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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심한 남자. 강호를 호령하던 여걸(양자경)이 ‘여자’가 되어 얻은 남편을 두고 옛 동료들은 이렇게 비웃는다. <검우강호>에서 정우성은 그 ‘한심한 남자’다. 그는 하루 종일 말똥을 치우고, 돈이 아까워 두부포 쌈을 먹고 싶어도 그냥 지나치고, 칼 가는 숫돌을 구입하는 게 일과 중 가장 큰 도발인 소시민 강아생을 연기한다. 사실 정우성의 이런 모습은 익숙하진 않지만 낯설지도 않다. <똥개>의 철부지 청년과 <호우시절>의 회사원 동하를 통해 그는 화려한 외모를 감추고도 얼마든지 배우 정우성으로 우뚝 설 수 있다는 걸 입증해 보였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우강호>는 좀 다르다. 이 영화에서 정우성은 강아생을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처럼 보인다. 마치 영화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그는 불필요한 힘을 빼고 물 흐르듯 대사를 읊조린다. 이는 촬영현장을 일상처럼 대하게 된 17년차 배우의 현재와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제는 나 자신이
[정우성] 겸손과 열정에서 관록이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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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30일
사람과 그가 깃들어 사는 공간이 조개의 몸과 조가비의 관계처럼 보이는 순간이 있다. 말하나마나 건물은 유기체도 아니고 직접 살 자가 집을 짓는 경우도 드무니 맞을 리가 없는 비유다. 그런데도 누군가 자리잡고 한동안 살아온 방에 들어서면, 거기 사는 사람의 필요와 욕망이 보이지 않는 분비물처럼 조금씩 새어나와 굳어버린 껍데기로 느껴진다. 노래방, 독서실, 고시원처럼 집단이 사용하는 건물도 크게 다르진 않다. 김동주 감독은 <빗자루, 금붕어 되다>를 자막으로 시작한다. “서울 신림동에는 일명 ‘고시촌’(exam village)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이뤄지며 6만명 이상이 고위 공무원 등이 되기 위해 공부하지만 합격해서 뜨는 사람은 극소수다.” 고시촌의 개념을 해설하는 이 자막은 마치 생태계의 특수 현상이라도 소개하는 투인데, 이어지는 영화와 썩 잘 어울린다. <빗자루, 금붕어 되다>는 50대 후반의 남자 장필의 신림동 고시촌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눈물이 앞을 가린다, 웃기고 슬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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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적이라는 것은 사태의 뿌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는 급진적(radical)이라는 말이 라틴어 radis(뿌리)에서 나왔다는 얘기에 불과하나, 마르크스가 굳이 이렇게 낱말의 어원을 상기시키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다. 흔히 ‘급진적’이라고 하면 현실에서 유리된 사유와 행동의 ‘과격함’이 연상된다. 그런 의미에서 급진적으로 되는 것은 어렵지 않을 거다. 그저 단순무식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 말의 어원에 합당하게끔 “사태의 뿌리로 돌아가는 것”은 어려운 일. 특히 그 ‘사태’가 자기 자신일 경우에는 더욱더 그러하다. 어느 나무가 제 뿌리를 땅 밖으로 드러내기를 원하겠는가?
필연과 우발, 두가지 유물론의 대립
한때 사회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자신의 내적 모순에 따라 필연적으로 몰락한다고 믿었다. 실제로 1917년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러시아는 당시에 유럽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이 매우 늦은 축에 속했다.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논리적 모순을 해결한 것
[진중권의아이콘] 신념을 의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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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보면, 전주에서 진안으로 가는 길에 있는 시골닭집의 상호가 ‘켄터키촌닭집’이었다며 어쩌다가 토종닭의 상징성을 켄터키가 대신하게 됐냐고 개탄하는 토막이 있다. 지금이야 국산 브랜드도 많고, 패스트푸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이 많아 덜할지 모르지만, 나의 어린 시절에는 ‘프라이드치킨’과 ‘켄터키’ 사이에는 강철보다 단단한 관계가 성립했었다. 아마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에게 “켄터키 하면 뭐가 떠올라?” 하고 물으면 열에 아홉은 망설임 없이 프라이드치킨이라고 대답할 것이 분명하다. 미국에서도 그 사정이 비슷한지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켄터키주 렉싱턴을 주무대로 삼은 <FX>의 TV시리즈 <저스티파이드>를 보면 프라이드치킨이 제법 여러 곳에서 활약한다.
