낚아채려는 조급증만 억누른다면 실로 빠져나갈 수 없는(혹은 빠져나가고 싶지 않은) 블랙홀에 가깝다. 근래 보드웰의 관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닫힌 프레임, 빠른 컷, 카메라를 끊임없이 움직이는 최근 미국 감독들의
[영화블로그 15선] INSIDERS_ 전문필자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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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1만 년의 인간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살았을까. 선사시대에 대한 상상력이 스크린으로 옮겨진 <10,000 B.C.>가 3월 둘째주 주말 미국 극장가를 점령했다. 전세계 20개 국가에서 동시에 개봉한 <10,000 B.C.>는 미국을 비롯, 스페인, 멕시코, 독일, 호주 등 19개 국가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주말 3일간 벌어들인 수입은 미국에서만 3573만달러이고, 전세계 수입은 6100만달러에 달한다. <인디펜던스 데이> <투모로우>의 감독 롤랜드 에머리히가 4년 만에 내놓은 연출작으로, 부족에 닥친 위기와 사랑을 지키려는 청년의 영웅담이다. 주연으로 출연한 스티븐 스트레이트나 카밀라 벨 모두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다. 원초적 자연과 고생물들을 스크린에 포착하기 위해 1억달러에 달하는 제작비가 투입됐으나 평단에서는 일관되게 혹평을 보냈다. 개봉 첫주 극장을 찾은 관객의 대부분이 남성인 것으로 알려졌다.
2위는 신
선사시대 블록버스터 <10,000 B.C.> 3570만달러로 1위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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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matical
http://www.cinematical.com/
팔딱대는 신선한 정보들을 낚을 수 있는 곳. Cinematical은 캐스팅 뉴스, 감독들의 차기작 소식, 새롭게 공개된 영화 스틸과 트레일러를 중심으로 한 블로그다. 그렇다면 시시각각 속보를 토해놓는 포털과 무슨 차이가 있냐고? 바로 일반적인 매체들이 두세줄 정도로 간략하게 써갈기고 말 팩트를 제법 흥미롭게 음미할 만한 아이템으로 가공해놓는 솜씨다. 전적으로 필진들의 사견(혹은 편견)에 근거한 포스팅들은 예컨대 한 배우의 캐스팅 소식을 놓고 그 배우에 대한 개인적인 소회와 인평에서 시작해 해당 작품과 배우의 궁합에 대한 노골적인 환호 혹은 적나라한 비아냥거림을 서슴없이 털어놓는다. 자연스레 댓글 충동을 부추기는 포스팅 외에도 방문객의 발걸음을 붙들어놓는 이벤트가 종종 열린다. 영화 스틸 한장을 던져놓고 캡션 달기 콘테스트를 제안한다거나, “슈퍼맨 망토와 마돈나 웨딩드레스 중 뭘 사고 싶어?” 같은 뜬금없는 설
[영화블로그 15선] HEADLINERS_ 뉴스형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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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 미디어 시대? 물론이다. 하지만 블로그는 이제 개인의 일기장 수준을 훌쩍 넘어선 정보의 창고이자 전세계 불특정 다수의 목소리를 흡수하고 전파하는 광대한 공유의 정거장으로 성장했다. 공식화된 지면에서 만나기 힘든 자유분방한 목소리도 매력적이지만, 기존의 매체 이상의 깊이를 자랑하는 전문화된 블로그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물론, 당신의 시야가 한국이라는 국경선 안에 갇힐 필요는 없다. 웹서핑의 영토를 넓히고 발견의 희열을 배가시켜줄 해외 블로그, 그중에서도 널리 알리지 않으면 아쉬울 영화 블로그들을 모아봤다. 매일 영화계 소식을 눈앞으로 배송해줄 뉴스형 블로그, 당신의 식견을 한층 업그레이드해줄 전문 필자들의 블로그, 링크로 우정의 가교를 놓고 싶어지는 영화광들의 블로그, 그리고 한 우물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특성화 블로그까지, 4가지 색깔의 15개 블로그를 만나보자. 접속시 주의사항, 과도한 트랙백은 정신 건강에 좋다!
[영화블로그 15선] 웹서핑의 영토를 넓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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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츠가네 난사사건>은 각본을 10번 이상 고쳐쓴 뒤 시대를 90년대 초로 바꿨다고 들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90년대 초라는 시대가 연출하기에 편리했던 것 같다. 휴대폰도 없고, 아직은 뭔가 부자유한 느낌이 남아 있는 시절. 그냥 이야기를 풀기에도 재밌지 않을까 싶었다. 당시가 일본의 버블 경제가 무너졌던 때라고 하는데 나는 학생이라 별로 실감을 못했고, 그냥 텔레비전에서 불경기가 될 거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일상은 하나도 변한 게 없는데 대체 세상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궁금했다.
-멧돼지 전설의 고장 마츠가네란 마을이 인상적이다. 어디에나 눈이 있는데 거기서 기묘한 분위기가 감돈다.
=로케이션 헌팅 때부터 눈만 있는 마을은 너무 그림 같을 거라 안 된다고 생각했다. 주변에 눈이 남아 있긴 하지만 설국의 이미지는 아닌 그런 곳을 원했다. 겨울의 나른한 느낌이 좋았고, 추운 곳을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뭔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란성 쌍둥이로 등장
[야마시타 노부히로] “이야기보다 캐릭터에 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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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영화잡지 <키네마준보>는 2007년 일본영화 베스트10을 뽑으며 2위와 7위에 각각 야마시타 노부히로 감독의 영화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과 <마츠가네 난사사건>을 올렸다. 베스트10 안에 한 감독의 영화가 2편이나 들어간 셈이다. 영화평론가 오카타 빈로우는 “2007년은 야마시타 노부히로의 해였다”고 말했고, 모리 나오토는 “<마을에 부는 산들바람>으로 야마시타 감독은 자신의 세계를 갱신했다”고 표현했다. 재능있는 감독이 고갈되다시피한 최근의 일본 영화계가 다소 과하게 들떠 있는 게 아닌가 싶지만, 실제로 2007년 야마시타 감독이 내놓은 두편의 영화는 서로 다른 의미에서 야마시타 영화의 절정을 보여준다. ‘덜떨어진 남자 3부작’이라 불리는 <우울한 생활> <바보의 하코선> <리얼리즘 숙소>를 총정리하듯 완성한 <마츠가네 난사사건>은 그가 가진 블랙코미디와 리듬을 정갈하게 살렸으며, <
[야마시타 노부히로] 21세기 일본영화의 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