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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를 내려다보는 부감숏의 초월성은 아마도 천사의 시선에서나 나오는 것이다. 있을 것 같지 않은 미모의 후카타 교코가 천사로 나와 사뿐사뿐 날아다니는 영화 <천사>는 소녀만화로 유명한 사쿠라자와 에리카의 <천사가 사는 곳>을 원작으로 했다. 유난히 칵테일 라임진을 좋아하는 이 미모의 천사는 호기심 많고 온정적이어서 고독하고 소심한 사람들의 사소한 사정들을 지나치지 못한다. 적극적이지 못한 편의점 직원 가토(우치다 아사히)는 어느 날 클럽에서 라임진을 빼앗아 마시는 하얀 옷의 낯선 여자를 만난다. 그녀는 가토를 쫓아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요시카와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지만 그녀는 아이를 다룰 줄 몰라 그와의 결혼에 회의적이다. 요시카와의 딸 치이에게는 천사가 보이는데, 천사는 외로운 아이의 친구가 되어 아름다운 환상을 선물한다. 여고생 미즈호는 친구들의 따돌림으로 학교 밖을
엄청난 기적이 아닌 사소한 이해와 위로 <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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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 어폰 어 타임>의 이야기는 1945년 8월12일이란 자막과 함께 시작한다. 민족의 해피엔딩인 광복까지 남은 시간은 3박4일. 영화의 사건이 결국에는 조국의 광복과 함께 해피엔딩을 맞는다는 걸 미리 예견하는 부분이다. 또한 1945년이란 시대적 상황을 영화가 흡수하는 방식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할 것이다. 안중근 의사, 김구 주석 등이 이름 혹은 사진으로 모습을 비추고 천황의 항복선언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결정적인 계기를 만드는 <원스 어폰 어 타임>은 제목 그대로 “옛날 옛적에 있었을 법한 일”이라는 컨셉의 오락영화다.
석굴암 본존불상의 이마에서 떨어져나가 오랜 시간 자취를 감추었던 전설의 보석이 발견된다. 이름하여 ‘동방의 빛’. 몇 십년간 동방의 빛을 찾아다녔던 총감은 입신양명의 기대를 품고 이 보석을 본국으로 이송하려 하지만 동방의 빛을 노린 건 이들만이 아니었다. 화려한 말발로 조선의 보물들을 일본인들에게 팔아넘기는 사기꾼 봉구(박용우)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오락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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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이에 있어서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약자’라는 말이 있다. 덜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에 대해 집착이 없으니 쿨하게 자기 페이스를 지킬 수 있고, 사랑하는 사람은 거기에 맞춰주느라 허덕대고 그러다보면 모양새 구기고 매력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마음이 없는 자는 언제나 우위에 서게 되는 법이라는 거다. 그러니 사랑에 빠진 자여, 상대의 마음을 얻으려면 언제나 도도하게 굴지어다. 그런데 문제는 그럴라치면 ‘이러다가 이 사람 정말 떠나버리면 어쩌지’라는 의구심이 불현듯 마음을 파고들어 초연함을 망가뜨린다.
