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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여섯잔 정도 마시고 난 뒤에는 동생에게 전화하는 것이 괜찮은 생각처럼 여겨지기도 한다.”소설의 첫 문장이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웰스 타워의 단편집 <유린되고 타버린 모든 것>에 실린 <삶에서 한 걸음 물러서기>의 첫 문장은 알코올 기운 묻어나는 목소리로 “왜, 그런 거 있잖아?” 하듯 동생과의 불편한 관계를 은근한 듯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세살 어린 남동생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에피소드들. 예컨대 동생은 형이 함께 춤을 추었다는 이유만으로 꼬여낸 여자아이와 키스까지 해놓고는 잔뜩 실망한 뒤 몇년이나 지나서 별볼일 없는 경험이었음을 토로했다. 마흔살 언저리에 다다른 형제의 간극은 더욱 벌어졌다. 그래도 “나는 스티븐을 사랑한다”. 살아 있는 유일한 가족이니까. 행간에는 ‘나’의 저돌성과 무신경함이 묻어난다. “몇년 동안 나는 부동산 투자로 꽤 돈을 벌었다. 그리고 왜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그것 때문에 스티븐은 상처를 받았던 모양이다.” ‘나’는 있는 그대로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그저 덤덤하게 바라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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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영화란 <E.T.>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영화란 외계에서 온 것과 같은 새로운 매체라는 것입니다.”(이명세 감독) “감독으로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내가 모르는 수없이 많은 대중에게 내 일기장을 보여주는 일이라는 것, 또는 끊임없이 연애편지를 보내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송해성 감독)
2008년부터 2011년까지 동서대학교 임권택영화예술대학 마스터클래스 강의 내용이 <연출 수업>이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임권택, 정지영, 김홍준, 이현승, 권칠인, 한지승, 김대승, 정윤철, 이충렬, 양익준, 배창호, 김유진, 이명세, 강우석, 김영빈, 김의석, 장현수, 송해성, 류승완, 조진규, 이정범. 총 21명의 영화감독들의 육성이 이 두권의 책에 담겼다. 그런데 <연출 수업>을 통해 대단한 연출 비법을 전수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하면 곤란하다. 겉보기엔 그렇지 않지만(책 표지도 영화과 교재처럼 투박하고 책 자체의 무게도 만만치 않다) <연출
[도서] 영화를 향한 사랑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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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배리 페퍼)은 아내 웬디(미라 소비노)를 폭행해 교도소에 수감된다. 7년 뒤, 출소한 립에게 웬디는 그들의 아이를 입양시켰다고 고백한다. 조이(맥스웰 페리 코튼)를 입양한 불임부부인 잭(콜 하우저)과 몰리(케이트 리버링)는 사랑을 다해 조이를 키운다. 립은 입양 절차에 오류가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조이를 다시 데려오려고 하고, 잭과 몰리는 하는 수 없이 조이를 립과 웬디의 가정에 적응시키려 한다.
<단델리온 더스트>는 <뉴욕타임스> 기자 출신의 소설가 카렌 킹스베리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며, 각색은 <머니볼>의 각본에 참여한 스티븐 J. 리벨이 맡았다. 때로는 조용한 흐느낌이 커다란 감정의 파도를 이끌어내는 순간이 있듯이 영화는 격한 감정을 전달하면서도 시종일관 잔잔하게 흘러간다. <단델리온 더스트>에 끝까지 침묵을 지키는 인물은 없다. 주변인으로 머물던 인물들이 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할 때 비로소 드라마적인 감동을 빚어내는 순간이
“당신은 하나님의 뜻이 뭔지 당신 마음대로 결정해서는 안돼.” <단델리온 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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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사고로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년째 되는 날 연희(한수연)는 고향을 찾는다. 오래전 고향을 등졌던 연희를 맞아주는 건 혁(여현수)이다. 연희의 어머니와 혁의 아버지는 장난감 공장 기숙사에서 같은 날, 같은 사고로 함께 세상을 떴다. 연희는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 고향을 둘러보기로 하고, 혁은 그녀와 동행한다. 한편 교회 성가대 지휘자이자 장난감 공장 사장인 성진(김중기)이 화재사고와 어떤 관련이 있음이 드러난다. 화재사건은 성진의 삶 또한 훼손시킨다. 공장은 부도나고 그는 사람들의 의심과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성진은 어린 시절 연희가 짝사랑했던 교회 지휘자 선생님이다. 그리고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 암시된다.
