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했다.”(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배흘림기둥’이라는 용어가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아마 혜곡 선생의 이 구절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왜 우리 조상들은 기둥에 배흘림(entasis)을 주었을까? 유홍준씨는 곰브리치의 말을 인용한다. “(엔타시스 형식을 취한) 기둥들은 탄력성있게 보이며, 기둥모양이 짓눌려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 않은 채 지붕 무게가 기둥을 가볍게 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마치 살아 있는 물체가 힘 안 들이고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들이 있다. 길을 걷다가, 버스를 기다리다가, 버스를 타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 무심코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멜로디가 있다. 집을 나서기 전에 들었던 노래이거나 누군가의 휴대전화 벨소리로 들려왔던 노래를 따라 부를 때가 많지만 가끔은 아무런 이유없이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가 있다. 갑자기 내가 이 노래를 왜 부르고 있지? 싶은, 어쩜 이렇게 정확하게 가사를 기억하고 있지? 싶은, 노래들. 고찬용의 새 앨범(이자 두 번째 솔로 앨범인) <<Look Back>>이 발매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내 입은 자동 반사적으로 <거리 풍경>을 흥얼거리고 있다.
대학을 휴학하고 이리저리 놀러다니던 시절, 얼마나 이 노래를 흥얼거렸는지 모른다. ‘회색빛 구름에 싸인 푸른 하늘, 그 속엔 초록색 나무가 보이고 새소리 아름답지요. 하나둘 별이 내리네 눈부시게, 그 속엔 사람들 웃음도 보이고 거리는 밤을 만나네.’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
[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 흥얼흥얼
-
니키(애시튼 커처)는 자타가 공인하는 ‘선수’다. 잘생긴 얼굴에 스타일이 좋은 것은 물론이고, 여자를 유혹하는 법을 꿰뚫고 있어서 노소를 불문한 여자들이 그에게 빠져든다. 하지만 그런 그도 끝내 할 수 없었던 일이 있었으니 정작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여자를 얻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청바지를 멋있게 입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니 청바지 잘 입는 대단한 비법이라도 소개할 것 같지만, 수많은 청바지를 입어보고 절망하며 깨달은 건 가장 만만히 입을 수 있는 옷인 청바지가 실은 가장 까다롭고 복잡한 옷이라는 것이다.
니키가 영화 내내 입고 나오는 진(Jeans)은 웨이스트라인이 짧아서 멜빵을 풀면 바지가 엉덩이 한가운데에 걸쳐지고, 바짓단은 복사뼈가 살짝 드러나게 접어놓은 스타일이다. 보통 남자들이 흔히 입는 모델도 아니고 웬만큼 키가 크고 다리가 길지 않고서는 소화할 수 없는 디자인이라서 그의 스타일을 여러모로 ‘한수
[fashion+] 청바지는 어쩌다가 까다로운 옷이 됐을까
-
영국의 한국문화원이 올 한해 내내 주최하는 12인의 감독전에 참석차 런던으로 향했다. 한국영화에 관심이 많은 현지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런던 시내에 자리한 아폴로 극장에서 <러브픽션>을 상영했다. 상영 전 <러브픽션>의 유머를 영국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걱정도 있었는데 의외로 많이 웃고 진심으로 즐겁게 보는 듯해 가슴을 쓸어내렸다. 상영 뒤에는 오랫동안 아시아영화 전문가로 명성이 높았던 토니 레인즈의 사회로 질의 응답하는 시간도 가졌다. 영국 관객은 배우 하정우와의 작업이 어땠는지 궁금해했고 영국에서 촬영한다면 어떤 배우를 쓰고 싶은지, 한국에서 영화는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물어왔다.
주말에 두번 다시 보기 힘든 행사가 열린다는 말에 런던에 며칠 더 머물기로 했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60주년을 축하하는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가 시내 곳곳에서 벌어졌다. 거리에는 수십만장의 영국 국기가 내걸리고 상점들은 할인 행사를 하고 크
[SO WHAT] 여왕 만세?
