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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악몽을 꾼 일이 있다. 땀과 구토물과 눈물 범벅이 되어 도망치는데, 어디에서부터 어디로(혹은 무엇으로부터 무엇으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채로 끝나지 않는 꿈. 현실 속 나쁜 경험도 그런 악몽과 다르지 않다. 꿈에서는 깨면 되지만 현실에는 이계로 뚫린 출구가 없다. 오에 겐자부로의 <개인적인 체험>도 그렇다. 소설은 끝나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는 인상이다. 주인공의 삶이 작가 오에 겐자부로의 삶과 겹쳐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이지만.
남자주인공 버드는 아내가 아이를 낳는 동안 아프리카 지도를 하나 구입한다. 학원 강사인 그는 아프리카로 떠나고 싶어 한다. 아이가 생기면 영원히 떠나지 못하겠다고 탄식하기도 잠시, 병원에 돌아간 그는 아들이 두개골 결손으로 뇌의 내용물이 빠진 채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아내에게 그 사실을 비밀로 하고 큰 병원으로 아이를 옮긴 그는 아이의 죽음을 기다린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던 여자친구와 섹스를 하면서.
[도서] 고유한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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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은 아직 닫혀있는데> 같은 도서미스터리를 읽을 때의 즐거움은 복합적이다. 도서미스터리라는 말을 먼저 소개하면, 범인의 범행 과정을 먼저 보여주고 이후 탐정역의 추리 과정을 보여주는 미스터리물을 말한다. 일반 미스터리물은 이미 벌어진 사건을 두고 범인을 추적하는 두뇌게임 과정을 거치지만 도서미스터리는 범인이 이미 알려져 있기 때문에 범행동기나 수법, 혹은 범인의 시점에서 범죄를 은닉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탐정과 맞서면서 재미를 낳는다. 도서미스터리의 효시인 <노래하는 백골>을 쓴 오스틴 프리먼은 “총명한 독자는 마지막 결과보다 책 속에서 사건을 추적하는 동료의 행동에 특히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다”며 새로운 기법을 시도한 이유를 밝혔다. 프리먼의 말은 이렇게도 들린다. 총명한 독자는 책 속 동료(탐정역 혹은 경찰)가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을 밝히는 데 관심을 갖고, 또 어떤 독자들은 범인의 입장에서 들키지 않기 위해 조마조마하는 쾌락을 누린다. 탐정에게는 알릴
[여름에 읽는 장르문학] 범인을 까고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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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번 듣는 것보다 한번 보는 게 낫다. 바꾸어 말하면 ‘착하게 살자’고 백번 말하는 것보다 착하게 살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보는 게 더 효과적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앨런 와이즈먼이 쓴 <인간 없는 세상>을 보고 나서 든 생각이다. 이 책은 그저 지구에서 인류가 사라지면 어떤 일들이 생길지를 연대기순으로 보여준다. 1년이 지나면 고압전선에 감전돼 죽던 새 10억 마리가 목숨을 건진다. 3만5천년쯤 지나면 토양 오염의 주범인 납이 씻겨나가고, 10만년 뒤엔 이산화탄소가 인류 이전의 수준으로 떨어진다. 인간이 없는 지구는 좀더 원시적이지만 더 착한 모습으로 변모한다. 이 오싹한 가상의 진실은 인간이 지구에서 다른 생명체와 공존하려면 결국 더 윤리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걸 느끼고 행동하는 게 바로 독자의 몫일 테다.
보여주기의 힘은 패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현재 전세계를 강타한 ‘패스트 패션’의 저렴한 가격 뒤에는 꼬마 노동자들의 불합리한 임금 문
[아트 & 피플] 윤리적인데 예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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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보다 저녁 노을이, 새벽의 어스름이 친숙하게 느껴지는 이라면 미술관과 안 친할 가능성이 높다. 대부분의 미술관 개장 시간이 오전 10시에서 오후 6시이기 때문. 8월1일부터 서울시립미술관 외벽에서 전시 중인 <라이트월(Light Wall)전>은 올빼미족에겐 안성맞춤인 전시다. 오후 8시부터 10시까지 열리기 때문에 시간을 맞추려 헐레벌떡 뛰어갈 필요도 없고, 미술관 밖에서 무료로 전시하니 표를 사지 않아도 된다.
