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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때 아주 잠깐 장난전화에 맛을 들였던 적이 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친구와 머리를 맞대고 앉아 전화기를 돌렸는데 그 수준이라는 게 아무 번호나 눌러서 “거기 캔디네 집이죠?” 하는 수준의 유치한 짓거리였다. 전화를 받은 사람이야 ‘이뭐병’ 했겠지만, 뭐 어떤가. 우리는 그저 애들일 뿐인데, 애들인데 뭐 어때 장난전화쯤, 이라고 우리의 짓거리를 정당화하곤 했는데….
난 몇달 전부터 장난전화질하는 아저씨 처음 봤고, 황당했을 뿐이고, 그저 배꼽 뒤집어졌다. 다름 아닌 케이블 채널의 <더 폰>이었다. 성대현과 고영욱, 신동욱이 진행하는 프로그램인데 한 시간 내내 전화기 붙잡고 장난전화만 해댄다. 유치원에 전화해 돈있는 샐러리맨이라고 속이며 학력 세탁을 위해 유치원에 기부입학을 하고 싶다고 애걸하고, 다짜고짜 비디오 가게 주인이라면서 연체된 에로비디오 반납하라고 박박 우기며, 지구 온난화로 인해 독도가 일본쪽으로 조금씩 이동하고 있으니 밧줄로 독도를 옮기는 퍼포먼스에 동
[김은형의 아저씨의 맛] 니들이 장난전화를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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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
죄책감을 동반한 즐거움을 뜻함. 다른 사람에게 공개하기엔 쑥스러운 취미나 금지된 장난 등이 길티 플레저의 예가 될 수 있다.
사실 난 춤을 잘 춘다. 아니 잘 췄다. <영화는 영화다> 속 나이트 클럽신을 찍을 땐 나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렸다. 나이 서른이 넘기 전까지 난 열심히 홍대 클럽을 드나들었다.
나의 어린 시절은 언제나 종교적인 엄숙함에 눌려 있었다. 어머니는 나에게 경박하지 말라 하셨고, 기분 좋은 일이 있어도 너무 들뜨지 말라고 하셨다. 어린 시절부터 들었던 말이다. 난 조용한 아이였고, 또 조용한 아이여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내가 대학생이 된 뒤, 우연히 좀 노는 친구들을 따라 홍대 앞 ‘발전소’라는 클럽에 처음 가보게 됐다. 첫인상은 특이했다. 맥주는 버드와이저 캔만 팔고, 안주는 새우깡이 다였던 것 같다. 그리고 다 마신 빈 캔은 무대 위의 커다란 금속 그릇에 던져넣었다. 여기저기서 빈 캔들이
[나의 길티 플레저] 내 춤을 인정한, 유일한 그녀 -장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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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원스> 이전에 글렌 한사드와 마르케타 이글로바의 협업이 내놓은 첫 번째 결과물. 듀오의 이름이자 앨범 타이틀인 ‘The Swell Season’은 체코 작가 요셉 스크보레키의 작품에서 따왔다. 인디신의 신데렐라가 된 이들에 관해선 익히 알려진 대로다. 아일랜드 밴드 프레임스(The Frames)의 보컬 글렌 한사드와 체코의 싱어송라이터 마르케타 이글로바의 만남은 영화의 성공과 더불어 전세계 투어와 오스카 수상으로 이어졌으니 말이다. 이 성공이 얼마나 대단한 것이었는지는 각종 수상과 흥행을 떠나서 미국 대중문화의 지표인 <심슨네 가족들>에 캐릭터가 출연했다는 사실이 말해준다. 2006년에 발표된 《The Swell Season》엔 <원스>의 <Falling Slowly> <When Your Mind’s Made Up> <Lies> <Leave> 4곡을 포함해 10곡이 실렸다.
