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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역사에 관한 책을 읽다가 다시 ‘라스푸틴’과 마주쳤다. 이 인물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러시아 혁명사를 읽을 때였다. 거의 30년 전 일이지만, 아직도 이 비범한 인격이 주는 스산한 느낌을 잊을 수 없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 괴승은 기도로 혈우병에 걸린 황태자의 피를 멈추게 하는 영험함으로 알렉산드라 황후의 총애를 받았다. 황후를 통해 무능한 황제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그는 사실상 섭정을 통해 제정 러시아의 몰락을 재촉했다.
인격의 언캐니
‘위키피디아’에 들어가니, 몇장의 사진이 올라와 있다. 사진 속의 그는 누가 봐도 예사롭지 않다. 클로즈업한 얼굴에는 말로 설명하기 힘든 묘한 인격의 아우라가 깃들어 있다. 깊은 늪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일 듯한 눈동자. 거기서 그의 비범한 능력을 직관적으로 알아차리게 된다. 즉 일거에 사람들의 의지를 무력화시켜 제 숭배자로 만들어버리는 영적인 능력. 사진 속의 그가 주는 느낌은 ‘언캐니’에 가깝다. 과연 저자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일까
[진중권의 아이콘] 라스푸틴의 예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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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건축가>의 초반부에서 건축가 정기용은 부산 공무원들을 상대로 강연을 한다. 그는 안성 면사무소를 지을 때 주민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뭐나고 물어봤는데 나이 든 주민들이 목욕탕이라고 답하는 걸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의 목소리는 성대결절로 많이 상해 있고 보조 마이크를 써야만 청중이 간신히 그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 이 장면은 <말하는 건축가>가 보여주고 싶은 것을 요약한다. 정기용이라는 건축가는 모양을 뽑아내는 건축가가 아니라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건축가이며 불운하게도 그 자신의 육체는 남들만큼 버텨주지 못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자신이 지은 무주 건물들을 답사하던 그는 설계자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주군청에서 태양열 집적판을 설치한 것을 보고 화를 낸다. “이런 게 녹색성장이라고?” 그는 욕지거리를 거침없이 쏟아낸다. 그가 공들여 만든 운동장 벤치에 그늘을 드리워주는 등나무 덩굴은 태양열 집적판 때문에 햇빛을 받지 못하는
[김영진의 인디라마] 과시 없이, 표나지 않게 존재했던 건축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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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그라운드 힙합을 소재로 고달픈 20대들의 꿈과 사랑을 유쾌하고 리드미컬하게 담아낸 영화 '청춘그루브'는 오는 3월 15일 개봉한다.
[봉태규] "타블로에게 조언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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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스코시즈의 <휴고>, 그의 필모그래피만 놓고 본다면 너무나 이질적인 영화다. 하지만 그의 바이오그래피를 조금만 아는 이들이라면 <휴고>가 가장 마틴 스코시즈다운 영화라는 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약먹는 마티’(Marty Pills)로 불릴 만큼 병약했던 어린 시절, 스코시즈는 골방에 처박혀 이탈리아계 사람들로 북적이는 비열한 거리를 창문 너머로 바라보거나, 부모와 함께 극장을 들락거리는 것을 낙으로 삼아야 했다(그의 성장담은 <마틴 스코시즈: 영화로서의 삶>을 보라). 실제로 <휴고>에서 가장 서정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장면들은 시계탑에서 휴고가 창밖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들이다. 늘 북적이는 기차역에서 살아가지만, 휴고는 그 세상과 섞이지 못한다(상황은 다른 인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런 그가 창 바깥으로 뛰쳐나갈 수 있었던 동력은 바로 영화-기계(또는 그것의 상징인 자동인형)의 힘이다. 휴고와 유사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스
[전영객잔] 경이로운 스펙터클의 기원을 찾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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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조감독으로 작품을 여러 편 했다. 영향력이 큰 감독 아래에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 어쩌면 부담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겠다.
=<극장전>은 연출부, <해변의 여인>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하하하>는 조감독을 했다. 그렇게 너무 많이 하면 네 색깔이 없어지지 않겠냐는 주위의 걱정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스스로는 막상 주위에서 걱정하는 만큼은 못 느꼈다. 막연하지만 어떻게 될 거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감독님과 일하면서 영화에 대한 내 생각이 조금씩 나아진다는 느낌도 들었다. 홍 감독님의 트리트먼트, 대본 등을 보면서 나도 같이 발전한다는 느낌이 들어서 큰 걱정은 안 했다. 게다가 감독님과 일하면서 좋은 배우들을 많이 봤고 그게 언젠가는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남들이 말하는 그런 부담에서는 점점 더 멀어졌고 모든 게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게다가 감독님의 제작방식이 큰 의지가 됐고 거기서 확신을 얻게 됐다. 이렇게
“홍상수 감독님에게서 현장의 여유를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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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국의 <로맨스 조>는 씨네21i와 보리픽쳐스(대표 임순례)가 공동으로 추진한 신인 발굴 프로젝트 당선작이다. 이미 부산국제영화제, 서울독립영화제, 로테르담영화제 등에 초청받으며 실력을 인정받은 작품이다. 이 데뷔 감독의 이야기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그의 이야기 솜씨란 특별한 내용의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뜻이 아니라 특별한 형식의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뜻이다. 씨네21i가 발굴한 신인감독이므로 더 주목하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사도 어쩔 수 없다. 올해의 주목할 만한 신인감독 중 한명이 될, 이광국 감독과 그의 데뷔작 <로맨스 조>를 소개한다.