편의를 먼저 말했지만 작품성 역시 강추하기에 손색이 없다. ‘빛나는 벽’이라는 제목처럼 <라이트월>은 미술관을 캔버스 삼아 영상작품을 투영하는 전시다. 내러티브가 있는 10분 내외의 영상 두편이 미술관 벽을 타고 움직인다. 어둠이 짙게 내린 밤의 미술관은 순식간에 눈 내리는 러시아풍의 궁전으로(<Tempo Museum), 크리스마스 트리가 반짝이는 겨울 풍경(<Magic Museum>)으로 변신한다. 그저 보고만 있어도 황홀한 이
[전시] 밤의 마술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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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렝게티의 데뷔작은 2007년에 나왔다. 그러니까 이 앨범 ≪OASIS≫는 2년 만의 정규 2집이다. 유정균(베이스), 장동진(드럼), 정수완(기타)으로 구성된 이 밴드는 아프로 비트를 가장 제대로 재현하는 팀으로 알려졌다. 그래도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사운드’란 수사는 좀 허세처럼 들린다. 오히려 세렝게티의 미덕은 단순하고 즐거운 음악을 만든다는 데 있다. 좋은 음악은 머리를 써서 듣지 않아도 좋구나, 란 생각을 하게 된다. 이국적이지만 가요 같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러니까 한국에서 만들어진 아프로 팝이다.
이 앨범과 세렝게티가 허세 덩어리로 여겨지지 않는 건 그 점을 감추거나 왜곡하려고 하지 않아서다. 제3세계 음악의 오리지널리티를 살리겠다고 겉모습만 흉내내는 데 급급하지 않는다. <별이 되리>의 나른한 그루브와 <OASIS>의 시끌벅적한 비트, <너는 너의 길을 가>를 지배하는 레게, 제목만큼 동요‘적’으로 아기자기한 <분홍 돌고래&
[음반] 아프로 코리안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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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돌 지수 ★
시너지 효과 ★★★★
물론 마이클 잭슨 얘기는 너무 많이 나왔다. 그는 불행한 말년을 보냈고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그를 추모하는 글은 넘쳐난다. 스페셜 에디션도 마찬가지다. 이때 당신은 조심스럽게 투덜거릴지도 모른다. 당연하다. 누군가의 죽음이 산업적으로 작동하는 게 썩 좋은 경험은 아니니까. 분명히 할 게 있다. 마이클 잭슨이 세상을 떠난 뒤 전세계적으로 그의 앨범 판매량은 100배 이상 늘었다. 10배도 아니고 100배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동정하기로 일제히 결심한 걸까. 아니다. 소비자는, 그러니까 우리는 영악하다. 동정심만으로 지갑을 열진 않는다. 한번 더 명확히 하자. 이 글은 마이클 잭슨을 위한 게 아니다.
≪Off The Wall≫은 마이클 잭슨의 다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이다. 1979년에 나왔다. 그의 나이 스물한살이었다. 연미복을 입은 그가 벽에 기대서 웃는 상반신 사진의 ≪Off The Wall≫은 당대 최고의 프로듀서 퀸시 존스
[음반] 팝의 미래를 제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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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익솝의 첫 앨범을 들었던 순간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덥고 습해서 짜증지수가 베수비오처럼 폭발하는 여름이었다. 로익솝의 첫 앨범 ≪Melody A.M≫을 거는 순간 더위가 싹 사라졌다. 노르웨이 출신 일렉트로 듀오의 음악은 한마디로 말하나 두 마디로 말하나 딱 ‘전자음악’이다. 반복적이고 차가운 비트에 청량하고 몽환적인 보컬이 점층적으로 깔리면서 마음을 자빠뜨린다.
솔직히 지난 앨범 ≪Understanding≫은 좀 실망스러웠는데 새 앨범은 아주 훌륭한 재기작이라 할 만하다. “우리가 원했던 건 반젤리스가 손가락으로 살짝 건드리는 듯한 그런 사운드였다”는 이 친구들 말을 한번 들어보라. 1집처럼 담백하고 청아한 북구 전자음악을 바라는 팬들이라면 올여름 내내 귀에 걸고 다니게 될 거다. 필청 트랙은 80년대적인 ‘뽕끼’로 가득한 <This Must Be It>. 로익솝은 9월18일부터 20일까지 서울 한강 난지지구에서 열리는 ‘글로벌 개더링 코리아’에 참가한다. 프
[음반] 담백하고 청아한 전자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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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시간대 시청률 1위로 인기를 끌고 있는 [도전!1000곡 한소절 노래방]이 새로운 MC 장윤정을 영입했다.
