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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숙취가 심한 날 아침, 식탁의 밥을 보며 ‘쌀이 만들어지는 홍천에 가봐야겠다’라고 마음먹은 것이 영화의 시작이었다. 가보니 어땠나.
농촌에 사는 분들을 보고 느낀 것이 분명히 있는데, 그것들을 내가 재현할 필요도 없고 재현할 능력도 없다는 사실부터 깨우쳤다. 농촌에서 이뤄지는 실제 삶의 영역이란 그분들의 것이다. 내가 농사를 지어본 적도 없고, 한 1년 지어본다고 그 영역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당연한 배움이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다큐멘터리 파트와 극영화 파트를 구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큐멘터리 파트의 시나리오를 쓸 때도 특정한 장면이나 대사를 넣기보단, 주민분들이 하신 말씀을 옮기는 데 집중했다. “사람이 20% 농사짓고, 하늘이 80% 농사짓는 거다”라는 이장님 말씀 같은 것들. 촬영 때 모니터하면서 무척 좋아했던 대사다.
- 그렇다면 민우가 등장하는 극영화 파트가 왜 필요했나.
영화 전반에 생사의 순환을 담고 싶은데, 누군가의 죽음을 기도하듯 기다
[인터뷰] 어쩔 수 없을 때까지, <지난 여름> 최승우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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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여름>은 세 파트로 나뉘어 픽션과 논픽션을 혼재한다. 첫째, 강원도 홍천군에서 찍은 농촌의 풍광이 그려진다. 5월부터 추수철까지, 농번기에 접어든 논밭의 경치가 화면에 너르게 펼쳐진다. 둘째, 홍천군에 거주하는 실제 주민들의 일상이 있다. 마을을 가꾸는 이들의 생활감 넘치는 모습이 넉넉하고 자연스러운 생동으로 포착된다. 픽션의 성질을 아주 조금 가미한 논픽션이라고 볼 수 있겠다. 셋째는 픽션이다. 공무원 생활을 포기한 청년 민우(김민혁)가 아버지(문영동)의 일을 거들기 시작한다. 할머니도 함께 산다. 민우는 모종의 권태로움에 빠진 듯하면서도 하루하루를 버틴다. 민우의 친구 성훈(김현섭)은 가업에 따라 소를 치며 생업을 이어가고, 종종 민우와 만나 술 마시며 일일을 보낸다.
세 파트는 분리되기보다 서로를 품어가고 섞여간다. 각 파트의 장면들이 다른 세계를 적극적으로 침범하지는 않되, 분명히 한 시공간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감각을 전한다. 세개의 시간대도 나뉘어진다.
[기획] 생멸의 사건들을 압축하다, <지난 여름>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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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농촌에 가뭄, 장마, 추수의 시간이 흐른다. <지난 여름>은 묵묵하게 이 과정을 찍는다. 벼가 자라나길 기다리고 비가 오기를 바라는 농부의 마음과도 같다. 2022년 최승우 감독이 던진 이 겸허하되 담대한 시도의 결과물은 제28회 부산국제영화제 크리틱b상, 제12회 무주산골영화제 영화평론가상 수상 등으로 이어졌다. 이어서 마침내, 2022년 그 농촌의 시공간이 2026년 8월5일 여름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는 극장에 펼쳐진다. 첫 장편 <지난 여름>의 느지막한 개봉을 기다린 최승우 감독의 속력마저도, 농사의 결실을 천천히 기다리는 농부의 정신처럼 느껴진다. <지난 여름>은 최승우 감독이 사비와 장고의 시간을 들여 만든 결실이기도 하다. 영화를 만드는 이의 태도와 영화가 보여주는 태도가 한점으로 모이며 특별한 감흥을 준다. 첫 장편 <지난 여름>부터 이후의 미개봉 작품들까지 꾸준한 일관성을 보여준 최승우 감독을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기획] 순리에 따라, <지난 여름> 리뷰&최승우 감독 인터뷰와 필모그래피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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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바람을 머금고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라벨: <거울> 제3곡 <바다 위의 작은 배>
호기심이 드는 상대가 지금 당장 동행을 요청한다면? 엘리오(티모테 샬라메)는 시내에 함께 가자는 올리버(아미 해머)의 말에 서둘러 짐을 챙긴다. 은근슬쩍 마음을 내비쳤는데도 틈을 주지 않는 상대와의 자전거 여정에서 라벨의 <바다 위의 작은 배>가 흐른다. 일렁이는 파도 위를 작은 배가 이리저리 떠다니는 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곡은 사랑 초입의 설렘과 혼란을 그대로 비추는 듯하다. 곡에서 물의 생동감이 느껴지는 데는 이유가 있다. 라벨은 이 곡이 포함된 피아노 독주곡 모음집 <거울>을 쓰던 무렵 7주간 운하 여행을 떠났다. 여기서 받은 음악적 영감을 작품에 담겠다는 기록도 남겼다.
