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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배우가 분장을 하고 영화에서 노역을 맡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박해일이 주연한 <은교>는 사정이 좀 다르다. 이 영화의 주제는 늙음과 관련이 있고 적어도 한국의 관객은 아무리 발달한 분장기술의 덕을 봤다고 해도 <은교>의 늙은 소설가 이적요를 영화 속 주인공으로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그가 처음으로 입을 뗄 때 나는 연기 잘하는 배우 박해일도 고전하는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건 누가 봐도 젊은 박해일이 늙은 이적요를 연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게 잘못됐다고 말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이것 때문에 영화가 텍스트의 논리를 충실히 따라가는 입장에서 매혹을 준다기보다는 텍스트 바깥의 관객 입장에서 다른 매혹을 준다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영화 중반에 늙은 이적요가 환상 속에서 청순하고 풋풋한 소녀 은교와 정사를 나누는 장면이 나올 때 그것은 늙은 이적요의 환상이라기보다 배우 박해일이 본모습으로 나온다는 인상이 더 강했다. 실제로 함께 영
[신전영객잔] 이 육체성, 혹여 관념적이지는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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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새해 벽두, <짝>의 첫 본방을 우연히 봤다. SBS 스페셜이었다. 다른 지상파의 ‘스페셜’들처럼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대표선수였으니 내 안의 첫 반응은 ‘참으로 별걸 다 한다’였다. 또한 흥미를 떨어뜨린 건 실험자들이었다. 비싼 차를 타고 제각기 등장하는 남녀들은 예상대로 너무 멋졌다. ‘저런 친구들이면 굳이 이런 곳이 아니어도 짝을 잘 찾을 텐데’라는 느낌이 다큐적 호기심을 식혔다. 연예인도 아닌 (연애) 선수들의 경기를 굳이 지켜봐야 하나. 곧 채널을 돌렸다. 그런데 나는 사악한 시청자가 아닌가. 모태솔로 편이 아주 나중에 기획된 게 순리처럼 보이듯, 짝 찾기 힘들겠다 싶은 분위기의 남녀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면 채널링은 더 빨라졌을 거다. 석달 뒤 정규 방송으로 편성되자 동시간대 프로그램을 가뿐히 제치고 나의 애정 목록에 올라섰다.
애정 획득은 정공법으로
<짝>을 보며 가장 의아했던 건 ‘저들은 대체 무슨 맘으로 출연을 결심한 걸까’였다.
나도 짝을 갖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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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이 있던 4월11일에 홍대 근처에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고양시에서 일찌감치 투표를 마치고 볼일을 보러 나간 것이었는데, 모임이 저녁 술자리까지 이어졌다. 한 클럽에서는 ‘우리 모두 모여서 총선 개표 방송을 보아요’라는(설마 지기야 하겠어, 싶은 마음의) 긍정적인 문구를 내걸고 조촐한 행사를 만들었다. 나도 그 자리에 가게 됐다. 분위기는 무거웠다. 무거울 수밖에 없지, 우리 모두 이제는 선거 결과를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됐지만 투표함 뚜껑을 막 열었을 때는 우리 머리 뚜껑도 함께 열린 상태여서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울어, 말아? 홍대를 포함한 마포 구역을 지역 기반으로 활동하는 고소 전문 후보가 참담한 득표율을 보이고 있다는 소식에 환호성을 지르기도 하고, 몇몇 지역구에서 예상외의 선전을 하는 후보들을 보며 응원의 박수를 보내기도 했지만 한숨을 쉴 때가 더 많았다. 트위터에서는 진보신당이 여당이고 녹색당이 제1야당이었는데, 새누리당 이야기는 욕밖에 없었는데,
당신의 3일은 어떤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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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자. <나는 꼼수다> 열풍 전에 <나는 가수다> 열풍이 있었다. 청출어람 청어람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명백한 것은 <일밤-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가 원전이고 <나는 꼼수다>(<나꼼수>)는 패러디물이라는 것이다. 시간이 좀 되어서 혹은 <나꼼수> 열풍이 워낙 거세 <나꼼수>가 오리지널이고, <나가수>가 파생 상품이라 헷갈릴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나가수>가 처음 방송된 건 2011년 3월6일이고, <나꼼수>가 처음 업로드된 건 그해 4월27일이다.