도전 1000곡의 제작진은 "장윤정은 폭넓은 세대의 시청자에 어필하는 매력이 있으며, MC로서도 다양한 출연자들과 호흡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며 MC로 발탁한 이유를 밝혔다.
또한 장윤정의 영입과 함께 도전 1000곡은 프로그램 포맷도 일부 수정할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의 개인전 형식에서 커플대결로 변경할 예정이며, 커플은 부부, 선후배, 친구 등 다양하게 구성하여 시청자들에게 더욱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할 예정이다.
장윤정의 도전1000곡 MC 도전은 8월 16일 아침 8시10분 시청자들을 찾아간다.
장윤정, 도전 1000곡 MC 합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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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주 감독은 <살인의 추억> 연출부로 영화계에 뛰어들었고, 2003년부터 2007년까지 여러 영화사에서 입봉작을 준비해왔다. 그런데 준비하던 멜로영화가 엎어졌다. “가장 입봉하기 쉬운 게 공포영화 아이템인 것 같아서 <불신지옥>의 시나리오를 썼다”는 게 이 영화의 탄생 비화다. 이용주 감독은 원래 건축을 전공한 건축학도다. 건축사에서 4년간 직장생활을 한 경험도 있다. “영화가 하고 싶었다. 게다가 직장생활 시작했을 때 IMF가 터졌는데 주변 사람들이 잘려 나가는 걸 보면서 짜증도 많이 났었다. 그러다가 이래저래 단편을 하나 찍었는데 아주 재밌더라. 안 하면 후회하게 생겼더라. 부모님께 딱 2년만 해보겠다고 했다. 그런데 벌써 10년째다. (웃음)”
-제목을 봉준호 감독이 지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아, 정말 이걸 어떡해야 하나. 그거 오보다. 일파만파 퍼져서 기정사실화돼버렸다. 초고 제목부터 ‘불신지옥’이었다. 제작사 내부에서 제목이 비호감이라 바꾸자는
종교에 대한 담론으로 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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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호러영화의 불신지옥이다. 누구도 한국 호러영화의 퀄리티를 믿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믿음은 매년 여름 배신당했다. <불신지옥>은 다르다. 제대로 만들어진 장르영화다. 성실하고 단단하며, 종종 대담하다. 게다가 이 영화는 2009년 한국이라는 지옥에 대한 불신의 리포트다.
2008년 12월 서울. 교회 목사가 신도들과 함께 귀신을 퇴치하는 안수기도를 하다가 자신의 아내를 폭행 살해했다. 이들은 기도를 통해 죽은 목사 부인을 소생시키겠다며 시신을 18일간 방치했다. 신도들은 말했다. 안수기도를 했을 뿐 죽일 의사는 없었다. 2009년 3월 광주. 귀신을 퇴치한다며 고등학생을 살해한 무속인 일당이 4년 만에 검거됐다. 이들은 2005년 전남 담양의 점집에서 부모에게 빙의 치료를 위탁받은 17살 고등학생을 마구 때려 죽인 뒤 시체를 유기했다. 이 기사에서 차이점은 없다. 하나는 기독교, 다른 하나는 무속신앙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양식은 같다. 그들의 믿음도 같다.
