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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전주국제영화제가 5월8일, 9일간의 축제를 마치고 내년을 기약한다. 영화제의 문을 닫는 폐막식은 5월8일 오후 7시에 한국 소리문화의 전당에서 개최된다. 폐막작은 <풀 몬티>의 프로듀서인 움베르토 파솔리니의 감독 데뷔작인 <마찬>으로, 폐막식에 이어 상영될 예정이다. 폐막작 <마찬>의 기자시사는 폐막식에 하루 앞선 5월7일 오전 11시 메가박스 8관에서 있으며, 폐막작 공식기자회견은 오후 1시 기자회견장에서 열릴 예정이다.
폐막작 <마찬> 기자시사, 오늘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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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6일 전주시네마타운 7관에서 오후 5시에 상영한 <손들어!>가 종료 2분을 남기고 필름이 끊어져 상영을 중단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상영을 중단한 이유는 필름 상태가 건조하고 노후해 상영 재개시 필름 손상이 우려됐기 때문. <손들어!> 상영중단에 대해 환불을 원하는 관객(ID 발급자 제외)은 지프서비스센터를 방문하면 된다.
필름 끊어진 <손들어!>관객 환불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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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V 일정이 추가됐다. 오늘 오후 5시 반 메가박스 10관에서 상영되는 <시티 오브 월드>의 GV는 감독 크리스티안 클란트와 프로듀서 마틴 리쉬케가, 저녁 8시 반 메가박스 10관에서 상영되는 <시네마스케이프 단편2>는 상영작 중 <좋은 남자>의 감독 존 조스트가 참석해 GV를 진행한다.
<시티 오브 월드> <좋은 남자> GV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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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을 염두에 두고 봐 달라.” 친절한 감독님이시다. 5월 6일 메가박스10관 ‘시네마스케이프 단편1’ 상영 전. 섹션 내 <나쁜 여자>를 연출한 싱가포르 출신의 코 순 감독은 무대 인사에 올라 관객들에게 관람 포인트를 미리 알려주었다. 마치 자신의 작품이 의도와는 다르게 전달될 수 있음을 감지라도 하듯 말이다.
듣기 거북한 신음소리, 음란한 내용의 이야기, 피로 물든 토끼인형, 공중을 날아다니는 아기마네킹 등 다양한 상징적인 이미지들이 <나쁜 여자>를 가득 채운다. 그 이미지들은 임신한 사실을 숨기고 싶은 주인공 젠의 불안한 마음을 대변한다. 다소 상징적인 장면들이 많아서 그런지, 역시 첫 질문은 “영화를 만들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다. 코 순 감독은 “같은 여성인 프랑스의 클레르 드니 감독의 <네네뜨와 보니>(1996)를 본 게 출발점”이라며 “안타까웠던 것은 싱가포르가 심의기준이 엄격해 일부를 무지화면으로 봤다. 그런데도 이야기에 빨려들
‘페미니즘’이 관람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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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그림의 제목 <도망자>는 가출한 꼬마를 가리킨다. 빨간 손수건에 주섬주섬 싼 허술한 보퉁이가 홧김에 꾸린 여장임이 한눈에도 분명하다. 집에서 그리 멀리 가지 못해 배가 고파 쭈뼛쭈뼛 식당에 들어섰으리라. 동네 순경과 주방장은 어린 도망자의 행색에 모든 걸 눈치챈 듯 사연을 묻는다. <도망자>가 ‘가출’의 삽화라면 <집을 떠나며>는 ‘출가’의 이미지다. 농사로 거칠어진 아버지와 대처의 대학으로 떠나는 아들은 허름한 트럭에 걸터앉아 있다. 주머니에 튀어나온 차표와 아래쪽에 보이는 침목으로 보아 장소는 간이역이며, 날 세워 다린 아들의 양복바지 위에는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과 이별을 슬퍼하는 개의 머리가 얹혀 있다. 이 그림의 드라마는 시선의 교차에서 나온다. 부자는 반대방향을 보고 있다. 젊은이는 홍조 띤 얼굴로 목을 길게 빼고 다가오는 미래에 이미 넋을 빼앗겼지만, 어깨를 늘어뜨린 아버지의 손은 약해지지 않기 위해 모자를 꼭 쥐고 있다.
미국 잡
[김혜리의 그림과 그림자] 출가 또는 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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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1호를 축하하는 의미(왜 701호냐고요? 700호에서 밀렸습니다)로 특별 칼럼을 준비했다. 이름하여 ‘나의 아저씨 길티 플레저의 맛’. 요즘 트렌드인 컨버전스를 세계 최초로 글쓰기에 도입한 최첨단 칼럼이라 하겠다.
