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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가토는 음과 음 사이를 부드럽게 연결하는 것을 뜻하는 음악 용어다. 권여선이 15년 만에 내놓은 장편 <레가토>는 사라진 여자 오정연에 대한 기억을 찾고자 과거 30여년의 이야기를 쉼없이 이어간다. 이야기는 1980년 광주항쟁 때 돌연 자취를 감춘 오정연의 행방을 그녀의 동생 하연이 30년이 지난 뒤에야 좇으며 시작된다. 그녀의 행방에 대한 첫 단서는 오정연이 사라졌던 30여년 전 존재했던 전통연구회 서클 카타콤에 있다. 표면적으론 전통연구회이지만 독재타도를 외치던 젊은이들이 모였던 그곳에 주인공 박인하와 사라진 여자 오정연이 있었기 때문이다. 30년이 지난 뒤 당시 서클의 회장이던 박인하는 의원이 되었고 그를 따르던 선후배들도 모두 한자리씩 하며 옛 기억은 그저 추억이 된 지 오래다. 하지만 하연이 등장해 오정연에 대한 수소문을 하면서 그들은 과거의 기억을 다시 맞춰보기 시작한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그들이 맞춰본 기억의 조각들은 ‘레가토’란 용어처럼 부드럽게 이어지
[도서] 아팠던 시간을 위한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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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독의 영화노트] <멜랑콜리아> 삶에 대한 기대 혹은 미련
[올드독의 영화노트] <멜랑콜리아> 삶에 대한 기대 혹은 미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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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판(派飯)은 농가로 내려온 간부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것을 뜻하는 중국어다. 영화의 배경인 중국 쓰촨성에 위치한 도석촌은 파이판을 의무가 아닌 이웃간의 정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작은 마을이다. 주민들의 관심사는 30년간 도석촌에 머물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장 선생(이바오안)이 오늘은 어느 집에서 끼니를 해결할지에 쏠려 있다. 어느 날 중국 정부는 파이판이 농가에 부담을 준다는 이유로 금지하고 대신 장 선생의 식사를 책임질 조리사(런린)를 파견한다. 장 선생의 끼니를 챙겨주는 것이 삶의 기쁨이었던 마을 사람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고 조리사를 무시한다. 도석촌에 살고 있는 소청의 어머니와 재혼할 목적으로 파견을 자청한 조리사는 마을 사람들의 홀대에 속상해하지만 그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한다. 한편 3년만 시골학교에 머무르면 도시 취업이 보장된다는 말에 한 선생(한후이량)이 도석촌에 내려온다. 한 선생은 따분한 생활에 쉽게 마을과 아이들에게 정을 붙이지 못하고, 엄마가 조리사와 재혼하면 자신을
소박함의 맛을 지키다 <파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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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부안의 모항에 도착한 프랑스 여자 안느(이자벨 위페르)로부터 시작되는 세편의 단편영화가 있다. 첫 번째의 파란 안느는 유명한 감독이고, 두 번째의 빨간 안느는 한국 감독과 몰래 사귀고 있는 유부녀고, 세 번째의 초록 안느는 한국 여자에게 남편을 뺏긴 이혼녀다.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채 원주(정유미)의 펜션에 머물고 있는 그녀들은 매번 비슷한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고, 원주에게 우산을 빌리고, 등대를 찾아 해변으로 나가고, 날이 맑으나 궂으나 수영 중인 안전요원(유준상)을 만나 불통이지만 경쾌한 대화를 나눈다. 그 세 가지 조화를 열고 닫는 것은 원주다. 보증을 잘못 선 엄마와 모항에 피신 와 있던 그녀는 “무료하고 불안해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그녀의 이야기 안에서 모항이라는 공간과 많지 않은 사람들과 크지 않은 사건들을 통과해 안느는 이제껏 가보지 않은 길을 향해 떠나게 된다.
