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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는 계절을 타는 조직이다. 지상파 3사는 4월 한달여에 걸쳐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한다. ‘시청률 무한 경쟁’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운 요즘 같아서야 프로그램이 피고 지는 데 딱히 철을 가리겠는가마는 개편은 방송가의 공식 중간점검이라 들여다보면 그들의 ‘속내’가 읽힌다.
이번 봄개편에서 주목할 부분은 한때 유행처럼 번졌던 ‘아나테이너’(아나운서와 엔터테이너의 합성어) 열풍이 사그라진 점이다. 아나운서 4명이 진행하던 MBC <지피지기>는 시청률 부진을 겪다 이번에 폐지됐다. KBS <상상플러스>는 시즌2로 재도약을 노리면서 아나운서 카드를 버리고 이효리에게 그 자리를 넘겼다. ‘아나테이너’의 진원지라 할 수 있는 <상상플러스>는 노현정, 백승주, 최송현 등 여러 명의 스타 아나운서를 배출한 프로그램이다. 이번 개편을 두고 일각에서는 ‘아나테이너의 종말’이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오지만 아직 단정하기엔 이르다. MBC 아나운서 6명이 공동진행하는 &
봄 타는 방송사, 그 속내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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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글래스고에 소재한 시그마 필름과 덴마크의 젠트로파사는 ‘Advance Party’라는 이름으로 세편의 영화를 공동 기획했다(배후에는 라스 폰 트리에가 있었다). ‘도그마95’의 영향 아래 있는 세 영화에는 까다로운 조건들이 주어졌다. 세명의 감독이 동일한 캐릭터와 배우를 데리고 각자의 영화를 만드는데, 글래스고시를 배경으로 찍어야 하고, 영화의 길이도 같아야 한다는 것이다. 데뷔전의 신인감독을 또 하나의 조건으로 내세운 제작진은 미국 아카데미에서 단편영화상을 수상한 안드레아 아놀드를 그중 한명으로 선택했다. 마흔이 넘은 안드레아 아놀드는 그렇게 장편영화를 만들 기회를 잡았고,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하면서 주목할 만한 감독으로 떠오른다(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도 <붉은 거리>가 상영된다). CCTV 오퍼레이터인 재키는 모니터를 통해 자기가 맡은 구역을 감시하고 관찰한다. 동료와 나누는 건조한 성관계처럼 쓸쓸한 삶을 살던 그녀는 어느 날 모니터에 잡힌 남
[해외 타이틀] 상처받은 이들을 위한 배려깊은 성찬, <붉은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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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찬가>(2001)를 보고 난 미국인 가운데 상당수는 영화에서 스티븐 스필버그가 언급되는 방식에 대해 다소 당혹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레지스탕스의 기억을 돈으로 사는 스필버그라는 존재를 대하며 누군가는 좀더 정확한 사실 관계를 밝힐 필요를 느끼기도 했고 또 누군가는 신랄한 조크이지만 좀 과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갖기도 했다. 사실 스필버그에 대한 장 뤽 고다르의 과격한 공격 혹은 비꼼은 꽤 오랜 시간을 거슬러간 지점부터 시작되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고다르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는 단지 스필버그 개인에 대한 어떤 악감정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세계가 조직된 방식과 그 세상에서 영화가 존재하는 방식에 대한 시인적이면서 철학가적인 통찰력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금세기 들어 고다르가 처음으로 내놓은 영화인 <사랑의 찬가>는 분명 <영화사>(1998) 이후의 작품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고다르의 너무도 방대하고 야심적인 전작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기
