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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독립영화제가 50주년을 맞은 2025년, 한국 독립영화는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 지난해 예산 삭감 위기를 겪고 복원 과정을 거치면서 드러난 것은 단순한 재정 문제가 아니라 독립영화를 바라보는 근본적 시각차, 그리고 독립영화 정책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함께 만들어갈 것인가 하는 거버넌스- 민간과 정부의 협력정치- 의 문제였다. 서울독립영화제의 경우 영화진흥위원회, 한국독립영화협회가 공동주최해온 협력 구조가 공모 사업으로 전환되면서 문제시되고 있다. 8월18일 열린 국회 토론회 ‘새 정부 독립영화 진흥 정책의 방향과 비전: 서울독립영화제 거버넌스 회복이 갖는 의미와 과제’(공동주최 국회의원 이기헌, 임오경, 조계원, 양문석, 손솔, 한국독립영화협회, 영화진흥위원회)는 이런 갈등의 본질을 고스란히 보여줬다. 2시간여 토론 속에서 독립영화의 정체성과 가치, 현장과 기관간 신뢰라는 근본 과제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1975년 대안영화의 플랫폼에서 출발해 한국영화 생태계의 토양이 된 서
[기획] 새로운 50년을 위한 정책은? 연속기획 - 2025 한국 영화산업과 정책 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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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를 불태워>에서 마티아스 피녜이로는 체사레 파베세의 <레우코와의 대화>, 그중에서도 여성 시인 사포와 요정 브리토마르티스의 대화 파트를 각색한다. 이 영화는 파베세가 자살하던 날 그의 책장에 놓여 있던 <레우코와의 대화>로 시작해 책 속에 담긴 사포의 목소리를 불러들이고, 그것을 낭독하고 각주를 덧붙이는 영화 속 인물들의 목소리를 덧입힌다. 다른 층위에 있던 목소리들은 서로의 페이지에 상호 침투하며 장면을 모호하게 교란한다. 영화 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렇게 파베세의 언어인지, 사포의 언어인지, 텍스트를 읽는 배우의 언어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로 스크린에 흩어진다. <너는 나를 불태워>에서 화면 안팎의 목소리는 흩어지는 박테리아균처럼 장면에 결부된 모든 것들을 감염시킨다. 마티아스 피녜이로의 영화를 보는 것은 문학의 언어와 영화의 음성이 뒤섞이고 변형되는 과정에 동참하는 일이고, 출발지와 도착지가 결정되지 않은 독후감
[인터뷰] 이 영화는 읽기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읽기 위한 영화다, <너는 나를 불태워> 마티아스 피녜이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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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밴드 오렌지택시클럽에서 나온 보컬 기석(윤호)은 한통의 전화를 받고 혼란스럽다. 베이스 멤버인 명오(배재영)에게서 공연에 서달라는 연락을 받은 것. 부탁에 못 이겨 찾아간 무대 뒤편에는 감정의 골이 깊은 기타리스트 유원(이찬우)이 있다. 유원은 밴드가 지금껏 자리 잡지 못한 이유가 기석이 회사 대표를 때린 탓이라 여기고, 기석은 멤버들이 계약 파투의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며 자신을 내쳤다고 원망한다. 이제 공연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단 15분, 둘의 오해는 풀릴 수 있을까. 8월18일 CGV에서 단독 개봉하는 <백! 스테이지>는 쉴 새 없이 휘몰아치는 음악영화다. 롤러코스터 같은 촬영과 편집은 내내 속도를 끌어올리고 기석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끝점에 도달한다. 이 중심엔 그룹 에이티즈 멤버로 잘 알려진 배우 윤호가 있다. 그가 펼치는 유연한 연기는 캐스팅의 이유를 납득게 한다. 실제로 마주한 윤호는 기석과 달리 차분히 촬영 비화를 전했다. 볼수록 궁금함을 자아내