밴드일 때도 소박한 음악
<원스> 듀오의 첫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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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여가수를 꼽으라면 단연 더피다. 웨일스 출신 더피의 데뷔작 ≪Rockferry≫에 대해서 구구절절 설명을 불일 필요는 없을 거다. 에이미 와인하우스가 촉발시킨 레트로 솔-팝의 물결을 거의 완벽하게 계승한 ≪Rockferry≫는 이미 전세계에서 수천만장이 팔렸고 미국시장에도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더피는 올해 그래미 시상식 최우수 팝보컬을 포함한 3개 부문 후보에 올라 있기도 하다. 2008년 최고의 데뷔앨범이라 할 만한 ≪Rockferry≫가 디럭스 에디션으로 재발매됐다. 새로운 싱글 <Rain on Your Parade> 등 일곱곡이 수록된 보너스 CD와 DVD가 들어 있다. 아직 앨범을 구매하지 않은 독자라면 반드시 신년 선물 리스트에 넣어두시라. 가장 추천하는 곡은 <Warwick Avenue>다. 신년을 홀로 보내는 솔로들이라면 이 처연한 이별가를 들으며 마음껏 울어보시길.
솔로들이여 마음껏 울어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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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작가들의 패기 넘치는 전시회로 한해를 시작해보자. 신진작가 17명의 회화, 설치, 영상 등 작품 250여점을 모은 기획전 <젊은 모색 2008>이 3월8일까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다. 1981년 처음 열린 이래 격년으로 개최되는 이 전시회는 미술계에 입문한 새내기 작가들의 작품 소개를 목적으로 한다. 개인전 경력이 드문 신인들이 대상이지만 정현, 이불, 서도호, 구본창, 이형구 등 한국 현대미술계의 굵직한 작가들이 이 전시회를 통해 이름을 알렸다.
15회를 맞는 올해의 주제는 ‘아이 엠 언 아티스트’(I AM AN ARTIST: 나는 작가다). 굳이 ‘작가들’이 아닌 ‘작가’를 전면에 내세운 이유는 17명의 작품이 어떤 구획으로도 묶을 수 없는 다채로운 개성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전시를 준비하며 줄어든 자신의 몸무게와 수면시간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김시원, 닭고기로 야구공을 만든 이완, 배트맨의 머리와 헐크의 몸, 스파이더맨의 팔을 접목시킨 위영일, 미술관
17인 17색의 젊은 모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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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아이언맨>의 연극 버전이라 지레짐작하면 큰일난다. 미남이고 명석하며 심심할 때마다 철갑옷을 입고 폼나게 악당들을 날려버리는 토니 스타크와 <강철왕>의 ‘스테인레스맨’ 왕기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열처리 공장의 차기 사장. 댄서를 꿈꿨지만 아버지의 강압에 무릎 꿇은 유약한 영혼. 열처리로에 감금된 뒤 온몸이 스테인리스로 변해가는 비운의 청춘. 왕기가 물려받을 공장은 아이언맨이나 배트맨이 소유한 첨단 기술의 집약체와는 거리가 멀다. 변신한 그가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처럼 위험에 빠진 이웃을 구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는 단지 스테인리스로 바뀔 뿐이다. 인간의 노동을 숫자로 환산하는 아버지, 그에 반발해 자신을 가둔 공장 노동자들, 가십에 솔깃한 사람들에 지쳐. 그러니 포스터에 커다랗게 적힌 대로 ‘스트레스, 스테인레스를 만든다’. 오, 스트레스에 찌든 구질구질한 우리 인생이여.
결론만 말하자면 세상 누구라도 공감할 내용이지만 이 연극
[연극이 끝난 뒤] 비운의 강철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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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현실주의의 모자를 쓴 가장 아름다운 붓이다.” 초현실주의자 앙드레 브레통은 스페인 출신의 예술가 호안 미로를 이렇게 정의했다. 화려한 색채와 대담한 곡선을 사용해 풍요로운 상상력을 화폭에 펼쳤던 호안 미로는 초현실주의가 막을 내린 1940년대 이후에도 여전히 건재했던, 브레통의 표현대로 가장 아름다운 붓이었다. 하지만 미로의 재능은 회화에만 있지 않았다. 그는 판화와 세라믹, 대형 입체물 제작에도 관심을 기울였고 후기 작업의 대부분을 이러한 요소들로 채웠다. 2월22일까지 성남아트센터 미술관에서 열리는 <호안 미로-최후의 열정전>은 호안 미로의 판화 103점을 공개한다. 이번 전시는 프랑스 최초의 사설 미술재단이자 미로가 전속 작가로 활동했던 매그 재단의 첫 아시아 전시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은 프랑스의 문인 자크 프레베르와 공동 작업한 석판화 <아도니스> 연작 20점이다. 호안 미로는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완벽한 작품을
<호안 미로-최후의 열정전> 초현실주의에 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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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트맨 비긴즈>는 배트맨의 기원이었다. 그리고 그래픽 노블 <배트맨 이어 원>은 바로 그 <배트맨 비긴즈>의 기원이다. 1986년부터 1년간 DC코믹스가 연재한 <배트맨> 시리즈 4편을 묶어 만든 <배트맨 이어 원>은, <씬 시티> <300>을 그린 프랭크 밀러가 스토리 작가로 참여했고, <데어데블> 시리즈를 그린 데이비드 마주켈리의 펜촉으로 완성됐다.