내 길티 플레저 중에서도 가장 음습한 건 바로 기타노 다케시다. 거장 반열에 오른 작가가 어떻게 길티 플레저냐고? 그의 영화가 아니라, 늙고 추하고 심술맞은 기타노에게 매혹되면, 그것도 성적으로 매혹되면 길티 플레저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가 기타노에게 빠진 건 십여년 전 어느 대학 축제 때 열린 일본영화제에서였다. 아무 생각없이 <그 남자 흉포하다>를 보다가 ‘헉!’했다. <3-4*10월> 보면서 ‘웬 늙은 돌아이’ 했던 아저씨가 가슴속으로 격하게 들어온 것이다. 그가 영화 초반 해맑고 사악한 소년을 묵사발 만들 때 전율했던 나는, 마지막 복수를 위해 걸어오며 카메라를 응시하는 그의 얼굴을 보면서 얼굴이 벌게져 괜한 손부채질만 해댔다.
[김은형의 아저씨의 맛] 나쁜 남자가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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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가 좋다. 주종을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건 아니기에 주당이랄 순 없지만, 소주도 와인도 정종도 아닌 맥주를 향한 애정만큼은 자신있다. 한데 단서가 붙는다. 효모를 키워 만들어 마실 정성도 없고, 원료와 생산지에 열광하는 마니아도 역사를 꿰는 전문가도 아니다. 대형마트건 편의점이건 허름한 슈퍼건 어디서나 파는 평범한 맥주로 범위를 한정하자. 기왕이면 캔맥주가 좋다. 한캔 한캔 비운 뒤 찌그러트리는 재미는 기쁨을 넘는 뿌듯함이다.
맥주는 어울림의 술이다. 저녁식사에 반주로 곁들여도 좋고, 기름진 음식, 단출한 스낵과도 궁합이 좋다. 지친 하루의 끝에 들이켜는 시원함은 어떤가. 얼린 잔에 담겨 저절로 살얼음이 언 드래프트 한 모금이면 머리끝까지 시원하고, 신촌 구석 지하를 2층으로 나눈 호프집에서 절묘한 냉기로 얼려낸 ‘얼음거품 병맥’은 케첩과 함께 내주는 싸구려 오징어 튀김과 마리아주하면 금상첨화다. 다혜리 선배와 말로는 이미 마실 만큼 마신 ‘야구장 종이컵 생맥’은 상상만으로도
[오픈칼럼] 캬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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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스승님은 삼국시대 때 각연사라는 절을 창건하셨던 유일대사님이다. 지난해 단오날 우연히 들른 절에서 대웅전 불상 옆에 앉아계신 이분의 목상을 보았을 때,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분은 분명 나를 향해 웃고 계셨다. 밖으로 나와 절의 역사를 설명하는 안내판을 보니, 절의 창건자는 삼국시대 말기의 유일대사님이거나 아니면 신라 초기의 통일대사님일 거라는 것이었다. 대사는 영어로 ‘meister’로 번역돼 있었다. 마이스터. 그러니까 득도한 사람이다.
그날, 나는 유일대사님을 내 스승으로 임명하고, 스승님, 살아계신 것 다 알아욧, 신라시대 통일대사님도 사실은 유일대사님 환생 맞죠? 웃은 죄가 있으니 내가 뭐 물어볼 때마다 즉각 대답해주셔야 돼욧, 했다. 그뒤, 노느라고 바쁜 데다가 사실 궁금한 것도 별로 없어서 자주 스승님을 찾지는 않았다. 상전처럼 떠받듦을 요구하면서 궁금하지도 않은 지식으로 사람을 고문하는 그런 스승들이 대부분인데, 평소에는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필요할 때마다 펼
[최보은의 돈워리 비해피] 그 책이 괴상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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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12월29일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개봉했고 그야말로 기분 좋게 뻥 터졌다. 박중훈은 이제 마음 놓고 유학을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가 유학을 마음먹었던 것은 <칠수와 만수>를 끝낸 다음이었다. 그때부터 영어 공부도 착실히 하면서 ‘영화만 터지면 무조건 떠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자신의 말처럼 유학을 위한 영화 흥행을 기다리며 ‘5분 대기조’처럼 살았다. 하지만 <칠수와 만수>는 물론 <바이오맨> <우묵배미의 사랑> <그들도 우리처럼>에 이르기까지 영화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도통 영화가 안됐다. 그가 진짜 구체적으로 생각했던 건 ‘<우묵배미의 사랑> 끝나고’였으니 그 영화만 흥행이 잘됐으면 더 일찍 떠났을 거다. 그런데 흥행은 배우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었다. 그래도 영화 출연과 CF 촬영, 라디오 생방송 진행 등 그 바쁜 와중에도 짬짬이 토플 학원도 다니고 보캐블러리 학
[박중훈 스토리 8] 봉산 마스크 댄스, J의 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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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6일 11회 서울여성영화 폐막식에서 아시아 단편영화 경선 수상자 발표가 있었다. 심사위원장 공효진이 수상자를 발표했다. 이어 상영된 수상작 중 가능성이 있다고 느낀 것은 한 여고생이 첫 경험을 한 뒤 연달아 겪는 성폭행에 관한 단편 <내게 사랑은 너무 써>(전고운 연출)였다. 다른 상은 대만, 중국의 여성감독들이 받았다. 공효진은 심사 과정이 어려웠다고 말했다. 서울여성영화제가 공효진을 심사위원으로 청했던 것은 물론 최근 그녀의 활약 때문이다. 이경미 감독의 <미쓰 홍당무>와 부지영 감독의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에 출연하면서 그녀는 2008년부터 부상하기 시작한 여성감독들의 아이콘이 되고 있다. 난 <행복>의 수연 역의 공효진이 그녀에겐 최선의 적역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호피 무늬를 입은 호리호리 한 맹금류가 도시에 나타난 듯했다. <행복>에서 내가 그녀를 보기 전 ‘전영객잔’의 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허문영은 스크린
[전영객잔] 일본영화나 소설적인 어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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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한 글재주나 빈곤한 상상력으로는 흉내낼 수 없는, 빽빽한 사실들을 마술같이 조합하고 풀어내어 멋진 소설적 분위기를 내는 전기 <트뤼포: 시네필의 영원한 초상>에 이런 기술이 있다. “1959년 4월27일 프랑수아 트뤼포와 장 피에르 레오는 칸의 <400번의 구타> 공식 야간 시사회를 위해 파리에서 턱시도를 빌렸다.”영국의 영화 전문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가 5월호에서 바로 이 프랑수아 트뤼포의 턱시도를 기념하는 특집기사를 냈다. <400번의 구타>는 이른바 누벨바그의 신호탄이며 지금 그 누벨바그가 쉰살 생일을 맞았다.