설긴 줄거리로 <다른나라에서>를 소개하자니 허망하다. 때로는 꿈이 영화를 포함하
가보지 않은 곳 <다른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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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은 엄마에게”로 시작하는 영민의 내레이션이 깔리면 시장에서 장을 보고 집에 돌아와 혼자 물에 밥 말아먹는 엄마 화정(장시원)의 모습이 비친다. 설을 맞아 화정의 자식들이 모두 친정집에 모인다. 제일 먼저 도착한 건 셋째아들 영민의 부인과 두명의 손자. 이어 화정의 세딸들이 남편과 자식을 대동하고 속속 집에 도착한다. 정성스레 설날 아침 차례를 지내고 윷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내는 가족들. 그러나 집안의 장남 영민의 부재는 이들에게 갈등과 오해와 상처를 남긴다.
<엄마에게>는 극영화지만, 종종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가족간의 미묘한 위계, 설날 풍경에 대한 묘사가 사실적이어서 그렇다. 차례를 지내며 장손주에게 술 따르는 법을 재차 확인시키는 할아버지, 고스톱 판을 벌이며 점 100이냐, 점 200이냐 결정하는 남자들, 부엌에서 자식들 싸줄 음식을 챙기는 엄마, 세뱃돈이 오가는 모습 등이 놀랍도록 꼼꼼하게 지점들을 굳이 꿋꿋이 묘사하는 이유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엄마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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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팀 버튼이 동화를 차용해 영화를 만든다면, 그건 <백설공주>가 아닐까 내심 생각해왔다. “눈처럼 하얀 피부, 앵두처럼 붉은 입술, 칠흑 같은 검은 머리”를 지닌 백설공주는 팀 버튼이 사랑해 마지않는 창백한 미녀이고, 기묘한 일곱 난쟁이가 살고 있는 숲은 팀 버튼 세계의 원천인 고딕적인 상상력을 마음껏 펼칠 수 있을 공간이라 여겨졌다.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루퍼트 샌더스의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은 그림 형제 동화의 어둡고 잔혹한 에너지를 만끽하고 싶었던 관객의 기대감을 얼마간 충족시키는 작품이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 그리고 <백설공주>를 계승한 수편의 애니메이션과 영화가 덧씌운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이 선택한 장르는 ‘역사 판타지’다. 왕비(샤를리즈 테론)가 허름한 마차에 일부러 갇혀 있다가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다음 왕국의 습격을 명하는 장면은 트로이 전투를 연상케 하고,
그림 형제 동화의 잔혹한 에너지 <스노우 화이트 앤 더 헌츠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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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욕은 넘치나 경험 부족으로 요령이 없고,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니는 신참 요원. 신태라 감독의 전작 <7급 공무원>(2008)의 주인공 재준(강지환) 말이다. <7급 공무원>의 웃음포인트 중 하나는 재준이 국가정보원 요원과 어울리지 않는 실수를 연발할 때였다. <차형사>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하나는 이번에도 주인공 차철수(강지환) 형사 캐릭터에 기댄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캐릭터와 이야기만 다를 뿐 <7급 공무원>의 이야기 문법을 그대로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차형사> 역시 영화의 초반부에는 캐릭터로 웃음을 유발하다가 남녀주인공의 로맨스를 형성한 뒤, 영화의 마지막에 임무를 완수하고 남녀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더러워도 이렇게 더러울 수가 없다. 저런 몸으로 어떻게 범인을 검거할 수 있을까 싶은 D라인 몸매,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도전! 슈퍼모델’ <차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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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영상은 끝까지 봐야 한다.” ‘미확인 동영상’이 재생되면 뜨는 문구다. 그런데 정작 무서운 건 동영상의 내용이 아니다. 동영상을 끝까지 보라는 말에는 곧 동영상이 끝나는 순간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는 암시가 담겨 있다. 세희(박보영)는 동생 정미(강별)와 단둘이 산다. 부모를 대신해 가장 역할을 하는 세희는 고3 수험생 정미가 공부는 하지 않고 인터넷에 동영상 올리는 일에만 열중하는 게 영 마뜩지 않다. 한편 세희의 남자친구 준혁(주원)은 사이버수사대에서 일한다. 사소한 문제로 세희와 사이가 멀어진 준혁은 세희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동생 정미를 만난다. 정미는 언니와의 관계 회복에 협조하는 대신 일종의 ‘거래’를 제안하고, 준혁은 폐쇄된 사이트에서 동영상을 다운받아 정미에게 넘긴다. 준혁이 건넨 동영상에는 한 소녀가 인형을 통해 저주를 거는 강령술 장면이 담겨 있다. 그런데 이 영상은 재생될 때마다 새로운 영상으로 변한다. 정미는 동영상을 열어본 뒤 죽음에 대한 공포로 점점 미