[인터뷰] 유연한 폭발, <백! 스테이지> 배우 윤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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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보아도 AI로 만들어진 것이 뻔한 저질 콘텐츠가 넘쳐나고 있다. 숏폼의 SNS 이미지는 말도 안되는 엉터리 이미지들과 동영상들이 장악해버렸고, 인터넷에 떠도는 글들은 생성형 AI 특유의 내용이 텅 빈 비릿한 문체의 문장들로 가득하다. 이런 것들을 음식 찌꺼기를 뜻하는 ‘슬롭’이라는 말을 써서 ‘AI 슬롭’이라고 부른다. AI 비관론 중엔 이런 것이 있다. 생성형 AI란 결국 인류가 기존에 만들어놓은 이런저런 지적 창작물들을 되새김질하여 내놓는 것이며, ‘창발성’이 작동한다고 해도 이는 우발적인 것일 뿐 의식적인 것은 아니므로 결국 원자재가 되는 창작물들의 내용의 의식 수준에 크게 지배되게 마련이다. 그렇게 해서 AI가 쏟아놓는 것들을 우리는 편하다는 이유로,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고 만들 수 있는 능력의 부족으로, 돈이 된다는 이유로 그대로 따르고 그대로 유통시킨다. 그러면 AI는 이를 원자재로 삼아 또다시 되새김질하여 결과물을 내놓는다…. 이러한 ‘되먹임’ 과정이 무한반복되면
[홍기빈의 클로징] ‘AI 슬롭’의 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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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8월27일 전설적인 록밴드 오아시스가 재결합한다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다. 팬들의 오랜 염원에도 꿈쩍하지 않던 갤러거 형제가 16년 만에 극적으로 화해하고 결성 25주년 월드 투어를 열기로 한 것이다. 올해 10월21일 오아시스 내한을 맞이해 다큐멘터리 <슈퍼소닉>이 4K 복원판으로 재개봉한다. 2016년 개봉 당시에는 오아시스가 해체한 후에 오랜만에 뭉친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팬들의 아쉬움을 달래줬던 영화다. <슈퍼소닉>의 미덕은 갤러거 형제의 생생한 인터뷰와 풍성한 아카이브에 있다. 영화는 갤러거 형제 특유의 거칠고 유머러스한 입담이 살아 있는 인터뷰를 따라간다. 형제는 맨체스터의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유년기부터 오아시스 최고의 라이브로 불리는 1996년 넵워스 라이브까지 그 시절의 진심을 허심탄회하게 고백한다. 감독은 갤러거 형제의 가족, 오아시스 전 멤버와 전 프로듀서 등 주변 인물의 인터뷰와 수많은 푸티지, 사이키델릭한 애니메이션을 덧대며 인터뷰에
[리뷰] 재개봉 영화 <슈퍼소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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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수감 생활을 끝내고 교도소에서 출소한 한장유(이강생)는 고향 하이난으로 돌아가 과거 연인이었던 수홍(이몽)과 재회한다. 한장유는 수홍과 새로운 가족을 이루길 희망하고, 수홍은 신축 아파트에 입주하길 꿈꾸지만 예상치 못한 난관이 그들 앞을 가로막는다. 결핍을 채우려 가족이 되는 현실을 그린 <부재>는 미니멀하고 정제된 영상미로 서사의 빈틈과 대사의 공백을 채운다. 다양한 프레임과 제한된 색채 팔레트로 평범한 서사를 낯설게 만듦으로써 미장센이 영화에 어떻게 기여하는지를 훌륭히 보여준다. 흔한 이야기를 비전형적 형식으로 연출해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 사건의 불분명한 인과관계는 완성도 높은 시각적 이미지로 보완한다. 미장센이 제 역할을 다하면 구체적 언어가 된다.
[리뷰] 평범한 서사도 낯설게 만드는 미장센의 힘, <부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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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터리 <타히티의 고갱. 잃어버린 낙원>은 폴 고갱의 삶과 작품 세계를 따라가며 타히티와 마르키즈제도의 원시적 풍광을 시각적 원형으로 조명한다. 뉴욕, 시카고, 워싱턴, 보스턴의 주요 미술관에 소장된 걸작을 감상하면서 고갱 회화의 색채와 구도도 함께 탐구한다. 고갱이 꿈꾼 낙원을 낭만적으로만 그리지 않고 이상향이 아닌 삶과 맞닿은 인간적 장소로, 예술에 대한 갈망과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공간으로 바라본다. 작품에 담긴 존재론적 질문을 인간에 대한 근원적 성찰로 이어가는 이 다큐멘터리는 그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가며 낭만화된 이미지 이면의 현실을 포착한다. 경제적 곤궁과 문화적 충돌, 논란의 그늘까지 골고루 다루지만 고갱을 바라보는 시선에 애정이 어리어 냉철하게 따져 묻지는 않는다.
