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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고 유종의 미를 거둬야 할 이 시점에 몇명 있지도 않은 친구 중 하나가 나의 안티였음이 밝혀지다니(<씨네21> 732호 ‘오마이이슈’ 참조) 먼저 심심한 유감의 뜻을 표한다. 나, 손석희 정말로 좋아한다. 누군가를 좋아한다고 그 사람이 만들거나 참여한 작품을 꼭 경험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박찬욱을 좋아한다고 박찬욱 영화를 꼭 봐야 하는가 말이다(으응? 이거 아냐?).
그녀의 주장을 반박하고 싶지만 주얼리 정을 더 좋아하긴 한다. 실은 사랑한다. 한때 MSN 대화명이 보사마였으며, 방송 담당후배에게 보사마 인터뷰는 어떻겠냐며 지그시 강압적으로 기사화도 성사시켰고 매일 잠자리에 들기 직전 그가 출연한 <지붕 뚫고 하이킥!>의 모든 장면을 낱낱이 복기하는 짓을 <거침없이 하이킥>에 이어 또다시 하고 있다.
내가 <지붕킥>에서 가장 흥미롭게 보는 부분은 청춘남녀들의 러브러브 사각관계도 아니고, 해리와 신애의 <
[아저씨의 맛] 올해의 아저씨로 그대를 선정하리 (최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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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본색>이 리메이크된다고 했을 때 팬들 모두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사적인 애정과 별개로 ‘언제 적?’이란 생각부터 드는 게 정상이니까. 그러면서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김주혁이 등장할 때, 주말 <개그콘서트>에서 허경환이 등장할 때 들려오는 그 음악부터 떠올랐다. TV <유재석 김원희의 놀러와>를 보니 황정민도 왕년에 그 음악에 맞춰 무던히도 바바리코트를 입었다니 그 추억의 깊이는 정말 어마어마하다. 하여간 현재 아시아에서 왕년의 주윤발과 장국영의 무드를 그대로 살려낼 만한 배우도 없을뿐더러 좋아하는 작품일수록 원전을 그대로 내버려뒀으면 하는 마음 때문에 다들 걱정했을 것이다.
바로 그 <영웅본색> 리메이크작을 송해성 감독이 <무적자>란 제목으로 연출하는데, 대략 그 캐스팅을 정리하면 주윤발이 연기했던 배신자를 처단하려다 다리를 다치는 전직 폭력배 역은 송승헌이, 폭력조직에서 일하다 후배의 배신으로 감옥살이를
[오픈칼럼] 안길강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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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호 <씨네21>에 실린 김영진의 <나는 곤경에 처했다!>(이하 <곤경>) 평문(‘김영진의 점프 컷’)과 다른 견해를 말하기 위해 쓴다. 그는 호의적으로 썼고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김영진도 절찬한 것은 아니다. 그에 따르면 “어떤 숭고나 고양, 반영, 아이러니의 느낌이 배어 있지 않”고 “홍상수 영화에서의 비약의 순간 같은 것이 없”지만, 이 영화는 “상당한 감각을 지닌 감독의 대사 구사력과 그 효과로 인해 발생하는 유머감각”과 “우리가 야심이라고 부르는 것에 매어 있지 않은 태도로 인물과 상황을 만들어내는 재기”를 보여주고 있으며 “흥미로운 세대의 기록”이다.
곰브리치가 미술을 두고 그렇게 말했듯이, 누군가 어떤 영화를 좋아하는 데 잘못된 이유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김영진이 말한 위의 장점들은, “(주인공)이 어떤 기왕의 범주에도 묶이지 않는 인물의 개성을 보여준다”고 말한 대목을 뺀다면, 그 자체로는 대체로 동의할 만하다. 그런데
[전영객잔] 영화는 영화다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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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있습니다
1990년대, 경제호황의 그늘 속에서 자폐적으로 내성 세계로 파고들던 세기말 소년이 관계에 눈을 돌리고 원망(怨望)이 아닌 원망(願望)의 열정을 품었다. 자기 세계 속에 갇혀 있던 이카리 신지가 무언가가,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있어서 무언가가’ 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초호기는 동물처럼 달리고 또 달린다. 에반게리온은 그렇게 신세기를 맞았다.
