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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의 열기와 종교재판의 광풍이 맞부딪치던 18세기 후반 스페인, 궁중화가인 고야(스텔란 스카스가드)의 모델이자 뮤즈인 이네스(내털리 포트먼)는 식당에서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소에 끌려가고,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해 자신이 비밀 유대교도임을 거짓 실토한다. 이네스의 아버지는 종교재판을 진두지휘하던 로렌조 신부(하비에르 바르뎀)에게 똑같은 고문을 가해 신성모독의 자백을 받아낸다. 투옥된 이네스를 찾아간 로렌조는 욕망에 휩싸여 그녀를 겁탈하지만, 신성모독의 자백이 들통나자 도주 길에 오른다. 밀로스 포먼(<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아마데우스>)과 각본가 장 클로드 카리에르(<프라하의 봄>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가 함께 시나리오를 쓴 <고야의 유령>은 고야의 삶을 조명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고야를 제3의 관찰자로 배치한 영화는 당대의 비극과 아이러니를 허구의 두 주인공을 통해 극대화하면서, 그것을
고야의 눈으로 바라본 야만의 시대 <고야의 유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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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세계의 엔터테인먼트 매니저인 생쥐 랫소(모건 C. 존슨)는 어느 날 우연히 미운오리새끼를 만난다. 알에서 막 깨어난 미운오리는 랫소를 엄마라 부르고, 그들이 불시착한 농장의 오리들은 미운오리에게 ‘어글리’(저스틴 그렉)란 이름을 붙인다. 뜻하지 않게 결성된 이 모자(랫소는 수컷이지만)를 환영해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랫소는 “세상에서 가장 저질스럽고, 비열하고, 추잡한 동물”인 쥐인데다, 어글리는 말 그대로 미운오리새끼이기 때문. 동병상련의 처지에 험난한 모험을 함께 겪던 이들은 점점 서로에게 진짜 부정을 느끼게 된다.
<미운오리새끼와 랫소의 모험>은 안데르센의 <미운오리새끼>에 감복한 덴마크의 후예들이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원작이 볼품없는 외모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안데르센의 세상에 대한 풍자였다면 이 작품은 ‘종속과목강문계’를 넘어서는 동물들의 화합에 빗대어 현실을 바라본다. 마음 착한 암컷오리는 수컷생쥐에게 알 듯 모를 듯한 연정을 느끼고 쥐
동물들의 화합에 빗댄 현실 <미운오리새끼와 랫소의 모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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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리 탈을 뒤집어쓰고 놀이동산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정원(차예련)은 자신을 골탕먹인 은규(장근석)에게 콜라를 쏟아붓는다. 하지만 다음날, 옆집으로 이사 온 은규에게 몰래 아르바이트 나가는 것을 들킨 정원은 부모님에게 고자질하겠다는 엄포에 일주일 동안 은규의 기타를 연습실까지 들어주기로 한다. 능숙한 기타 연주에 작곡 실력까지 갖춘 은규는 10대 밴드를 대상으로 한 대회를 위해 연습하고 있으며, 앙숙처럼 치고받던 둘은 서로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내 정원은 예전에 가장 친한 친구였지만, 불행한 사건으로 사이가 틀어진 희원(정의철)이 은규가 소속된 밴드 ‘도레미파솔라시도’의 베이시스트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당황한다. <도레미파솔라시도>는 <늑대의 유혹> <그놈은 멋있었다>에 이어 세 번째로 귀여니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늑대의 유혹>의 조연출이었던 강건향 감독이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았다. 주인공 소녀를 가운데 놓고, 두명의
사춘기 소녀의 일기장 <도레미파솔라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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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인에게는 <반지의 제왕>에 버금갈 매력적인 원작이지만 방대한 분량과 스케일로 미처 손대지 못했던 필독서 <삼국지>가 본격적으로 스크린에 구현된다. 같은 원작으로 제작 중인 오우삼 감독의 <적벽>에 앞서 먼저 신호탄을 울린 셈이다. <성월동화> <흑협> 등을 연출한 이인항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유덕화, 홍금보, 매기 큐가 주연을 맡았다. <삼국지>의 핵심인물을 다 담으려는 욕심을 버리고 ‘조자룡’을 전면에 내세움으로써 긴장과 압축의 묘를 발휘한다.