-
-
요즘 제작 중인 다큐멘터리는 40년대 해방 전후의 내용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 덕에 때늦은 역사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이게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워낙 배경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어떤 자료든 한줄 읽어내려가다 보면 새롭게 찾아야 할 인물이나 사건이 꼭 하나둘씩 등장하는 식이다. 정규교육과정에서 내가 근현대사에 대한 정보를 얼마나 접하지 못했는지 피부로, 아니 뼛속 깊이 체감하고 있다.
하지만 나를 서글프게 하는 건 단지 나의 무식함만은 아니다. 오히려 조금씩 더 유식(?)해질수록 해방 전후의 대한민국의 상황이 지금의 현실과 너무나 닮아 있다는 바로 그 점이 나를 가장 서글프게 만든다. 아니 어디 지금의 현실만 그렇겠는가? 해방 이후 60여년간의 우리나라 사회는 당시의 모순과 굴레를 그대로 간직한 채 계속 같은 상황을 반복하고 있다. 도대체 몇 번째 매트릭스이고 몇 번째 네오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매트릭스>를 떠올리니 ‘스미스’가 생각이 났다. 모든 대
[김진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오래된 실수
-
현대 미술작품 앞에서 자존감을 지키기란 쉽지 않다. 미술계에서 극찬받은 작품이지만 막상 내게는 전율이 오지 않을 때, 그건 나의 무지몽매함 때문일까 주눅이 들곤 했다. 그러나 미디어 아티스트 전준호(사진 왼쪽)와 문경원은 예술은 학습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꼬마전구를 볼 때 누구나 본능적으로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처럼. 두 작가의 ‘뉴스 프롬 노웨어’ 프로젝트는 예술과 아름다움의 본질에 대한 그들의 고민으로부터 출발했다. 전준호와 문경원은 2년 전부터 각 분야의 경지에 오른 전세계의 고수들을 찾아 예술이 무엇인지,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물었고 그 답을 반영해 종말 이후의 세계를 그린 단편영화 <세상의 저편>과 설치물 작업을 완성했다. 그리고 이들의 작품은 6월9일부터 9월16일까지 독일 카셀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현대미술전시회인 <카셀 도큐멘타>에서 처음으로 공개될 예정이다. <세상의 저편>의 프로듀서를 맡
[전준호, 문경원]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검열의 작업이다
-
한때 체험용 음악 게임이 큰 인기를 끌었다. 코나미의 <비트매니아>, <이지투디제이>(EZ2DJ), <기타프릭스>, <드럼매니아>를 비롯해 전세계에 기타 열풍을 일으켰던 <기타히어로>까지. 게임에서나마 록스타가 되고 싶은 이들의 열정을 누가 비난할 수 있을까. 하지만 게임은 게임일 뿐 실제 연주는 할 수 없다. 게임은 이제 좀 지겹고, 실제로 기타를 배워보고 싶은 이들을 위한 희소식이 있다. 지타라는 이름의 아이폰을 이용한 기타다.
간단히 설명하면 아이폰을 전용 기타에 꽂으면 자연스럽게 기타를 배우고 연주할 수 있는 기계다. 이 기타는 싸구려 플라스틱 모조품이 아니다. 실제 기타와 무게와 모양도 같고, 기타줄까지 있다. 특이한 점이라면 아이폰과 연동했을 때 손가락으로 짚어야 할 코드에 불이 들어와 훨씬 쉽게 기타를 배울 수 있다는 것. 이렇게 친절한 기타 교사가 또 없다. 올여름 미국에서 발매 예정이며 가격은 대략 500달러로
[gadget] Guitar? G-tar!
-
사양
5.8×5.6×1.9cm(W×H×D), 30g
특징
1. 음질은 정말 끝내주는군.
2. 합주, 강의, 영상 등 생각보다 쓰임새가 많다.