<나가수>가 방송되자 논쟁이 일었다. 아무리 오디션 열풍이 거세기로서니 중견 가수들까지 오디션 무대에 세우느냐는 것이었다. 몇몇 대중 가수는 이런 프로그램은 뮤지션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고춧가루를 뿌렸고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동료를 자존심이 없는 뮤지션으로 몰아세웠다. 음악이 어떻게 평가의 대상이 되
오디션 권하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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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킥’ 시리즈 중에서 가장 문제작이지만 그에 합당한 주목을 덜 받은 것이 바로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이하 <짧은 다리의 역습>)이다.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지목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이 시리즈가 노골적으로 블랙코미디를 표방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과거보다도 더 정공법을 택했다고 할까, 그래서 시청자에게 현실에 대한 위트를 제공하고자 했던 것이 이 시리즈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위트는 현실에 대한 재치있는 비틀기인데, 약간의 냉소가 묻어 있는 유머의 기법이다. 전작에 비해 <짧은 다리의 역습>은 이런 위트의 특성을 많이 살려서 코미디는 코미디이되 상당히 뒤틀린 스타일을 보여준다. 이전 시리즈에서 ‘하이킥’은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를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알레고리라는 것은 현실을 그대로 말하지 않고 돌려서 다르게 표현하는 수사법이다. 극중 캐릭터는 현실의 개인이면서 동시에 전형이기도 하다. 전형은 현실을 비례적으로 재현하는 지
대신 웃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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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꽃 흐드러진 4월 초, 문정현 신부님이 강정마을 방파제 7m 아래로 떨어졌을 때, 주위 사람들은 그분께 임종이 닥쳤다고 생각했다. 그때 강정마을을 새까맣게 포위하고 있던 경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죽음을 또 어떻게 축소 은폐해야 하나, 설마 그런 생각을 하지야 않았겠지. 다행히 신부님은 그런 높이에서 추락하고서 어떻게 그 정도밖에 다치지 않았는지 모두 신기해할 정도로 입원 13일 만에 퇴원해 강정마을로 돌아왔다. 사고가 난 그날, 포구에서 기도할 때 쓰던 깔개가 바람에 날려 방파제 밑에 떨어져 있었다고 한다. 70노구의 사제를 받아낸 그 기도용 깔개에 대해 생각한다. 고마워해야 할 것들은 대개 이렇게 바닥에 있는 것들이다. 기적은 멀리 있지 않다.
이른바 ‘강정앓이’ 중이다. 아침에 눈뜨면 제일 먼저 그곳이 염려되고, 밤새 별일 없었는지 안부를 챙기는 일부터 시작하게 된다. ‘앓이’를 해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앓는다는 건 일종의 사랑의 상태다. 사랑의 에너지는 삶에 ‘
[김선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아름다움에의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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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서역발 라싸행 T27 열차에 올랐다. 6인실 침대칸에 짐을 풀고 늦은 저녁을 먹었다. 열차가 출발하자 가랑비가 흩날리기 시작했다. 비에 젖은 베이징 시내가 빠르게 뒷걸음질쳤다. 양치질 소리가 요란스레 들려왔다. 46시간을 꼬박 열차에서 보내야 할 사람들이 서둘러 잠잘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얼마 안 있어 객실등이 꺼지고 정적이 찾아왔다. 코고는 소리 요란한 객실에서 나는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몸을 이리저리 뒤척였다.
티베트 여행은 오랜 꿈이었다. 스무살 무렵 달라이 라마에 대해 알게 된 이후로 티베트는 내게 근면하고 경건한 사람들이 메마른 땅에 몸을 던지며 삶과 신념을 일구어내는 숭고한 땅이라는 이미지로 가득했다. 힘들고 지쳐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을 때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해 외로울 때 문득문득 티베트에 가고 싶었다. 그곳에 가면 어쩐지 위로받고 회복하고 용서하고 거듭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열차는 하루 종일 내몽골의 황량한 초원지대를 쉼없이 달렸다. 3일째가 되자 눈 덮
[SO WHAT] 별의 웅성거림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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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메이커>의 원제 ‘The Ides of March’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 나온 대사로, 브루투스가 시저를 살해한 기원전 44년 ‘3월의 중간(15)일’을 뜻한다. 이 제목은 모리스 주지사(조지 클루니)의 민주당 경선캠프에서 인정받는 홍보관 스티븐(라이언 고슬링)의 변화를 좇아 영화가 폭로하는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반영한다. <킹메이커>는 ‘모시는 후보님’에 대한 선망과 더러운 정치를 청산하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이 어떻게 부서지고 또 그로 인해 한 청년의 근본이 얼마나 바뀌는지 추적하는 영화. 하지만 그 얼굴을 클로즈업하는 엔딩은 과연 그가 배신한 건지, 아니면 정치적 각성을 한 건지 저울질한다. 구스 반 산트의 ‘미드’ <보스>가 적나라하게 묘사한 대로 정치는 정의실현이 아닌 게임의 장이기 때문이다.