이레나 파블라스코바의 <나쁜여자 길들이기>는 이런 밀고 당기기를 경험하면서 조금씩 사랑의 권력함수를 깨달아가는 여성 캐롤리나(다니카 줄코바)의 이야기다. 어느 비오는 날 그녀는 우연히 알렉스(카렐 로든)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고 좀체 속을 보여주지 않는 그에게 매료된다. 가까워지는가 싶으면 밀어내고 홀로 서려고 하면 어느새 다가오는 알렉스에게서 헤어나
나쁜 여자로 길들이는 방법 <나쁜여자 길들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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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슈퍼맨(황정민)이다. 스스로 그렇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그가 태안반도에 퍼진 기름 찌꺼기를 제거할 수 있거나 조지 부시를 지구 바깥으로 던져버리지는 못한다. 그는 사실 슈퍼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자기가 슈퍼맨이라고 착각하고 있는 미친놈이다. 맨홀 밑에 괴물이 산다며 동분서주하고 주유소 앞 풍선 인형을 향해 돈키호테처럼 달려들 때는 영락없이 그렇다. 하지만 그를 유명하게 만든 건 대체로 남들이 잘 하지 않으려는 작은 선행들을 하기 때문이다. 길가는 노인 짐 들어주기, 건널목에서 차 막아주기, 다친 사람 병원에 데려가기, 소매치기 잡아 주기 등등. 엉터리 감동을 짜내는 방송 다큐 프로듀서 송수정(전지현)이 이 사람을 우연히 알게 된다. 처음에는 그저 그럴싸한 방송용 취잿거리로만 생각했는데, 그에게 아픈 과거가 있다는 걸 하나둘 접하게 되면서 생각이 달라진다. 그의 머릿속에 박힌 크립토 나이트(이 영화의 슈퍼맨은 원작 <슈퍼맨>에 나오는 대머리 악한이 자기 머
곱게 미친 광인, 초인을 꿈꾸다 <슈퍼맨이었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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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의 요체이자 전부라 할 수 있는 세 의형제 이야기는 19세기 말 중국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이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로를 세워 양강총독에 임명된 마신이가 의형제로 지냈던 장문상에게 살해된 것이다. 마신이를 칼로 찔러 죽였다는 데서 ‘자마’(刺馬)라 불리는 이 사건은 마신이가 또 다른 의형제의 아내를 탐해 그를 살해하면서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철 감독의 1973년작 <자마> 또한 ‘형제애 대 치정’의 대립구도 속에 놓여 있다. 반면 <금지옥엽> <첨밀밀> 등 멜로영화의 달인 진가신 감독은 자신의 첫 액션영화 <명장>에서 같은 소재를 취하지만, 주제를 좀더 확장한다. 그는 마신이에 해당하는 방청운(이연걸)과 의형제들인 조이호(유덕화), 강오양(금성무)을 내세워 형제애란 도대체 무엇이고, 대의명분과 전쟁은 무엇이며, 정치와 권력은 어떤 것인지 진지하게 캐묻는다. 방청운과 눈이 맞은 조이호의 부인 연생(서정뢰
비극적 운명 속에 휘말린 세 남자의 표정 <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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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경성. 일제강점기지만 조선 유일의 라디오 방송국 경성방송국 스튜디오엔 나른한 분위기가 감돈다. 아버지의 힘으로 PD 자리를 꿰차고 있는 로이드(류승범)는 가끔씩 들려오는 뉴스나 짜투리 방송에 마이크 전원을 켤 뿐 방송 일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한다. 아나운서 만섭(오정세)이나 가끔씩 스튜디오에 와 풍월을 읊는 기생 명월(황보라)이 이따금 방송국의 정적을 깨는 돌출 행동을 하지만 시대와 벽을 쌓은 듯 심심하게 굴러가는 방송국에 별일은 없다. 1930년대 경성, <라듸오 데이즈>는 역사의 아픔을 싹 거둬낸 뒤 남겨진 피곤함과 공허함에서 시작하는 영화다. 방향을 찾지 못한 인물들이 모두 한량이 되어 방송의 주파수를 돌리고 이야기는 나른한 리듬을 타고 천천히 흘러간다.
시작부터 끝까지 별다른 기복이 없는 영화 <라듸오 데이즈>의 사건은 로이드가 시나리오작가 노봉알(김뢰하)을 만나면서 벌어진다. 봉알의 글을 보고 라디오 드라마를 떠올린 로이드는 방송
경성 최초의 라디오 드라마 <라듸오 데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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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소와 모텔, 두채의 건물만이 덩그러니 자리잡은 어느 황량한 국도변. 아버지가 종적을 감춘 뒤 어머니와 단둘이 하늘주유소를 운영하며 살아가는 동아(강희)는 건너편 파파모텔의 콜걸 영자(고다미)를 남몰래 좋아한다. 포주인 아버지(김준배) 밑에서 몸을 파는 영자를 매일같이 망원경으로 훔쳐보던 동아는 그녀에게 ‘유리에’라는 이름을 붙이고 은밀한 판타지를 살찌운다. 영혼을 팔면 10년간 변치 않는 사랑을 주겠다는 악마의 말에 넘어간 그는 거래로 유리에를 얻지만, 이내 10년이 아닌 영원한 사랑을 갈구한다.