고독과 사색, 혁신을 조화시킨 전설의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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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결코 시작되거나 끝나길 멈추지 않는다. 이야기는 차이들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에 머리없이, 꼬리없이 나타난다. 그것의 (무)유한성은 완전성에 관한 모든 개념을 전복하고 그것의 틀은 총체화할 수 없는 상태로 남는다. 그것이 가져오는 차이들은 구조들의 유희, 표면들의 활동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음색과 침묵 속에도 있다.”-트린 T. 민하, <여성, 원주민, 타자>(Woman, Native, Other) 중에서
베트남 태생 여성인 트린 T. 민하는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고 세네갈을 거쳐 미국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독립영화감독이자 작가, 이론가이다.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넘나드는 그녀의 작품들은 완결된 서사와 매끄러운 편집, 균질적인 사운드를 거부한다. 그녀가 보기에 하나의 중심으로 모여드는 서사나 규정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내레이션, 서사의 틈을 메워주는 음악은 서구 중심주의와 남성 중심주의의 부산물이다. 다시 말해 트린 T. 민하의 실험적이고 비관습적인
3세계 여성의 해방을 위하여, 트린 T. 민하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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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불어라 봄바람>을 내놓은 이후 장항준 감독은 계속 수면 아래 있었다. 그가 준비해온 <꿈의 시작>과 <메이드 인 홍콩>이라는 대작 프로젝트는 촬영을 코앞에 둔 시점에 운 없게도 좌절의 호수 속으로 빠져들었다. <라이터를 켜라> 같은 연출작이나 <북경반점> <귀신이 산다> 같은 시나리오를 통해 독특한 코미디 세계를 구축해온 그에 대한 궁금증이 치솟아 오를 무렵, 그는 영화를 들고 갑자기 나타났다. 그것도 한꺼번에 두편을. 그가 만든 <전투의 매너>와 <음란한 사회>는 케이블 채널 OCN이 주최하는 ‘무비배틀’에서 김정우 감독이 만든 두편의 영화와 격돌을 벌이게 된다. 일러스트레이터인 여자와 가전제품 대리점 직원인 남자의 연애담을 그린 <전투의 매너>는 4월17일 극장에서, 인생에서 쓴맛을 본 세 남자가 성인용품을 팔면서 희망을 찾게 된다는 <음란한 사회>는 4월25일
[장항준] “인생은 즐겁다. 언제 뒤집어질 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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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노인을 위한 노인은 있다. 허리는 굽고 눈은 침침하며 각종 질병이 시든 육체를 공습하지만 아픔도 쪼개면 가벼워지는 법이니, 노인과 노인이 짝패를 이룬 두편의 ‘실버 버디무비’를 비교분석해봤다. 죽음을 눈앞에 둔 채 마지막 여행길에 오르는 <버킷 리스트>와 황혼에 찾아온 사랑으로 꺼졌던 열정을 지피는 <그럼피 올드 맨>. 세월은 유수와 같고 그 앞엔 장사가 없으니, 이들의 특출난 노후 설계를 적극 참조해보자.
질병과 고독, 어떤 말년이 더 우울한가
<버킷 리스트> 승!
<버킷 리스트> 결국은 병원 신세다. 왕년엔 제법 총명한 청년이었으나 여자친구가 덜컥 임신하면서 대학을 중퇴한 카터는 40년간 자동차 정비공으로 온몸에 기름때를 묻혀가며 가족을 부양한다. 퀴즈쇼에 채널을 고정하고 나홀로 정답을 중얼거릴 정도로 지식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지만, 결국은 일흔을 앞둔 나이에 암 선고를 받는다. 한편
[VS] 어느 쪽 노후설계가 더 솔깃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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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베를린영화제, 스티븐 소더버그의 <트래픽> 기자회견장에서 영화의 다큐멘터리적 기법에 대한 질문과 찬사가 쏟아지던 가운데, 한 기자가 “그런 건 이미 당신 선배들이 다 했던 것 아니냐”고 비꼬았다. 그러자 소더버그는 “줄스 다신의 <네이키드 시티>를 말하는 거죠?”라고 웃으며 답한 뒤, 그는 가장 존경하는 감독 중 하나가 줄스 다신이라며 그의 또 다른 작품 <리피피>에 오마주를 바치는 가벼운 강탈 영화도 하나 만들 것이라 했다. 그 강탈 영화가 바로 <오션스 일레븐>(2001)이었다. 주도면밀한 강탈 현장을 세심하게 재현해낸다는 점에서 <리피피>는 <오션스 일레븐>은 물론 저 멀리 장 피에르 멜빌의 <형사>(1971)부터 최동훈 감독의 <범죄의 재구성>(2004)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영화들의 원조라 할 수 있다. 오리지널이 드문 시대, 그렇게 또 하나의 ‘원본’ 감독이 사라졌다.
