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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부러졌다. 스스로 부러뜨렸다. 석달 전 일이다. 마의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두달 넘게 병원신세를 졌다. “이렇게 다치기도 어려운데.” 의사의 진단을 거짓말이라 생각했다. 수술하고 몇주 지나면 훌훌 털고 일어나겠지. 한데 의사의 말은 참말이었고, 내 바람이 망상이었다. 일주일 만에 휠체어 신동 소리 듣고 으쓱댄 것도 잠깐뿐. 얼마 지나지 않아 시련이 일상이 됐다. 혼자서 머리 감겠다고 낑낑대다 물이 흥건한 바닥에 철퍼덕 소리내고 주저앉기도 했고, 화장실에 가다가 외발이 문턱에 걸려 시멘트 바닥에 머리를 찧기도 했다. 제 한몸 간수하지 못한 결과는 볼썽사납기 그지없었다. 몸뚱이야 그렇다 치고 문제는 정신이었다. 환자복 입은 지 한달이 넘어가자 “여기서 나가면 뭣부터 할까” 했던 기대감은 사라졌다. 대신 “과연 내가 전처럼 걸을 수 있을까” 하는 조바심이 마음에 들어찼다. 잡생각 말고 책이라도 좀 읽어보자 하는 날이면 약속이라도 한 듯 옆방 아줌마들은 결투를 벌였다. 화장실 물을 안
[타인의 취향] 녹색 마약 청양고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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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형식주의자 빅토르 슈클로프스키는 이른바 ‘낯설게 하기’(остранение)를 일상 언어와 구별되는 시적 언어의 특성으로 꼽은 바 있다.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시어는 정보를 전달하는 데에 사용되는 일상의 언어와는 다르다. 시는 우리의 일상 언어를 낯선 방식으로 사용한다. 예를 들어 각운이나 두운, 동일한 어구의 반복, 의미론적 혹은 통사론적으로 불합리한 단어의 결합 등을 통해 우리는 어떤 텍스트가 시인지 아닌지 어렵지 않게 구별해낸다.
자동화한 지각의 익숙함
“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 김기림의 시 <바다와 나비> 속의 한 구절이다. 일상에서 언어를 이렇게 이상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것이 시어 특유의 낯설게 하기다. 낯설게 하기는 자동화를 파괴함으로써 낡은 지각의 방식을 변화시킨다. 나비가 바다에 내려앉으려다 날개만 물에 적시고 다시 날아오르는, 어떻게 보면 별것 아닌 일상
[진중권의 아이콘] 낯설면서도 친숙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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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김병욱 시트콤의 어떤 면을 즐겼나.
=<순풍산부인과>부터 빠짐없이 챙겨본 팬이다. 예컨대 변기가 막힌 이야기라고 해도, 그것을 통해 인간의 콤플렉스와 분노, 관계에 대한 불안을 가장 섬세하게 다루는 아티스트라고 생각해왔다. 그 점이 우디 앨런과 비슷하게 느끼지만 개인적으로는 김병욱 감독님이 앨런보다 더 좋다.
-출연 제안을 받고 든 생각과 시간이 흐르면서 드는 걱정이 있을 텐데.
=‘롱 카메오’ 정도로 여기면 된다고 하셨다. 출연분은 많지 않은데 시작과 끝을 열고 닫을 때가 있고 전지적 시점으로 사태를 바라보기도 한다. 근데 첫회 연기가 난해하더라. (웃음) 다만 팬으로서 뜬금없는 캐스팅이 되면 어쩌나 염려했지만 안심시켜주셨다. 음악 맡기는 김에 내레이션도 시켜볼까, 내레이션만 하면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생각을 하나 궁금해질 테니 출연도 시키자. 그 정도 맥락으로 이해한다.
-음악감독으로서 맡은 바는.
=타이틀곡과 엔딩곡, 몇 가지 테마를 작곡한다. 타이틀곡
interview ② 김병욱 감독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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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가 아니야>가 첫 시트콤이었다. 어떤 경험이었나.