어쨌든 신극장판 <에반게리온: 파(破)>는 기존 관객이든 새로운 관객이든 누구나의 피를 뜨겁게 만들 애니메이션임에 분명하다. 다섯 차례에 걸쳐 일어나는 사도와의 대결 시퀀스는 현재 일본 아니메 기술의 첨단과 극적 쾌감의 최고도를 선사한다. 여기서 안도 히데아키는 서사를 요약하고 신비의 요소를 복병처럼 숨겨두는 숨은 보물 찾기 놀이가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감성의 전개쪽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에반게리온: 파(破)>는 새롭다. 오랜 관객의 뇌리에 각인된 인식의 지점들을 꾹꾹 눌러줘가며 그노시스적 세계
[영화읽기] 열혈 감성, 현실의 권태를 뚫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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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리영화 한편을 보고 난 듯하다. “자, 고기를 썰 때는 이렇게 사선으로 단번에 잘라야 해요, 보세요, 이렇게 썰린 단면이 깔끔해야죠. 망설임없이 자르세요. 자, 깔끔하게 자르려면 뭐가 필요하겠어요? 그렇죠. 숯돌에다 칼을 잘 갈아두어야겠죠.” 영화 <닌자 어쌔신>에서 어찌나 피와 고기와 살과 칼과 뼈를 많이 보았던지 극장문을 나설 때는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고 푸줏간에 걸린 고깃덩어리로 보이더라. <닌자 어쌔신>에 대한 평은 요리칼럼니스트 박찬일씨에게 넘기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박찬일 칼럼니스트라면 아마도 사람 뼈의 강도와 칼날의 각도 같은 걸 치밀하게 계산하고, 흘러나온 피의 양과 잘려나간 단면을 연구하여 맛있는 칼럼을 만들어내겠지만, 내가 알기로 박찬일 칼럼니스트는 이런 영화라면 질색한다. 아마 포스터 근처에도 못 갈 것이다. 나는 이런 영화, 참 좋아하는 편이다. 그런데도 힘들었다. 칼 쓰는 영화 좋아하고, 피 철철 넘쳐흐르는 영화 좋아하지만 영화
[나의 친구 그의 영화] 고통이 몸을 정화시키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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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어필지수 ★
엉뚱 지수 ★★★★★
드디어 때가 왔다. 거리에는 캐럴이 울려퍼지고 TV에선 온갖 특집 방송이 편성되는 시즌, 옆구리가 시리다고 투덜대는 친구들과 크리스마스 따위 별거 없다고 약 올리는 커플들의 시간 말이다. 11월 말부터 12월 초에는 여전히 캐럴 음반이, 그야말로 쏟아진다. 여기서 밥 딜런의 ≪Christmas In The Heart≫를 소개하는 것도 그래서다. 하지만 이 앨범은 10월에 발매되었다. 2009년에 가장 일찍 튀어나온 캐럴 앨범인데, 밥 딜런 음악 인생 47년 만의 첫 캐럴이자 34번째 스튜디오 앨범이다. 물론 그래서 이 앨범이 대단하다는 얘기는 아니다. 사실 그리 대단하지도 않다. 여기서 이걸 소개하는 건 ‘이상하지만 좋기 때문’이다.
앨범엔 모두 15곡이 있다. <Here Comes Santa Claus>를 비롯해 <Winter Wonderland>와 <Little Drummer Boy> <Silv
[음반] 걸걸하고 불안한 캐롤의 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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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의 사연>(이하 <악연>)에는 진짜 악당이 나온다. 이름은 ‘홍어단’. 암모니아 향기 가득한 홍어를 트레이드마크로 하고 있다. 어이없다. 홍어의 색과 모양을 본뜬 슈트를 입고, 끈적끈적한 홍어폰을 쓴다. 홍어폰은 30초 동안 전화를 안 받으면 괴음을 내면서 피를 토한다. 황당하다. 홍어단은 지구 정복을 위해 말도 안 나오는 이상한 괴수를 만들어낸다. 악당이 있으면 정의의 사도도 있는 법. 홍어단에 맞선 이들은 사랑의 힘으로 지구를 지킨다고 하는 ‘러브레인저’다.