이광국의 데뷔작 <로맨스 조>는 싸구려 모텔의 복도에 걸려 있는 그림, 야생마들이 늠름하게 내달리는 그 그림에서 시작한다. 그야말로 거기엔 말(馬)들이 몰려온다. 카메라가 천천히 트랙 아웃하는 동안 약간은 우스꽝스러운 음악이 흐르는 걸 보면 이때의 말들은 유머이며 신호다. 실은 그 말이 아니라 다른 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이야기를 쏟아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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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형인지 수비형인지 그것까진 모르겠어요
-김윤석 배우와 두 작품을 했습니다. 전 이런 게 궁금합니다. 함께 신을 만들 때 두 배우의 장면 해석이 일치할 필요가 있나요? 아니면 현실의 인간이 그렇듯 주고받으면서 속으로 다른 그림을 그리는 건 상관없나요.
=서로 확인하진 않아요. 장면의 큰 목표에 관해선 대화하지만 연기에 대해서는 이야기 안 해요. “우리 지금 맞게 가고 있는 거니?”그런 문답은 오가죠. 예컨대 구남을 잡으려고 갑판에서 면정학이 직접 바다로 몸을 던지는 장면에서 “형, 그래도 두목인데 여기서 면가가 배에서 뛰어내리는 게 말이 돼요?” 하면 “그치?” 하면서 감독한테 이야기해보는 거죠. 그럼 나홍진 감독은 농담으로 그러죠. “뛰기 싫으세요?”(좌중 폭소) <황해>에서 둘이 처음 만나는 장면을 보면 형이 “구남이, 밥 먹었니?” 물어보는데 저는 거기서 예인지 아니오인지 애매하게 말을 뭉뚱그려서 대답해버렸어요. 그건 상대배우를 곤란하게 하려는 것도 아니고 내가
#.3 since 2009: 하정우가 자신의 연기를 돌아보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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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우가 프로야구 매니저 게임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가 직접 쓴 책에서 읽고, <머니볼>을 재미있게 봤다는 소감을 듣고, 슬며시 웃은 적이 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별명을 붙여주고 어울리는 헤어스타일 골라주기를 즐기는 눈치다. ‘FC 하정우’를 결성해 마음 맞는 후배들과 축구를 하는가 하면, 올해 본 영화 중 최고의 연기를 골라 ‘하정우 어워드’를 수여해 달라는 기자의 지나가는 농담에 진지하게 눈을 빛내며 열심히 기억을 뒤적인다. 스스로 규칙의 시스템을 발명하고, 한 공간을 울타리 쳐서 취향에 맞게 꾸미고 경영하는 작업만큼 하정우의 흥을 돋우는 일은 없어 보인다. 인터뷰를 위해 옮겨간 하정우의 단골 술집도 그의 ‘영역’ 중 하나였다. 사방의 벽과 문이 하정우가 그린 벽화와 직접 찍은 사진으로 뒤덮여 있었다. 구석자리에 마주앉자 그가 아담한 벽 램프를 만지작거렸다. “어제 떡볶이 먹으러 왔다가 달았어요. 이 테이블에 자주 앉는데 늘 어둡다고 느꼈거든요. 훨씬 아늑해졌어요
#.3 since 2009: 하정우가 자신의 연기를 돌아보다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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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 1편 오프닝 시퀀스. 딸의 결혼식이 열리는 동안 어두운 내실에서 말론 브랜도가 분한 돈 콜레오네가 복수를 청원하는 보나세라를 면담하고 있다.)