=방송연기 시작이 시트콤이었다. 처음으로 카메라 3대 앞에서 연기하면서 템포감을 익혔고 방송의 속성을 배우며 편안해졌다.
-<지붕뚫고 하이킥!>을 보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김병욱 감독의 전작을 어떻게 보았나.
=다는 보지 못했지만, 짜임새가 있고 억지가 없었다. “웃길래요”가 아니라 “우린 이렇게 살아요”라고 말하는 작품들이었다. 시트콤을 다시 한다면 저 감독님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올해 초 미국 시트콤 한편을 보고 매료돼 이 장르가 배우가 도전할 많은 요소를 갖고 있구나, 깨닫고 의욕이 넘친 상황이었는데 마침 김병욱 감독에게 연락이 왔다.
-내상은 언뜻 보기엔 <순풍산부인과>의 박영규씨나 <지붕뚫고 하이킥!>의 정보석씨 계보를 잇는 인물이지만 좀 다른 면이 있다. 할아버지 세대가 없는 상태에서 최연장자이기도 하고.
=내상은 그냥 내상이더라. 감독님이 뭐라 딱 꼬집어
interview ① 무섭다고 인정해주면 다 내려놓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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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효과회사를 운영하던 중산층 가장 안내상(안내상)은 아내 유선(윤유선)의 생일날 부도를 맞는다. 채권자들에게 쫓긴 그는 회사 소유 낡은 봉고차를 타고 마사지 받던 아내와 아이스하키 시합 중이던 아들 종석(이종석)과 미국 유학 중 귀국한 딸 수정(크리스탈)을 차에 싣고 은신처를 찾아나선다. 믿었던 5촌 당숙마저 모르는 사이 작고한 사실을 알게 된 내상 가족은 유선의 동생인 공중보건의 계상(윤계상)과 체육교사 지석(서지석)이 사는 집에 더부살이하게 된다. 대학병원을 그만두고 6개월 뒤 르완다 의료봉사를 준비 중인 계상과 사람은 물론 사물과도 싸울 만큼 다혈질인 지석의 옆집에는, 일찍 부모를 여의고 집을 물려받은 조숙한 소녀 지원(김지원)이, 미안스러워 자장면 배달도 못 시키는 소심한 사촌언니 하선(박하선)과 살고 있다. 하선의 배려병은 자기를 구해준 9급 공무원 준비생 영욱(고영욱)과 죄책감 때문에 성심껏 사귈 정도. 내상네 식구들이 계상네에 입주할 무렵, 지원의 집에는 조폭들에게 쫓
<하이킥3>는 어떤 이야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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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가드를 올릴 시간이다. 2011년 9월19일 오후 7시45분 김병욱 사단이 세 번째 하이킥을 날린다. 주간 일일시트콤 <하이킥3: 짧은 다리의 역습>(연출 김병욱·김영기·조찬주, 각본 이영철·홍보희·장진아·백선우, 이하 <하이킥3>)은 120회로 6개월에 걸쳐 방영될 예정이다. 8월5일 뉴질랜드에서 일부 촬영이 시작되고 8월 말 세트 촬영에 돌입한다. 편의상 여전히 시트콤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김병욱 작가/감독의 시트콤은 이제 고유한 화법과 관습을 가진 25분 길이 드라마로서 독자적 양식을 확립했다. <하이킥> 시리즈가 세상에 나온 5년 전부터 달 기지에서 지내다 방금 귀환한 시청자가 아니라면 이제 김병욱 시트콤에서 오로지 웃음만 기대하는 이는 없을 터다. 해피엔딩은 언감생심, 나아가 좀더 단련된 시청자라면 내심 각오조차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이킥3>의 종장에서도 어쨌거나 우리는 궁극적으로 어떤 허무와 만나게 되리라고.
해피엔딩보다 짜릿한 김병욱표 웃음과 눈물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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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활쏘기를 연습했다고 들었다. 어느 정도 실력인가.
