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타일의 완성은 가방이다. 얼마 전 세계적인 의류 브랜드 행사에 초청을 받아서 갔다. 요즘 그런 행사에는 포토월이 설치되어 있다. 나 역시 사진에 잘 찍히기 위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공들여 빼입고 포토월에 섰다. 헤어, 메이크업, 의상, 액세서리, 신발까지 나름 완벽하게 준비를 마쳤는데, 뭔가가 허전했다. 가방, 그것이 문제였다.
동물보호 활동을 시작한 이후 가죽가방을 들지 않겠다고 내 자신과 약속을 했다. 그 탓에 공식적인 자리에 갈 때마다 그날의 의상과 어울리는 가방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제일 듣기 싫은 건 “이효리, 동물보호하더니 요즘 스타일이 밋밋해졌어”라는 소리다. 동물보호 활동을 하고 채식을 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멋지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욕심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행사에는 드레스에 어울릴 만한 에코백을 발견하지 못한 터라 그냥 맨손으로 가야 했다.
솔직히 아쉽다. 불과 몇년 전만 해도 나 역시 20~30대 또래 여자들처럼 가죽으로 만든 가방에 열광했
[이효리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엣지와 에코 사이
-
“섹스도 있고 뉴욕도 있지만, 마놀로는 없다.” <뉴욕타임스>가 <HBO>의 새 코미디 <걸스>에 내린 촌평이다. 뉴욕 브루클린을 배경으로 4명의 여자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걸스>를 이야기할 때 백이면 백 언급되는 <섹스&시티>와의 비교를, 쇼의 크리에이터이자 작가이고 때론 메가폰도 잡는, 주인공 한나 역의 리나 던햄은 쿨하게 받아들인다. “<섹스&시티> 없이는 <걸스>도 없었다.” 그러니 비교로 시작하자. <섹스&시티>가 사회적으로 안정된 30대 중반의 여자들이 남자와 패션, 행복을 추구하는 일상을 그렸다면, <걸스>는 섹스를 포함한 모든 것이 불안정한 20대 초·중반을 중심에 놓았다. 배경이 맨해튼이 아니라 브루클린인 것도 다른 점. 공통점도 있다. 나쁜 남자와의 나쁜 섹스가 등장한다는 것. 하지만 나빠서 웃긴 섹스가 아니라, 가장 친밀한 행위를 통해서도 위로
[안현진의 미드 크리에이터 열전] 20대, 현실적인 그녀들의 이야기
-
얼마 전 지인에게 ‘경인운하’의 유람선 얘기를 들었다. 유람선을 타고 아무리 운하를 거슬러 올라가도 보이는 건 양옆의 콘크리트 둑. 얼마나 볼 게 없던지 유람선에서 고작 둑 위를 달리는 자전거만 구경하다 돌아왔단다. 흥미로운 것은 그다음 대목이다. 볼 게 없기는 자전거 탄 이들도 매한가지. 그들은 유람선을 구경하더란다. 구경을 하면서 구경을 당하는, ‘상보적’ 유람, ‘재귀적’ 관광. 두개의 손이 서로 상대를 그리는 에셔의 작품을 닮았다.
자연을 수정하는 고전주의
영주 내려가는 길에 다리를 건너며 내려다본 남한강 자락. 시멘트로 덮은 강변에 자전거 길이 나 있다. 물론 그 위에 사람의 그림자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왜 강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지 못하는 걸까? 누구나 다 알다시피 이른바 ‘4대강 사업’은 삽질을 통해 경기를 부양해 고도성장을 하겠다는 각하의 미련한 집념의 결정체다. 하지만 거기에는- 비록 결정적 요인이라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각하 특유의 ‘삽질 미학’도 한몫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각하의 삽질 미학
-
자전거를 타면서 음악을 들으면 위험하다. 자동차의 경적이나 위험 신호를 감지할 수 없으니 사고 위험이 높다. 나도 큰 사고를 당할 뻔한 적이 있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자전거를 타다가 옆에 자동차가 있는 걸 모르고 핸들을 꺾었다. 다행히 살짝 넘어진 게 전부였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난다. 정신이 번쩍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전거 타면서 들었던 음악들이 얼마나 짜릿했던가도 생각난다. 자전거의 속도와 음악의 속도가 합해져 나를 하늘로 붕 띄워 올리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고 오로지 속도와 나와 음악만 남아 있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하긴, 친구 중 한명은 자동차 소음이 너무 심해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운전을 했다더라. 불법이고, 정말 위험한 짓이지만 그게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이 간다.