<파워레인저>류의 전대물을 기막히게 비틀어 만든 <악연>은 황당함으로 이루어진 만화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싶은 괴상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런데 그게 또 잘 읽힌다. 신기하다. 홍어단에서 괴수를 디자인하는 도식이라는 주인공과 러브레인저 핑크의 러브라인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한회씩 짧게 끊어서 개그에만 집중하는 에피소드식이 아니라 스토리가 있는 개그만
[스크롤잇] ‘싸대기몬’을 아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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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조금 전성기가 지났지만 1990년대의 재닛 잭슨은 마돈나와 휘트니 휴스턴, 머라이어 캐리에 맞먹거나 어느 정도는 그들을 능가하는 압도적인 스타였다. 특히 90년대 여가수가 내놓은 단 한장의 걸작 앨범을 꼽으라면 당연히 재닛 잭슨의 89년작 ≪Rhythm Nation 1814≫(89년 발매지만 영향력은 91년까지 지속됐다)여야만 한다. 한장의 앨범에서 무려 7곡의 ‘빌보드 톱5’가 나왔을 뿐만 아니라, 그중에서 무려 네곡이 1위, 두곡이 2위였다. 게다가 한곡도 빠짐없는 팝의 클래식이다. 이건 경쟁자들이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는 기록이다. 이후로도 재닛은 <That’s The Way Love Goes>나 <All For You> 같은 명곡을 만들어냈지만 그 유명한 슈퍼볼 사건 이후 조금 수그러들었다. 어쨌거나 오빠가 영원히 사라진 지금, 오빠의 명성에 결코 좌초되지 않고 자기만의 세계를 만들어온 여동생의 베스트가 나오는 건 의미심장하다. 특히 신곡 <
[음반] 잭슨가는 건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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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드 폴을 좋아하는 사람만큼 별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엄친아’라서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감성이 부담스럽다는 사람도 있고 허세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루시드 폴은 이제 발매되자마자 차트 1, 2위에 드는 음악가가 되었다. 적이 많다는 건 그만큼 대중적이라는 얘기다. 개인적으론 그에게서 뭘 기대하기 때문에 호불호가 상반되는지 궁금하지만, 어쨌든 ≪레 미제라블≫은 ≪국경의 밤≫과 비슷한 곳을 지향한다. 이주노동자 문제와 유년기에 대한 향수를 동시에 드러냈던 전작처럼 ≪레 미제라블>은 노스탤지어를 경계로 여기와 저기를 오간다. 그걸 이상과 현실의 접목이라고 부를 사람도 있을 테고, 감상적인 현실감이라고 부를 사람도 있을 테지만 오히려 그런 점 때문에 ≪레 미제라블≫은 어쩌면 가장 루시드 폴‘다운’ 앨범으로 들린다. <고등어>의 “날 고를 때면 내 눈을 바라봐줘요”라는 가사는 좀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음반] 유랑하는 노스탤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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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의 시대가 저물고 있다. 2010년 경인년은 호랑이의 해. 또 다른 1년을 잘 살아낼 각오로 호랑이 정기를 듬뿍 받는 건 어떨까. 롯데갤러리에서는 12월29일부터 민화가 서공임의 개인전, <100마리 호랑이>를 개최한다. 제목 그대로 화폭 가득 100마리 호랑이를 풀어놓았다. 흥미로운 점은 50마리는 할아버지, 50마리는 젊은 호랑이라는 것. 호랑이 나이를 어떻게 계산하냐고? 굉장히 간단하다. 곰방대를 빨거나 까치를 바라보고 있으면 할아버지고, 고양이의 골격을 하고 있거나 개성있는 마스크를 자랑한다면 젊은이다.