유비의 호위대장으로 유명한 조자룡은 단 한번도 싸움에 진 적 없는 불패의 신화를 이룩한 <삼국지>의 인기 캐릭터. 관우, 장비, 황충, 마초와 함께 오호장군을 지낸 그는 무예뿐만 아니라 충절에서도 따라올 자가 없는 장수 중의 장수다. 영화는 촉나라의 비천한 출신 조자룡(유덕화)이 용맹을 떨친 ‘장판교’ 일화로 말문을 연다. 군대에서 고향선배 나평안(홍금보)을
삼국지, 본격적으로 스크린에 구현 <삼국지: 용의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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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무어는 화끈한 대상을 정한 뒤 그걸 선정적으로 다뤄야 효과가 극대화한다는 사실을 기질적으로 믿는 사람이다. 단지 믿을 뿐 아니라 실제로 효과도 거둬왔다. 그의 영화의 주인공이 누구든, 제너럴 모터스사의 회장 로저 스미스든, 대통령 부시든, 그들은 당연히 무어의 영화에서 죽일 놈이 된다. 컬럼바인고등학교의 총격사건을 다룬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9·11을 부시의 가계와 사업도로 파헤친 <화씨 9/11>에서 그러했다. 무어의 장편 <식코>는 그 점에서 어떤 차이를 보인다. 무어는 그의 주인공 부시를 중심으로 이미지 게임이나 음모이론을 제기하는 대신, 이번에는 제도가 지닌 허점을 비교법 차원에서 비교적 찬찬히 엮어가는 방법을 택한다. 중지와 약지가 잘린 남자가 한 손가락의 마디만 봉합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으로 시작한 이 영화는 미국의 민간의료보험 시스템이 갖고 있는 난점들을 캐나다, 영국, 프랑스, 심지어 쿠바까지, 다른 국가들의 공공복지와 비
마이클 무어가 파헤치는 탐사 보도 <식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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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기능 가운데 교육과 계몽의 힘을 일찍 깨달은 것은 구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였다. 레닌이 가장 중요한 예술로 영화를 꼽은 건 마르크스주의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는 데 영화만큼 효과적인 매체가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히틀러의 독일도 이 점에선 레닌의 소련과 다르지 않았다. 미학적 완성도를 자랑하는 레니 리펜슈탈의 영화가 지금껏 비난받는 이유는 나치의 선전도구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내용 면에서 레니 리펜슈탈의 반대편에 있다고 할 수 있지만 마이클 무어에게도 영화는 교육과 계몽의 수단이다. <식코>에서 구소련의 선전영화가 인용되는 모습을 보노라면 마이클 무어는 그 점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다. <피아니스트>의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당신 영화의 메시지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메시지 같은 건 우체국에 가서 찾아라. 내 영화에 메시지 같은 건 없다”고 말하는 것과 상반된 태도다. 마이클 무어에겐 메시지가 중요하고 그의 영화는 메시지를 가장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
[편집장이 독자에게] <식코>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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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를 보았다. 일정 수준 이상이라는 세간의 평에 동의할 만했고, 무엇보다 외국의 영화광들이 보더라도 Made in South Korea임을 단박에 알아차릴 것 같은 작품이란 사실이 너무 신기했다. 하지만 죽지 않아도 될 것 같았던 캐릭터가 죽어버린 뒤엔 약간 심경이 복잡해졌다.
<괴물>이 미국에서 개봉했을 때 미국 관객의 반응을 본 적이 있다. 어떤 이들은 매우 좋다고 했지만, 다른 어떤 이들은 불쾌감을 표시했는데, 그 이유가 흥미로웠다. 그토록 똑똑하게 처신한 어린 소녀를 기어이 죽여버리다니 대중영화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말이었다. 똑똑하게 처신했는데도 죽은 사람- 이 말에는 <추격자>의 그녀도 포함될 듯싶다. 세상엔 한국영화보다 사람을 잘 죽이는 영화도 많지만 확실히 할리우드의 대중영화들은 상황에 잘 대처한 주요 등장인물들을 굳이 죽이지는 않는 것 같다.
