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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여기에 썼던 글을 지우기 위해 쓴다. 언젠가 이곳에 플라톤의 ‘코라’(chora)를 주제로 한 데리다와 아이젠만의 건축 프로젝트에 관해 쓴 적이 있다. 그들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결국 자기들끼리 주고받은 구상을 담은 한권의 책으로 남았다. 이 프로젝트의 발주자는 뒤에 “두 사람은 애초에 건축을 지을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애초에 그들의 작업이 초점이 어긋났다는 느낌에서 쓴 글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내 글 역시 살짝 초점이 어긋났다는 느낌이다.
‘코라’의 개념으로 돌아가보자. 플라톤은 ‘이데아론’을 수립하다가 이데아계와 현실계가 서로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 설명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념계가 보편자의 세계라면 현실계는 개별자의 세계다. 이념계가 정신의 세계라면 현실계는 물질의 세계다. 이렇게 성질이 급진적으로 다른 이 두 가지가 어떻게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일까? 이 대목에서 플라톤은 두 세계를 무리 없이 매개해주는 제3의 요소를
[진중권의 아이콘] 건축의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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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일의 <오월愛>는 광주 5·18 민주화 운동 당시 참가했던 이름 없는 사람들의 기억을 담아내려 한다. 이런 시도는 오늘날 환영받지 못한다. 누구에게나 80년 광주에 대해서는 일종의 피로감 같은 것이 있다. 한번도 제대로 평가받진 못했지만 가해자나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 모두 잊고 싶어 하는 역사가 되었다. 광주사태라 불리던 것에서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불리는 형식적 복권을 이뤄냈어도 그때의 정치적 지형과 다름없는 현재에서 사람들은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도 여전히 이 편 저 편으로 나뉜다. 가해자쪽이었던 정당이 지금도 한국사회의 여당이고 그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광주 민주화 운동을 광주사태로 기억하고 있는 현실에서 형식적 명명 작업이 가리고 있는 상처의 진액은 더욱 농도가 높아졌다.
1980년대 대학을 다녔던 사람들 상당수는 광주 민주화 운동에 죄책감을 품고 있으나 그걸 다시 기억하는 일은 망설여진다. 적어도 이 글을 쓰는 필자는 그랬다. 선과 악의 이
[김영진의 인디라마] 당신의 윤리에 눈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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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인권 연작은 시종 ‘시선’의 의미를 강조해왔다. 2003년 <여섯개의 시선>으로 출발해 2006년 <다섯개의 시선>과 <세번째 시선>, 2009년 <시선 1318>을 거쳐 올해 <시선 너머>까지 유달리 ‘시선’을 전면에 내세운다. 종래의 영화들에서 시선의 개념이 종(種)의 수나 다루려는 제재의 성격을 지칭하는 것이었다면 <시선 너머>에서 ‘시선’은 그 자체로 영화적 레토릭의 기능을 해내고 있다. <시선 너머>에 함께 묶인 다섯편의 단편은 비교적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영화적 개념으로서 ‘시선’의 문제를 끌고 왔을 때 강이관의 <이빨 두 개>와 윤성현의 <바나나 쉐이크>가 눈에 들어온다. 두 영화 공히 수준급의 단편이라 하기에 모자람이 없거니와 여기서의 쟁점은 시선의 다중성 또는 산포(散布)된 시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두 영화에서 다뤄지는 ‘시선’이란 개인
[전영객잔] 시선의 교차로 당신은 어디에 서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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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사진은 알렉상드르 아야 감독의 2003년 공포영화 <엑스텐션>의 한 장면입니다. 이 같은 사이즈의 숏에서의 화면구도(Framing 혹은 Composition을 일컫는)는 장면 속 인물이 바라보는 시선의 방향에 좀더 많은 공간을 주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프레임 속 인물은 시선의 방향보다 오히려 반대쪽의 공간을 더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화면구도는 공포영화나 스릴러 장르에서 많이 보이는 것으로 관객으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것 혹은 화면 속에 인물이 간과하는 것에 대한 공포심을 유발합니다. 만약에 스마트폰으로 공포영화를 찍겠다면 장르에 어울리는 전통적인 화면구도에 대해 좀더 알아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같은 영화의 다른 장면을 한번 보도록 하지요. 인물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위의 사진은 역시 공포영화에서 많이 사용하는 숏 중 하나인데, 마치 카메라가 제3자의 입장에서 인물을 바라보는 것 같은 이 프레이밍은 누군가의 시선으로 훔쳐보는 시점숏처럼 쓰이곤 합