책을 펼치면 독자는 고담시의 3대 전설과 마주하게 된다. 첫째는 배트맨의 기원, 둘째는 캣우먼의 탄생, 마지막이 제임스 고든의 피묻은 생존기다. 청렴한 경찰 제임스 고든은 브루스 웨인이 12년 만에 죄악의 도시에 돌아온 그날, 고담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고든은 배트맨과 함께 고담의 생존방식인 ‘약육강식’에 맞춰 진화하고 발전한다. 영화에서 덜 다뤄진 캐릭터여서일까. 흥미를 끄는 이야기는 배트맨보다는 고든쪽이다.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사이트
위대한 배트맨 그래픽 노블 1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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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영화비평이 아니다. 영화를 매개로 이미지와 철학을 이야기하는 가능성의 탐색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이매진>은 미학자 진중권의 필력을 확인할 좋은 기회다. 진중권은 짧지 않은 프롤로그를 통해 새로운 영화 담론의 가능성 탐색이라는 면에서 이 책에 실린 글을 몇 가지 카테고리로 분류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매트릭스>에서는 영화의 미래를 내다본다. 구석기인들이 동굴 벽에 수많은 동물을 그려놓고 그게 현실이 될 거라 믿던, 가상을 만드는 전통적인 방법이 점차 진화해 복제 이미지(사진)의 발전으로 이어지고 마지막으로는 생성 이미지 시대에 가상을 만드는 가상현실의 테크놀로지에 이른다. <매트릭스> 1편에서 네오 일당은 신경에 직접 펄스를 주는 방식으로 가상세계에 입장하는데 그런 방식으로 뉴로시네마가 가능해질 수 있지 않을까? 미셸 공드리의 <수면의 과학>에서는 백일몽의 시각화, 즉 초현실주의의 흔적을 발견한다. 포스트모던 건축이라는
영화 이미지로 철학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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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 예측 지수 ★★★★
앉은자리에서 다 읽었다 지수 ☆
“왜 그냥 전화 기능만 있는 휴대전화는 살 수 없지?”
기술이 발달하는 속도와 비례해 피로감도 늘어난다. 쓰지도 않을 기능의 목록을 눈앞에 두고 원치도 않는 무언가를 선택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내 돈을 내고. 그렇다면 선택의 여지가 많다는 것은 좋은 것일까? 선택할 게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가 집어던질 정보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결정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건 아닐까? 선진국에서 자주 발견되는 불행의 원인은 바로 선택 피로증. 선택의 여지가 많을수록 그 결과에 만족하지 않을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선택 피로증은 다양성과 기술의 발전이라는 스포트라이트 이면에서 우리를 지치게 하는 요인 중 하나다. 선택 피로증의 의미와 이유, 그리고 선택 피로증을 느끼는 소비자를 대하는 시장과 상표의 전략은 오늘날의 사회를 읽는 작은 키워드 중 하나가 된다.
<월드 체인징>
미래는 지속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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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새 카메라를 장만했다. 이름하여 올림푸스 PEN FT. 기계에 대한 애착이 전무한 내 눈에도 제법 예뻐 보이는 필름카메라다. 가죽 케이스에 둘러싸인 보디는 날렵하면서도 튼튼했고, 가느다란 셔터는 윙크하듯 애교있었다. 호기심이 일었다. “그런데 나이가 몇살이래?” “1960년대 말, 일본생이야.” 그가 자랑스레 대답했다.