섣부른 얘기일 수도 있지만 우리의 현대사가 남긴 어떤 종류의 잔상이 아닐까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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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론 디아즈 인터뷰해봤어? ‘그건 부적절한 질문이군요’로 일관하지. 최악의 인터뷰이야.” “러셀 크로는 생각보다 무섭지 않더군. 술집에서 싸움박질하지 말라고 스튜디오가 세트 안에 바를 만들어준 배우치고는 말이야.” “누가 뭐래도 톰 크루즈가 최고야. 어쨌건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미소를 잃지 않는단 말이지.” 나와 같은 직업을 지니고 다른 땅에서 일하는 이들을 만날 일이 간혹 있다. 할리우드의 특정 영화를 보고 감독, 배우를 단체로 인터뷰해야 하는 자리가 대표적이다. 항상 느끼는 바, 영화기자라고 모두 같은 건 절대 아니라는 사실. 말 많고 탈 많은 스타와 직접 대면하기를 밥 먹듯 하는 그들의 대화는 경청의 대상일 뿐이다. 외국 배우에 대한 기사를 쓸 때마다 그들이 작성한 인터뷰 자료를 뒤적이며 코멘트를 찾아야 하는 나는, 변방의 영화기자에 지나지 않는다.
영화전문지 출신이 아닌 탓에 나와 꼭 비슷한 표정으로 대화를 겉돌아야 했던 프랑스의 한 기자를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심
[오픈칼럼] 대통령 배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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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논하고 인생을 논하기엔 인생이 짧고 영화작업이 짧아 많이 쑥스럽다. ‘내 인생의 영화’라는 주제를 놓고 너무 많은 생각이 떠올라 그 말에 대한 분석이 먼저 필요했고, 단 한편만 꼽는 것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우선 ‘내 인생의 첫 영화’. 아는 분들은 알겠지만, 나는 영화가 좋아서 영화를 공부한 사람이 아니다. 사실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어린 시절 단 두번 극장에 가봤고 그 영화는 <건담>과 <E.T.>였다. 물론 신나서 넋빠지게 보긴 했지만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영화보다 깜깜한 극장을 나선 뒤의 강렬한 햇빛이었다. 그 햇빛은 순간 내 눈앞을 멀게 했고 앞이 안 보이는 순간의 공포가 영화보다 더 강렬했다.
그런 내가 물 흐르듯 바람에 구름 흘러가듯 철저히 현재에 충실히 지내다보니 어느 순간 계원예술고등학교 연극영화과를 입학해 있었다…. 그곳은 신세계였다!!! 전혀 알지 못하던 시청각문화가 날 사로잡았다. 아마도 입학식 하고 얼마 되지 않을 때였을
[내 인생의 영화] <페임> <스파이 게임> <디파티드> -신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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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캐서린 헤이글은 나이 들수록 어딘가 애슐리 저드를 닮아가는 것 같다, 뭐 이런 단순한 생각으로 본 영화였지만 <27번의 결혼 리허설>은 좋은 로맨틱코미디였다. 사랑에 빠진, 능력 있고 착하지만 외모가 조금 수수하고 주눅 든 30대 여성을 그릴 때 흔히 가장 간편한 방법으로 써먹는 과장과 희화화를 비교적 적게 사용하고도 공감을 이끌어낸 것만으로도 작은 수확이다. 이 사단은 전작인 <40살까지 못해 본 남자>에서 귀엽고도 쓸쓸한 남자 버진을 그릴 때 해낸 솜씨를 이번에도 잘 발휘하였다. 전작의 주인공보다 <27번의…>의 여주인공은 나이도 젊고 직업도 훨씬 좋고 능력도 있고 외모도 뛰어났지만 그 남자나 이 여자나 참 착한 것만은 동일하다. 바로 그거였다.