=나쁘지 않은 편이다. (웃음) 1년 정도 속성으로 배웠는데, 움직이는 과녁을 맞히거나 내가 움직이면서 맞힐 수 있는 정도는 된다. 영화에서 과녁에 맞는 화살은 직접 내가 쏜 거다. 에어건 같은 걸로 쏠 수도 있는데, 화살 깃이 흩트러져서 보기가 싫더라. 명색이 활영화인데, 깃털이 엉망이면 안되겠다 싶어서 직접 쐈다.
-활을 공부해보니 어떤 매력이 있던가.
=일단 우리나라의 활이 가장 진화돼 있다는 사실이 짜릿했다. 크기는 작으면서도 장력이 좋다. 서양 활은 크게 휘어져 있지만 우리나라 활은 휘어진 활의 양쪽을 다시 부려서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다더라. 대나무와 참나무, 뽕나무를 민어부레로 접착해서 만든다는데, 1년에 딱 한 시기에만 만들 수 있다. 화살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도 놀라웠다. 영화에 쓰인 육량시나 애깃살 외에도 많은 화살이 있었다. 무엇보다 활은 선 자세에서 쏘는 걸로 알려져 있는데, 진짜 오리지널한 사법은 기
“활이 가진 속성을 그대로 액션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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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8월이다. <고지전> <퀵> <7광구>에 이어 올여름의 마지막 한국 블록버스터인 <최종병기 활>까지 공개됐다. 앞서 개봉한 영화에 비해 다소 관심에서 멀리 있던 프로젝트였지만 기자시사 뒤의 반응만큼은 앞선 영화들 못지않은 상황이다. 정리하자면 지난해 개봉한 <아저씨>와 비교할 수 있는 날렵한 오락영화라는 평가다. <최종병기 활>이 지닌 대중영화로서의 전략과 미덕을 살펴보고, 영화를 준비하면서 직접 활쏘기를 연습했다는 김한민 감독도 만났다. 이번 여름의 극장가에서 놓치면 안될 또 한편의 영화다.
<최종병기 활>은 3D영화가 아니다. 대규모의 오픈세트나 CG로 창조한 공간을 통해 크기를 과시하는 것도 아니고, 숨겨진 역사를 통해 역사관의 전환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2011년 여름시장에 뛰어든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마지막 주자인 <최종병기 활>의 야심은 오로지 한국 고유의 활이 지닌 매력을 보
명쾌하다! 일타필살(一打必殺)의 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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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둥이 두 아기가 기저귀만 한 채 마주서서 ‘다다다다’라고 서로 외치는 화면, 생각나시나요? 이 심오한 아기들의 대화는 양말이 한짝밖에 없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으로 만들어져 광고에 활용되기도 했죠. 이제 막 돌이 지난 아기와 함께 사는 저에게는 ‘나도 저런 장면들을 좀 찍어뒀다가 사람들과 같이 보면 좋았을걸’ 하는 생각이 들게 하더라고요. 아마 아이를 키우거나 반려동물을 키우는 분들은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하신 경우가 많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일상에도 만만찮게 재미있는 일,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은 일들이 매일 일어나고 있으니까요. 이번 ‘영상공작소’에서는 이런 마음에 ‘뽐뿌질’을 할 수 있도록 도와드리려고 합니다.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들과 함께 우리 가족의 ‘영화’를 만드는 것이 이번 영상공작소 주제거든요. ‘영화’라고 해서 거창하고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가족여행의 추억을 담은 여행기일 수도 있고, 아이나 반려동물의 성장을 담은 육아일기일 수도 있고, 엄
[영상공작소] 일상의 작은 진실을 발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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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독의 영화노트] <고지전> 이 영화의 '리얼함'은 환각일까?