<사이트 앤드 사운드>가 당신에게 누벨바그란 어떤 의미냐며 전세계 다섯명의 유명 감독- 자크 오디아르, 카트린 브레야, 찰스 버넷, 클로드 샤브롤, 허우샤오시엔- 에게 질문을 했는데, 허우샤오시엔이 재미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다. 나는 그것을 <펑꾸이에
[정한석의 블랙박스] 누벨바그, 생일 축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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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잉>을 보며 기시감을 느꼈다. 아마도 올리버 스톤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2006)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실 <노잉>은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재난영화 버전이라 해도 틀리지 않다. 실제로 지하철 전복 사고 이후 유령처럼 걸어나오는 생존자들의 모습은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 재현된 9·11 직후의 지옥도와 너무도 유사하다. <노잉>은 여러 평론가들이 이미 지적한 바 있는 9·11 이후 할리우드영화의 변화와 관련해 파악할 만한 작품이다. 하지만 나는 공교롭게도 이미 <월드 트레이드 센터>와 <왓치맨>을 통해 이와 유사한 논의를 전개한 바 있다. 나는 동어반복을 피하기 위해, <노잉>이 포스트 9·11의 징후를 담고 있다는 전제 아래 어떻게 이 작품이 사회적 트라우마를 종교적으로 치유하려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파스칼의 ‘신에 대한 내기’와 닮아
<노잉>
[영화읽기] “믿으라, 그리하면 보일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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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 독설을 써야 한다는 통보를 듣고 무엇을 써야 하나 고민하다가, 699호에 실린 강의의 반론을 발견했다. 일단 졸고를 읽어주었다는 사실 자체에 감사를 드리고, 무엇을 쓸지 고민할 필요가 없게 도와준 점에 대해서도 역시 감사를 드리고 싶다. 그 반론을 읽다 보니 부연해서 하고 싶은 말들이 몽글몽글 떠올랐다.
강의의 반론은 제목에서 확 짚어준 것처럼 ‘역사적 맥락’을 강조한다. ‘맥락’의 개념은 좀 모호하지만 어쨌거나 개봉 지원에 동의하나 제작 지원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내 의견을 비판하는 논리로, 영진위가 적극적으로 제작 지원을 했던 이유가 ‘국가의 문화정책, 특히 문화적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책적 가치와 필요성’이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한국영화산업과 한국의 영화문화가 양질의 전화를 기할 수 있는 정책이라면 법과 제도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거의 모든 영역에 걸친 백화점식 지원정책을 펼쳐왔’다고 말한다.
맞다. 지금까지 영진위가 그런 이유로 제작 지원을 했고, 그런
[김봉석의 독설] 그 지원정책의 성과는 무엇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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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고집 센 당나귀를 데리고 장에 나가는 것처럼 힘들기는 하지만 원칙적으로 나는 초등학교 동기생과 카페에 앉아서 다양한 문제에 대해서 떠들어대는 것을 좋아한다. 얘기하다가 보면 내가 얼마나 멍청한 생각을 하고 사는지 깨닫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이다. 한번은 밥 말리의 <No Woman No Cry>에 대해 얘기하다가 나는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가사를 중화풍으로 ‘여자 없으면 울 일 없다 해’라고 해석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동기생이 느끼한 목소리로 들려준 정확한 해석은 ‘그만, 그대여, 울지 말아요’였다. 이 얼마나 큰 차이인가. 그러기에 혼자서 미뤄 짐작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얘기를 잘 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럼 이 제목은 어떻게 해석해야만 하는가? <Vicky Christina Barcelona>. 이 영화를 보겠다고 ‘내 남편의 아내도 사랑해’를 봐야겠다고 말했다가 망신만 당했다. 그 무슨 자기애적인 제목이란 말이더냐? 그럼 ‘내 남
[나의 친구 그의 영화] 혼자 중얼거리지 마, 인생만 꼬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