[영상공작소] 공포심 유발하는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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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스타운>
연출 황의경, 김진원 | 각본 서숙향 | 출연 성유리, 정겨운, 김민준, 민효린 | 5월11일부터 수·목요일 밤 9시55분 | KBS
‘식모’가 돌아왔다. <로맨스타운>은 도박꾼인 아버지 때문에 상위 1%의 사람들이 산다는 1번가의 재벌집에서 3대째 식모살이를 하게 된 20대 여성 노순금(성유리)의 이야기다. 몸에 감겨드는 메이드복에 하이힐을 신은 순금의 스틸컷을 보면 영락없이 <하녀>의 은이가, ‘가정부와 주인집 아들의 사랑 이야기’라는 드라마의 줄거리를 보면 자연스럽게 <지붕뚫고 하이킥!>의 세경이 생각난다. 그러나 <로맨스타운>이 조명할 가정부 이야기는 고용주와 고용인의 첨예한 계급 갈등이나 못 가진 자의 서러움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제작진의 기획 의도를 들어보자. “5년 전에 모 방송사에서 일하던 40대 청소부 아주머니가 로또 복권 1등에 당첨돼 100억원이라는 초유의 상금을 받고도 그 사실을 숨긴
1번가 식모들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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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 리플리>
연출 최이섭 | 각본 김선영 | 출연 김승우, 이다해, 박유천, 강혜정 | 5월30일부터 월·화요일 밤 9시55분 | MBC
방탕한 부잣집 아들 주위를 맴돌며 그를 모방하던 가난한 청년(리플리)은, 자신이 곧 부잣집 아들이라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재주꾼 리플리>의 줄거리다. 하이스미스가 만들어낸 이 섬뜩한 캐릭터가 어디선가 언급된다면, 그건 분명 욕망과 거짓된 환상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장치로서의 역할일 것이다. <짝패>의 후속작으로 알려진 <미스 리플리>는 제목에서 연상 가능하듯 욕망에 사로잡혀 거짓말을 일삼으며 점점 자신을 잃어가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고아로 불행한 유년 시절을 보낸 20대 여성이 학력을 위조해 출세하지만, 자신의 본모습을 감추려는 거짓말을 반복하게 되면서 파멸의 위기에 처한다는 내용이다. 이쯤에서 선명히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 2007년 학력 위조와 변양균 전
The Talented Miss 신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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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파 3사의 드라마 ‘육첩반상’이 대중적이고 밋밋하다고 생각하는 분들, 분명 있을 것이다. 원래 황금시간대에 방영되는 드라마란 게 가장 보통의 시청자를 위한 작품 아니겠는가. 지상파의 ‘빅 네임’에 안주하지 못하는 시청자라면 KBS2에서 심야시간대에 방영하는 <드라마 스페셜 연작 시리즈>와 케이블 채널이 제시하는 새로운 메뉴들에 주목해보자. <드라마 스페셜 연작 시리즈>는 2010년 5월부터 11월까지 KBS2가 매주 토요일 밤 11시15분에 방영했던 단막극을 연작 형식으로 확대한 프로그램이다. <락 rock 樂> <특별수사대 MSS> <화이트 크리스마스> <사백년의 꿈> <헤어쇼> 등의 작품이 4부작·8부작 등의 형식으로 각각 한달씩 방영됐다. 여섯 번째 연작 시리즈인 <완벽한 스파이>(5월8일부터 매주 일요일 밤 11시15분)는 총 4부작으로,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며 역시 KBS2에서 방영
황금시간 미니시리즈가 2% 부족한 이들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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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티헌터>
감독 진혁 | 각본 황은경, 최수진 | 출연 이민호, 박민영, 구하라, 이준혁, 김상중 | 5월25일부터 매주 수·목요일 밤 9시55분 | SBS
1980년대, 영화계에 <영웅본색>이 있었다면 만화계엔 쓰카사 호조의 <시티헌터>가 있었다. 돈 밝히고 여자 좋아하는 속물이지만 경찰이 감당할 수 없는 ‘도시 정의’를 바로세우는 ‘해결사’ 사에바 료의 호탕한 매력은 남성 팬들의 아드레날린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 <시티헌터>가 드라마로 제작된다. 일본 YTV에서 제작한 동명의 애니메이션(1987)이나 성룡, 왕조현이 출연하고 왕정 감독이 연출을 맡은 동명의 홍콩영화(1992)가 주목을 받은 바 있지만 <시티헌터>를 드라마로 제작하는 건 한국이 최초다.