영화진흥위원회 사전제작 HD 장편 지원작인 <내 사랑 유리에>는 <뚫어야 산다> <풀밭 위의 식사>를 연출한 고은기 감독의 세 번째 장편이다. 지난해 전주국제영화제 HD영화 특별전을 통해 관객을 찾았으며, 이번 작품으로 스크린에 데뷔한 동아 역의 강희는 ‘정다빈의 남자친구’로 이미 수차례 인터넷 뉴스란을 장식했었다. 유리에, 나타샤, 실비아 등 영화의
사랑에 관한 일종의 우화 <내 사랑 유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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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줄리엣 비노쉬)은 일곱살짜리 아들 시몽과 함께 파리에서 살고 있다. 중국 정통 인형극의 제작자이자 목소리 연기자인 그녀는 아들 시몽(시몽 이테아뉴)의 베이비 시터로 중국 유학생 송팡(송팡)을 고용한다. 몸도 마음도 언제나 불안정하게 바쁜 수잔과 나이에 비해 성숙한 시몽, 차분하고 따뜻한 영화학도 송팡은 그렇게 일상을 공유하게 된다. 시몽의 학교에서 집으로 오는 거리, 카페, 집, 그리고 수잔의 일터를 오가며 단조롭게 반복되는 대화와 얼굴들과 일상. 유일한 ‘드라마’가 있다면, 때때로 그러한 일상을 견디지 못하고 수잔이 터뜨리는 히스테리 혹은 우울증의 과민한 표정과 눈물이다.
그렇다. <빨간풍선>은 이야기의 요약을 기다리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를 보면 즉각적으로 몇몇 영화의 공기가 떠오르는데, 우선은 허우샤오시엔이 오즈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일본에서 찍었던 <카페 뤼미에르>다. 지하철이라는 도시의 풍경, 그 안의 쓸쓸한 개인들, 그들이 찾아가는 과거
도시의 고독한 산책자 <빨간풍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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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또 아무리 많이 배워도 그 안에만 들어가면 성숙한 자아를 발현하거나 지적인 합리성을 적용하기 힘들어지는 집단이 있다. 그게 바로 가족이다. 가족은 때로는 험난한 세상을 뚫고 나가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하지만, 오이디푸스의 귀를 간질이는 세이렌의 노래처럼 우리를 엉뚱한 곳에 주저앉히거나 좌초시키기도 한다. 안주하고 싶음과 벗어나고 싶음이라는 상반된 두개의 욕망을 잘 조절하고 자신을 세워나가는 것, 그것이 가족을 가진 이들이 풀어야 할 영원한 숙제이자 성공적으로 하나의 개체로 독립해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하다. 우리에게는 다소 낯설게 느껴지는 퀘벡영화 <크.레.이.지>는 요란한 음악과 패셔너블한 외장 아래 가족에 관한 잔잔하고 오래된 이야기를 품고 있다.
1960년 크리스마스이브 세명의 아들과 단란한 저녁시간을 보내던 부부 사이에 새로운 아들이 태어난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부부는 아기 예수와 생일이 같은 자크의 탄생을 축복으로 받아
퀴어 성장소설 <크.레.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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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든(조셉 고든 레빗)을 잡아 지하에서 폭행하던 핀(루카스 하스)과 터그(노아 플레이스)는 위에 올라가 이야기하자며 집의 주방으로 들어간다. 마약 조직의 아지트인 지하실이 평범한 주택의 주방으로 연결되고 미국 남부의 평온한 풍경을 창밖으로 한 주방에 인자한 인상의 중년 여성이 등장한다. 핀의 엄마인 그 여자는 마치 아들 친구에게 간식을 내주듯 브랜든에게 애플주스와 시리얼을 내민다. 학교를 배경으로 한 여자의 죽음, 마약 조직의 얽히고설킨 배신을 따라가는 영화 <브릭>은 10대를 주인공으로 한 누아르다. 마약이 틀어놓은 학교의 질서가 출구없이 어둡게 이어지고, 징계와 체벌을 손에 쥔 교감은 경찰의 자리를 대신해 학생들의 숨통을 조인다. 로커에서 오고가는 비밀편지, 학교 연극과 파티를 무대로 이어지는 음탕한 인물간의 흐름 등 <브릭>은 치밀하지만 어딘가 귀여운 구석을 간직한 잿빛 영화다.