첫 번째 활약상이다. 지난밤 남편에게 매맞던 아내가 그를 엽총으로 쏘아 죽인 뒤 동네 오빠로 알고 지낸 보안관에게 “이따가 말이야, 저녁 먹으러 들르지 않을래? 치킨 몇 조각 사다가
[안현진의 미드앤더시티] 치킨 뜯다 권총 뽑아든 카우보이 모자의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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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가? 방가!>의 순제작비는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현물 지원받은 것을 제하면 6억원에 불과하다. 육상효 감독의 장편 데뷔작 <아이언 팜>(2002)은 미국에서 현지 로케이션을 진행한, 순제작비 10억원의 영화였다. 그의 두 번째 작품 <달마야, 서울가자>(2004)는 순제작비 25억원에, 총제작비가 40억원이 넘었다. <방가? 방가!>를 찍으면서 제작자와 “영화가 중요하냐, 사람이 중요하냐”고 다퉜을 정도로 빠듯한 살림이었다지만, 정작 육상효 감독은 “자신이 하고 싶은 영화를 만들 수 있었다”며 돌아보면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말한다. 위장취업한 한국 청년이 외국인 노동자 틈에서 일한다는 흥미로운 설정의 <방가? 방가!>는 육상효 감독의 전작들이 그러하듯 캐릭터와 대사가 돋보이는 흥미로운 코미디다. ‘웃기는’ 타이밍과 포인트를 아는 그의 여전한 감각이야말로 <방가? 방가!>가 작은 영화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입소문만으로
[육상효] 외국인 노동자들을 친근한 존재로 드러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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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 La Nana
2009년/세바스티앙 실바/97분
1.78:1 아나모픽/DD 5.1, 2.0
스페인어/영어 자막/오실로스코프(미국)
< 화질 ★★★☆ 음질 ★★★☆ 부록 ★★☆ >
영화와 하녀(혹은 하인)의 관계는 대체로 전형성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편이다. 대개의 영화들은 기껏 계급 갈등이나 성적 폭력을 주제로 삼았을 따름이다. 클로드 샤브롤, 김기영, 마르코 벨로치오, 조셉 로지, 루크레시아 마르텔 등의 영화에서조차 주인과 하인의 관계를 규정하는 말은 죄다 그렇고 그런 것 아니었나. 틀렸다는 게 아니라 식상하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세바스티앙 실바의 <하녀>는 신선하다. 한 뿌리 두 가지인 장 르누아르의 <어느 하녀의 일기>나 루이스 브뉘엘의 <시골 하녀의 일기>에 빗댈 만한 걸작은 아니지만, 영화의 모호한 성격은 인물과 주제에 관한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혹자는 <남아 있는 나날>을 거론하기
[DVD] 늙은 하녀의 혹독한 성장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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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태를 만나러 가기 전 <심야의 FM> 홍보실장이 이런 얘기를 꺼냈다. “혹시 인터뷰 도중 유지태씨 표정이 갑자기 변하더라도 오해하지 마세요. 스스로 짜증이 났거나 맘에 안 드는 상황이 생겨서 그런 거니까요. 절대 상대방에게 짜증내는 거 아니에요.” 유지태는 솔직하다.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고, 그 감정을 숨김없이 표현한다. 솔직해서 오해를 사는 일이 많다. “아무리 착한 척, 정의로운 척, 예쁜 척해도 시간이 흐르면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다 까발려지게 돼 있어요.” 유지태는 ‘척’하는 대신 영화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열정을 작품으로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하며 달려왔다. <동감> <봄날은 간다> <올드보이>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그에게 인기는 물론 ‘믿음직스런 배우’라는 수식어를 가져다주었다. <야수> <가을로> <황진이> <비밀애> 등 최근작들은 흥행에 실패했다. 그렇다고 그의 연
[유지태] “매순간 떨리고, 매순간 새롭고, 매 순간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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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유소 습격사건>에는 “한놈만 패면 돼”라는 대사가 나온다. 애초에 그 대사가 의미한 것과는 다를지도 모르지만, 실로 그렇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와 (생명체처럼 움직이는) 조직은 서로 닮아 있다. 하나만 파고들면 전체를 이해할 수 있다. 누구는 야구가 인생과 닮았다 하고 누구는 산이 그렇다 하고 누구는 바둑이 그렇다 한다. 모두 참이다. <바나나>는 바나나 하나만 파고들어간 책이다. 바나나의 생김새부터 맛처럼 누구나 익숙한 부분은 물론, 바나나를 둘러싼 무역업의 변화, 세계 노동 착취의 현실 등 바나나와 관계없다고 느껴졌던 세상 돌아가는 현실까지를 다루고 있다.