[리뷰] 삶이 따라오지 않는 낙원은 없다, <타히티의 고갱. 잃어버린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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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의 기억이 없는 수아(임도화)는 폭력적인 연인 현우(송승현)와 관계를 이어가며 불안한 나날을 보낸다. 수아와 운명이 얽힌 아누앗(아누팜 트리파티)은 끔찍한 과거를 숨긴 채 그녀의 곁을 맴돌고, 수아는 스물다섯 번째 생일을 맞아 연인과 친구를 따라 위태로운 여행을 떠난다. 만월의 밤, 아누앗은 그녀를 좇다 섬뜩한 진실과 마주한다. 전형적인 공포물에서 벗어나려는 영화는 외국 배우를 주연으로 내세우는 이색적인 캐스팅으로 차별화를 시도했으나 설정과 상황을 단순 나열하는 데서 그친다. 서사와 유기적으로 결합하지 못한 시도는 공허할 수밖에 없고, 허약한 기본기 위에 낯선 소재를 모아놓는 것만으로 새로움이 만들어지진 않는다.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요소가 서사를 위해 복무할 때 낯섦과 새로움을 기대할 수 있다. 의도를 실현해주는 것은 결국 탄탄한 서사다.
[리뷰] 전형에서 벗어나려면 전형에 도달해야 한다, <검은 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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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렌치 셰프 오바나(기무라 다쿠야)는 도쿄에서 아시아 최초로 미슐랭 3스타를 달성해 명성이 자자하다. 큰 뜻을 품고 파리에서 파인다이닝을 연 뒤 같은 지위를 얻고자 하지만 늘 2스타에서 제자리걸음이다. 별 세개에 대한 압박감에 흔들리던 그는 동료들의 지지를 힘입어 다시 도전하기로 한다.
<그랑 메종 파리>는 드라마 <그랑 메종 도쿄>의 세계관을 잇는 작품으로, 완벽한 요리를 향한 사람들의 집념을 흥미롭게 포착한다. 무대가 파리로 확장된 만큼 식재료와 조리법은 한층 다채로워졌다. 실제 미슐랭 3스타 셰프에게 자문을 받아 완성한 요리들을 실감나게 담아낸 숏들이 극의 풍미를 더한다. 드라마와 뚜렷이 구별되는 영화적 개성이 부족하다는 점은 아쉬우나 ‘요리에 국경은 없다’라는 핵심 메시지만큼은 분명하게 전달한다.
[리뷰] 보장된 맛에 찾아가는 단골집처럼, <그랑 메종 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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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진(공민정)과 정호(감동환)는 연인이며 둘 다 그림 그리는 일을 한다. 수진은 글을 쓰는 훈성(유의태)과 몰래 만나는 사이이기도 하다. 인주(정보람)는 개인전을 준비하고 있다. 시한부일지도 모르는 그는 정호를 짝사랑한다. 한편 연기하는 유정(정회린)은 연인 우석(류세일)과 자꾸 다툰다. 유정은 현재 우석을 대하는 자신에게서 전 연인 정호의 모습을 겹쳐 본다. 각자가 겪는 일상의 파편들로 관계를 조립해나가던 영화는, 어느 지점에 이르자 지나간 장면들로 되돌아가 잘라냈던 시간이나 공간을 조명하기 시작한다. 서로 다른 상황들, 스스로의 언어와 창작물에 비친 상들로 하나의 진실을 엮어낼 수 있을까.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는 서사를 분해해 재구성하며 정교한 연출로 관계와 감정의 복잡한 결을 담아낸다. 조희영 감독의 두 번째 장편으로, 전작 <이어지는 땅>의 분위기를 잇지만 긍정적인 의미로 낯설다.
[리뷰] 제목만큼 영화를 잘 드러내는 문장이 없다, <다른 것으로 알려질 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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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에서 친 사고의 대가로 살인이 포함된 특수 임무를 수행하며 빚을 갚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허치(밥 오든커크)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기를 간절히 원한다. 이에 아내 베카(코니 닐슨)와 두 자녀 그리고 허치의 노부 데이빗(크리스토퍼 로이드)과 함께 워터파크가 있는 휴양지로 바캉스를 떠난다. 그러나 평온함은 오래가지 못한다. 휴가지에서의 작은 실랑이로 인해 허치가 참지 못하고 폭력을 행사해버렸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상대가 해당 지역의 검은 조직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렇게 가족과의 평범한 휴가를 지키려는 허치의 눈물 겨운 전투가 시작된다.