<이방인들>에는 최소한의 인물만 등장하며 인물들의 관계는 모두 얽히고설켜 있다. 이들의 관계를 파악하는 것은 곧 이들의 심정에 다가가는 것이다. 사건이 아닌 감정을 좇는 영화이다보니 이야기가 하나로 모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사건이 아닌 감정을 좇는 영화 <이방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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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일라(카리나 하자드)는 종신형을 받고 복역하던 중 갑작스러운 사면으로 출소한다. 사면의 조건은 눈이 보이지 않는 신부 야곱(헤이키 노우시아이넨)의 집에 머무르면서 신부에게 온 편지를 읽어주는 것이다. 레일라는 청렴하게 살아가는 야곱 신부와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을뿐더러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편지에 답장을 하고 기도를 하는 그의 사명이 헛된 짓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더이상 야곱 신부에게 편지가 오지 않는다. 실의에 빠진 신부를 위해 레일라는 이제 가짜 사연을 만들어내기 시작한다.
<야곱 신부의 편지>는 단출한 영화다. 여기에는 야곱 신부, 레일라, 그리고 편지를 전해주는 우체부, 딱 3명의 인물만이 존재한다. 왜 야곱 신부는 레일라의 사면을 원했던 걸까? 레일라는 어떤 이유로 복역을 하게 된 걸까? 클라우스 해로 감독은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을 마지막으로 미룬다. 대신 그는 분노로 가득 차 인생을 포기하려는 인간과 신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왔으나 회의에 빠
상업영화들에 대한 치유제 <야곱 신부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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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클로스로도 슬래셔 호러 무비를 만들 수 있다. <세인트>는 성자 ‘성 니콜라스’(산타클로스의 라틴어)의 속성을 비틀고 뒤집는다. 성 니콜라스가 착한 일을 한 아이에게 선물을 준다는 건 잘 알려진 대로 크리스마스의 풍습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버전으로 나쁜 아이는 성 니콜라스와 함께 다니는 전사 ‘블랙피트’들이 자루에 담아 스페인으로 데리고 간다는 속설도 있다. 바로 <세인트>의 이야기가 출발하는 지점으로, 영화는 성 니콜라스를 성자가 아닌 약탈자로 가정하고 나선다.
사건은 12월5일에 시작된다. 영화의 배경이 된 암스테르담에서는 12월25일 대신 매년 12월5일 성 니콜라스 축일을 기념한다. 연대기순으로 보자면 사건의 시작은 1492년이다. 12월5일 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하던 성 니콜라스(허브 스타펠)가 분노한 마을 사람들에 의해 불타 죽는다. 476년이 지난 12월5일 밤, 망령이 된 성 니콜라스의 복수가 시작된다. 어린 ‘후트’는 그
산타클로스의 속성을 뒤집는다 <세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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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저 아이는 어쩌면 좋을까. 궁리하는 어른들 사이에서 고아원, 입양 같은 단어들이 오간다. 그때 다이키치(마쓰야마 겐이치)가 벌떡 일어나 린(아시다 마나)에게 다가가 묻는다. “우리 집 가서 살까?” 그렇게 27살짜리 총각 조카와 6살짜리 늦둥이 이모의 동거가 시작된다. 다이키치에게 주어진 첫 번째 미션은 ‘린 보육원 보내기’다. 만원 지하철을 뚫고 린을 보육원에 데려다준 뒤 제시간에 출근하기 위해 다이키치는 달리고 또 달린다. 그리고 매일 늦은 밤까지 린을 혼자 보육원에 남겨둘 수가 없어 야근이 없는 부서로 이동까지 한다. 