보는 내내 내 속을 뒤집어지게 한 것, 그 착함, 너무너무 착함, 아 제발 제인 제인 제인, 그렇게 살지 마, 하고 애걸복걸하고 싶을 정도로
[냉정과 열정 사이] 그래, 그녀보다 내가 더 겁쟁이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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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극악한 사건들이 출몰하는 이즈음이고 보니 뉴스만 보아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경험을 한다. 특히 어린 소녀 이혜진과 우예슬 사건에 대한 상심은 사실 글쓰기조차 힘들게 한다. 깊은 애도를 표한다. 나는 이 소녀들의 죽음에 뒤얽혀 있는 성폭력의 면모에 몸서리친다.
초봄의 대기층이 황사와 애탄과 비애로 덮여가는 중 다큐멘터리의 힘이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영화가 20세기의 경이적 마술 장난감으로 축포를 터트리던 시기, 크라카우어는 물리적 현실을 구원하는 장치로 영화를 생각한다. 영화와 현실의 재현, 구원의 문제는 잘 알려진 것처럼 이후 앙드레 바쟁 등을 거쳐 영화 사유의 주요 거점으로 자리잡는다. 신에서 깨어난 ‘구원없는 세상’에서 기독교를 탈색한 영화적 구원이란 무엇인가? 철학이 정언적 마지막을 선언하도록 놓아두는 대신 크라카우어는 역사가 마지막 사물들을 들여다보고 돌보도록 한다. 역사적 맥락을 지운 채 기억의 자리를 대신한 카메라가 역사에 대한 그의 화두를 열었다.
[전영객잔] 꾸준히 지속되어야 할 과거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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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사랑에 빠진 기남씨
[정훈이 만화]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사랑에 빠진 기남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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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잠수종과 나비>로 칸영화제 감독상까지 거머쥔 줄리앙 슈나벨이지만, 데뷔작 <바스키아>를 내놓을 때만 해도 그는 동료 화가의 이야기를 연출한 ‘화가 출신’ 감독으로 소개되곤 했다. 그렇게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던 줄리앙 슈나벨의 이력을 확인할 기회가 생겼다. 그의 미술작품 30여점이 아시아순회전의 일환으로 베이징, 홍콩, 상하이를 거쳐 서울에 오게 된 것이다. 이제는 오히려 영화감독이라는 수식어에 더 무게가 실리는 듯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의 작품들을 ‘영화감독’의 미술작업으로만 감상한다면 놓치는 부분이 있을 것 같다.
줄리앙 슈나벨은 1970년대 말 미국 화단에 등장하여 신표현주의의 범주에 포함되는 1980년대 미국 뉴 페인팅의 기수로 알려져 있다. 그가 등장하기 전, 당시 일부 비평가들은 예술에 냉소적인 시선을 보냈던 팝아트와 지극히 절제된 표현방식을 사용했던 미니멀리즘 작품에 대해 ‘회화는 죽었다’고 선언했었는데, 이미지와 표현력이 강조된 줄리앙
회화에서도 빛나는 줄리앙 슈나벨의 재능, <줄리앙 슈나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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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 느끼는 아버지란 존재 너머에는 그의 자식들이 만나지 못한 또 다른 ‘아버지’가 있다. 가장으로서 짊어지는 책임감은 가족이란 소규모 사회를 끌고 갈 권위를 필요로 하고, 그 권위는 아버지를 베일에 싸인 존재로 포장한다. ‘보편적’이라 여겨지는 가정에서 2세들은 아버지에 대해 깊이 알려 하지 않으며 성인이 되면서 아버지는 감정의 교류가 끊긴 상징적인 존재가 되곤 한다. 물론 최근 가장의 역할과 위상이 바뀐 게 사실이지만 아버지는 깨트릴 수 없는, 깨져서도 안 되는 신화와도 같다.
<재미난 집>의 작가 앨리슨 벡델의 아버지 역시 그런 ‘보편적’인 아버지상을 유지하고자 부단히 노력한 사람이다. 그녀는 그런 아버지가 답답하고 부담스러워 일찌감치 마음의 문을 닫는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아버지가 알면 대경실색할 비밀이 있었으니 자신이 레즈비언이라는 사실이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달은 뒤 몇번의 망설임 끝에 아버지에게 커밍아웃을 하는 그녀. 그러나 끔찍하게 무거운 침묵이나 모
아버지와 나의 커밍아웃, <재미난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