<대부>는 제게 바이블입니다. <황해>를 찍는 동안에도 사운드트랙을 계속 들었고 <범죄와의 전쟁>의 최형배를 연기하면서도 <대부2>의 로버트 드 니로 연기를 자주 떠올렸습니다. 어떤 영화, 무슨 역인지와 무관하게 전부 대입이 가능한 교과서, 요리책이랄까요. 연기하기 전에 <대부>를 보면 어떻게 조리하고 양념을 쳐야겠다는 계획이 떠올라요. 제가 남성성 강한 영화를 많이 한 까닭도 있겠죠. 자 지금, 보나세라를 응대하면서 슬쩍 얼굴을 만지는 브랜도의 손짓을 보셨나요. <비스티 보이즈>의 재현이 동료에게 돈을 안 주려고 수 부리는 장면에서 한번 썼어요. 저만 아는 오마주? 그런 셈이죠. <범죄와의 전쟁>은 <대부>
#.2 배우의 영화관: 하정우가 액션의 명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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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는 이날 그의 두 번째 일과였다. 하정우는 파주의 서울액션스쿨에서 <베를린>의 북한 첩보원 표종성이 연기할 액션의 합을 연습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특정한 체격이 목표는 아니지만 <러브픽션>의 구주월을 연기하느라 근육을 몽땅 없애놓은 상태라 웨이트 트레이닝도 병행하고 있다. 한때 카페에서 편안히 앉아 대화하는 연기 좀 해봤으면 좋겠다고 농담할 만큼 치고받고 뛰고 구르는 사나이 영화가 필모그래피의 대종을 이루는 하정우지만 류승완 감독이 창조한 투철한 첩보원 표종성의 액션은, 희생자를 장난감 다루듯 하는 지영민(<추격자>)의 폭력, 살아남기 위해 버르적거리는 김구남(<황해>)의 싸움, 구경꾼을 의식한 체벌에 가까운 최형배(<범죄와의 전쟁>)의 주먹질과도 다르다. 표종성은 촬영 콘티와 밀착해서 안무된 지극히 프로페셔널한 액션을 수행해야 한다는 점에서 그가 경험하지 못한 도전이다. “<베를린> 액션의 전체적 느낌은 반작용
#.1 배우의 방: 하정우가 학생처럼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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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2월28일, 우리는 하정우를 방문했다. 이날의 대화는 외견상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의 전성시대>(이하 <범죄와의 전쟁>) 커버스토리 이후 약 두달 만의 재회지만, 숨은 맥을 짚자면 2008년 늦가을 <국가대표> 촬영현장에서 이루어진 ‘김혜리가 만난 사람-하정우’에 이어지는 속편이었다. 3년3개월 전 무주에서 우리는 그의 데뷔부터 <멋진 하루>까지 연기에 대해 1박2일 일정으로 이야기했다. 이후 하정우는 기관차의 호흡을 유지하며 어느덧 6편의 장편영화 주연작을 세상에 내놓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등 짤막한 출연을 포함하면 9편) 류승완 감독의 <베를린> 크랭크인을 한달 남겨둔 지금이 기자와 다시 마주 앉아 그간 행보를 정리하기 적절한 시점이라고 느꼈다. 허투루 시간을 흘려보내기 싫어해 줄곧 스스로를 적당히 바쁘게 몰아세우지만 동시에 급류에 휩쓸려 손아귀에서 방향타를 놓치는 낭패가 없도록 주의를 기울이
2012년 2월28일, 하정우와 함께한 멋진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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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상자료원은 2008년 상암동 신청사 개관 이래 알찬 성장을 계속해오고 있다. 전임 조선희 원장 시절인 2007년 9월 국내 최초로 양주남의 <미몽>(1936) 등 7편의 영화가 동시에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뒤, 국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극영화인 안종화의 <청춘의 십자로>(1934)가 문화재청의 심의 및 실사를 거쳐 지난 2월 등록문화재(제488호)로 지정됐다. 그리고 시네마테크KOFA 관객 수는 지난 4년간 지속적으로 증가했는데 2009년 9월 이병훈 자료원장이 취임한 이듬해인 2010년에는 거의 3배 가까운 관객 증가율을 보였다. 한편, 지난 2월17일에는 올해의 주요 사업계획을 발표하며 영상자료원의 숙원사업 중 하나였던 제2보존센터 건립을 발표했다. 지난 몇년간 이어져온 이런 의미있는 성장 뒤에는 많은 이들이 이병훈 원장의 묵묵한 추진력이 큰 바탕이 됐다고들 얘기한다. 공식임기 3년의 중간평가를 겸하여 자료원장으로서 2년여의 시간을 보낸 그를 만났
[이병훈] “영화도 문화재라는 인식을 확산시켜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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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독의 영화노트] <디센던트> 인생의 마트료시카 놀이
[올드독의 영화노트] <디센던트> 인생의 마트료시카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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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의 타이틀 시퀀스는 암시적이다. 본인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서커스(영국 정보부의 별칭)로부터 해고당한 퇴직요원 조지 스마일리(게리 올드먼)는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평소대로 수영을 마친 뒤 안경을 새로 맞추러 간다. 곧 안경점 밖으로 나온 그는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안경을 추어올린다. 이 장면은 소설에는 없는 것을 감독이 창조적으로 덧붙인 것으로, 시작될 ‘두더지’(러시아가 영국 정보부에 심어둔 이중 스파이를 일컫는 스파이 용어) 소탕작전을 스마일리가 이끌게 되리라는 예고다. 앞으로 스마일리의 시선을 경유해 사건의 진상을 목격하리라는 뜻이기도 하다.
이상한 것은 그다음 장면이다. 그가 도착한 집에는 초상화 한점이 걸려 있다. 그는 새 안경을 끼고 초상화를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살짝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앞의 허공과 자신의 뒤통수 뒤에 앉아 있을 관객 사이쯤 어딘가에 시선을 던진다. 그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자신을 버리고 도망
[영화읽기] 착각 걷어내니 허세가 보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