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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도 이름도 없는 ‘드라이버’가 이웃을 구하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는 플롯은 니콜라스 윈딩 레픈 감독의 말대로 ‘동화’ 같지만 <셰인>이나 <석양의 무법자> 같은 서부극과도 닮았다. 때론 슈퍼히어로 무비나 쿠엔틴 타란티노, 오우삼의 누아르 같기도 한데 드라이버와 악당이 살인기술자, 혹은 무인(武人)처럼 묘사되는 순간엔 칼잡이의 비정함도 엿보인다. 그 와중에 신체 훼손의 시각충격도 만만찮다. 선명한 80년대 감수성을 지향한 의도와 달리 영화는 꽤 복잡한 미로 속에 던져진다.
반면 음악은 선명하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를 거쳐 <섹스 거짓말 그리고 비디오테이프>로 영화음악을 시작한 클리프 마르티네즈의 스코어는 ‘감독의 요청’대로 80년대 전자음악을 재현한다. 아날로그 신시사이저 너머로 크라프트베르크, 반젤리스, 브라이언 이노가 어른거리는데, 삽입곡인 칼리지의 <A Real Hero>나 디자이어의 <Under Your Spell>
[차우진의 귀를기울이면] 80년대 빈티지 사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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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때 내 꿈은 농촌 총각에게 시집가는 거였다. 그때는 농협에 취직하면 농부를 알게 되고, 수협에 취직하면 어부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다. 마음만 먹으면 양촌리 김 회장댁 막내 며느리쯤은 충분히 내 자리라고 생각했다.
지금의 나는 농협과는 전혀 상관이 없어졌으며, 농촌 총각도 농협과 그닥 긴밀한 관계가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나의 체력과 게으름이 결과적으론 고귀한 농가와 멀쩡한 농촌 총각 하나 살렸구나 싶다.
올봄 우연한 기회에 도시농부학교 실습농장 귀퉁이에 작은 밭을 얻게 되었다. 처음 오이씨, 호박씨 심는 걸로 본격 흙놀이(농사라고 부르기엔 양심에 찔리는 바가 많다)가 시작됐다. 코를 막아가며 퇴비를 섞고, 뽑아도 뽑아도 다시 나오는 잡초를 뽑는 게 쉽지 않았다. 장갑이 축축해지도록 벌레는 눌러 죽이는 일, 매주 늘어가는 눈 밑 기미는 슬프기까지 했다.
멋모르고 시작한 흙놀이가 나에게 고통만 준 것은 아니다. 한여름 뙤약볕에서 잡초를 뽑고, 벌레를 잡은 뒤
[타인의취향] 농부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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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예술의 목적과 기능은 단 한점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다종의 목적들을 위해 예술은 제작, 감상되었고, 상이한 목적들이 한 작품 속에 중첩해 발현되기도 한다. 상상력의 표현과 유미주의 추종은 널리 통용되는 예술론일 것이다. 의사소통 수단, 프로파간다 활용, 시각적 오락 제공처럼 다분히 기능성에 비중을 둔 예술론이 차지하는 몫도 크다. 잡지의 표지는 네모진 틀에 시각 정보를 채워넣는 형식에서 네모진 액자에 그림을 끼워 보여주는 미술의 제시 방식과 닮았다. 잡지 표지의 일관된 미학은 그 주/달의 사건(인물)을 주제로 삼는 원칙이다. 당대 인구에 회자된 사건/인물을 예외없이 그 주/달의 커버로 선정하는 점에서 잡지 표지의 기획안은 전적으로 대중 취향을 고집한다. 이는 여론을 균형있게 수렴하기에 장점으로 꼽히지만 속물 취향으로 흘러 잡지의 품위를 훼손할 위험도 안고 있다. 편집인이 대중 취향과 위험한 줄다리기를 시도하는 빈번한 사례는, 진부한 예술-외설 논쟁으로 이어지는 선정적 이미지를 표
[반이정의 예술판독기] 잡지 표지, 세계 최강의 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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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마르세유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월드프리미어된 필립 그랑드리외의 신작이 이후 몇몇 영화제와 특별상영회에서 소개되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랑드리외는 영화 이외에 설치미술 및 비디오아트 영역에서도 활동하고 있는 아방가르드 작가로, 한국에 그의 작업이 폭넓게 소개된 적은 없지만, 장편 데뷔작 <음지>(1999)를 비롯해 <새로운 삶>(2002), <호수>(2008) 등의 실험적 픽션이 전주영화제, 부산영화제 및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상영된 바 있어 시네필들에게 낯선 이름은 아니다. 올해 발표한 작품은 그가 프랑스 영화비평가 니콜 브르네와 공동기획한 다큐멘터리 시리즈- 20세기에 저항과 해방의 투쟁에 참여했던 저명한 혹은 미지의 시네아스트들에 관한- <우리의 결의를 다진 것은 아름다움이었으리라>의 첫 결과물로서, 1960~70년대 일본의 전투적 시네아스트 아다치 마사오에 대한 것이다.
