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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숨쉬는 공기>는 희로애락(喜怒‘愛’樂)의 네 가지 챕터로 구성된 다중 캐릭터 영화다. 첫 번째 챕터 ‘해피니스’(Happiness). 펀드매니저 포레스트 휘태커는 조작 승마에 돈을 걸었다가 갱두목 핑거스(앤디 가르시아)에게 빚을 지고 은행을 털기로 계획한다. 두 번째 챕터 ‘플레저’(Pleasure). 핑거스의 부하인 브렌단 프레이저는 자신의 능력으로도 정해진 미래를 바꿀 수 없다는 사실에 고통받는다. 세 번째 챕터 ‘소로우’(Sorrow). 핑거스에게 학대당하는 젊은 팝스타 사라 미셸 겔러는 자신을 숨겨주는 브렌단 프레이저와 사랑에 빠진다. 마지막 챕터 ‘러브’(Love). 의사 케빈 베이컨은 짝사랑해온 친구의 아내(줄리 델피)를 살리기 위해 희귀 혈액 소유자인 소로우를 찾아다닌다.
모든 인간은 각자의 삶와 운명 속에서 헤엄치지만 결국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보편적 우화로서 <내가 숨쉬는 공기>는 <숏컷> <바벨> <크래쉬
희로애락에 대한 멀티 플롯 우화 <내가 숨쉬는 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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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밥상>은 신인 노경태 감독이 연출한 독립장편영화다. 짐작건대 화성으로 이민을 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화성이 그들에게 무엇을 약속하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그들은 어쨌든 더이상 지구(라기보다는 대한민국)에서 살 여력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다. 직장을 잃은 중년의 남자, 무력과 실의에 빠져사는 것 같은 젊은 남자, 장터에 무언가를 내다팔며 근근이 삶을 견디는 시골의 할머니, 군에서 아들을 잃고 무속에 기대어 사는 중년의 여자, 컴퓨터에 매달려 사는 덩치 큰 젊은 여자.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가난하고 외로워 보인다는 점이다. 실은 이 인물들이 어떤 사회적 소집단으로 서로 얽혀 있는지 마침내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 영화는 밝히고 있지만 그걸 밝히거나 그렇지 않거나 하는 것이 이 영화의 어법상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다. 중요했다면 좀더 긴밀하게 다뤄야 했으며, 밝힌다고 해서 영화의 사유가 더 진전되는 지점이 없다. 그들이 외롭고 헐벗어서 기댈 곳 없는
기댈 곳 없는 사람들 <마지막 밥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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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베를린 비경쟁부문에서 상영된 <정원의 반딧불들>(Fireflies in the Garden)은 어느 미국 중산층 가족의 초상이다. 작가 마이클(라이언 레이놀즈)은 어머니 리사(줄리아 로버츠)와 아버지 찰스(윌렘 데포), 이모 제인(에밀리 왓슨)을 만나기 위해 시골집으로 향한다. 어린 시절 폭압적인 찰스의 훈육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마이클에게 리사는 가족을 떠받치는 기둥이다. 그러나 리사가 갑작스런 사고로 사망하자 그간 숨겨져왔던 가족의 비밀이 밝혀진다. 영화 속 미국 중산층 가족은 폭압적인 아버지와 인고의 어머니, 그리고 덜컹거리는 부자관계까지 기이할 정도로 한국적인 가족상에 가깝다. 그토록 미묘한 한국성은 작가 최인호 감독의 외조카이기도 한 감독 데니스 리의 핏줄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서면 인터뷰로 궁금한 점들을 물어봤다.