한국 호러에 대한 불신을 깨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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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민은 두 손으로 갈비뼈께를 자꾸 어루만졌다. 새 영화를 위해 52kg까지 감량했던 몸에 얼마나 살이 붙었는지 확인하느라 생긴 버릇이다. 회복 중인 그의 몸무게는 아직 정상치를 한참 밑도는 63kg에 3주일째 머물러 있다. 몸을 재료로 일하는 직업의 딱한 일면이다. 김명민은 유난히 고되게 연기하는 배우다. 팔자와 천성이 맞물린 결과라고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다. 연기자로서 묵직한 일감을 얻기까지 과정이 고됐고, 오랜 기다림 끝에 손에 잡힌 굵직한 배역들은 하나같이 고된 수련을 요구하는 난제들이었다. 명장(名將) 이순신(<불멸의 이순신>), 명의 장준혁(<하얀 거탑>), 명지휘자 강마에(<베토벤 바이러스>)를 살아 있는 인간으로 미덥게 보여주는 데는 샛길이나 우회로가 없었다. 결정적으로, 김명민에겐 배역이 요구하는 데 스스로 한술 더 얹어 감당하는 습관이 있다. 갈채가 돌아왔고 신뢰가 쌓였다. 능숙히 집도하고, <합창교향곡>을 외워 지휘하는
[김혜리가 만난 사람] 고지식한 연기중독자, 김명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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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가 개봉한 뒤, 김용화 감독이 주로 찾는 곳은 역시 극장이다. 그에게는 언론과 평단의 평가보다 관객의 표정이 가장 공신력있는 별점이기 때문이다. <국가대표>를 통해 기대했던 별점은 “벅찬 감동을 얻은 표정”이었다. 현재 김용화 감독이 받아든 별점은 기대 이상이다. “종영인사 겸해서 후반 30분을 같이 본다. 그 정도 반응이 나올 줄은 몰랐다. 남자들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눈물 흘리며 보더라. 심지어 내 미니홈피에 방문자 수가 늘어나는 현상도 처음 경험했다. (웃음)” 하지만 그가 본 풍경과 달리 <국가대표>의 감동이 진부한 신파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선도 있다. 말하자면 <국가대표>는 스포츠영화에 기대할 법한 감동코드가 잘 살아 있다는 평가와 그래서 평범한 스포츠영화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 사이에 놓인 셈이다. <오! 브라더스>와 <미녀는 괴로워>를 통해 영리한 대중영화의 모델을 보여준 김용화 감독은 <국
[김용화] 신파라고? 그건 오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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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갑자기 영화 만들겠다고 선언한 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차승재 전 싸이더스FNH 대표는 과거 옷장사를 했고, <해운대>의 윤제균 감독은 광고인이었다. 제작자로 겸업을 선언한 조광희 변호사도 있다. 영화사 천상의 김종선 기획이사도 결국 영화를 택하고 말았다. <노르웨이의 숲>의 프로듀서인 최광호 대표와 함께 제작업을 시작한 지 3달째. 지난 10년 동안 최희준, 최용규, 윤원호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활동하며 검열, 투자조합, 스크린쿼터, 영화진흥위원회 등을 둘러싼 굵직한 영화계 현안 해결에 앞장서 왔던 그가 여의도에서 충무로로 둥지를 옮긴 속사정은 뭘까.
-영화사 이름이 천상이다.
=1천 가지 상상력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첫 섹스>(가제)라는 프로젝트의 시나리오를 마무리하는 중이다. 영화아카데미 출신으로 <박하사탕>의 조감독이었던 김현정 감독이 연출을 맡는다.
-10년 보좌관 생활을 하는 동안 정치에 염증을 느꼈나?
=처음부터
[spot] “정치영화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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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라로 가자”던 그 스칼렛이 아니다. <지.아이.조: 전쟁의 서막>(이하 <지.아이.조>)의 스칼렛(레이첼 니콜스)은 엘리트 군인 조직 ‘지.아이.조’의 여전사. 12살 때 대학을 졸업했고, 러닝머신 위에서 과학 서적을 탐독하는 공부벌레다. 그렇다면 닌자에 미치광이 과학자, 팜므파탈 악녀까지 횡행하는 이 만화적인 액션블록버스터에서 남자의 시선에 콧방귀나 날리는 고지식한 천재 여인이 인상적인 까닭은? 정답은 비비안 리 뺨칠 만큼 잘록한 허리 위로 물결치는 불타는 머리칼. 그러니 세상 모든 쇼트커트 머리 여인들이 그녀를 두고 한탄하지 않았을까. 저토록 탐스러운 붉은 머리라니, 갖고 싶어라!
레이첼 니콜스는 본디 모델로, 탄성이 새어나오는 곡선이 그 명백한 증거다. 컬럼비아대 재학 시절 우연히 모델계에 입문해 게스, 아베크롬비앤피치 등의 광고 캠페인에 발탁될 정도로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배우의 꿈을 이루기란 운 좋고 지적인 금발 미녀에게도 힘든 일이었다. 20
[레이첼 니콜스] 천천히, 대담하게 피는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