지난
[줄스 다신] 범죄를 가장 먼저 재구성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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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28일 중국의 다큐멘터리 감독 저우하오가 인디다큐페스티발 참석차 방한했다. 저우하오는 중국 공산당에서 발행하는 신문 <신화통신>에서 기자로 활동하다 2003년 다큐멘터리 <호우지에 타운십>으로 데뷔한 감독. 이번 영화제에서 상영되는 작품은 2006년작인 <고3>과 2007년 작품인 <약쟁이 아롱씨>다. <고3>은 입시문제를 통해 성공이란 틀로 정해진 중국 청소년들의 미래를 쓸쓸하게 바라보는 작품이고 <약쟁이 아롱씨>는 마약에 찌들어 사는 남자 아롱을 따라다니며 찍고 찍히는 관계에 대해 탐구한 영화. 2년이 넘게 걸리는 제작과정이지만 저우하오 감독은 이미 두편의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그에겐 아직 못다한 중국의 뒷이야기가 많이 있는 걸까. 저우하오 감독을 만나 두편의 다큐멘터리에 대해 물어보았다.
-<고3>을 구상한 출발점이 궁금하다.
=중국에선 대학 입시를 높은 시험이란 뜻으로 고고(高考
[저우하오] “다큐멘터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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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태 감독의 장편 데뷔작 <마지막 밥상>이 완성된 지 2년 만에 4월11일 인디스페이스에서 개봉한다. 이보다 조금 앞선 3월19일엔 프랑스 파리에서 먼저 정식 개봉했다. 국내 배급을 위해 이리저리 부딪히길 2년, 고생 뒤에 찾아온 결과다. 유령처럼 떠돌며 사는 가족들의 삶을 실험영화 방식으로 담은 <마지막 밥상>은 확실히 국내에서 쉽게 개봉할 수 있는 종류의 작품은 아니다. 캐릭터는 설명을 거부하고 파편적으로 이어지는 이미지는 불균질한 흐름 안에 녹아 있다. 변하지 않는 일상 속에서 답답함을 느끼던 가족들이 화성으로 이민을 가며 끝나는 영화의 결말까지 추상적이고 괴상하다. 영화의 개봉을 맞아 노경태 감독을 만났다. 현재 충남 청운대학교에서 영화를 가르치고 있는 노경태 감독은 이미 두 번째 영화 <허수아비들의 땅>을 찍어 칸영화제에 응모했다고 했다. 한손엔 <마지막 밥상>을, 다른 한손엔 <허수아비들의 땅>을 갖고 인터뷰 자리에
[노경태] “큐비즘의 영화라고도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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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정소동이 돌아왔다. <영웅>부터 <연인> <황후花> <명장>까지, 중국발(發) 대작영화 속 무술감독 정소동도 훌륭하지만, <천녀유혼> <동사서독>을 기억하는 팬이라면 감독 정소동은 여전히 묵직한 이름이다. <연의 황후>를 연출작으로 선택한 이유는 “액션과 멜로의 조화” 때문. 진혜림을 축으로 견자단과 여명을 배치한 삼각관계부터 그의 포석이 드러난다. 진혜림과 여명이 한국에서 홍보활동에 여념이 없는 동안 중국의 정소동에게 서면으로 질문을 전달했다. 그의 차기작은 베이징올림픽 개막식이다.
-<벨리 오브 비스트>는 일종의 할리우드 진출작이었다. 어떤 작업이었나.
=스탭들은 모두 친절했고, 행복하게 작업할 수 있었지만,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스타일에 대한 적응이 필요했던 것도 사실이다. 촬영 전 준비기간이 길었다.
-<연의 황후>의 원제인 ‘江山美人’은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오리
[스폿 인터뷰] “사회에 대한 불만으로 영화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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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과거를 영화로 만들면 어떤 장르가 되냐고요? 코미디에 가까울걸요?” 왜 아니겠나. 순진한 처녀행세에 막무가내 떼쟁이 말투를 따라하는 ‘색정녀’로 대변신한 끝에(<웨딩 크래셔>) 주연의 인기까지 빼앗았던 이 여자, 무려 ‘보랏’의 여자다. 스코틀랜드 출신 부모를 두고, 오만에서 태어나, 호주에서 자란 그의 이름은 아일라 피셔(Isla Fisher). 빈스 본(196cm)과의 열연으로 스타덤에 오르고, 사샤 바론 코언(191cm)과 약혼한 뒤 딸을 낳은데다가, 최근에는 라이언 레이놀즈(189cm)와 짝을 이룬(<나의 특별한 사랑이야기>) 그는 160cm의 단신이다. 눈에 띄는 빨강머리까지 더해지니, 그의 외모며 파트너와의 궁합 역시 (굳이 따지자면) 코미디에 가깝다. “사샤와 나의 사진이 꽤 언론의 인기를 끌더군요. 나는 마치 서커스 광대처럼 보인다니까요.” “코미디를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별난 괴짜는 남자들이 맡게 마련이니까. 그런데 사샤가 말하더군요.