-올해 베를린에서 할리우드 스타들이 대거 출연한 저예산 인디영화 감독으로 화제를 모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데뷔작으로 이만한 국제적 인지도를 얻
[데니스 리] 캐리 앤 모스를 캐스팅한 것이 행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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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는 한국에서 보편적인 주거형태다. 인구는 많고 땅은 좁으니 많은 사람이 작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점유하기에 적당한 방식이다. 여러모로 도시생활자의 편의를 고려해 설계한 집인데 그렇다고 아파트에 사는 각자의 필요를 모두 충족하는 것은 아니다. 2인 가구라면 왜 30평도 안 되는 아파트에 방을 3개나 만들었나 불만스럽고 5인 가구라면 좁더라도 방을 4개로 만들어주길 바랄 것이다. 가족 구성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불만사항이 다르지만 아파트는 각자의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없다. 가장 많은 가족 형태를 모델로 평균치의 감각으로 만든 집이기 때문이다. 부동산에서 방 하나에 거실 넓은 30평 아파트를 찾아달라고 하면 면박당하기 십상이다. 현대사회에서 대량 생산, 대량 소비 시스템에 포섭되지 않는 욕망을 실현하는 일은 어렵다. 돈도 노력도 더 많이 들여야 한다. 아파트를 예로 들었지만 평균치 감각과 평균치 욕망을 원하는 것은 건설회사만이 아니다. 대형 마트에서, 커피 체인점에서, 브랜드 의류
[편집장이 독자에게] 틈새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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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마이클 강의 <웨스트 32번가>를 통해 코리안 아메리칸 영화의 간을 슬그머니 본 경험이 있다. 하지만 마이클 강의 <웨스트 32번가>는 한국 자본으로 동포감독을 이용해 미국을 공략해보겠다는 충무로적인 전략의 일환이었고, 서사와 미학적 경향에서도 (<올드보이>의 리메이크판을 연출할!) 저스틴 린의 <베터 럭 투모로우>처럼 전형적인 ‘아시안 아메리칸 영화’에 머무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미국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코리안 아메리칸 감독들은 더이상 뉴욕과 LA의 뒷골목에서 총을 들고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아시아계 아이들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들은 줄리아 로버츠, 케빈 베이컨, 브렌단 프레이저 같은 할리우드 스타들을 데리고 중저예산의 데뷔작을 할리우드 자본으로 만들거나 혹은 뉴욕 인디영화계의 지원을 받으며 노마드적인 예술적 자화상을 그려나간다. 그들은 도대체 누구인가. 베를린국제영화제 비경쟁부문에 출품된 &l
코리안 아메리칸 시네마가 전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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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당당한 표절은 처음이었다.
6년쯤 전이었다. 사무실로 두툼한 우편물이 하나 날아왔다. 남쪽 지방의 한 도시에서 자칭 ‘소설가’라는 50대 아저씨가 자신의 신작 소설이라며 보내온 것이었다. 베트남전 당시 사이공에서 사랑을 나누다가 헤어진 한국군 사병과 베트남 여인이 1990년대에 다시 만나 피치 않게 악연을 맺는다는 내용이었다. 책을 펼쳐 잠깐 훑어보다가 깜짝 놀랐다. 소설의 상당 부분은 당시 내가 일하던 잡지의 기사에서 발췌한 것이었다. 나를 포함해 동료들이 쓴 르포기사의 문장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기가 막혔다. 짜깁기와 베끼기로 소설을 바느질해놓고서, 원문을 쓴 기자에게 책을 보내주는 것은 무슨 심리란 말인가. 우편물 겉봉엔 자신의 주소와 전화번호까지 당당히 적혀 있었다. 제 기사를 활용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라고 전화라도 해달라는 말인가. 항의를 할까 한참 고민하다가 관두었다. 첫째, 귀찮았다. 둘째, 표절을 했지만 그가 명성이나 영달을 누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가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표절의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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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밤과 낮>을 보자고 했다. 아니, 도대체 왜? 나름 데이트라면 데이트인데, 홍상수의 영화가 웬말인가. 영화를 보는 동안 그녀는 영화 속의 남자에 빗대어 옆자리에 앉은 나를 간볼 게 분명했다. 너도 똑같잖아. 너가 아무리 입에 침바른 소리를 해봤자 저 남자랑 다를 바 없는 거 아냐?(알면서 왜 그러시는지). 그렇다고 내가 그녀를 홍상수의 영화에 등장하는 여자들에 빗대어 ‘자기는 뭐 다른가?’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상황은 더이상 연애에 기대를 걸지 않는 나이가 돼버린 남녀의 냉소 가득한 데이트처럼 보였다. 더이상 순진한 척을 할 수 없는, 했다간 나잇값 못한다는 소리나 들을 게 뻔한 데이트. 아마 <밤과 낮>을 미리 봤다면 내 스스로에게 말했을 것이다. “당신 조심해.”