댄 쾨펠은 성경에 나오는 선악과가 사과가 아닌 바나나였다는 주장에서 시작한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라는 히브리어 단어를 라틴어로 번역하면서 ‘사과’로도 번역될 수 있는 ‘malum’이라는 단어를 택했기 때문에 사과라는 오해가 시작되었다고. 확인할 길 없는 선악과 논쟁이 흥미진진한 뒷이야기의 재미를 준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바나나가 진짜 선악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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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항해술>│ 어슐러 르 귄 지음 황금가지 펴냄
<나는 왜 쓰는가>│조지 오웰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글쓰기에 관한 두권의 책이 출간되었다. 제목을 보면 그렇게 보인다.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는 제목 그대로 ‘왜’ 써야 하는가의 문제제기를 포함한 산문집이다. <1984> <동물농장>을 비롯해 르포타주인 <위건 부두로 가는 길>까지, 그가 왜 꾸준히 사회를 글 안으로, 글을 사회 속으로 끌어들였는가를 알게 해준다. 1931년부터 1948년에 걸쳐 쓴 에세이를 모은 이 책은 그러니까 조지 오웰이라는 인간에 대한 르포타주라고 봐도 손색이 없다. 그의 다양한 삶의 면면에 대해서도 귀동냥을 하게 해준다.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들고자 했던 조지 오웰이 ‘왜 쓰는가’의 문제를 고심했다면 <어스시 전집>을 비롯해 <어둠의 왼손> 등을 쓴 어슐러 르 귄의 <글쓰기의 항해술>은
[도서] 왜 쓰지? 어떻게 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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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앨범을 어떻게 보든 그건 당신 마음이다. 벤 폴즈 최고의 멜로디로 보든 닉 혼비 최고의 운문으로 보든 혹은 그 둘이 결합해 만든 놀라운 시너지 효과로 보든 뭐 어쨌든. 난 단지 과장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해서, 이 앨범은 좀 재밌다. 11곡은 근사하기도 하고 끔찍하기도 하고, 또 사랑스러울 때도 있고 철학적일 때도 있다. 멜로디는 벤 폴즈의 솔로 1집 <<Rockin’ The Suburbs>>처럼 들리기도 해서 마음에 드는데, 가사는 정말 괴상한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풍자와 자조가 뒤엉켜 있는 중에 압권은 아이러니다. 그게 인생이라는 듯, 닉 혼비는 노래의 앞과 뒤를 엎어놓았다. 아티스트의 으스댐은 너드의 자기비하로, 백인 쓰레기 이웃에 대한 설교는 보수주의자의 헛소리로, 클레어의 아홉살 생일은 아빠가 둘이나 찾아온 이혼가정의 싸움질로 말이다. 짐작건대, 두 사람은 이걸 만드는 동안 꽤 즐거웠을 것이다. 한없이 아름다운 멜로디에 “희망은 거짓말, 나쁜 놈
[추천음반] ≪Lonely Ave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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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희/음악웹진 ‘백비트’ 편집인 ★★★★
앨범은 크게 록과 발라드로 양분된다. <그대랑> <두통> 같은 록은 편곡 사운드가 이적의 보컬을 잘 살려주지 못해 조금 아쉽다. 하지만 <다툼> <빨래> 같은 발라드는 솔로 이적을 기다려왔던 이들의 기대에 충분히 부응한다. ‘사랑’이라는 주제 선택은 다소 추상적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가사와 멜로디와 보컬 모두가 선명하게 살아 있다. 여전히 그는 국내 싱어송라이터의 모범 모델이다.