[아일라 피셔] 무려 보랏의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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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말. <무간도>의 여의사와 <첨밀밀>의 순박한 청년이 한국을 방문했다. 진혜림과 여명. 둘은 가수와 배우로 활동한 기간이 10년을 훌쩍 뛰어넘는 홍콩의 대중스타. 진혜림에게는 <친니친니> <냉정과 열정 사이>, 여명에게는 <타락천사> <유리의 성> 등 대표작으로 떠올릴 만한 영화도 꽤 많다. 그럼에도 <무간도>와 <첨밀밀>이라는 인장은 쉽게 거둬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조신하고 차가운 여성미와 순수하고 우직한 일편단심. 춘추전국시대 여인의 몸으로 천하를 통치하게 된 연비아와 암살단에 공격받는 그녀를 거두는 의사 난천이라는 조합과는 잘 연결되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연의 황후> 속 두 사람은 꽤 귀여운 한쌍이다. 황후로서의 책임을 다하려는 말괄량이 공주와 자연을 벗삼아 전쟁을 멀리하는 망국의 무사 혹은 사랑을 위해 속세를 뒤로하는 뜨거운 여인과 그 여인이 임무를 다할 수
[여명, 진혜림]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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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니치와.” 인터뷰 장소로 잡은 호텔로 들어가는 길. 회전문 앞에 서 있던 벨맨이 그녀에게 인사했다. 난데없이 들린 일본어에 그녀의 큰 눈이 더 또렷한 동심원이 됐다. “우히힛, 제가 일본 사람처럼 보였나봐요.” 사건의 재구성. 평소 일본어를 비롯해 영어, 중국어 등등 몇 가지 외국어 인사말을 장전해놓았을 벨맨은 그곳에 서서 얼굴만 봐도 국적을 감별할 수 있는 감식안을 기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얼굴이 조그맣고, 눈은 크고, 드라마 <아일랜드>의 대사를 빌리자면 “썰어서 세 접시는 나올(만큼 두꺼운) 입술”을 가진 여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에게는 그녀가 누구라는 사실보다 그녀가 어느 나라 사람인지가 중요하다. 그는 단박에 그녀의 국적을 일본이라고 판단했고 자신있게 인사했다. 오로지 일에 열중한 한 남자의 착각이다. 그런데 그의 착각에는 김민정도 책임이 있다. 어린 시절부터 연기를 해왔지만 희한하게도 김민정은 언제나 숨은 배우다. 사람들은 그녀의 작품이 세상에
[김민정] 20년, 소녀는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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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그리스의 테살로니키국제영화제는 새삼스레 잊고 있던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경험이었다. 영화제에 가는 것이 다시 즐거움으로 다가온 것이다. 호텔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허름한 극장들에서 나는 하룻동안 예닐곱편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가장 많은 사람이 몰린 것은 일본 거장 감독 나루세 미키오와 말레이시아 야스민 아마드의 회고전이었지만, 나는 주로 남아메리카영화와 이 영화제의 최대 강점인 동유럽 최근 영화들을 보았다. 그 지역 영화들에 대해 그다지 아는 것이 없어서 영화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모른 채 제목, 줄거리와 포스터가 얼마나 매력적인가를 보고 뭘 볼지를 결정했다. 그렇게 해서 보게 된 최고 영화는 폴란드에서 온 시적인 성장영화 <속임수>(Tricks)와 세르비아에서 온 심리스릴러영화 <함정>(The Trap)이었다. 이 영화들은 정말이지 그때그때 자유롭게 내린 결정들을 통해 얻게 된 수확물들이다. 이런 실험적 시도가 가능했던 이유는 보고 싶은
[외신기자클럽]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