‘도시의 해결사’를 주인공으로 삼는 기본 구조는 같지만 드라마 <시티헌터>는 원작 만화보다 큰 스케일의 작품이 될 듯하다. 만화 <시티헌터>
화려한 도시의 영웅 본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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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안미녀>
연출 이진서, 이소연 | 각본 오선형, 정도윤 | 출연 장나라, 최다니엘, 류진, 김민서 | 월·화요일 밤 9시55분 현재 방영 중 | KBS2
명랑 ‘소녀’도 이제 나이먹었다. 역경을 헤쳐나가는 젊은 캔디에게도 타계책이 필요했다. 극약처방은 바로 ‘동안’이다. 이름하여 이 시대 최고의 가치가 있으니 그건 바로 탱탱한 피부의 ‘동안’이다. 그리하여 <동안미녀>는 장나라를 앞세워 서른네살 노처녀의 ‘명랑 동안 성공기’를 고안해냈다. 전반부는 철저히 역경모드다. 고졸에 신용불량자인 소영은 7살이나 나이를 속이고 패션회사에 취직한다. 하는 일, 되는 일 하나없는 그녀의 고행은 마치 패션회사를 다룬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연상케 할 정도. 꿋꿋한 캔디를 위한 테리우스는 비록 어수룩해 보이지만 족발집 계승도 마다하고 패션계에 입문, 결국 소영에게까지 투신하는 소신남 진욱이다. 학력차별, 88세대의 고충, 외모에 대한 편견 등등의 온갖 사회적 메시지를 한꺼
캔디의 나이를 묻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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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사랑>
연출 박홍균, 이동윤 | 각본 홍정은, 홍미란 | 출연 차승원, 공효진, 윤계상, 유인나 | 매주 수·목요일 밤 9시55분 현재 방영중 | MBC
<최고의 사랑>은 본격 ‘연예’ 드라마다. 톱스타와 한물간 스타의 만남이라는 소재를 통해 이 드라마는 지금 방송가의 캐스팅, 스캔들, 권력관계 등 모든 걸 훑는다. 톱스타와 작가, PD라는 재료는 이미 익숙하다. 김은숙 작가의 <온에어>나 노희경 작가의 <그들이 사는 세상> 모두 이들 재료를 다른 방식으로 활용했으며, 여기에 필연적으로 ‘사랑’을 결부해왔다. <온에어>가 알싸한 맛의 ‘매운 홍합’ 같은 맛으로, <그들이 사는 세상>이 국물이 진한 ‘설렁탕’ 같은 맛으로 방송가의 현재와 사랑을 매칭했다면 <환상의 커플> <미남이시네요>로 ‘잘난 사람들’이 대체 어떻게 사는지 이미 너무 잘 아는 홍 작가는 역시 달콤새콤하여 먹는 재미를
연예하는 사람들의 달콤살콤 연애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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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거짓말을 해봐>
연출 김수룡, 권혁찬 | 각본 김예리 | 출연 윤은혜, 강지환, 성준, 조윤희, 박지윤 | 5월9일부터 월·화요일 밤 9시55분 | SBS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씨네21>이 엄선한 신작 드라마 중 가장 진입장벽이 낮은 작품이다. 이유를 알고 싶다면 줄거리부터 들어보자. 첫사랑에게 차인 5급 공무원 공아정(윤은혜)이, 자존심을 세우려고 우연히 알게 된 일류호텔 대표이사 현기준(강지환)과 결혼했다며 주변에 말해버린다. 이를 알게 된 기준은 어이가 없으면서도 가짜 결혼 소식을 자기 편한 대로 이용하려 한다. 두 남녀의 거짓말이 커지고 주변 인물들이 이 결혼 사기극에 휘말리면서 한바탕 소동이 일어난다. 여기까지만 들어도 <내게 거짓말을 해봐>가 로맨틱코미디 드라마의 정석 공식- 엉뚱하지만 정감가는 여주인공과 완벽하지만 까칠한 남주인공의 티격태격- 을 충실히 따르려 한다는 건 자명해 보인다. 작품명 또한 20세기