영화는 브랜든의 여자친구 에밀리(에밀리 드 라빈)의 죽음으로 시작한다.
고등학교 마약 누아르의 세계 <브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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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달 전쯤 박혜명 기자는 뭐라 말할지 난감한 상황에 처한 적이 있다. <내셔널 트레저: 비밀의 책> 홍보행사 참석차 도쿄를 방문했을 때 일인데 인터뷰 도중 존 터틀타웁 감독이 갑자기 불법복제에 관한 얘기를 꺼냈기 때문이다. 그는 한국을 해적판의 천국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농반진반 기자들에게 당신들도 불법복제를 하는 것 아니냐고 추궁했다고 한다. 듣기에 기분 좋은 얘기는 아니지만 다운로드받아서 영화 보는 일이 다반사인 게 국내 실정이다보니 뭐라 답할 말도 없었다는 것이다. 하긴 몇년 전부터 중국이나 동남아를 다녀온 이들이 이구동성 “거긴 해적판 천지”라고 했던 걸 떠올려보면 미국 감독의 그런 발언도 당연한 일이다. 중국에선 주로 VCD로, 한국에선 주로 인터넷으로 유통된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명장> 개봉을 앞두고 내한한 진가신 감독은 비교적 한국을 잘 아는 홍콩 감독이다. <명장> 시사회에서 무대 인사를 하던 그도 불법복제 얘기를 꺼냈다. 이미 불법
[편집장이 독자에게] 즐감 서비스 개봉박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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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스위니토드> 저.. 레게 머리는 어떻게 풀죠?
[정훈이 만화] <스위니토드> 저.. 레게 머리는 어떻게 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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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위무하는 착한 가족영화
설 특선영화2 <가족의 탄생>
2월7일(목) 밤 12시15분 | KBS2 | 감독 김태용 | 출연 문소리, 엄태웅, 고두심
이 영화의 등장에 모두들 열광했다. 신파에 호소하지도 않고, 분노나 증오에 휩싸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쿨한 척(하지만 도대체 쿨하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쿨한 사랑, 쿨한 관계, 쿨한 가족…)하지도 않으면서 관계의 결을 주의 깊게 파고드는 가족영화가 나왔다! 부계 혈연이 아니라 여성들로 연대하는 가족의 형상 앞에서 아마도 사람들은 가족의 폭력성에 시달린 자신들의 상처를 어루만졌을 것이다. 혹은 한 핏줄이라는 무거운 운명에 짓눌려 점점 메말라가는 그와 그녀와 당신과 나 사이의 ‘관계’를 떠올렸을 것이다. 타자와의 낯설고 불편한 맨몸의 부딪침에서 그 맨몸을 부비며 이루어낸 타자와의 아름다운 동거. 이 영화의 착한 태도는 너무 많은 가족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정작 가족을 갖지 못하는 이 시대의 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에
[설 연휴 강추 TV영화] 방콕이 좋아? TV를 켜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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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도살자: 특별판> Killer of Sheep: Special Edition
1970년대 초·중반의 흑인 선정영화는 미국의 흑인에 대한 이미지를 규정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후 ‘갱, 마약, 매춘, 폭력’은 흑인 문화를 설명하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단어가 되었다. 이에 줄리 대시, 빌리 우드베리 등 일군의 흑인 영화인들은 흑인의 현실을 무시한 주류영화에 반기를 든다. 평론가 클라이드 테일러가 ‘LA의 반란’이라 불렀던 이들 세력의 힘은 크지 않았지만, 그들이 1980년대 흑인영화의 부흥에 끼친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찰스 버넷의 <양 도살자>는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양 도살자>를 보면서 놀라게 되는 사실은, 캘리포니아의 가난한 흑인들의 삶이 너무나 평범해서 뭔가 눈을 번뜩일 거리가 필요한 사람을 무색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물론 <태양의 계절>이나 <나싱 벗 어 맨> 같은, 품위 있는 흑인영화는 있었다. 그러나 &l
[해외 타이틀] 흑인의 일상을 담은 사려 깊은 걸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