일본영화 사상 가장 특이한 이력의 영화감독 가운데 하
[유운성의 시네마나우] 예술가/테러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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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그리너웨이의 영화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 네빌을 살해한 마스크의 사내들이 죽은 네빌의 옷을 벗기며 말한다. “불투명한 알레고리의 애매모호한 증거로서 영지 주변 여기저기에 흩어놓거나.” 이 대사가 영화 전체의 메시지를 암시한다. 영화에서 이 살인의 의미는 끝까지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사태의 의미를 짐작하게 하는 단서들만 “불투명한 알레고리의 애매모호한 증거로서” 영화 전체에 흩어진다. 마치 살인자들에게 벗겨져 여기저기 버려질 네빌의 옷들처럼.
파편에 대한 취향
동전의 양면이랄까? 철학에서 17세기가 합리주의로 특징지어지는 고전주의 시대였다면, 예술에서 17세기는 비합리주의로 특징지어지는 바로크 시대였다. 피터 그리너웨이는 영화 속에서 한 시대에 공존하던 이 두 가지 사고방식을 서로 충동시킨다. 가령 격자를 이용해 르네상스의 투시법을 과학적으로 실현한 네빌의 풍경화는 합리주의적 사유를 상징한다. 푸코라면 그것을 ‘고전주의 에피스테메’의 그림이라 불렀을 거다.
[진중권의 아이콘] 감각을 건드리는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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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볼>을 보았다. 나는 야구를 잘 모르는 여자다. 그 수준이 어느 정도냐면, ‘출루율’이라는 말을 이 영화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 몇할 몇푼 몇리로 설명되는 타율도, 실은 지금까지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다만 올해, 이상하게도 롯데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그냥 경기를 틀어놓고 다른 잡일들을 한 적이 많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몰두해서 본 적은 없지만, 양준혁이 격앙된 목소리로 “야구는 이런 거지요!”라고 외치기 직전마다, 내가 어느새 화면에 집중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팽팽하게 동점을 유지하던 경기가 누군가의 홈런 한방으로 뒤집어지거나 하는 승부수가 시합이 다 끝날 무렵 벌어질 수 있다는 걸 목격하고 양준혁은 언제나 그 뒤에 의기양양하게 이렇게 덧붙였다. “끝날 때까지 모르는 게, 그게 야구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축구나 농구나 배구에 대고 하는 사람을 본 기억은, 적어도 내게는 없다. 물론 야구를 잘 모르는 나도 그게 무슨 뜻인지는 대강 알 수 있다. 공격의 기회를 빼
[전영객잔] 어처구니없지만 숭고한 어떤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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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뱅 이론> <마이크와 몰리> 등 손대는 시트콤마다 성공하는 ‘미다스의 손’ 척 로르가 제작한 시트콤 중에서 가장 많이 구설에 시달린 작품은 <두 남자와 1/2>이다. 2003년 <CBS>에서 첫 시즌 방영을 시작해, 2011년 현재는 시즌9를 방영 중인 이 시트콤은, CM송 작곡가이자 가수인 찰리 하퍼(찰리 신)의 집에 이혼한 동생 앨런(존 크라이어)이 아들 제이크와 함께 살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매일 밤 다른 여자(들)와 침실로 들어가는 플레이보이에 적게 일하고 많이 버는 찰리의 삶과 물리치료사로 일하면서 전처 두명에게 이혼수당을 지급하고 양육 책임까지 떠맡은 앨런의 삶이 대비되고, 그 사이에서 웃음이 발생하는 구조다. 한데 시즌8이 방영 중이던 2011년 1월, 찰리 신이 약물치료를 위해 재활시설에 입소하면서 시트콤은 제작 중단이라는 대형 위기를 겪었다. 1년 사이에 세 번째 입소였고, 시즌 파이널까지 3개월이나 남겨둔 상황이었기에
