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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보료를 움켜쥐고 씹어뱉듯 혼잣말을 하는 왕의 얼굴을 본다. 자괴감, 열패감, 수치심 등이 뒤얽혀 온몸을 휩싸는, 그런 순간.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자기혐오에 사로잡힌 그 얼굴. 보아서는 안될 인간의 내밀한 부분을 밝은 형광등 불빛 아래 마주하고 있는 게 어쩐지 죄스럽게 느껴졌다. SBS <뿌리깊은 나무> 8회 이야기다.
청년 이도(송중기)에서 세월을 훌쩍 건너뛴 중년 이도(한석규)의 첫 등장은 소탈하고 솔선수범하며 백성을 생각하고 학문을 사랑하는, 익숙한 성군 세종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드라마는 그런 성군이 돌연 역정을 내거나 속을 알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순간들을 파고든다. 앞서 비단보료 장면은 자기 사람이 비밀결사에 의해 궁 안에서 죽임을 당한 사건을 목도하고도 주위를 물리며 “자야겠다”고 신하들을 뜨악하게 한 다음 장면이다. 극도의 스트레스 앞에서 자러 들어간 왕이라니!
자리를 털고 일어난 이도는 왕의 권위를 위협하는 비밀결사 ‘밀본’의 색출 대신
[유선주의 TVIEW] 나는 나의 길을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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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를 듣다가 울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는데 노래 속의 어떤 단어나 목소리나 멜로디가, 불쑥, 귀로 들어오더니 뒷골을 타고 내려가 심장을 후벼판 다음 재빨리 얼굴로 올라가 눈물샘을 건드린다. 그 시간이 얼마나 짧은지, 내가 어쩌다 눈물을 흘리게 됐는지도 알지 못한다. 눈물은 얼마나 재빠른지 손쓸 틈이 없다. 흐르고 난 뒤에야 닦아낼 수 있다.
누구에게나 그런 노래가 있을 거다. 듣는 순간 무방비 상태가 되는, 갑자기 한숨을 쉬게 되고 어느 순간 가슴이 아릿해지는 노래가 있을 것이다. 한번 눈물을 쏙 빼고 나면 들을 때마다 슬픔은 반복된다. 오랜 시간 동안 노래에 익숙해지면 슬픔은 사라지지만 몇년이 지난 뒤 그 노래를 들으면 슬픔의 감정이 되살아난다.
나에게는 롤러코스터의 노래가 그랬다. 지금도 2002년의 신촌이 또렷하게 기억난다. 롤러코스터의 음악을 좋아해서 첫 번째 앨범부터 얼마나 열심히 들었는지 모른다. 이어폰을 꽂고 계속 들었고, 노래방에
[김중혁의 No Music No Life] 외로움이 몸부림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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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기너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10월24일
<트리 오브 라이프>에서 오브라이언가의 요절한 둘째 아들을 연기한 소년 배우는 아버지로 분한 배우 브래드 피트와 혈연이라 해도 믿을 만큼 닮았다. 확실히 연출 의도가 개입된 캐스팅이다. 외양만이 아니다. 소년은, 피아니스트를 꿈꿨으나 결국 회사원으로 주저앉은 아버지가 여가에 건반을 두드릴 때면 먼발치에서 기타로 바로 받아 변주할 만큼 음악적 재능까지 이어받았다. 오브라이언씨가 차남에게 유독 엄하고 가혹하게 굴었던 까닭은 이 소년 안에서 ‘남자’가 되기 전 여리고 어렸던 자신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자란 열아홉의 청년이 자신이 가장 사랑받은 자식이었다는 사실도 미처 알지 못한 채 먼 곳에서 죽어갔으리라는 짐작이 <트리 오브 라이프>의 비탄을 사무치게 한다.