사실 나이는 비유일 뿐이고, 할아버지 호랑이 그림은 전통 민화, 젊은 호랑이 그림은 현대적 민화에 가깝다고 보면 된다. 서공임 작가는 18~19세기에 조선에서 활약했던 무명 화가들에 바치는 오마주로 전통 민화를, 그 정체성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의지의 표명으로 현대적 민화를 그렸다고 한다. 이 작품들 속에서 공통적으로 엿보이는 호랑이의 든든한 풍채와 순박한 표정
[전시] 호랑이 기운이 솟아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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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사라졌다. 엄마가 여행을 간 사이에, 아빠가 일하는 사이에, 오빠가 방치한 사이에 아이는 자취를 감췄다. 가족들은 몸져눕거나 속죄하거나 기행을 저지르는 방식으로 막내를 잃어버린 책임을 나눠진다. 그런데 아이가 실종된 지 석달 뒤, 한강에서 익사한 남자의 시체가 발견된다. 소설의 프롤로그를 장식하는 이 불길한 기운의 사건은 아이의 실종사건과 익사체가 연관돼 있음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정이현 작가의 신작 <너는 모른다>의 초반 몇 챕터를 이끄는 힘은 서스펜스다. 익사한 의문의 남자는 누구이며, 아이와 남자는 어떤 관계일지에 대한 궁금증이 서둘러 페이지를 넘기게 한다. 정이현 소설에 종종 등장하는 도회적인 이미지의 가족 구성원도 관심을 끈다. 실종된 소녀 김유지의 가족들은 누구나 꿈꿀 만한 강남의 정돈된 빌라에 산다. 개인 사업가인 아버지는 가족을 아낌없이 지원하며, 화교 출신의 새엄마는 가끔 대만의 옛 애인을 만나지만 가족에 소홀함이 없다. 철없으며 나약한 첫딸 은
[한국 소설 품는 밤] 결국, 우리는 알지 못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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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을 참 맛깔스럽게 한다. 오쿠다 히데오 말이다. <연장전에 들어갔습니다>는 스포츠에 관한 잡설을 모은 책인데, 놀랍게도 누구나 한번쯤 가져봤을 궁금증에 대한 수다로 가득 차 있다. 이를테면, 한국 야구 팬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SK와이번스의 (얼굴 작기로 유명한) 김광현 선수와 LG트윈스의 (‘국민 대괄’이라고 불릴 정도로 얼굴이 큰) 이진영 선수가 한 프레임에 잡히는 모습에 한마디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을 것이다. 오쿠다 히데오는 9등신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얼굴이 작은 타이거 우즈를 보며 얼굴이 너무 커서 슬플 닉 팔도 선수에 대한 망상을 펼친다. 그러고는 생각이 뻗어간다. 머리가 크면 스포츠에 불리하다, 증거는 100m 결승에 선 선수들이 다 얼굴이 작다는 것이다, 얼굴이 크면 격투기할 때 맞는 면적도 넓어져 곤란하다 등등. 운동경기를 볼 때 관중석을 보다 엉뚱한 것에 신경이 쏠려버렸다든지, 싸움 자랑하는 남자 앞에서는 줏대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남자가 되어버린다든지.
[도서] 스포츠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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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자리에 있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지난 4월 말 MBC 신경민 기자가 <뉴스데스크> 앵커직에서 석연치 않게 물러난 이후 정국이 어지러워질 때마다 문득 궁금했다. 하루 뉴스의 핵심을 짚고 빈곳을 메우는 신랄한 멘트로, 저널리즘과 앵커의 역할을 재조명하게 했던 신경민 기자가 책을 냈다. 2007년 라디오 프로그램 <뉴스의 광장>과 387일간 진행한 <뉴스데스크>에서 방송한 500여개 멘트 가운데 시의성을 넘어 유의미한 클로징 멘트를 선별해 주제별- 미디어, 정치, 국제, 사회- 로 묶고, 보도의 배경이 된 사실(fact)과 저변에 깔린 관찰과 판단을 서술했다. <신경민, 클로징을 말한다>는 단순히 화제를 불러일으킨 클로징 멘트를 수집해 주석을 붙인 책이 아니다. 오히려 클로징 멘트의 결산을 ‘빙자’한 30년차 언론인의 경험적 저널리즘 개론이며 한국 사회평론에 가깝다.
한국의 대통령, 사법부, 행정기관, 언론이 작동하는 방식을 묘파한 문
[도서] 뉴스 읽어주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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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설계론자와 교인들에게 추천 지수 ★★★★★
그들이 눈과 귀를 막고 거부할 지수 ★★★★★
당신은 지상 최대의 쇼를 믿는가. 여기서 ‘지상 최대의 쇼’는 제임스 카메론의 <아바타>, 가 아니라, 진화다.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으로 막을 열어젖힌 진화 말이다. 진화론은 지금 사상 최악의 적들에 둘러싸여 있다. 갤럽에 따르면 미국인의 44%가 ‘신은 지난 1만년 안짝에 현재의 형태 거의 그대로 인간을 창조했다’고 믿는다(그리고 그들 중 대부분이 지금 모습 그대로 공룡과 같은 시대에 아옹다옹 살았다고 믿는다). 미국 교사들은 진화론을 가르치려 할 때마다 교회의 세뇌작업에 물들어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들을 직면한다. 대체 어쩌자고 일이 이렇게 된 것인가.
사실상 전세계의 존경받는 종교인 지도자 대부분은 ‘인간은 덜 발전된 생명 형태로부터 수백만년의 기간을 거쳐 발달했고, 신이 그 과정을 이끌었다’는 설을 지지한다. 그러니까 진화론은 사실이되 그것 역시 신의
[도서] 참 재미있는 진화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