그래놓고선 정작 <밤과 낮>을 볼 때는 내내 키득거렸다. 그녀는 그만 좀 웃으라며 내 팔을 찔렀지만, 웃지 않고서는 도리가 없었다. 웃음이 나기도 했지만, 김성
[오픈칼럼] <밤과 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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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때였다. 나는 창문도 없고 전압이 낮아서 냉장고만 돌아가도 형광등이 깜박거리고 헤어드라이를 켜면 전기가 나가버리는 그런 곳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공동화장실에는 지붕이 없어 비가 오는 날에는 화장실에서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정취가 있는 곳이었다. 자취방은 재래시장 건물 안에 있었는데 내부에는 낮에도 빛이 안 들어오는(방에 창문이 없으니까) 한칸짜리 작은 방들이 수십개 모여 있었다. 건물 기둥은 시멘트가 떨어져나가 철근이 들여다보였다. “시멘트와 철근을 기준량의 절반도 안 쓴 것 같아. 학교에서 배운 건물 붕괴 조짐 사진하고 똑같은데…. 곧 무너지겠다.” 건축을 전공하는 친구가 말했다.
친구여, 무너지겠는 건 내 청춘이라네. 나는 그때 첫사랑과 막 이별을 한 참이었다. 삼각형의 세 내각의 합이 180도인 것처럼 알 듯 모를 듯한 자연스러운 이유로 헤어졌기 때문에 나는 우리의 엇갈리는 마음에 이상함과 서글픔을 더 느꼈었다. 게다가 무너질 것 같은 자취방에 새벽이면 술을 사
[내 인생의 영화] <중경삼림> -장형윤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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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운 골목, 서울의 주름 사이를 가쁘게 미끄러져가고 있는 한 사내를 떠올린다. 미진(서영희)이 선 우연의 문(門) 앞에서, ‘들어오세요’라고 말하는 남자의 적당히 이완된 말씨를 그려본다. 그의 이름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 그의 이름을 자꾸 생각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 말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으면,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보라.’
어떤 영화를 보고 나면 마음이 아프고, 어느 작품은 머리가 아픈데, 이 영화를 보고나선 며칠간 몸이 아렸다. 영화가 끔찍한 장면을 다뤄서만은 아니었다. 영상 속 폭력에 무던해진 지 오래고, 어느 면에선 그것만큼 지루한 것도 없다고 생각해오던 터였다. 그런데도 필름이 피를 타고 도는 느낌이 났다. 가까스로 화염 속에 들어간 소방관이 결국 시신을 안고 나왔을 때처럼, 몸에서 지워지지 않는 탄내가 났다. 나는 내가 왜 힘든지, 또 무엇이 나를 두렵게 하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아무리 궁리해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이름’이란
[냉정과 열정 사이] 우리가 알 수 없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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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취적이고, 폭력적이고, 활발하고, 젊으며 대담하고 사악해.” 그저 재미로 혼자 사는 여인을 잔혹하게 살해한 난폭한 젊은이가 내무부 장관에게는 이상적인 실험의 모델이 된다. “그는 완벽해.” 살인죄로 14년형을 선고받은 알렉스. 2년간의 지루한 교도소 생활 끝에 테크놀로지의 힘으로 악인을 선인으로 바꿔준다는 ‘루도비코법’의 대상자로 선정된다. 치료소에서 몇주간의 치료만 받으면, 그는 완전히 새 사람이 되어 사회로 나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처벌의 이론들
1971년에 제작된 <시계태엽 오렌지>는 1995년의 영국, 당시로서는 24년 뒤의 미래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영화에는 철학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몇 가지 문제들을 제기한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물론 형벌에 관한 법철학적 논의들이다. 영화에서 다루어지는 것은 보복론과 치유론(혹은 재사회화론)의 대립이다. 교도소장은 형벌에 대한 견해 중에서 가장 고대적인 관념을 대변한다. 형벌이란 모름지기 보복을 통한
[진중권의 이매진] 범죄자, 진정으로 도덕적인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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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집을 나가고 아버지는 죽는다. 아이들은 버려져 삶의 지옥을 목격한다. 그리고 말하기를 멈춘다. 말하기를 멈추었으므로 그들에게 선택은 두 가지다. 세상을 폭파하거나 자신을 폭파하거나. 이건 장르영화가 사랑하는 길이다. 현실을 사는 우리 대부분은 그럴 용기가 없다. 아오야마 신지는 <헬프리스>(1996)와 <유레카>(2000)에서, 어느 쪽도 할 수 없어 세상의 변방 혹은 황야를 떠도는 아이들의 침묵을 찍었다. 특히 <유레카>에서, 말해질 수 없는 상실과 상처를 흐느끼듯 사무치게 찍었다.