마녀사냥에 대한 경고 <미확인 동영상: 절대클릭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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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봄날은 간다>의 유지태가 기념비적인 대사를 던지던 순간, 몇몇 관객은 철없는 질문이라는 듯 코웃음을 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사랑은 유통기한이 짧은 우유처럼 쉬이 변한다. 수많은 멜로영화들이 끈질기게 반복적으로 변해가는 사랑을 탐구하는 이유가 뭐겠는가. ‘그 뒤로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happily ever after)로 끝나는 디즈니의 고전 만화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블루 발렌타인> 역시 봄날이 가는 이야기다. 신디(미셸 윌리엄스)와 딘(라이언 고슬링)은 부부다. 둘은 서로를 사랑하는 게 틀림없지만 불꽃이 점점 꺼져가는 것을 누구나 감지할 수 있다. 관계의 종말을 직감한 딘은 억지로 신디를 데리고 교외의 모텔로 간다. 마치 1970년대 텔레비전용 SF시리즈의 싸구려 세트처럼 생긴 모텔 방의 이름은 ‘미래’다. 사람들이 꿈꾸는 미래란 그토록 보잘것이 없다.
데릭 시엔프랜스 감독은 봄날이 가는 과정 사이
봄날이 가는 이야기 <블루 발렌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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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제작 청년필름(주) / 감독 김조광수 / 출연 김동윤, 류현경, 송용진, 정애연 / 개봉예정 6월21일
행복한 퀴어영화라는 게 한국에서도 만들어질 수 있을까. 김조광수 감독에게 묻는다면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웃으며 말할 것이다. 김조광수의 장편 데뷔작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은 스스로를 해피 퀴어 로맨틱코미디라고 부르는 영화다. 부모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은 게이 민수(김동윤)와 아이를 입양하고 싶은 레즈비언 효진(류현경)은 위장결혼이라는 꼼수를 찾아낸다. 하지만 바로 옆집에 있는 애인들과의 이중생활이 영원히 완벽하게 흘러갈 리는 없는 법이고, 위장결혼이 흔들리면서 우정과 사랑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해외영화제에서 주목받은 퀴어 단편들의 발랄한 감수성을 김조광수 감독이 어떻게 장편으로 이어갈지 기대해보자. 훈남들의 키스장면을 거대한 스크린으로 볼 수 있냐고? 당연하지.
[Coming soon] 해피 퀴어 로맨틱코미디 <두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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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돈의 맛>을 보면 비행기 화장실에서 섹스를 하는데 만약 걸리면 어떻게 되나요?
A. 아무리 스릴이 좋아도 비행기 화장실이라니, 조금 위험해 보이네요. 하지만 이런 스릴을 즐기는 사람이 어찌나 많은지 지상에서 1마일 이상에서 섹스를 하면 가입할 수 있는 클럽도 있다고 하네요. 그래도 무엇보다 위험한 건 이런 행위를 들켰을 때겠지요? 만약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보기 위해 국토해양부 부산지방항공청 포항공항출장소에 근무하는 황병구씨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제가 질문을 던지자 쑥스러운 듯 “허허” 웃던 황병구씨는 “이것 참 애매하다”며 말을 이어 나갔습니다. “일반적으로 보면 풍기문란죄이겠지만 항공안전 및 보안법은 ‘안전’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그들이 낯 뜨거운 행동을 했더라도 승객의 안전에 위해를 가한 것이 아니라면 처벌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그래도 항공안전 및 보안에 관한 법률 제23조(승객의 안전유지협조 의무)에 따르면 승객에게 성적 수치심을 안겨줄
[cinepedia] <돈의 맛>을 보면 비행기 화장실에서 섹스를 하는데 만약 걸리면 어떻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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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씨는 그래도 피가 있고 살이 있는 인간 같더라고요.