사진가 커뮤니티의 중고장터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는 그 카메라는 지난 크리스마스 바람이 거센 서울의 거리에서 입양됐다. 전날 과음을 한 탓인지 술 냄새를 폴폴 풍기던 전 주인은 꽤나 여릿한 외모의 청년이었다 했다. 그 청년이 이베이에서 카메라를 구입했으니 전전 주인은 미국에 사는 누군가일 확률이 높았다. 깜찍한 외모에도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이 카메라는 적어도 네 사람의 손을 거친 셈이다. 태평양 너머, 카메라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쇳덩이를 깎고 다듬고 조였던 이들을 포함해.
그 사람들, 아직까지 살아 있을까. 카메라의 운명을 거슬러가다 보니 그를 만든
[오픈칼럼] 낯간지러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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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2005년 12월 어느 날. 나는 누가 들으면 면전에서는 너 미쳤니라고 묻고, 돌아서자마자 쟤 미쳤어라고 할 게 분명해서 절대로 말하지 못할 어떤 특별한 체험을 했다. 보고 듣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못해서 기독교 선교사인 언니가 30년간 전도를 했음에도, 살아 있는 예수를 내 앞에 데려오라고 코웃음쳤던 내게 전혀 일어날 만한 일이 아닌,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마침 연말도 되고 해서, 믿거나 말거나, 재미삼아 소재 채택료도 안 받고 털어놓을 참인데, 절대로 방송국에 전화번호가 알려지지 않기를 빈다.
무대는 지방 소도시. 때는 평일 오후. 어느 한적한 골목길 앞을 지나치는데, 갑자기 “나를 데려가주세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목울대를 통해서 울려나온 그런 소리가 아니었는데, 나는 들었다. 세상에는 인간의 말만 아니라 무수한 언어가 있고, 인간에게 그런 언어를 들을 능력이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나는 빈 골목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사람은 한명도 없고, 의자
[최보은의 돈워리 비해피] 믿거나 말거나, 의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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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중훈과 만납니다. 우리 시대 한국 배우를 떠올릴 때 오래도록 현역으로 활동하는 배우 중 ‘아이콘’이라 부를 수 있는 배우는 몇명 되지 않습니다. <깜보>(1986)로 데뷔한 박중훈은 새로운 감각과 화술의 청춘영화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1987)나 <아스팔트 위의 동키호테>(1988)로 대표되는 1980년대 대학가의 해빙 무드, 그리고 <칠수와 만수>(1988)를 전후한 한국영화 뉴웨이브의 시작과 함께한 배우였습니다. 마치 한국영화의 80년대와 90년대를 잇는 징검다리 같은 존재였던 그는 이후 장선우의 <우묵배미의 사랑>(1990), 이명세의 <나의 사랑 나의 신부>(1990), 강우석의 <투캅스>(1993), 장현수의 <게임의 법칙>(1994)에 이르기까지 작가와 장르를 넘나들며 그 자체로 변화하는 시대의 표정이 되었습니다. 더불어 과거 박재동 화백이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투쟁 당시
[박중훈 스토리 1] 나는 어떻게 <깜보>의 제비가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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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호버먼은 <이스턴 프라미스>를 “기적으로 가득한 크리스마스 스토리”라고 불렀다. 다른 국내외 평자들도 조심스럽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 희망 혹은 구원에의 소망을 발견했다. 하지만 나는 <폭력의 역사>에서 폭력에 대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근심을 읽어내는 평문에 동의할 수 없듯이(<씨네21> 2007년 10월15일자), <이스턴 프라미스>에서 긍정적인 전망을 찾아내려는 시도에 동의하기 힘들다.
이 영화가 크로넨버그의 가장 선명하고 직선적인 영화임은 부인할 수 없다. 사건은 시간순서대로 명료하게 배치되어 있고, 인물들은 고정된 역할을 배당받아 한정된 태도 안에서 움직인다. 적어도 <스파이더>에서 <폭력의 역사>를 거쳐 <이스턴 프라미스>에 이르는 도정은, 크로넨버그에게 환각의 시인이라는 별칭이 더이상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나는 크로넨버그가 타락한 현실을 근심하는 윤리적 태도에
[전영객잔] ‘침묵의 라스트신’을 다시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