마이크 밀스 감독의 <비기너스>는 평생 우정어린 관계를 유지했으나 열정은 결여된 부모- 아버지는 게이였다- 사이에서 외동으로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귀퉁이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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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잠깐 채식주의자가 되려고 마음을 먹은 적이 있다. 처음부터 일체 육류를 안 먹을 수는 없고, 일단 채소와 생선만 먹는 것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주변에 ‘채식주의자’가 되겠노라고 떠들고 다니지는 않았다. 뭔가를 자처하면 그에 합당하게 행동해야 할 의무가 따르기 마련이니까. 이를 윤리학에선 ‘공약의 부담’이라 부른다. 무슨 ‘주의’에 헌신(commit)하는 것은 멋진 일이나, 그에 따른 ‘부담’(burden)을 지는 것은 피곤한 일이다.
남성 페미니스트의 경우
아주 오래전에 어느 대담에서 페미니스트 교수를 만난 적이 있다. 남자가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데에는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다. 제아무리 투철한 페미니스트라 하더라도, 마초들이 득실거리는 사회에 살다 보면 그 영향으로 정신과 신체의 어느 구석에 여전히 남성우월주의가 남아 있기 마련. 그것은 의식조차 되지 않은 것이기에, 본인이 아무리 조심한다 하더라도 언젠가- 무의식적 언행을 통해- 표출될 수가 있다.
똑같은 성차별
[진중권의 아이콘] 공약의 부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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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티 오브 로맨스>와 <두더지> 이후의 소노 시온이 궁금하다면 차기작을 기다리면 된다. 그런데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의 차기작이 될지도 모르는 영어영화 <로드 오브 카오스>는 사실 <두더지> 이전에 만들 예정이었던 작품이다(소노 시온의 완벽하게 새로운 행보를 암시하는 영화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로드 오브 카오스>는 실제 살인사건을 다룬 동명의 논픽션(사진)을 각색하는 영화다. 1993년, 노르웨이의 1인 블랙메탈밴드 ‘버줌’의 바르그 비켄네스가 또 다른 블랙메탈 뮤지션을 23차례 흉기로 찔러 살해했다. 경찰은 바르그 비켄네스가 90년대 내내 자행된 교회 방화사건의 주동자라는 사실까지 알아냈고, 결국 바르그는 노르웨이 최고형인 21년형을 받았다. 소노 시온이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당연한 일이다. 바르그 비켄네스 사건은 블랙메탈 사탄주의라는 일종의 사이비 종교 때문에 발생했고, 가해자와 희생자
소노 시온의 차기작 <로드 오브 카오스>(Lords of Cha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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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영화의 변태들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미이케 다카시는 지루해졌고 구로사와 기요시는 휴식 중이며 이시이 다카시는 지나치게 나이들었다. 지금 일본 영화계는 내수용 블록버스터와 나긋나긋한 슬로 무비만이 존재하는 듯하다. 그러나 변태는 아직 죽지 않았다. 그걸 확인하고 싶다면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사랑의 죄>라는 제목으로 공개된 소노 시온 감독의 <길티 오브 로맨스: 욕정의 미스터리>(11월17일 개봉)를 보아야 한다. 지금 일본의 가장 근사한 변태 소노 시온은 일본 영화계의 미래를 짊어진 재능 중 하나로 진화하고 있다. 대체 어떻게?
소노 시온은 변태다. 잠깐. 사실 일본섬에서 ‘변태 감독’이라는 칭호를 하사받을 예술가가 어디 한두명이겠는가. 1960년대 핑크영화(혹은 로망 포르노) 시대 이후, 일본에서는 와카마쓰 고지와 오시마 나기사 같은 훌륭한 예술적 변태들이 쏟아져나왔다. 거기서 끝이었던가. 핑크영화의 유구한 전통은 이후 구로사와 기요시, 미이케 다
사랑받고 싶어 미움받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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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독의 영화노트] <트리 오브 라이프> 영화는 영화가 안될 것 같은 걸 만드는게 진짜 영화적인 거죠
[올드독의 영화노트] <트리 오브 라이프> 영화는 영화가 안될 것 같은 걸 만드는게 진짜 영화적인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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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유수 영화제에서 작가정신이 충만한 독립영화 감독으로 인정받는 방법은? 마를론 리베라의 <하수조에 빠진 여배우>(2011)를 보면 필리핀의 경우를 알 수 있다. 첫신은 이렇게 시작한다. 슬럼가에 사는 중년부인 밀라는 아이들에게 점심을 먹인 다음, 딸을 씻기고 새 옷을 입힌 뒤 마닐라 시내의 아파트로 가서 노년의 백인 남성에게 넘긴다. 이것이 영화 속 독립영화 감독이 만들려고 하는 작품의 내용이다. 감독과 제작자는 그들의 작품이 어떻게 하면 해외 영화제에서 주목받을 수 있을지에 대해 논의를 계속한다. 로케이션 헌팅을 위해 찾아간 슬럼가는 단지 영화를 위한 훌륭한 배경에 불과하다. 이처럼 필리핀에서 디지털 독립영화는 이제 코드화되어가고 있고, 다양성이 사라져가고 있다.