[안현진의 미드 앤 더 피플] 이혼남, 이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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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브>를 보고 나오는 길, 벌거벗은 임금님을 목격한 기분이 들었다. 이 영화에 내려진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사는 꽤 화려하고 묵직한 용포와 왕관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내가 본 건 무엇이었나.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드라이브>는 관객의 뇌 주름 사이사이 잠자고 있던 각자의 영화적 기억들을 깨워내는 데는 꽤 충실하다. 형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수류탄 핀 같은 성냥개비를 뽑고 돌진하던 홍콩영화의 비장한 영웅들이, 순진무구한 옆집 소녀를 구하기 위해 피바다로 뛰어든 한국과 프랑스 ‘아저씨들’의 얼굴이 떠오를 것이다. <폭력의 역사>를 거쳐온 두 이름의 남자가 <올드보이>의 장도리를 들고 타란티노적 폭력과 피의 향연을 펼치는 걸 보게 될 것이다. 그 위로 스티브 매퀸, 클린트 이스트우드, 로버트 드 니로, 라이언 오닐, 알랭 들롱 같은 이름이 스쳐지나갈 것이다. 하지만 그뿐이다. 이외에도 각기 다른 시대, 다른 방식으로 호령된 수많
[영화읽기] 그냥 정크무비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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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분야의 연예인들을 만나고 인터뷰하면서 분명히 느낀 것 중 하나는, 노래 못하는 가수도 연기 못하는 배우도 스타가 될 수 있지만 개그 못하는 개그맨은 스타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예뻐서 연기를 시작할 수도, 예뻐서 노래를 시작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쁘다고 웃기는 걸 시작할 수는 없다. 그래서 코너를 대박 내고, 유행어를 띄우고, 대중의 주목을 받는 개그맨들은 그 분야의 진짜 실력자들이다. 그들에겐 정말 재능이 있고, 그들은 죽도록 노력한다.
비범한 연기력으로 인기 코너 여럿을 탄생시켰던 한 개그우먼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무대에서 빵 터뜨리고 나면 내려오자마자 ‘다음주엔 뭘 하지…’ 하는 걱정부터 들어요. 녹화 끝나고 술 한잔하면서 오늘 무대 평가하고 서로 수고했다고 좋은 얘기 하다 ‘다음주 분장 뭐 할까?’ 하면 바로 정적이 흘러요.” 그리고 인터뷰의 말미에 그는 말했다. “술자리 같은 데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다른 여자들에겐 하지 못할 말 같은 걸 쉽게 할 때가 있어
[최지은의 TVIEW] 사랑하지 않을 수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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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한해를 돌아보면 대작이라고 불릴 만한 게임이 그리 많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몇몇 게임을 제외하곤 대작 게임의 기근에 시달렸다는 것이 정답. 게임 마니아들의 심심한 한해가 그렇게 저물어가나 싶었다. 하지만 <배틀필드3>의 출시를 시작으로 무차별적인 대작 게임의 귀환은 기근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올 4분기 게임시장을 격동 속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엘더스크롤: 스카이림>
베스트 오브 베스트
2006년에도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오블리비언> 이후 5년이 흐른 지금, 드디어 새로운 시리즈가 등장했다. <엘더스크롤>의 5번째 시리즈, <스카이림>(skyrim)이 그것. <오블리비언> 이후 5년이 흐른 지금 당연하게도 새롭게 무장된 그래픽 엔진과 게임성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됐다. 훌륭한 게임이지만 다소 지루했다는 평을 받았던 <오블리비언>과 다르게 <스카이림>은 압도적인 그래픽
[gadget] 게임의 계절, 대작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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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본>의 경찰서장 정진영은 빈틈없어 보이는 남자다. 경찰을 무시하는 국회의원들 앞에서 전혀 기죽지 않을 만큼 강직하고 사사건건 후배들부터 챙긴다. 성격은 판이하지만 TV드라마 <브레인>에서 연기하는 ‘김상철’ 의사 역시 그렇다. 허름한 차림새에 의사로서의 권위는 온데간데없이 오직 환자만 생각하는 사람이다. 두 캐릭터 모두 정진영이라는 배우에게 기대하게 되는 신뢰에 딱 부합한다. <닫힌 교문을 열며>와 <초록물고기> 등을 시작으로 <와일드 카드> <왕의 남자> 등을 거쳐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는 참 많은 변화를 겪었고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너무도 과분한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런 정진영에게 2011년은 새로운 자극을 얻기 위해 ‘이것저것 해보자’는 마음으로 살아온 해였다. 이쯤에서 그에게 개인적인 중간점검의 의미를 캐물었다.