하지만 육아의 세계는 그의 생각보다 넓고도 깊다. ‘아픈 린 보살피기’, ‘혼자 자기 무서워하는 린 달래기’, ‘이불에 실례하는 린 버릇 고쳐주기’ 등 그가 어엿한 보호자가 되기 위해 통과해야 할 일은 많고도 많다. 다행히 그때마다 그의 딸바보 동료들이, 보육원 동기생 엄마가, 그리고 가족들이 그의 든든한 지원군이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버니드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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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SMTOWN LIVE WORLD TOUR in Madison Square Garden>(이하 <I AM.>)은 SM엔터테인먼트 소속 가수들이 지난해 10월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연 ‘SMTOWN 라이브 월드 투어’ 실황을 담고 있다. 여기에 동방신기, 소녀시대, 샤이니 등의 연습생 시절부터 현재까지의 이야기가 엮여 있다. 영화가 시작되면 카메라는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열리는 그들의 콘서트장 백스테이지를 쫓는다. 초조하게 자신의 무대를 기다리는 가수들의 모습은 다시 시간을 거슬러 그들이 가수로 데뷔하기 전인 연습생 시절에 다다른다. 무대에선 프로다운 모습을 보였던 슈퍼주니어의 성민은 자신이 없다는 이유로 노래를 안 부르겠다고 고집을 피우던 연습생 시절의 모습을 보며 그때를 추억한다. 앳된 얼굴로 노래와 춤연습에 매달리는 소녀시대의 모습과 작은 장난에도 자지러지게 웃는 샤이니의 모습은 화려한 모습의 아이돌 역시 작은 일상에 울고 웃는 보통
일상의 평범함과 무대에 대한 열정 < I AM: SMTOWN LIVE WORLD TOUR in Madison Square Gar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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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죽었다. 사후세계에서 천사 혹은 악마 프라프라를 만난 나는 자살을 기도하고 겨우 살아난 중학교 3학년 꼬맹이 고바야시 마코토(아소 구미코)의 몸에 들어가 6개월을 살아가며 전생의 죄를 기억해내야 한다. 만약 죄를 기억해내지 못하면 환생할 수 없고, 마코토 역시 다시 죽어야만 한다. 고바야시 마코토의 삶 또한 끔찍하다. 아버지는 우유부단하고 엄마는 춤선생과 바람이 났으며 형은 마코토를 극도로 경멸하는 데다가 학교에서는 왕따다. 다가오는 친구라곤 왕따인 쇼코(미야자키 아오이)밖에 없다. 과연 나는 전생의 죄를 기억해내고 마코토의 삶도 구원할 수 있을까.
<컬러풀>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이름은 감독인 하라 게이이치다. 한국에서는 여전히 수면 밑의 이름이지만 사실 하라 게이이치는 지금 일본의 가장 훌륭한 애니메이션 작가 중 한명이다. 그의 대표작인 <갓파쿠와 여름방학을> <짱구는 못말려: 태풍을 부르는 장엄한 전설의 전투>를 본 적이 있다면 얼핏 아
하라 게이이치가 주는 마음의 치료제 <컬러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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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김슬기)와 아름(조아름)은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에 다닌다. 슬기는 판소리를, 아름은 경기민요를 전공하고 있다. 예고에 다닌다고 해서 다를 건 없다. 슬기와 아름에게 가장 큰 스트레스는 역시 대학입시다. 인간문화재 할머니를 둔 슬기는 주변의 기대가 부담스럽기만 하다. 부모를 잃은 뒤 이모와 함께 사는 아름은 어떻게든 학비가 싼 국립대학에 진학하려고 안간힘을 쓴다. 한편, 합창대회에 참여하라는 교육청의 지시가 떨어지자 학교에선 강제로 합창단을 만든다. 출석일수가 모자라 방학에도 학교에 나와야 하는 학생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합창단의 일원이 되고, 그중에는 슬기와 아름도 끼어 있다.