롤랜도 톨렌티노 필리핀대학교 대중문화학과 교수에 따르면 필리핀의 독립영화계 안에 위계질서가 만들어졌는데, 서열배치는 독립영화 감독이 거둔 (해외 영화제에서의) 비평적 성공과 국제적인 영화 지원단체에서
[김지석의 시네마나우] 상만 받으면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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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치(無恥). ‘부끄러움이 없다’는 뜻의 이 단어는 조선시대 왕의 권력을 상징할 때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속뜻을 품는다. 아마도 후궁은 왕의 무치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제도이자 캐릭터일 것이다. 아내 외의 여자에 대한 왕의 욕정은 감출 필요가 없는 승은이다. 하지만 후궁에게도 왕의 간택이 은혜였을까? <혈의 누> <가을로> 등을 연출한 김대승 감독의 신작 <후궁: 제왕의 첩>(이하 <후궁>)은 뜻하지 않게 후궁이 되어 궁궐로 들어간 한 여자의 사랑 이야기다. 왕만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후궁이 왕 외의 다른 남자에게 정을 품었으니, 그 사랑이 순탄할 리 없다. 무엇보다 이미 수많은 사극 드라마를 통해 알고 있듯이, ‘궁’자체가 격렬한 운명의 공간이다.
조선이 배경이지만 <후궁>은 자막으로 명시할 법한 뚜렷한 시기를 설정하지 않는다. 대략 조선 초기, 개국공신들이 왕에게 권력의 지분을 요구하며 권력을 향한 암투를 벌이던
탐욕의 시대, 권력을 향해 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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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의 결혼식과 한번의 장례식>은 ‘퀴어 로맨스’도 ‘해피엔딩’이 가능함을 보여주려는 코미디다. 게이인 민수(김동윤)와 레즈비언인 효진(류현경)은 커밍아웃 대신 위장결혼을 선택하는데, 신혼 첫날부터 별거하는 이 별난 커플의 동거는 그들의 진심을 모르는 가족과 동료들 때문에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다. <조선명탐정: 각시투구꽃의 비밀> <의뢰인>의 제작자이기도 한 김조광수 감독의 장편 데뷔작. 이미 단편 <소년, 소년을 만나다> <친구 사이?> <사랑은 100°C> 등을 연출하면서 ‘밝은’ 퀴어영화를 모색해왔던 김조광수 감독은 이번엔 성소수자들에 대한 편견을 깨기 위해 웃음의 장치들을 적극적으로 가져왔다. 11월11일부터 촬영에 들어가 크리스마스 전까지 촬영을 끝낼 그는 이미 두 번째 장편 <약속>의 시나리오 작업도 시작한 상태였다.
-실제 인물들을 모델 삼아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들었다.
=게이, 레즈비언
퀴어도 해피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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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한 상업영화를 만들려 한다.” 박찬경 감독의 다짐이 낯설다. 그의 전작들이 머릿속에서 들어차 쉽사리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 박찬욱 감독과 공동 연출한 <파란만장>은 아이폰 촬영이라는 형식적 실험을 한 영화이고, 중편 <신도안>은 무속신앙과 한국 근대사를 접목시킨 실험적 다큐멘터리였다. 첫 장편 <다시 태어나고 싶어요, 안양에>는 다큐멘터리와 픽션, 과거와 현재가 이종 교배된 새로운 형식의 작품이었다. 그의 발언은, 적어도 그를 대중영화에서 벗어나 보이게 했던 이 모든 시도에 대한 ‘No’를 뜻한다. “원래 미술작업을 하다 영화 연출로 전향한 이유가 좀더 많은 대중과 소통을 원해서였다. 대중적으로 소비되는 상업영화는 내 작품의 지향점이다.”