<그린 파파야 향기>
쇼팽: 전주곡 Op. 28 제23번 F장조 & 쇼팽: 전주곡 Op. 28 제24번 D단조
음악이 답변이 되기도 한
[기획] 라벨, 모차르트, 베토벤… 영화 속 클래식 9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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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면 제철 음악을 귀에 꽂아야 한다. 시원한 시티팝, 느긋한 보사노바, 파워 댄스곡까지. 잠시나마 불쾌지수가 내려간다. 무엇이든 일단 영화에서 찾는 시네필이라면 이맘때 들을 만한 음악이 어디 없나 하며 사운드트랙 섹션과 영화 목록을 어슬렁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독자를 위해 영화 속 여름 음악을 골라봤다. 단, 이번호 <오디세이> 특집과 함께 읽기 좋게 고전음악으로 한정했다. 물방울을 닮은 피아노 소리와 바람이 부는 듯한 클라리넷 소리가 휴가지의 여유를 가져다줄 것이다. 때로는 휘몰아치는 교향곡이 지친 몸에 기력을 불어넣어줄 것이다. 믿기지 않지만 이제야 본격적인 무더위라는 8월 초. 부디 이 음악과 영화가 쉼이 되어주기를.
*이어지는 글에서 여름의 클래식 영화 둘러보기가 계속됩니다.
[기획] 영화 속 여름의 선율 - 라벨, 모차르트, 베토벤… 영화 속 클래식 9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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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비무장지대 접경의 포구 마을. 이런 시공간을 배경으로 삼은 영화 앞에서 우리는 으레 재현의 성실함을 기대하게 된다. ‘멸공’ 푯말과 낡은 건물, 페인트가 벗겨진 간판처럼 저개발의 흔적이 겹겹이 배어 있는 농촌 골목의 질감 같은 것들, 거기에 <전원일기>에 나올 법한 캐릭터들까지 가세해 사투리 대사로 인간적 정서까지 전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실제로 제작진은 20세기 어느 시점에 시간이 멈춘 것 같은 전남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 상가 거리 일대를 통째로 영화 속 배경으로 개조하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호프>의 카메라가 호포리의 거리로 접어드는 순간부터 이런 기대는 서서히 헛돌기 시작하고, 대신 이상한 확신이 자리를 잡는다. 이 영화에서 호포리는 누군가가 살아가는 장소가 아니라 무언가가 달리기 위한 무대라는 확신이 그것이다. 나홍진 감독은 시대의 재현 따위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속도의 상연을 위해 이 지역을 선택한 것처럼
[기획] 호포리라는 포툠킨 퍼사드, 박해천 디자인 연구자의 <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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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이 등장하는 SF영화는 미국 중심의 국제정치를 상징한다. 할리우드의 외계인 SF에서 미국인은 인류 전체를 대표하는 보편적 주체다. 프랑스 등 서구의 영화 ‘선진국’들에서 SF가 흔치 않은 이유다.
멕시코 출신이지만 할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2013년작 <그래비티>는 서구 SF영화의 변곡점으로 불린다. 이 영화는 우주 정복이나 외계인과의 전투가 아니라 우주를 배경으로 인류 자신의 문제를 탐구한다. 우울증에 대한 탁월한 성찰, 돌봄, 아시아(중국)의 등장, 우주 쓰레기 문제를 다룬다. 나는 이 영화를 매우 좋아하지만 그들의 ‘성찰 권력’에 질투를 느낀다. 미국은 상업적·기술적 한계를 넘어섰기에 자신을 성찰할 권력마저 획득한 것이다.