그 여자의 뻥과 그 남자의 이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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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좀 장중했다. 드라마 말이다. 브라운관에 <로열 패밀리>와 <마이더스> 같은 재벌가의 아귀다툼이나 <짝패>처럼 운명이 뒤바뀐 인물들이 주를 이뤘다. 봄날을 맞아 겨울코트 정리하듯, 드라마도 무게를 툭툭 털어냈다. 이미 방송을 시작한 <동안미녀> <최고의 사랑>을 비롯해 <내게 거짓말을 해봐> <로맨스타운>처럼 단연 로맨틱코미디가 대세. 액션물 <시티헌터>, 스릴러 구조를 띤 <리플리>도 주목할 만하다. 6편의 봄 드라마를 정리했다.
신작 드라마에 채널이 두근두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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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 새론이는 머리가 풍성해야 예쁜데 머리를 왜 저렇게 꽁꽁 묶어놨대?” MBC 주말드라마 <내 마음이 들리니?>의 ‘작은 미숙이’ 김새론은 잠자는 장면 빼곤 늘 잔머리 없이 핀을 꽂고 두 갈래로 묶어놓은 헤어스타일로 등장한다. 처음에는 안 예쁘다고 투덜거리다 문득 무릎을 쳤네. 저거, 어릴 때 엄마가 빗겨주던 머리구나! 빚쟁이에게 쫓겨다니느라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아홉살인데도 아직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는 청각장애인 엄마와 단둘이 산다.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온전히 다 해주지는 못하지만 엄마는 아마도, 매일 아침 아이의 머리에 물을 묻혀 정성스럽게 빗기고 삐져나온 머리칼 없이 꽁꽁 묶어주었을 거다. 우리 어릴 때도 그랬다. 양 눈꼬리가 째질 정도로 단단하게 묶은 머리에 알록달록한 고무줄이며 머리핀들을 찌르고 다니는 아이들은 엄마 손이 야무지다는 소리를 대신 듣고 다녔다. 드라마 속 작은 미숙이의 머리는 방치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연출의 목소리가
[유선주의TVIEW] 우리가 몰랐던 신파의 속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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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생으로 이미 서른이 넘은 나이지만 장정초는 너무 어리고 연약해 보인다. 그처럼 바람에 쉬이 쓸려갈 것처럼 가냘픈데도 종종 어찌할 수 없는 운명 앞에 버텨선 여자로 등장했다. 아무런 힘도 없어 보이는 그녀가 펑샤오강의 <대지진>(2010)에서 지진 복구 자원봉사자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 무슨 도움이 될까 싶지만 어쨌건 그녀는 먼 길을 날아와 힘을 보탠다. 비록 이동승의 <문도>(2007)에서 피폐한 마약중독자 미혼모 역할로 자신의 존재감을 홍콩에까지 각인시켰지만 사실 <대지진>에서의 모습이 장정초에 대해 가지고 있는 대륙인들의 인상이다. 베이징중앙연극학원을 나와 <샹그릴라에서 온 신부>(2004)를 비롯해 구창웨이의 <공작>(2005)에서 1970년대 문화대혁명 이후 여전히 혼란스런 중국사회를 밝고 저돌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상주의자 소녀로 등장했을 때, <빨간 버스>(2006)에서 씩씩한 버스 안내양으로 변신
제2의 장쯔이를 예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