동네 공원에서 자전거를 자주 탄다. 늦은 밤에 타기 때문에 사람도 많지 않아서 음악을 들으며 타기에 아주 좋다. 음악에 맞춰 페달을 밟는다. 음악이 빨라지면 속도도 빨라지
[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 그건 너의 탓이 아니야
-
-
밤섬을 아시나요? 서강대교가 한발 걸치고 지나가는 한강의 작은 섬이랍니다. 지금은 평평한 두개의 섬이지만 한때 60여 가구가 살던 밤 모양의 볼록한 섬이었어요. 그러다가 여의도 개발 당시인 1968년 잡석 채취를 위해 폭파되며 두개로 나뉘고 그중 상류에 있는 윗밤섬에는 둥근 만이 만들어졌답니다. 지금은 철새가 날아오는 자연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되어 사람의 상륙이 금지되었지요….
이런 기구한 이야기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성이 김씨일 <김씨표류기>의 주인공조차 섬의 이름을 모른다. 그저 ‘한강의 무인도’라 알고 있을 뿐. 부채에 시달려 투신 자살하려 했던 남자의 삶이 개발을 위해 희생된 섬에서 좌충우돌 이어져 나가며 기묘한 도심 표류기가 전개된다.
얼마 전 그 밤섬을 아주 가까이서 볼 기회가 있었다. 잠실 수중보에서 김포 수중보까지의 한강 약 30km를 2인승 카약으로 종단해 보자는 친구의 제안에 넘어간 날이었다. 어깨가 탈구되는 것이 아닌가
[architecture+] 밤섬을 아시나요?
-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서른이 넘으면 멋진 남자를 만날 가능성보다는 테러리스트에게 살해당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20대 중반에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희극처럼 보이는 남의 비극인 양 박장대소했지만 30대를 지나며 가끔 그 희비극의 주인공이 결국 나였다는 사실, 그래도 나니까 하는 존심, 그렇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알알이 박혀드는 어떤 예감들, 가끔 터뜨리고야 마는 분통에 지쳐갈 때쯤. 그러다 ‘이놈 저놈’ 간 보는 그 지겨운 시간들이 다 지나고 비로소 마흔 즈음이 돼서야 확신하게 됐다. 자신에게 정말로 꼭 맞는 상대를 만나려면 적어도 서른다섯은 넘어야 하고 40, 50살쯤 돼야 안목 비스무리한 무언가가 돋아난다는 사실.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내 오랜 염원을 아는 언니가 어느 날 나에게 딱 맞는 괜찮은 남자를 소개해주겠다 한다. “사람 순수하고 음악 좋아하고 책 좋아하고 네가 딱 좋아할 타입이라니까.” 근데 아내도, 여자친구도, 딸린 자
[SO WHAT] 마흔 후후, 그까이 꺼
-
라이카, 에르메스와 함께 묶일 브랜드로는 또 어떤 게 있을까? 자동차 중에서는 우선 메르세데스 벤츠가 떠오른다(실제로 벤츠는 지난 2010년에 에르메스와 함께 한정판 스마트를 선보이기도 했다). 얼마 전 메르세데스 벤츠 코리아는 프리미엄 SUV인 더 뉴 M클래스를 공개했다. 7년 만의 속편에 해당하는 이 3세대 모델에서는 일단 뛰어난 경제성이 돋보인다. 연료 소비가 동급의 2세대에 비해 약 20% 감소했다. 직렬 4기통 디젤 엔진을 장착한 ML250의 경우, 복합 주행 연비는 11.9km/l,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168g/km 수준이다. 독일 소비재 심사기관인 외코 트렌드는 이 모델을 환경성 평가 SUV 부문 1위로 꼽기도 했다. 그런데 초식남처럼 사려 깊으면서도 육식남처럼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야말로 더 뉴 M클래스의 진짜 매력이다. 직접 시승한 ML 350은 정지상태에서 7.4초 만에 100km/h까지 주파했으며 최고 속도는 224km/h에 달했다. 승차감 역시 SUV로
[gadget] 초식남의 배려, 육식남의 힘
-
사양
기본 사양은 기존의 라이카 M9-P와 동일하다. 1800만 화소, ISO감도 2500, 최대 셔터 스피드는 4천분의 1초, 무게 약 600g.
