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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이 걸렸다. 10년 만에 발표된 포티스헤드의 세 번째 앨범은 제목도 간략하게 ≪Third≫,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존재감이 느껴지는 것은 이들이 포티스헤드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는 게 다소 성의없어 보여도 어쩔 수 없다. 베스 기븐스의 보컬은 여전히 심해를 배회하는 어떤 생물체처럼 음습하고 애드리안 우틀리의 기타 리프도 여전히 종잡을 길 없이 난감하다. 심지어 첫 싱글의 제목은 <Machine Gun>, 첫곡의 제목은 <Silence>다. 이 모순적이고 비대칭적인 조합이야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포티스헤드의 사운드를 단칼에 상징한다. 트립합, 노이즈록 같은 장르가 이 사운드를 수식한다고 해서 포티스헤드의 사운드가 여기에 완전히 수렴되는 것도 아니다. 차라리 ‘우울할 때 들으면 그 우울함의 정도가 짜증과 함께 바닥까지 치닫는 음악’이라고 설명하는 편이 낫다. 편한 마음으로 듣기 어려운 음악인 것은 분명하지만 기타로 만들 수 있는 뻔한 사운드와 무드에 질린
우울이 바닥을 치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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팝밴드 ‘스위트박스’를 여자 솔로의 이름으로 알고 있었던 이들도 아마 적지 않을 것이다. 1995년 2명의 독일 프로듀서 헤이코 슈미트와 로베르토 ‘지오’ 로산이 일본시장을 베이스로 결성한 팝밴드 스위트박스는 3인조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히트를 기록한 <Everything’s Gonna Be Alright>(1998)는 1기 여성보컬 티나 해리스가 부른 곡. 스위트박스는 2001년 제이드 발레리 빌라론 영입 뒤 일본과 한국시장에서 전성기를 누렸다. ≪Out Of The Box≫는 6년간 팀의 프론트우먼이자 송라이터 역할을 했던 제이드 발레리가 내놓은 첫 솔로 앨범이다. 그리고 팀의 또 다른 기둥이었던 지오가 이 앨범의 프로듀싱 작업을 맡았다. 스위트박스의 동양적인 팝멜로디 감각을 좋아했던 이라면 이 앨범도 환영할 듯하다. 솔로 앨범이라선지 확실히 제이드 발레리의 개성에 모든 걸 집중한 느낌이다. 그런지한 사운드와 펑키한 비트로 한껏 맛을 낸 첫 트랙 <Tuned Up&
스위트박스 밖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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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리동네>를 떠올리지 말길. 우리 이웃에 두명의 살인마가 살고 있다는 섬뜩한 착상에서 출발한 동명 스릴러와 달리 이 작품은 인류가 존재한 이래 매일같이 반복됐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그리는 착한 뮤지컬이다. 여기, 골목을 두고 다정하게 마주본 두 가정이 있다. 김 박사네 아들 상우는 앞집 이씨네 딸 선영이를 좋아하고, 선영이 역시 상우를 따른다. 우리 동네의 소소하지만 정감있는 하루가 그림처럼 지나가면 어느새 4년 뒤. 상우와 선영이가 결혼식을 올리려는 순간이다. 그야말로 화양연화, 행복한 두 사람. 하지만 시간은 어김없이 흘러 7년 뒤 선영이는 둘째아이를 낳다 세상을 떠나고 만다. 탭댄스가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몇 장면을 제외하곤 화려한 노래나 춤 따윈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이 공연이 진정으로 힘을 발휘하는 것은 그 순간이다. 죽어버린 사람들이 자기 무덤에 앉아 삶과 죽음을 이야기할 때 어떤 이들은 어찌할 수 없는 세상의 이치에 마음을 베이거나 남은 생이 너무 소
평범해서 감동적인 우리들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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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미술에서 포스트 모더니즘은 기존의 작품 개념을 해체하는 것을 뜻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적 관점에서 창조란 그리거나 조각하는 등 기술적인 방법으로 이미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명화들의 이미지를 차용하거나 패러디하는 등의 방법으로 작품을 만들고 개념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때 진짜, 원래의 것을 뜻하는 오리지널리티의 개념도 다르게 해석해야 한다. 