[올드독의 영화노트] <고지전> 이 영화의 '리얼함'은 환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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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나는 악어부대의 외상적 사건으로 제시된 포항 장면에서 문득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떠올랐다. 그는 유사한 상황을 예로 들어 진보와 보수간의 차이를 언급한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전쟁터가 아닌 일반 버스로 순화된 가정을 했지만, 어쨌든 상황은 비슷하다. 만원 버스다. 그런데 버스 바깥에는 버스를 타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이때 어떻게 해서라도 함께 타고 가자, 라고 말하면 진보고, 더 탈 곳이 없으니 그냥 출발하자, 라고 말하면 보수가 아니겠냐는 내용의 이야기였다. 그런데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누군가가 이런 설명을 하는 그에게 만약 (<고지전>의 포항신에 등장하는) 전장의 극단적 상황에서도 이러한 구분이 가능하냐는 질문을 했다고. 달변이었던 그 역시 쉽게 답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문이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선택의 여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선택의 가능성이 봉쇄된 상황에서
[전영객잔] 죄는 있는데 죄인은 없는 이상한 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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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골적인 국가주의, 애국적 순응주의,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환상. <퍼스트 어벤져>가 일으키는 몇 가지 혐의들은 대부분 영화의 시대착오적인 설정에서 비롯된다. 프랭크 카프라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상주의적인 인물이 성조기 쫄쫄이를 입고 나치 세력에 맞서 싸우며, 정의감과 애국심간의 수상쩍은 공조가 별다른 회의없이 이루어진다. 영화가 2차 세계대전 당대의 이데올로기적인 판단을 단순히 반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드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러나 영화의 원작이 1941년에 간행을 시작한 <캡틴 아메리카>라는 코믹스이고 주인공이 나치에 대항한 애국적 인물이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질문의 방향은 조금 달라져야 할 것이다. 왜 이 영화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웅을 굳이 1940년대 방식으로 노출시키고 있는가? 선과 악의 구분은 분명하고, 주인공은 고리타분할 법한 가치를 우직하게 고수한다. 그는 여타 히어로물의 영웅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신념과 정체성에 대해 거의 고
[영화읽기] 이다지도 순진한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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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발연기상’이란 부문이 영화 시상식에 존재한다면 류승룡은 이미 이 부문의 강력한 수상 후보다. 표정으로 해야 할 연기를 발로 하는 것마냥 엉망이라는 뜻이 아니다. 올 한해 류승룡만큼 땅에 발을 밀착시키고 힘차게 전진한 배우는 없으리란 확신에서 하는 말이다. <최종병기 활>에서 병자호란 시절 청나라 장군 쥬신타를 연기하는 그는, 자신이 모시는 왕자를 태워 죽인 ‘그놈’을 잡을 때까지 조선 산천을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린다. 사냥감을 포획하기 위해 넘어지고 구르는 걸 망설이지 않으며, 급기야 절벽까지 뛰어넘는 쥬신타는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 같은 인물이다. “캐릭터와 싱크로율이 500%였다. 내가 그랬다. 한국의 벤 존슨(캐나다 육상선수) 같다고. 숲속에서 남이를 뒤쫓는 장면을 통해 류승룡은 진정한 발연기란 어떤 것인지 확실히 보여줬다.” 김한민 감독의 코멘트처럼 류승룡은 <최종병기 활>을 통해 중년 액션배우로의 연기 변신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러나 류
[류승룡] “해냈다, 끝났다,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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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리를 쥔 남자를 그리면 그가 곧 최민식이다. 소뼈를 쳐든 남자를 그려놓으면 김윤석이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박해일의 캐리커처에서는 ‘화염병’이 빠질 수 없다. “연기를 하면서 특별히 누군가에게 가해를 해본 적이 없었던” 그에게 ‘화염병’은 처음 주어진 무기였고, <괴물>은 박해일의 날렵한 매력을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영화였다. 그에게 이번에는 ‘활’이 쥐어졌다. 빨리 뛰고 재빠르게 간파해 0.01초 단위의 호흡으로 쏴야 하는 활의 직선적인 성격만큼 박해일이 연기한 남이의 캐릭터 또한 명쾌하다. 납치된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오빠. 이중적이거나 때로는 찌질했던 박해일의 캐릭터들과 비교할 때 남이는 숨겨진 모습 따위를 드러낼 겨를이 없는 남자다.
<최종병기 활>은 박해일의 두 가지 갈망이 한데 모인 작품이다. 말과 표정보다는 몸으로 이야기하는 남자를 원했고, 사극을 해보고픈 마음이 있었다. 물론 활에 대한 관심까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나한테 활
[박해일] 몸이 말한다, 배우의 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