‘두레소리’는 실제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 합창반 이름이다. 2009년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만들어져 지금까지 쭉 활동하고 있는 두레소리와 달리 영화 속의 ‘두레소리’는 교사들과 아이들의 반목 속에서 몇번이나 해체될 위기를 맞는다. 함 선생(함현상)은 서양 악보도 읽지 못하는 학생들을 간신히 추슬러 합
마음을 흔드는 우리의 소리 <두레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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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 사건이다. 세계 영화사의 손꼽히는 걸작 <제7의 봉인>이 제작된 지 무려 반세기 만에 국내 개봉한다. 그간 영화제나 특별전 등을 통해 몇 차례 소개되긴 했지만 정식으로 극장에서 상영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스웨덴의 거장 잉마르 베리만 감독은 <한여름 밤의 미소> <산딸기> <화니와 알렉산더> 등 수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그중에서도 그의 세계관을 가장 잘 요약한 작품을 고르라면 두말할 것 없이 <제7의 봉인>을 꼽을 수 있다. “프랑스영화의 모든 곳에 베리만의 유산이 남겨져 있다”던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의 말처럼 20세기를 이끈 최고의 시네아스트이자 영화계 거장들의 스승인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오늘을 만든 대표작이기도 하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제7의 봉인’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구절로 세상의 종말을 상징하는 7개의 봉인 중 마지막을 일컫는다. 14세기 중엽 기사 블로크(막스 폰 시도)는 십자군 전쟁을 끝내
세계 영화사의 손꼽히는 걸작, 반세기만의 국내개봉 <제7의 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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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물깨나 들었다는 사람치고 프로이트와 융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제대로 아는 사람도 드물다. <데인저러스 메소드>는 정신분석학계의 뿌리이자 거목인 두 남자와 그들이 치료했던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다. 흔히 위대한 인물들의 위용에 압도되어 쉽게 잊곤 하지만 그들 또한 사람이다. 존재감이 클수록 그림자 또한 짙은 법, 인간의 심리를 아무리 이론적으로 잘 설명했다고 한들 그들의 인생마저 완벽할 순 없다. 심지어 그들의 이론조차 완벽하지 않은 마당에. 이 영화는 프로이트와 융의 숨겨진 이야기와 그들이 감추고 싶었던 은밀한 욕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위인들의 뒷이야기는 재미있다. 더구나 감독이 무려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다. 폭력에 중독된 거칠고 끔찍한 세계를 다뤄왔던 크로넨버그의 첫 멜로드라마라는 것도 그러하거니와 정신분석학계의 위인, 아니 신이나 다름없는 인물들의 속살을 파헤친다는 점에서 절로 기대가 인다.
정신과 의사이자
인간 프로이트와 융을 만나다 <데인저러스 메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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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제왕의 첩>
제작 (주)황기성사단 / 감독 김대승 / 출연 조여정, 김동욱, 김민준 / 제공·배급 롯데엔터테인먼트 / 개봉 6월6일
최근 일련의 사극드라마를 봐도 알 수 있듯이, 궁은 언제나 ‘합방’을 향해 있는 곳이다. <후궁: 제왕의 첩>은 왕과 중전이 아닌, 왕과 후궁의 정사에 관한 비사다. 왕에게 중전과의 정사가 왕의 공식적인 의무라면 후궁과의 정사는 사적이고 은밀한 시간이다. <번지점프를 하다> <혈의 누>를 연출했던 김대승 감독은 이 관계에서 더욱 강하게 드러날 수밖에 없는 권력과 탐욕의 모습을 상상했다. 당연히 TV로 즐겼던 달달한 사극 로맨스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뜻하지 않게 후궁이 된 여자 화연(조여정),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 권유(김민준). 그리고 권력으로 화연을 얻게 된 서원대군(김동욱)의 정욕과 권력을 향한 욕망이 궁의 가장 깊은 곳에서 뜨겁게 폭발할 것이다.
[Coming soon] 왕과 후궁의 비사 <후궁: 제왕의 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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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서울환경영화제가 5월9일부터 15일까지 CGV용산에서 열린다. 총 829편이 출품된 올해는 11개국 20편의 경쟁부문 작품을 비롯해 포커스 2012, 기후변화와 미래, 그린 파노라마, 한국 환경영화의 흐름, 지구의 아이들 등 다양한 섹션에 걸쳐 총 112편의 환경영화가 상영된다. 개막작은 민병훈, 이세영 감독의 <아! 굴업도>. 골프장 개발 논란으로 시끄러운 서해안의 진주 굴업도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작품이다. 서울환경영화제 김영우 프로그래머는 “내년이 10주년이다. 10주년을 앞두고 지난 9년을 되돌아보고, 미래를 준비하는 점에서 이번 환경영화제는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경쟁부문과 함께 눈에 띄는 건 포커스 2012 섹션이다. 올해 주제는 ‘후쿠시마, 그 이후의 이야기들’로, 3·11 대지진을 소재로 한 일본 장편영화 3편, 단편영화 4편 등 총 7편이 공개된다. 영화제 시간 및 상영 정보는 영화제 홈페이지(www.gffis.org)를 참조할 것.
3·11
[영화제] 이와이 슌지의 환경영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