수공예적인 기술로 이미지를 재현할 때에는 그 작품 자체가 오리지널리티를 가지지만, 작품의 개념을 창조하는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에는 작가의 머리 속에서 나오는 개념 자체를 오리지널리티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원형’으로 해석될 수 있는 전시 제목은 현대미술의 의미 자체를 포괄한다. 백남준, 요셉 보이스, 안젤름 키퍼 등 현대미술가들의 거점이 되었던 베를린, 그곳에서 활동하는 여섯 작가들의 회화, 사진, 조각, 비디오, 설치 작업을 보이는 전시가 이렇게 거창한 전시명을 부여받은 것은 현재, 베를린이 새로운 예술의 중심지로
새로운 예술의 중심지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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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90년대 고우영, 이두호, 윤승운, 오세영 등이 그려낸 한국 전통물은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인정받으며 한국 만화를 대표하는 한 장르로서 자리잡았었다. 그러나 일본 만화의 직수입이 시작된 1990년대 중반부터 전통물이 설 자리는 줄어들었고 2000년대 들어서는 그 명맥조차 끊길 위기에 처했다. 그런 상황에서 <춘앵전>과 같은 만화의 등장은 반갑기 그지없는 일이다. <천일야화>로 ‘2006년 하반기 오늘의 우리 만화상’을 수상한 한승희, 전진석 콤비가 철저한 자료조사와 함께 탄생시킨 <춘앵전>은 여성 국극의 창시자 임춘앵을 모델로 한 독특한 퓨전순정만화다.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사주팔자가 모두 ‘양’(陽)인 양팔통의 사주를 갖고 태어난 여장부 임춘앵. 그녀가 초창기 연예기획사라 할 수 있는 ‘권번’에 들어가 갖은 고난을 극복하고 춤과 소리에 능한 명기로, 그리고 전통을 재창조해 진정한 예인으로 거듭나는 과정을 순정만화의 외피 속에 절묘하게
순정물로 만나는 여성 국극의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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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지식포럼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세컨드라이프의 창립자 필립 로즈데일이 인터넷 가상경제사회의 아이디어를 얻은 것은 한 SF소설에서였다. “<스노 크래시>를 읽고 내가 꿈꾸는 것을 실제로 만들 수 있다는 영감을 키웠다”는 것. 2005년 <타임> 선정 ‘현대 영미소설 베스트 100선’에 꼽히기도 했던 <스노 크래시>의 의미는 저자 닐 스티븐슨이 세컨드라이프와 같은 새로운 세계관과 ‘아바타’ 같은 단어를 만들어냈다는 데 있다. <크립토노미콘>과 <다이아몬드 제국>을 읽은 사람이라면 닐 스티븐슨이라는 이름만으로 이미 지름신의 강림을 느낄 수 있으리라. 근미래의 LA. 주인공 히로 프로타고니스트는 최후의 프리랜서 해커를 자청한다. 히로는 가상세계인 메타버스와 현실세계 양쪽에서 활동하는 가장 뛰어난 검객이기도 하지만 현실세계에서는 피자 배달부로 일한다. 히로는 ‘스노 크래시’라는 신종 마약에 관련된 음모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다. 1992년
1992년에 예측한 사이버펑크 가상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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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 하얀 피부와 매끈한 얼굴, 날씬한 몸매와 가는 허리, 탱탱하게 솟은 가슴과 하얀 치아, 큰 눈, 가는 허벅지와 걸을 때마다 씰룩거리는 엉덩이로 이 혁명 전사를 낚을 수 있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사단장도 마찬가지야. 백전노장의 혁명가이자 영웅이며 고급 간부인 그가 어떻게 이런 여자를 얻을 수 있었단 말인가?” 중국 문화대혁명 즈음, 인민해방군의 모범병사이자 규율의 화신인 우다왕은 분노를 금치 못한다. 사단장의 전속요리사가 된 그의 눈앞에 등장한 사단장의 젊은 아내 류롄 때문. 사단장이 집을 비운 뒤 류롄의 유혹은 강도를 더해가자 우다왕의 갈등은 극에 달한다. 사단장과 사단장의 가정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인민을 위해 복무하는 것일진대, 그러기 위해서는 스물여덟살 원칙주의자 우다왕이 서른두살 사단장 아내의 애정의 대상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민을 위해 복무하라>는 2005년 봄 중국 광둥성 격월간 문예지 <화청> 3월호에 삭제본으로 발표되었음에도 중