-<특수본>은 어떻게 시작하게 된 작품인가.
=영화사 수박의 신범수 대표와
[정진영] 꼰대는 되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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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에 대항해 똘똘 뭉쳐 거세게 저항하는 염소 떼가 있었다. 상황을 전해 들은 늙고 경험 많은 잿빛 늑대는 흰 염소와 검은 염소 중 수가 적은 흰 염소만을 쫓으라고 한다. 늑대들은 수가 적은 흰 염소만 잡으려고 평소보다 더 힘을 써야 했다. 하지만 몇번 더 같은 패턴이 반복되자, 검은 염소들이 방어선에서 빠지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늑대에 잡아먹히는 흰 염소의 수가 늘었다. 흰 염소들은 검은 염소들에게 따졌다. 왜 같이 싸워주지 않는가. 검은 염소들은 되레, 자신들이 쫓기지 않는데도 싸워준 것에 고마워해야 한다고 맞선다. 흰 염소들이 고마움을 모른다고, 너희들만 공격받으니 스스로 싸워 살아남으라고. 바로 옆에 검은 염소가 있어도 흰 염소만 쫓기는 상황. 결국 흰 염소는 모두 잡아먹혔다. 늑대들은 다시 늙은 잿빛 늑대에게 어찌할까를 물었다. “이제 아무 염소나 내키는 대로 잡아도 된다네. 이제 검은 염소들은 한 마리가 잡아먹히면 그놈이 왜 잡아먹혔는지 알아내느라 대항할 생각을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징한 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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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신작도 한강의 문장은 여전하다. 손쉬운 찬사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필사적으로 쓴 문장들. 내용은 단순하다. 양육권을 잃고 실어증에 걸린 여주인공이 말을 다시 하고자 언어의 본질을 건드리는 고어인 희랍어를 배우면서, 시력을 잃어가는 강사와 친해진다. 한강의 소설평에 늘 언급되듯 이야기 자체가 그렇게 중요하진 않다. 그녀의 묘사를 따라, “어둑한 은숫가락” 같은 달, “희끗한 혼령 같은” 민들레 홀씨 등 지나치기 쉬운 자연을 되새기고, 희랍어를 “우렁우렁 따라 읽는” 변두리 교실을 엿보고, “검고 단단한 숲” 같은 밤을 거닐다 “오래되고 희미한 적의 같은” 침묵이 밴 막차를 타자. 읽다보면 어둑어둑한 도시의 거리를, 소리를 제거하고 촬영한 동영상을 감상하는 기분이 든다. 문장의 달인이 도시를 활보하다 이미지를 채집해 매끄럽게 편집한 조각물이라고 할까. 실제로 보면 무감각하겠지만, 문장을 통해 무척 아름다워진 풍경.
캐릭터들도 한강식의 익숙한 모습 그대로다. 마
[도서] 문장의 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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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선 / 음악웹진 ‘보다’ 편집장 ★★★☆
리아나 하면 자연스레 떠오르는 매끈한 멜로디와 훅을 가진 노래들이 곳곳에 포진해 있고, 반대쪽에는 반복되는 가사와 비트가 존재하는 노래들이 균형을 맞추고 있다. 또 리아나가 가진 보컬의 매력을 확인할 수 있는 <We All Want Love>나 <Farewell> 같은 미드 템포의 트랙들도 건재하다. 실질적인 현 팝 음악계의 여제답게 세련되고, 감각적이며, 대담하다.
이민희 / 음악웹진 ‘백비트’ 편집인 ★★★
이상한 콧소리도 그렇고, 불도저로 미는 듯한 수준의 폭풍 비트도 그렇고, 반복 위주로 구성되는 강한 멜로디와 전반적인 사운드도 그렇다. 말이 좀 웃기긴 하지만 리아나는 고급 싼티’ 나는 음악을 들려준다. 차트와 세일즈 기록은 그 우월한 싼티가 세계적으로 통한다는 걸 일러준다. 그런 즉물적인 노래에 오래 적응되어 있기 때문에 <We All Want Love> 같은 발라드는 생소하게 느껴질 정도다.
[hottracks] 이런 우월한 싼티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