그들이 떠도는 황무지는 불친절하지만 세상과 달리 그들의 침묵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게 그들이 떠나온 이유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서부극의 낭만적인 황무지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신화는 소멸한 지 오래이고, 황무지는 문명의 피안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문명에 갇혀 있다. 문명의 포위망은 더욱 확장될 것이고 황무지는 점점 왜소해질 것이
[전영객잔] 수평적이며 비혈연적인 유대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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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 하하. 이걸로 비앙카가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르면 재미있겠당. 라스가 사는 마을 사람들 같은 분위기가 그대로 이어지는 영화가 또 한편 개봉되죠. <댄 인 러브> 말입니다.
어스: 맞아요.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에 동화책에서 집단 탈출한 듯한 이웃들이 등장한다면 <댄 인 러브>에는 그런 가족이 나오죠.
헬프: 어떻게 보면 퇴행적이라는 느낌마저 없지 않았어요. -_-
어스: 아내를 여의고 세딸을 키우는 상담 칼럼니스트 댄(스티브 카렐)이 추수 감사절 가족 모임을 위해 부모 집에 왔다가 하필 동생의 여친(줄리엣 비노쉬)과 사랑에 빠지는 난감한 로맨스입니다. 영화의 첫 장면은 칼럼니스트 댄이 아침에 기상하는 장면인데요.
헬프: 옆에 아내가 있는 줄 알고 더듬거리다가 없음을 확인하고 쓸쓸하게 일어나는 장면이죠.
어스: 더블베드인데도 한쪽에 몰려서 자고, 그의 옆에는 연인이나 배우자가 아니라 밤새 보던 자료들이 누워 있더군요. 보는
[메신저토크] <댄 인 러브>, <천일의 스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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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프리스(lifeisntcool@naver.com)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어웨이 프롬 어스(vermeer@cine21.com)님이 입장하셨습니다.
헬프리스님(이하 헬프)의 말: 아! 오늘 제 대화명도 <어웨이 프롬 허>에서 따왔어요. 오래 하다보니 닮아가는 듯. 그래서 메신저토크를 끝낼 때가 됐나봐요. ^^ <어웨이 프롬 허>의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 흐르는 K. D. 랭의 노래 제목이 <헬프리스>거든요. 살면서 무력감에 얼마나 잘 적응하냐가 무척 중요하다는 생각을 저 자신이 종종 하고 살아서리….-_- 그리고 ‘Help Lee’s’라고 새기면 “이군이 하는 짓거리 좀 도와주구려”의 뜻도 되고. ^^
어웨이 프롬 어스님(이하 어스)의 말: 쯧쯧. 선배는 꼭 딱 좋을 때 한발 더 나아가신다니까요. 제가 선배를 멈췄어야 했는데…. -..-
헬프: 마지막이잖아요. 좀만 참아주구려. -_-#
김혜리: 20대 후반 감독의 데뷔작으로선 의외
[메신저토크] <어웨이 프롬 허>,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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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흥행영화
장년층에게 추억으로 환심
“수익을 본 것은 아니지만 과거 흥행작에 대한 관객의 지지는 확인했다.” 지난해 11월 드림시네마에서 재개봉한 <더티댄싱>은 현재까지 약 1만2천명 관객을 동원했다. 재개봉을 추진한 즐거운시네마의 김은주 대표는 드림시네마에 이어 옛 허리우드극장을 인수해 ‘추억의 흥행작 전용관’을 설립했고, 이곳에서는 지난 4월1일부터 <벤허>를 상영하고 있다. <더티댄싱>이 화제가 되면서 심지어 몇몇 멀티플렉스도 이 추세에 동참하려는 조짐을 보일 정도다. 하지만 <더티댄싱>을 관람한 관객이 “왜 멀티플렉스까지 고전영화를 상영하려 하냐”며 “오래된 영화를 오래된 극장에서 보는 게 더 좋다”는 내용의 글을 극장 홈페이지에 올리고 있다. 김은주 대표가 바라보는 틈새는 30, 40대 관객이다. 50대 이상의 관객은 영화정보에 대한 접근도가 낮기 때문이지만 자신이 함께 추억을 공유한 세대가 30, 40대이기 때문이기도 하
[틈새 속의 틈새시장 생존전략] 숨겨진 1%를 찾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