차우진 대중음악평론가 ★★☆
이적은 괜찮은 가요를 만든다. 잠깐, 여기서 쉼표. 난 이 앨범이 적당히 만들어졌다고 본다. 놀라운 건 많은 사람들의 열광이다. 새삼 대중문화(수용자들)의 보수적인 속성이 환기될 정도인데, 잘난 척하자는 게 아니라 사실 우린 좀 부지런해질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취향이 아닌 자기 계발에만 그렇게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는 것일까.
김학선 음악웹진 ‘보다’ 편집장 ★★★☆
이제는 돌아와
[hot tracks] 좀더 ‘패닉’에 빠지고 싶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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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26일~11월30일/PKM트리니티갤러리/02-515-9496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날씨다. 일탈하고 싶으나 그럴 수 없는 날에는 여행을 작품의 원동력으로 삼는 작가의 전시를 둘러보는 것도 위안이다. 가브리엘 오로즈코는 거처없이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작업하는 멕시코 작가로 멕시코, 뉴욕, 파리 등 머물렀던 지역에서 일상적으로 볼 수 있는 오브제를 소재로 사물의 움직임, 확장, 순환을 고민하는 작품을 만들어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오로즈코의 사진, 설치, 회화를 아우르는 70여점의 최신작이 소개된다. 축구선수 호나우두의 슈팅 사진에 기하학적 도형을 접목시켜놓고 <호나우두 발레>라는 제목을 붙인 작가의 센스가 귀엽다.
[전시] <가브리엘 오로즈코: Selected Works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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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디 피아노 리사이틀> (11월1일 오후 8시 |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 1577-5266)
<지용 리사이틀> (11월28일 오후 2시30분 |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 1577-5266)
쓸쓸하다면 당신의 마음을 피아노 선율 위로 날리자. 11월 두 젊은 피아니스트가 우리 곁에 온다. 첫 손님은 피아니스트이자 아티스트인 지용. 마술, 춤, 퍼포먼스 등 그의 무대는 무경계이며 항상 진화를 꿈꾼다. 이번 솔로 무대 또한 본인이 직접 컨셉과 조명, 영상까지 꾸몄다. 지용이 선택한 곡은 2011년 탄생 200주년을 맞는 리스트의 음악들이다. 리스트 피아노 소나타 B단조를 비롯하여 리스트가 편곡한 클래식 마스터 피스들을 들려준다.
두 번째 손님은 윤디. 2000년 15년간 공석이었던 쇼팽국제피아노 콩쿠르의 1위 자리를 중국인 최초로, 콩쿠르 사상 최연소로 거머쥔 스타다. 윤디가 쇼팽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전곡을 쇼팽으로 구성했다. 녹턴부터 마주르카, 소나타
[공연] <윤디 피아노 리사이틀> , <지용 리사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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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열전3> 6th-연극 <너와 함께라면>
10월31일까지/ 대학로 문화공간 이다 1관
출연 송영창, 서현철, 추귀정, 박준서, 이세은, 김유영, 조지환, 최정헌
02-766-6007
120분 내내 웃음의 속사포다. 미타니 고키의 신작 <너와 함께라면>은 이번에도 강력한 웃음 실탄을 장전했다. <연극열전2>의 히트작 <웃음의 대학>을 능가하는 폭발력이다.
이야기의 전말은 이렇다. 코이소가의 연례행사 나가시 소멘(흐르는 물에 국수를 띄워 먹는 일본 전통 풍습) 준비가 한창인 여름날, 스물여덟살 큰딸 아유미(이세은)의 남자친구 켄야(송영창)가 불쑥 집에 찾아온다. 청년사업가인 줄 알았는데 맙소사, 70대 노인이다. 애지중지 딸을 키워온 아빠(서현철)는 기절초풍할 지경이다. 그런데 아내가 놀랄까봐 두딸의 거짓말에 동참한다. 엄마(추귀정)는 사위를 시아버지로 오인하고, 말없이 들이닥친 켄야의 아들(박준서)은 아유미의 엄마를
[연극] 눈물 쏙 빠지게 웃고 싶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