그가 던진 승부수는 ‘공포’다. <신은 번개처럼 내린다>(가제)는 진짜 무서운 게 무엇인지 보여주기 위한 카드다. 신-신도시에 사는 하급 여경찰 연희. 잇단 투신자살 사건을 목격하게 된 그녀는 물
이번엔 철저하게 상업영화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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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승완 감독에게 베를린을 무대로 남북한 요원들의 첩보액션을 그릴 <베를린 파일>에 관한 얘기를 듣고 있자니, 그가 직접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묘하게 존 르 카레의 첩보소설들이 떠올랐다. 유럽에서 위장요원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아시아인, 아랍인, 아프리카인 등 온갖 인종의 난민들이 범람하는 독일 함부르크 기차역이 겹쳐졌고(<원티드 맨>), 독일에서의 첩보활동 중에 요원들을 전부 잃고 이중스파이 같은 잠입 명령을 수행하며 정부와 개인이라는 경계에서 갈등하는 알렉 리머스의 모습도 스쳐 지나갔다(<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어쨌건 북한이 남한보다 추울 테니 당연히 그들을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존 르 카레는 세월이 흘러 고백하길, 실제 베를린에 파견되어 영국의 스파이로 활동했었으며 당시의 경험은 작품 집필에 큰 영감을 줬다고 한다.
류승완 감독은 <부당거래>를 끝내자마자 <베를린 파
남북 요원들의 다찌마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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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이 작가, 어쩌려고 이걸 쓴 건가 싶더라.” 감독 박정우가 작가 박정우의 시나리오를 읽어보고 든 생각이란다. 변종 기생충 연가시의 출현, 사망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는 재난 사태. <연가시>는 이 아비규환 속에 가족을 살리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한 남자(김명민)의 이야기다. 바이러스의 출몰로 인한 재난영화, 충무로엔 분명 없던 얘기가 온다.
-<연가시>는 어떻게 시작된 이야기인가.
=3년 전쯤 KBS에서 아마추어 시나리오작가들의 작품을 선정하는 프로그램에 심사위원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그때 참가한 출연자에게 연가시를 소재로 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템이 좋아 책으로 발전시켜봤지만 그게 전부였다. 최근 연출을 오래 쉬다보니 쫓기는 마음이 생기더라. 내 아이에게도 아버지의 대표작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때 이 작품이 떠오르더라.
-<바람의 전설>과 <쏜다>가 장르는 다르나 모두 일탈에 대한 주제의식으로 연결된다면 이번 작품은
<28주 후> 그러나 한국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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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나이트>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더니 투자자들이 웃더라.” 인터뷰 말미, 정병길 감독은 농담처럼 이 말을 불쑥 건넸다. 하지만 인터뷰를 끝내고 내내 이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비록 영화의 톤과 제작 규모는 차이가 있겠지만 정병길 감독의 ‘다크 나이트’ 발언은 <내가 살인범이다>의 밑그림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힌트다. 그동안 한국 범죄영화에서 주인공은 어두운 뒷골목을 거닐며 범죄자를 쫓는 흑기사들이었다. <내가 살인범이다>는 다르다. <다크 나이트>의 또 다른 주인공 조커처럼 연쇄살인범 이두석(박시후)은 자신의 살인을 만방에 공표하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린다. 그 구체적인 방법은 공소시효가 만료된 뒤 세상에 나타나 살인 참회록 <내가 살인범이다>를 출간하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발칵 뒤집히지만 이두석의 완벽한 외모와 진심으로 죄를 회개하는 듯한 태도에 현혹되는 사람들도 생긴다. 공소시효는 지났고, 살인범은
공소시효 만료 그리고 살인 고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