반면 우리가 할리우드의 이 ‘성찰적 SF’에 도달하는 길은 여전히 아득해 보인다.<호프>를 보고 낙담한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황해>를 또 봤다. 서구가 ‘용개리’로 발음했던 심형래 감독의 1999
[기획] 나홍진의 ‘테마파크’에서 본 식민지 남성성의 진화,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가 본 <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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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여년 동안, 나를 포함한 어떤 부류의 프랑스 영화평론가들(물론 이런 부류는 프랑스 밖에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은 이 세기가 안겨준 혼란의 감각에 필적할 만큼 거대하고, 혼돈스럽고, 광기에 찬 블록버스터를 간절히 기다려왔다. 하지만 그런 영화는 2000년대 이후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이를테면 미국에서는 9·11이라는 대재앙을 향한 반응으로 이른바 ‘파괴 포르노’(destruction porno)가 넘쳐났지만, 시간이 지나도 살아남은 작품은 많지 않았다. 특히 슈퍼히어로영화들은 시네필들에게 금세 진부한 것이 되었고, 심지어 그 영화들의 주요 관객인 10대들마저 지치게 만들었다. 이에 많은 동료 평론가들처럼 나 역시 희망을 접고, 메이저 스튜디오가 내놓는 SF 대작을 빠짐없이 챙겨 보는 노력을 거두었다. 어느덧 성인을 위한 블록버스터의 시대는 끝난 것처럼 보였다. 제임스 캐머런 감독을 누구보다 존경하는 나조차 <아바타: 불과 재>를 보지 않고 넘어가려 할 정도였으니 말
[기획] 가속이 향하는 곳, 얄 사다트 평론가가 본 <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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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호프>를 향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나뉘고 있다. 호평을 보내는 쪽, 불호를 표하는 진영 둘 다 열정적이다. 미지근한 반응은 없다. 이에 영화잡지도 <호프>를 향한 비평의 장을 한 차례 더 펼친다. 개봉 초기 한국의 영화평론가, 영화기자의 비평을 실었다면 이번에는 한국 너머의 필자와 영화가 아닌 다른 분야에 몸담은 학자들의 글을 전한다. 우선 얄 사다트 <카이에 뒤 시네마> 평론가는 매체의 변화와 세계정세가 긴밀히 맞물리는 지점에 주목하는 글을 보내주었다(아직 프랑스에서는 <호프>가 개봉하지 않았다. 얄 사다트 평론가는 칸에서 <호프>를 본 기억을 바탕으로 비평문을 써주었다). 정희진 여성학 연구자는 포스트식민주의의 관점에서 <호프>를 식민지 남성성의 영화로 해석하며, 박해천 디자인 연구자는 <호프>의 쉼 없는 운동을 여러 공간들과 연결지어 분석한다. 끝없는 추격과 도주를 벌인 뒤에도 호포항에는 아직 해가
[기획] <호프> 어떻게 보셨어요?, 얄 사다트, 정희진, 박해천이 본 <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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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치! 티니핑> 제작사 SAMG엔터테인먼트는 2025년 기준 매출 약 1412억원, 영업이익 약 226억원을 기록하며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전년도인 2024년의 영업손실(61억원)과 비교하면 회복 수준을 넘어 안정적 수익 구조에 진입했음을 알 수 있다. 실적 향상의 근거로 많은 이들은 2024년 8월 개봉한 극장판 <사랑의 하츄핑>을 꼽는다. 메인 타깃인 유아동뿐만 아니라 2030세대의 관심까지 포섭하며 대중문화의 재편을 이뤘다는 평이다. 실제로 2026년 초에 오픈한 오프라인 플래그십 스토어 ‘더 티니핑 성수’ 방문객 중 20대 비중은 20.6%로 집계된다. 이제 키즈 콘텐츠는 유치한 것이라고 여기던 어른들의 보편적 선입견마저 벙찐 채 새로운 시선으로 업데이트되는 중이다. 그렇다면 <캐치! 티니핑>의 무엇이 관심의 지평을 넓혔을까. 티니핑은 어떻게 어린이부터 (심지어 미혼의) 성인까지 끌어안을 수 있었을까. <캐치! 티니핑>
[기획] 하츄핑부터 ‘피곤핑’, ‘비겁핑’까지 - 아동애니메이션 시장에서 <캐치! 티니핑>이 세운 흥행 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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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여름 극장가를 떠들썩하게 만든 주인공은 <사랑의 하츄핑>이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귀염둥이 친구들의 반란. <마당을 나온 암탉>(222만명) 이후 13년 만에 국내 애니메이션이 관객수 100만명을 넘기는 성과를 거뒀다. 독특하고도 명료한 세계관, 1020세대의 밈 문화를 달구는 셀링포인트, 하이퀄리티의 O.S.T, 보편적 공감에 명중한 서사까지 키즈 콘텐츠는 더이상 어린이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리고 이번 여름 또 다른 모험을 앞둔 <사랑의 하츄핑: 고래보석의 전설>(이하 <고래보석의 전설>)이 관객을 찾는다. 스토리, 캐릭터 세팅, 음악, 3D애니메이션, 미술 등 모든 항목이 이전보다 업그레이드되었다. 바닷바람에 흔들리는 물결부터 해안 수평선 위로 그늘진 그림자까지 모든 디테일이 살아 숨쉬는 이곳에서 우리의 기분 좋은 서머 어드벤처가 펼쳐진다. “그럼 또 같이 떠나볼까? 츄!”