=풋. 이 아저씨 웃기는 말씀 하시네요. 사람은 원래 피가 있고 살이 있는 거예요.
-그런 말이 아니라, 그나마 윤 회장댁에서 나미씨가 인간다운 마음을 갖고 있더라는 말씀입니다.
=<돈의 맛> 보셨나봐요? 근데 그게 몇년 전 이야기인 줄 아세요?
-아… 아뇨. 영화적 시간으로부터 시간이 꽤 흘렀나보죠?
=풋. 그거 한 10년 전 이야기예요. 그동안 우리 집안도 많은 게 바뀌었답니다. 아버지 윤 회장님 돌아가시고 몇년 뒤에 엄마인 백금옥 여사도 더 젊은 집사랑 자다가 복상사로 돌아가셨어요. 소식을 듣고 뛰어가봤더니 어찌나 행복한 표정으로 돌아가셨는지…. 백금옥 여사다운 최후죠.
-그럼 기업의 비즈니스는 누가 맡고 있나요.
=할아버지가 다시 회장직을 맡으셨어요.
-헉. 할아버님이 아직도 살아 계신다고요?
=그분은 아마 저보다 오래 사실걸요. 요즘은 중국에서 총각들 피 사다가 몸속의 피랑 갈아치우고, 가끔
[김도훈의 가상인터뷰] 재벌 떡볶이의 맛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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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페스티벌이라는 건 종종 상상과는 다르게 마련이다. 뽀송뽀송한 잔디밭에서 좋아하는 밴드의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며 노는 게 전부는 아니다. 화학약품으로 분변을 처리하는 간이 화장실은 푹푹 찌는 태양 아래서 오묘한 냄새를 발산한다. 비라도 올라치면 스테이지와 스테이지를 이어주는 길은 곤죽이 되기 마련이다. 숙소는 부족하고, 겨우 숙소를 구해도 가격은 평소의 두세배가 넘는 바가지고, 그렇게 바가지를 쓰고 숙소를 구해도 예닐곱명의 냄새나는 친구의 친구들과 방을 함께 써야 한다. 그럴 때면 근방의 근사한 콘도를 빌려서 자가용으로 왔다갔다하는 사람들이 어찌나 부러운지. 말인즉슨, 록페스티벌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고행 또한 준비를 해야 한다는 소리다. 물론이다. 당신이 음악을 사랑한다면 그 정도 고행은 웃어넘길 수 있다. 돈도 없고 텐트도 없고 자가용도 없고, 무엇보다도 태양 아래 고행을 견뎌낼 재간이 없다면? 당신을 위한 최적의 록페스티벌이 있다. KT&G상상마당시네마음악영화제
[영화제] 뜨거운 태양을 피하며 즐기는 록페스티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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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24일 인도의 국보급 플래이백 가수로 칭송받아온 라타 망게쉬카르가 은퇴를 선언했다. 플래이백 가수란 인도영화에서 주인공 대신 노래를 부르는 전문 가수를 말한다. 열세살이 되던 1942년 영화계에 입문해 장장 70년 동안 활동해온 노가수의 은퇴 메시지는 앞으로 자신이 부른 노래를 사용하게 될 경우 원곡 그대로 사용해 달라는 것이 전부였다. 은퇴 소식이 자신의 첫 노래 스승이자 영화계에 몸담는 계기가 됐던 아버지의 70회 기일에 맞춰 발표된 터라 현지 언론들은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에서 그녀의 음악 인생을 재조명했다. 특히 후배 영화인들은 대선배의 은퇴를 “인도 영화사의 한 장(章)이 끝난 것”으로 묘사하며 존경을 표했다.
사실 대다수 인도 영화사 책들의 영화음악 설명 부분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름이 라타 망게쉬카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0년 동안 만들어낸 진기록들과 함께 플래이백 가수라는 분야가 인도 영화산업에서 확고한 위치를 점하기까지 그녀와 관련된 일들이 그만큼
[델리] 역사 속으로 사라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