‘5금(禁) 조치’에 빛나는 전설의 문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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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포르주 피아노: 공구, 부품’은 파리 센강의 왼쪽 언덕에 자리잡은 피아노 공방이다. 이야기는 파리가 더 익숙한 미국인 사드 카하트가 공방의 간판에 호기심을 가지면서 시작한다. 중고 피아노 한대 들여놓을까, 대수롭지 않던 생각은 “소개받은 손님만 맞는다”는 주인의 텃세에 기가 꺾인다. 하지만 어렵게 소개받고 피아노와 만나는 과정에서 저자가 경험하는 황홀경은 글만 읽어도 부러워 죽겠다. 공방의 뒷방 작업장은 보물창고다. 예술가의 아틀리에처럼 햇볕이 쏟아지는 작업장에는 가느다란 다리 3개로 거대한 몸뚱이를 지탱하는 그랜드 피아노부터 알 수 없는 문자들이 상감된 날씬한 업라이트까지 즐비하다. 에라르, 플레옐, 뵈젠도르퍼 등 이름만 들어도 사연을 간직했을 법한 유럽의 피아노 브랜드 흥망사도 무궁무진한 소재의 화수분이었다. 음악의 우아함으로 빚어지는 이야기들도 아름답지만, 이 책의 매력은 믿음직하면서도 참신한 묘사에 있다. 피아노의 물리적인 아름다움은 물론, 건반에서 현으로 이어지는 소리에
연인보다 더 사랑스런 피아노 찬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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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그분이 오셨다.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를 쓰셨으나 <자산어보>는 안 쓰셨던 분. ‘사지선다’ 문항을 풀어야 했던 학력고사 세대의 밤잠을 앗아갔던 그분이, MBC 드라마 <이산>에서 ‘산 너머 산’인 정조의 숙제를 돕느라 밤잠을 설치신다. 시와 문장에 능하고 세상 학문과 이치를 꿰뚫었으며 백성을 귀하게 여기고 500여권의 방대한 저술을 남긴 다산 정약용 선생은 지금 댓글가에서 이렇게 불린다. “정·초·딩.”
정조와 정약용이 성균관 담벼락에서 처음 만난다는 극중 설정부터 심상치 않았다. 전문용어로 ‘담 치기’를 밥먹듯 하는 <이산>의 정약용은 과거에 응시해 훌륭한 답안을 쓰고도 이름 적는 것을 ‘깜박 잊어’ 4번이나 낙방했으며, 임금을 임금이라 부르지 않고 호형호제하다가 장원급제한 다음에야 정조를 알아보고 ‘옴마야!’ 한다. 유득공·박제가·이덕무 트리오가 “임금님 사실은 속좁은데, 자네 큰일
[댓글로 보는 TV] 정초딩과 국민 요정이 납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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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사 엉덩이로 밥을 푸든 허벅다리로 밥을 푸든 무슨 상관이래?”
주막에서 밥을 먹다 주모에게 꾸중을 듣는 쇠돌(이문식). 용이(이준기)가 양아버지를 보고 히죽거리다 숟가락으로 머리를 맞는다. “딱” 소리가 나게 맞았는데 NG다. 이준기는 머리를 감싸쥐고, 이문식은 미안해하고, 이용석 감독은 “(이문식이) 준기에게 감정있나보다”며 우스갯소리를 한다. 이문식은 촬영 내내 컨디션이 좋지 않은지 자주 NG를 냈다. 덕분에 이준기는 맞은 데 또 맞아 아프고, 곁에서 구경하던 이준기의 팬들은 발만 동동 구른다.
지난 5월1일 충북 제천 오픈세트장에서는 SBS 새 수목드라마 <일지매> 촬영이 한창이었다. <온에어>에 이어 21일부터 방송될 <일지매>는 조선시대 의적으로 알려진 ‘일지매’의 삶을 다룬다. <궁>을 만든 황인뢰 감독이 고우영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일지매>를 만든다고 알려져 더 주목을 끌고 있는 작품이다. 제작진은 실존인
공길, 의적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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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개관기념 영화제:
오타와애니메이션페스티벌 역대 그랑프리 모음
압축적인 단편애니메이션들이 보여주는 모든 세계는 투명하게 여과되지 않는 잉여로 그 짧은 형식을 능가한다. 감탄을, 당혹을 혹은 선불교적 깨달음을. 익숙한 만화영화나 전래동화의 이미지 조합에 이완되었던 정신이 문득 어떤 불가해한 질문 앞에 먹먹해지는 순간이 온다.