- 트릴로지 3부작으로 구성된 <사랑
[인터뷰] 흔들리는 파도만이 바다의 성장을 기억한다 - <사랑의 하츄핑: 고래보석의 전설> 김수훈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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훨씬 더 넓어지고 다양해졌다. 누적 관객수 124만명이라는, 유아동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는 이례적인 수치를 기록한 <사랑의 하츄핑> 이후 2년 만에 돌아온 속편 <사랑의 하츄핑: 고래보석의 전설>(이하 <고래보석의 전설>)은 로미의 내적 성장의 토양을 넓히며 다층적인 레이어를 완성했다. 첫 번째 극장판이 운명 같은 솔메이트를 기다리던 로미와 하츄핑의 우정을 보여줬다면 두 번째 작품 <고래보석의 전설>은 엄마와 로미의 갈등을 주축 삼아 복잡한 사춘기를 통과해간다. 또 로미-하츄핑 2인 구도에 집중했던 전편과 달리 이번에는 바다 소년 카이트와 아히죠 해적단까지 가미해 로미가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이해하고, 확장할 수 있도록 도왔다. 다시 말해 1편에서 하츄핑과 로미의 다정한 울타리가 형성됐다면, 2편에서는 그 울타리를 넘어서 삶의 저변을 넓힌 것이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아름다운 바다 풍경이 담긴 이 세계관에서는 작은 모험마저도 여전히 사랑에
[기획] “눈을 떠봐, 우리 자유롭게 날아” - <사랑의 하츄핑: 고래보석의 전설>이 말하는 유아동IP의 흥행 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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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우수자도, 특기생도 아닌 인혜(박혜진), 서희(이승연), 정애(박효은), 수민(최수인)은 면접반의 특별 관리 대상이다. 수능을 200여일 앞둔 시점에서 이들은 학교가 사육장의 동물들을 처분할 계획이라는 소식을 접한다. 애정을 갖고 돌봐오던 오리 ‘희선’과 다른 동물들을 구출하기 위해 네 아이는 머리를 맞댄다. 최종적으로 채택된 작전은 비밀리에 ‘쉘터’를 구성하는 것. 그렇게 4인방과 동물들이 함께하는 아지트가 산자락에 마련된다. 학교부터 숲속에 조성된 쉘터까지, 인혜와 서희, 정애, 수민이 발을 들이는 <산양들>의 모든 주요 공간들이 김영탁 미술감독의 손에서 탄생했다.
<산양들>의 시나리오를 읽으며 김영탁 미술감독은 자연스레 동물과 10대 청소년들이 함께하는 영화의 분위기를 상상했다. “동물이 있는 현장을 관리하기 쉽지 않겠다는 걱정이 앞섰지만 시나리오가 워낙 귀여웠다. 이미지적으로도 재미있게 표현할 여지가 많아 보였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학
[STAFF] 인물의 내면까지 드러나는 미술의 리얼리티, <산양들> 김영탁 미술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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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된 나무 한 그루가 있다. 7천년을 살았다는 삼나무. 사람의 셈으로는 가늠도 안되는 시간이다. 그런 나무가 야쿠시마에 있다고 했다. 일본 규슈 남쪽, 한달에 35일 비가 내린다는 섬. 달력에도 없는 그 닷새치의 비를 뚫고서라도 만나보고 싶은 나무였다. 가고시마에서 고속선을 타고 섬으로 들어갔다. 배가 파도를 가른 지 두어 시간 지났을까, 멀리서 섬의 윤곽이 드러났다. 섬은 온통 초록이었다. 멀리서도 물을 잔뜩 머금은 짙은 빛이 보였다. 섬에 내리자 비 냄새와 풀 냄새와 바다 냄새가 한꺼번에 끼쳐왔다. 한 모금 들이켜는 것만으로도 폐가 씻기는 것 같았다. 함께 간 여자 친구와 나는 부두에 선 채 한참 그 공기를 들이마셨다. 서두를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섬은 도착하자마자 일러주었다. 한국에서 일에 치여 지내는 동안 얼마나 자주 이 시간을 꿈꾸었는지 모른다.
야쿠시마에서는 늑장을 부리면 점심을 먹을 수 없었다. 조금만 때가 지나도 식당이 죄다 문을 닫았다. 문 연 곳을 찾
[박 로드리고 세희의 초소형 여행기] 35일 비가 내리는 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