한편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음악은 드라마와 스릴러를 오간다. 바이올린족(族)의 현악기가 빚는 무거운 저
[차우진의 귀를 기울이면] 게임 같은 정치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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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세도 비굴함도 괜한 말치레도 없는 단정한 성품이 모두에게 호감을 사는 남자. 그가 친구라면 어쩐지 상상 속의 목돈이나마 맡겨도 좋을 것 같다. 알량한 통장 잔고를 한탄하며 포털 사이트 인물정보 검색창에 그의 이름을 쓰고 엔터키를 탁 쳤더니 사진 속 그는 도리어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갚아도 돼’라고… 아아 환청이 들린다! 배우 이야길 하면서 가상의 돈거래를 떠올리다니 뭔가 크게 잘못된 기분이 들지만 아무튼, 엄태웅을 보면서 금전거래에도 탁해지지 않는 희귀한 우정을 상상하곤 한다. 그런 남자의 신의를 저버리면 저절로 몹쓸 인간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정이나 신뢰에서 출발하는 복수극에 엄태웅이 등장하면 진폭이 커진다. 그리고 그 남자는 공소시효 따위 아랑곳않고 반드시 돌아온다.
KBS 드라마 <적도의 남자>는 그의 세 번째 복수극이다. 자살로 위장된 아버지의 죽음을 의심하는 선우(엄태웅)는 아버지가 진 회장(김영철)을 만나러 갔던 것을 알게 되고 재수사를 청하는
[유선주의 TVIEW] 이만하면 지존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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텔레비전 음악 순위 프로그램에서 언제부터 가사를 보여주기 시작했을까. 자막처럼 가사를 보여주는 건 반대지만 (전 음악도 못 듣고 춤도 못 보고, 자꾸 그걸 읽고 있단 말예요! 음악을 자막으로 배운단 말예요!) 아이돌 그룹들의 현란한 노래와 랩의 의미를 제대로 전달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가사의 내용이 어찌나 ‘아스트랄’ 하고 괴이하고 직설적인지, 자막 읽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노래와 퍼포먼스와 가사의 불일치 때문에 배꼽을 잡는 경우도 많다. 걸그룹들의 노래는 대부분 ‘너는 정말 나쁜 남자다’라거나 (그래서) ‘남자와 곧 헤어질 예정’이거나 (아니다) ‘내가 오히려 나쁜 여자다’라거나 (이럴 바엔) ‘다 싫어, 전부 꺼져버려’(라며 ‘멘붕’의 극단을 보여주는) 가사들이 많은데, 이토록 가사는 슬프고 비트는 살벌하게 빠르고, 춤은 몸살나게 애크러배틱한 이유에는 “슬픈 일이 있을 때는 빠른 음악 속에서 너의 몸을 극도로 피곤하게 만들어 이겨내도록 하여라”라는
[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 말 많은 오빠, 나쁜 오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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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희/ 음악웹진 ‘백비트’ 편집인 ★★★
가끔씩 명랑한 피아노가 음악을 살린다. 언제나처럼 어둡고 묵직한 음악을 즐기지만 화사한 블루스를 들려주는데, 과거 들려주었던 음악과 명확하게 구분될 만큼 매력적이진 않다. 몸담았던 밴드들을 돌아보면 화이트 스트라이프스는 미니멀리즘의 미학, 라콘터스는 완연한 블루스, 데드 웨더는 침잠의 극단이라고 요약할 수 있지만 솔로 활동의 핵심어를 찾기는 좀 어렵다. 경력을 반영하는 믿을 만한 완성도, 그러나 했던 작업들의 두서없는 총망라.