샐리 아르투어의 <A-Z>는 길치 P부인이 런던의 지도를 만드는 과정을 발랄하게 따라간다. 지도 이미지에 그래피티와 잭슨 폴록적 페인팅의 이미지가 중첩되는가 했더니, 여기에 코믹스 비주얼과 타이포그래피가 합류한다. 나카타 다케시와 모노 가즈에의 <라이트닝 두들 프로젝트-피카피카 2007>은 이온처럼 명멸하는 선으로 구성된 이미지들의 소음을 일상의 감각적 영상에 콜라주했다. 이미지의 소음은 음악적 소음과 경제적으로 결합해 놀라운 가역 반응을 일으킨다. 이 ‘피카피카’(번쩍번쩍) 이미지들은 프레스토의 리듬으로 점점 가속되면서 죽은
[2008 애니 열전] 낯설고 강력한 단편애니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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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개관기념 영화제: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역대 그랑프리 모음
가장 권위있고 유명한 애니메이션페스티벌인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은 <마리 이야기>의 이성강(2002), <오세암>의 성백엽(2004), <버스데이 보이>의 박세종(2005)의 수상 이력을 통해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세계에서 최고로 유서 깊은 애니메이션영화제이자, 그 규모와 상영작 등 질적인 면에서도 최상의 수준을 견지하는 애니메이션영화제인 안시는 애니메이션의 ‘칸’이라고 불린다. 이와 전혀 무관치 않은 것이 1956년 칸영화제의 비경쟁 부문행사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수준있는 애니메이션 <나무를 심는 사람>이나 <붉은 돼지> 등도 역대 수상작 목록에 올라 있다. 장편의 경우 종종 대중적 속성도 노출시키고 있지만, 형식과 이미지의 응축된 실험성을 보여주는 단편부문에서의 수상의 성패는 예술성에 달려 있다. 이미지의 혁신성과 주제의 깊이, 발상의 참신함과 아트하
[2008 애니 열전] 삶에 쉼표와 물음표를 건네는 애니메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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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그로 논 트로포> Alegro Non Troppo
제12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상영작
<알레그로 논 트로포>는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또 애니메이션과 클래식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혁명적인 작품이다(여섯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아담과 이브를 만드는 클레이애니메이션 장면도 있다). 어린 시절 8개의 클래식 음악에 각각 다른 성격의 애니메이션을 결합한 작품인 디즈니의 <판타지아>(1940)에서 영감을 받아, 브루노 보제토는 자신만의 스타일로 <판타지아>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냈다. <판타지아>가 이데올로기적으로 끊임없이 공격받았다면 브루노 보제토는 바로 그 디즈니의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며 자신의 옛 기억과 추억을 새로이 재구성한 것이다. 이처럼 <판타지아> 그 자체를 대담하게 패러디하고 있지만 부정과 전복의 정신으로 묘한 쾌감을 준다. 그것은 <알레그로 논 트로포
[2008 애니 열전] 클래식과 애니메이션의 환상적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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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어스 오브 더 다크> Fears of the Dark
제12회 부천국제판트스틱영화제 상영작
사드 후작을 연상시키는 마르고 포악한 귀족이 끌고 가는 음산한 개떼들의 등장에서부터 이미 심상치 않다. 아마도 오랫동안 악몽의 근원이 될 불쾌한 공포감들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개성적인 비주얼들에 대한 강한 시각 쇼크와 동반될 것이기 때문이다. 두려움은 구체적으로 표상되지 않지만 짙은 분위기로 도처에 깔려 있다. <피어스 오브 더 다크>는 여섯명의 세계적 그래픽 아티스트와 만화가가 제작한 ‘어둠이 주는 원초적 공포감’에 대한 단편을 엮은 아트하우스 애니메이션 앤솔로지다. 형식적으로도 앤솔로지의 권태로운 형식을 파괴한다. 여섯편의 작품이 나란히 배열된 것이 아니라, 네편의 작품들이 각각 전개되는 사이에 두편의 다른 형식이 삽입되어 전체를 응집시키는 것. 전체적으로 일관되게 흑백을 유지하며 공포를 심플하게 시각화했다. 놀랍게도 이 기분 나쁜 공포감들에서
[2008 애니 열전] 불쾌한 그로테스크, 불온한 매혹, 강렬한 시각 쇼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