2021년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북미에서의 깜짝 흥행으로 인상을 남긴 <노바디>의 4년 만의 속편이다. 여러 액션영화를 연출한 인도네시아 출신 티모 타잔토가 연출을 맡았다. 평범해 보이는 중년 남성이 일상이나 휴가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품들을 활용하여 선보이는 반전 액션을 보는 재미가 있다. 전체적 서사는 ‘분노한 아버
[리뷰] 피곤한 아버지의 애처로운 휴가 지키기, <노바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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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자 소설가인 체사레 파베세의 저서 <레우코와의 대화>는 그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을 당시 짧은 유서가 적힌 채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마티아스 피녜이로 감독은 <레우코와의 대화> 중 <바다 거품>을 영화화할 수 있겠다고 적은 과거 자신의 메모에서 출발해 <바다 거품> 을 스크린으로 옮기기 시작한다. <바다 거품>은 고대 그리스의 여성 시인 사포와 그리스신화 속의 님프 브리토마르티스의 대화로 이루어져 있다. 사포는 실연의 고통으로 바다로 투신했으며 브리토마르티스는 미노스 왕의 구애로부터 도망치다 바다에 빠졌다. 영화는 사포와 브리토마르티스 역을 맡은 두 배우의 목소리를 빌려 <바다 거품>의 대사와 여러 각주, 그리고 유실되지 않고 남은 사포의 시를 분석하기 시작한다.
<너는 나를 불태워>는 아르헨티나의 영화감독 마티아스 피녜이로의 신작이다. 아르헨티나와 미국, 이탈리아, 그리스, 페루, 스페인 등 여러 국
[리뷰] 다른 매체, 다른 언어의 경계를 감각게 하는 번역 실험, <너는 나를 불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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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여성 영화감독이자 배우인 마니아 아크바리는 아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 <텐>의 주인공으로 출연했다. 키아로스타미가 사망한 이후 그는 <텐>의 배급권을 보유한 배급사 MK2에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엔 아바스 키아로스타미가 <텐>을 연출하지 않았고, 시나리오를 쓰지도 않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아크바리는 <텐>에 사용된 장면은 모두 자신이 촬영한 것이며 이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기록된 영상이 아니라 심리치료사와 논의를 거쳐 녹화된 사적 프로젝트의 러시 필름이었다고 주장한다. 아크바리는 키아로스타미가 거짓말과 조작으로 자신의 영상을 훔치고 영상에 담긴 가족들의 민감한 사생활을 허락 없이 착취했음을 몇 차례에 걸쳐 폭로한다. <텐>을 편집하고 나서 완성본을 감상한 뒤에도 아크바리는 이 영화를 키아로스타미의 작업으로 인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칸영화제 공식 상영 직전에 마니아 아크바리가 기억하는 키아로스타미의 말은 다음과 같다.
[21세기 영화란 무엇인가?] 눈을 감은 영화 - 21세기 영화의 얼굴 없는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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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피 무늬의 의상과 선글라스, 여유로운 걸음걸이와 위압적인 풍채. 태산(마동석)에게 겁 없이 대적할 빌런이 과연 몇이나 될까. <이터널스>의 길가메시, <범죄도시> 시리즈의 마석도 등 배우 마동석은 이전에도 특별한 능력을 지닌 히어로와 악당에 맞서는 정의로운 캐릭터로 관객과 만나왔다. 그중 <트웰브>의 태산은 12간지를 소재로 한 동양적인 슈퍼히어로라는 점에서 신선함을 안긴다. 태산이 상징하는 동물은 호랑이다. 과거 전투에서 희생된 동료 천사들을 마음 한쪽에 묻어둔 채 현재는 남은 8명의 천사들과 정체를 숨기고 인간 세상에 정착한 상태다. 인간사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그의 방침이었으나 악당들이 다시금 활동할 기미를 보이자 태산도 자신의 거취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범죄도시> 시리즈를 비롯해 여러 작품의 기획, 제작, 각본에 참여해온 만큼 배우 마동석은 <트웰브>의 각본 작업 단계에서부터 여러 아이디어를 냈다. 배우 캐스팅부터
[인터뷰] 호랑이의 위압적인 이미지에 경쾌함을 더했다, <트웰브> 배우 마동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