김학선/ 음악웹진 ‘보다’ 편집장 ★★★★
뿌리를 찾아가는 잭 화이트. 자신이 몸담고 있는 데드 웨더, 화이트 스트라이프스 등의 음악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 가운데 ‘블루스’를 떼어 독자적인 행보를 선보인다. 이를테면 ‘블루스 리바이벌’인 셈이다. 때로는 흥겹고, 때로는 서글프게 들리는 이 음악을 잭 화이트는 자신의 스타일대로, 전혀 구닥다리로 느껴지지 않게 표현해냈다. 확실히 믿어도 좋다
최민우/ 음악웹진 ‘
[MUSIC] 활력이 가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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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6~7년 전 병원에 가서 처방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심각한 우울에 시달린 적이 있었다. 하루 종일 밖에 나가지 않고 TV 모니터만 뚫어져라 보았다. 그러다가 (MBC <강력추천 토요일>의 코너이자, <무한도전>의 전신인) ‘무모한 도전’이라는 정말 ‘무모한’ 프로그램을 발견했다. 쫄쫄이 옷을 입은 일군의 남자들이 도전해봐야 인생에 하등 도움이 안될 것 같은 종류의 대결을 만들어 도전하고는 매번 실패하는 이상한 컨셉의 프로였다. 그런데 묘한 중독성이 있었다.
나를 결정적으로 미치게 만든 에피소드는 4회인 ‘목욕탕 물 빼기 도전’이었다. 영업이 끝난 목욕탕에 러닝셔츠와 팬티 등으로 저렴하게 차려입은 멤버(유재석이 MC였고 박명수, 노홍철, 정형돈은 단골 출연자였으며 나머지는 매우 유동적으로 채워졌다)들이 욕탕의 자연배수에 맞서 바가지로 물을 퍼내는 도전 과제를 어떻게 수행할 것인지 계획을 세우더니, 정신력을 기른다며 열탕에 들어가질 않나 맹렬하
우울증 치료제를 돌려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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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 환경이 다양해졌고 변했다고들 한다. 하지만 TV 프로그램의 영향력은 여전히 우리의 시청각 문화에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아니, 그 번식력은 더 막강해졌다. 그래서 궁금증이 생겼다. 최근에 뜨거운 화제를 일으킨 프로그램들은 무엇이 있었나. 그 프로그램들의 무엇이 대중의 관심을 뜨겁게 끌어낸 것일까. 특집 ‘TV 다르게 읽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단순히 특정 프로그램에 관한 호불호를 말하는 수준을 넘어 혹은 TV 관계자들의 관습적인 내부 목소리로는 들을 수 없는 그 바깥의 고견들을 모아봤다. 영화평론가 김지미가 <무한도전>을, 문화평론가 이택광이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을, 시사전문지 기자 고재열이 <일밤-나는 가수다>를, 소설가 김중혁이 <다큐멘터리 3일>을, 출판인 이성욱이 <짝>을 읽는다! TV를, 다르게, 읽는다!
당신의 TV는 텍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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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리의 I AM
1. 가장 듣기 좋아하는 말은 [예뻐졌네]이다.
2.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어머니]다.
3. 신체 부위 중 가장 자신있는 곳은 [목]이다.
4. 가수가 되지 않았다면 [연기자]가 되었을 것이다.
5. 지금 당장 생각나는 사람은 [친구]이다.
6.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아이스크림>]이다.
7. 살면서 가장 크게 울었던 때는 [엄마한테 혼났을 때]다.
8. 함께 영화를 찍어보고 싶은 사람은 [안성기 선배님]이다.
9. 소개팅 자리에서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면 [정색하겠]다.
10. 다시 태어난다면 [나]로 태어나고 싶다.
★ 만일 세상에 있는 ‘상큼함’을 표현하는 수사를 전부 합친 말이 있다면 아마도 그건 ‘설리’가 될 것이다. 딱 그 나이의 소녀만이 가질 수 있는 싱그러움을 가득 안고 설리는 나비처럼 걸어 들어왔다. 굳이 햇수를 따지자면 데뷔 8년차의 프로지만, 혹시라도 말실수를 할까 싶어 조심스럽게, 가만가만 대답하는 모양새는 그저 풋풋
외유내강의 미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