특징
라이카만 해도 고가인데 여기에 에르메스까지 가세했다. 점심 사겠다고 브래드 피트를 불렀더니 안젤리나 졸리가 따라 나온 듯한 상황. 보기는 더 좋은데 그만큼 부담도 커졌다.
패션 브랜드가 옷이나 가방, 구두만 만드는 건 아니다. 잘 알다시피 프라다와 아르마니는 각각 LG, 삼성과 함께 스마트폰을 선보였으며 구치는 피아트500의 한정판 디자인에 참여했다. 올해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를 방문했다면 마르니의 의자, 보테가베네타의 책장, 에르메네질도 제냐의 슈트 걸이를 구경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에르메스 역시 새로운 협업에는 꽤 적극적이다. 물론 럭셔리의 대명사 대접을 받는 패션 하우스인 만큼 손을 내밀 상대는 신중하게 고르는 편이다. 그러니까 카메라로 치자면 라이카 정도는 돼야 파리 생토노레 거리의 아틀리에에 초대되어 함께 홍차라도
[gadget] 만나면 비싼 친구
-
<언터처블: 1%의 우정>은 따뜻하고 유머가 풍부한 영화다. 동물, 아기처럼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데, 드리스와 필립이 ‘나쁜 짓’으로 가까워지는 건 성장영화의 관습과도 일맥상통한다. 음악이 사용되는 방식도 흥미롭다. 나는 취향이 사회적이고 계급적으로 구성된다고 믿는다. 요컨대 취향은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설명하는 단서고, 그러므로 정치적이다. 필립의 생일 파티에서 두 사람이 ‘음악 취향 배틀’을 벌이는 장면이 그걸 명백히 보여준다.
비발디, 바흐,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어스 윈드 앤 파이어가 자연스레 뒤섞이는, 홀의 모든 사람들이 <Boogie Wonderland>에 맞춰 춤추는 장면은 드리스가 마침내 이 유사 가족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취향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정될 수 없다는 점도 드러낸다. 중요한 건 결국 맥락이다(이건 드리스가 재취업 면접을 볼 때 다시 한번 선명해진다). 언급한 곡들과 함께, 영화 곳곳에
[차우진의 귀를 기울이면] 타인의 취향
-
이민희/ 음악웹진 ‘백비트’ 편집인 ★★★
열혈 팬들에게 실망이 컸던 지난 두장에 비하면 나아졌다 하지만, 그 차이를 인지하기에 맨슨은 예나 지금이나 일관성으로 먹고사는 뮤지션이다. 악기든 목소리든 정석대로 쓰지 않고 어떻게든 일그러뜨려 파괴된 소리가 우수할 수 있다고 일깨운다. 극강의 사운드 사이에도 나름의 고저와 두께가 있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소리를 구겨넣지만 여백도 즐긴다. 그러다가도 미친 듯이 터뜨린다. 어느 순간 ‘헬게이트’가 열리는 진짜 무시무시한 롤러코스터.
김학선/ 음악웹진 ‘보다’ 편집장 ★★★
이제는 더 이상 세기말이라는 특이한 분위기가 먹히지 않는 세상. 마릴린 맨슨의 음악이나 비주얼도 더이상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마릴린 맨슨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기 위해 괜히 더 오버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여전히 어둡고 여전히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그 안에서 괜찮은 멜로디들을 만들어낸다. 전과 같지 않은 세상에서 그저 고군분투할 뿐.