3. 10만원이 넘는 돈을 레코더에 투자하기는 좀.
10여년 전, 세계적인 한 석학은 10년 뒤에는 휴대용 전화기 한대만 있으면 MP3나 카메라 같은 다른 휴대용 IT 기기를 가지고 다닐 이유가 없을 거라고 했었다. 그때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스마트폰에 모든 걸 넣어 다닐 수는 있겠지만 일단 스마트폰이 아무리 발전해봤자 개별 전용 기기들의 성능을 따라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마트폰 한대에 모든 것이 종속될 수는 없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이제야 그 석학의 통찰에 다시 한번 감탄하고 있다. 지금처럼 스마트폰으로 영화를 찍을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스마트폰의 진화 과정을 살펴보면 모든 분야가 골고루 발전해온 것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CPU나 그래픽 처리 칩셋
[gadget] 아이폰의 녹음 기능이 아쉬웠다면
-
5백만불 전달을 명한 후 자신을 죽이고 돈을 빼돌리려는 상무의 음모를 알게 된 대기업부장이 대반격에 나서며 펼쳐지는 코믹 추격극 '5백만불의 사나이'는 오는 6월 28일 개봉 예정이다.
[영상인터뷰] 5백만불의 사나이 ‘박진영 민효린 조성하’
-
김학선/ 음악웹진 ‘보다’ 편집장 ★★★☆
첫 앨범 <Rufus Wainwright>를 냈을 때의 아우라는 이제 많이 희석됐지만 그 대신 우리는 훌륭한 어덜트 컨템포러리 팝 싱어를 얻을 수 있게 됐다. 마크 론슨의 프로듀싱 아래 다양한 스타일의 팝송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귀를 잡아끄는 멜로디와 훅 메이킹은 <Rufus Wainwright> 때부터 계속해서 이어져오고 있다.
이민희/ 음악웹진 ‘백비트’ 편집인 ★★★★
그의 어머니가 눈을 감았고, 그의 딸이 태어났다. 최근 몇년 사이 겪었던 죽음과 삶을 다룬 앨범이라 설명하지만 눈물의 작별보다 ‘딸바보’가 된 그의 환희가 두드러지는 앨범이다. 경사를 축하하는 의미로 음악에 힘을 보탠 인물은 프로듀서 마크 론슨. 서양식 백일잔치 느낌에 가깝다고 할까. 연회장을 배경으로 하는 우아한 춤의 음악, 모두가 축배를 드는 고전적인 파티의 음악. 나도 동참하고 싶어진다.
최민우/ 음악웹진 ‘웨이브’ 편집장 ★★★☆
[MUSIC] 가장 빛나는 때
-
기간: 6월29일까지
장소: 미디어극장 아이공
문의: http://igong.org/
유람선을 타고 한강 속으로 처음 들어가본 것은 이 작가 덕분이었다. 2009년 임민욱의 퍼포먼스 <S.O.S-채택된 불화>는 관람객을 한강 유람선에 태우고 다리 아래를 누비며 번쩍이는 고층 빌딩과 그사이를 마구 뛰어가는 남녀의 가쁜 숨소리를 듣게 했다. 2011년 작가는 기무사 수송대였던 한 극장(국립극단) 무대에 고문 피해자를 올라가게 하고 우리로 하여금 그 이야기를 듣게 했다. 작품 제목처럼 그야말로 <불의 절벽>이었다. 퍼포먼스와 설치가 있었던 현장에 없었더라도 작가 임민욱이 발견한 “이미 본 것 같고 벌써 사라진 것도 같은 뒤숭숭한 시공간” 상황을 볼 수 있는 기획전이 열린다.