최민
[MUSIC] 파괴와 여백의 미학
-
기간: 7월29일까지
장소: 컬처스페이스 엔유
문의: 1588-0688
뮤지컬 <풍월주>는 신라시대에 ‘풍월’이라 불리는 남자 기생이 있었다, 는 발칙한 상상에서 시작된다. 하나 무늬만 신라시대가 배경일 뿐, 시간을 알 수 없는 완전히 새로운 가상의 세계가 무대다. 남자 기생들이 신분 높은 여자들에게 기쁨을 주는 곳, 운루. 그곳의 제일 가는 풍월 ‘열’과 그와 각별한 관계인 ‘사담’, 열에게 맹목적인 사랑과 폭력에 가까운 구애를 하는 여왕 ‘진성’이 주인공이다. 이렇듯 뮤지컬 <풍월주>의 뼈대는 사랑이다. 사랑 때문에 안식을 찾고, 사랑 때문에 헛된 욕심을 부리고, 사랑 때문에 목숨까지 버린다. 모든 것이 ‘사랑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풍월주>는 그 복잡한 사랑을 철저하게 감성에 호소한다. 배우들이 사랑을 말뿐만 아니라 몸짓과 감정으로 구현할 때 관객은 흔들린다. 물론 여기엔 소극장이 주는 감성의 밀도와 휑한 공간이 쓸쓸함을 더하는 4
[공연] 사랑하기 때문에
-
솔직히 제목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마음껏 욕망하며 살아보니 괜찮더라는 뜻으로 들렸다. 욕망 그대로의 삶을 선언하는 책들은 차고 넘친다. 어릴 때 여행을 많이 다니라거나, 직장을 때려치우고 도전하라거나 하는 말들이 기쁘게 들리는 사람들은 어디까지나 따로 있다. 어릴 때 여행을 다니는 것도 돈을 벌 능력이 있거나 부모가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고, 직장을 때려치우고 나만의 일을 하는 것도 그만큼의 능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다. 책을 읽고 나서야 저자의 관점을 오해했다는 걸 깨달았다. <욕망해도 괜찮아>는 욕망을 감추고 살아야만 하는 사회가 결국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가에 관한 이야기이고, 왜 우리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는지에 관한 회고담이다.
<욕망해도 괜찮아>는 김두식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가 창비 사이트에서 연재한 <색, 계>라는 칼럼을 묶은 것이다. 언제나 ‘색’을 갈구하지만, 또 언제나 ‘계’의 영역에서 색을 향한 욕망을 감추고 살
[도서] 계를 넘어 색을 찾다
-
[올드독의 영화노트] <컬러풀> 숨은 재도전 쿠폰 찾기
[올드독의 영화노트] <컬러풀> 숨은 재도전 쿠폰 찾기
-
부모의 강요로 후궁이 되어야 하는 화연(조여정)은 오랜 연인인 권유(김민준)와 헤어져 궁으로 들어간다. 왕의 이복동생인 성원대군(김동욱)은 화연을 사랑하지만, 형수가 된 그녀를 어쩔 수는 없다. 5년 뒤, 선왕의 승하와 함께 성원대군은 왕위에 오른다. 섭정의 명목으로 왕의 머리 위에 오른 대비(박지영)와 그녀의 간신들이 선왕의 세력들을 처단하는 가운데, 화연 또한 위기에 놓인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성원대군은 무능한 왕이고, 내시가 되어 궁에 들어온 옛 연인 권유는 화연과 화연의 부모를 향해 이를 갈고 있다. <후궁: 제왕의 첩>(이하 <후궁>)은 궁이라는 미로에 홀로 남겨진 여인의 이야기다. 그녀에게는 출구를 찾을 실이나, 미로 밖으로 나갈 동아줄을 내려줄 사람이 없다.
<후궁>의 무대인 궁궐의 깊숙한 곳에는 ‘밀궁’이 있다. 선왕의 후궁이나 죄를 지은 후궁, 정절을 지키지 못한 나인들이 처벌받고 죽을 때까지 갇혀 있는 곳이다. 혼돈의
혼돈의 궁, 그리고 <후궁: 제왕의 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