예술과 사회의 관계라는 난제에 천착해온 임민욱의 이번 기획전은 전시장이 아닌 미디어‘극장’ 아이공에서 열린다. 영등포 일대를 트럭을 타고 활주하는 비디오 작업 <뉴타운 고스트>뿐
[전시] 현실 속에 숨은 틈을 보라
-
기간: 7월15일까지
장소: 경기도미술관
문의: gmoma.or.kr
이제 막 동이 튼 시간은 새벽인지 밤으로 가는 시간인지 알 수 없다. 우리는 거기에 없었으니까. 하늘과 바다 사이일까, 여기 착륙한 것일까,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검고 푸른색의 습기 가득한 느낌을 본다. 어떤 순간이었을지 상상하는 동안 비행기 앞에 놓인 활주로와 구름 형태는 더욱 모호해진다. 경비행기 운전 자격증을 가진 시사평론가 진중권의 비행 사진이다. 이륙과 착륙 사이에서 이 눈 밝은 한명의 비행사가 건져낸 활주의 단서를 보려면 경기도미술관에서 열리는 기획전 <생각여행>에 가면 된다.
거기엔 김훈도 있다. 전시장을 걷다보면 소설가 김훈이 손으로 꾹꾹 눌러쓴 문장과 사진이 보인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속으로 흘러들어온다. 모든 길을 다 갈 수는 없다 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나가는 일은 복되다.” 여름의 초입인 이맘때쯤이면 여행을 생각하는 이들이
[전시] 예술가들이 길에서 찾은 것은
-
괴수영화를 보면 꼭 이런 순간에 괴물이 나타나더라 싶은, ‘평화’라는 말을 그려놓은 것 같은 여름밤의 천변풍경. 출근시간에 늦은 양 빠르게 걷는 운동하는 사람들 사이로 때릉때릉 자전거가 지나가고, 곳곳의 벤치에는 DMB로 드라마를 보는 아주머니, 아저씨들이 있고, 배드민턴 코트 구석에는 누가 버리고 간 셔틀콕이 비온 날의 목련처럼 가장자리가 허물어진 채 가만히 누워 있다. 술을 마시던 아저씨들이 목소리를 높이는 일도 종종 벌어지는데, 들어보면 싸우는지 기분 좋게 흥분한 건지 구분할 수가 없을 때도 있다. 이근화의 새 시집 <차가운 잠>에 실린 <천변 자전거 클럽>은 며칠 전 본 그 장면을 오려낸 것 같다.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검은 타이츠를 신고 오징어 같은 다리를 구르며 한쪽 귀에서 다른 쪽 귀를 궤뚫고 지나간다 걷는 나는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그 뒤에 사운드트랙처럼 걸려 있는 이런 광경. “삿대질과 멱살잡이의 뒤에는 얼큰한 막걸리 한잔이 숨어 있다 꼭 시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그런 거잖아
-
한편의 영화가 끝난 뒤 관객이 그 순간 제일 하고 싶은 것은 방금 이야기를 마무리지은 이 영화에 대해 시시콜콜한 잡담을 나누는 것 아닐까? 영화를 통해 내가 느끼고, 네가 생각한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이 결과적으로 영화와 소통하는 과정이기도 하니까. 어쩌면 그렇게 영화를 두고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 누군가의 생각과 경험, 느낌을 품게 된 영화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채 더 값지고 의미있어질 것이다.
2009년부터 꾸준히 관객과 영화와의 소통창구를 열어주었던 CJ CGV 무비꼴라쥬 시네마톡이 그간의 대화들을 정리해 한권의 책으로 엮었다. 한편의 영화를 상영한 뒤 감독, 평론가, 배우 혹은 다양한 인사들을 초청해 영화에 대해 웃고 떠들었던 지난 이야기들이 500페이지가 넘는 다소 엄청난(?) 분량에 알차게 담겨 있다. 무비꼴라쥬 개봉작을 평론가와 기자, 감독, 배우들과 감상한 뒤 이야기를 나눴던 시네마톡, 예술을 주제로 한 영화들을 선정해 그 안에 담긴 예술세계에 대
[도서] 영화에게 말 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