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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적자> 9회. 용식이(조재윤)가 조 형사(박효주)에게 물었다. “근디요 조 형사님은 백 형사님(손현주)과 뭔 사이다요? 아 긍께 이게 쉬운 일은 아니지라. 탈옥을 하는데 잘못 도왔다가 커플로 쇠고랑 찰 수도 있는디.” 조 형사는 자신이 이혼을 할 때마다 대신해서 짐을 챙겨다주고 도망간 남편을 잡아다 때려주면서도 한번도 혼낸 적이 없던 백홍석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래서 나도 우리 선배님 편이 돼주는 거다.” 조 형사의 고백에서 뜻밖에도 17년 전, 손현주가 출연했던 <모래시계>가 떠올랐다. <모래시계>에서 손현주는 태수의 탈옥을 돕던 조력자였다. 태수는 동생들이 준비한 컨테이너 안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탈출했다. 손현주는 빈 컨테이너로 경찰을 따돌렸다. 결국 그들을 잡은 경찰이 “박태수는 어딨냐”고 다그치자, 그는 함께 잡힌 동료에게 말했다. “들었니? 형님 무사하시단다.” 어쩌면 손현주라는 배우가 연기할 수 있는 과잉된 남성성은 그 정도였을지 모른
[손현주] 누가 이 남자를 미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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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색은 절대 안 하겠다고 떠들고 다니더니, 결국 <폭풍의 언덕>을 하냐고 주변 사람들에게 조롱당했어요.” 지난 1월 열린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폭풍의 언덕> 상영 전 공개토크에 나선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은 청중을 여러 번 웃겼다. 그녀는 관습적인 대답을 체질적으로 못 견디는 사람으로 보였다. 아놀드는 대뜸 이 영화가 싫다고 말했고 그럼 다른 전작들은 마음에 드느냐는 사 회자의 질문에, 기본적으로 본인의 작품을 다 싫어하는데 <폭풍의 언덕>을 제일 싫어한다고 대답했다. 완성도에 대한 불만이라기보다 영화로 인해 2, 3년 동안 고통, 폭력, 사도마조히즘의 그늘 속에 살아야 했던 스트레스의 표현이었다. 극장의 불이 꺼지기 직전 안드레아 아놀드는 남말하듯 짓궂게 경고했다. “화면을 보고 얼마나 실망하시건 현실 풍경은 그것보다 훨씬 추레했어요. 여러분은 객석에서 두 시간 보면 그만이지만 난 몇주 동안이나 하루에 10시간씩 저기 있었다고요! 그러니까 여러분이
[신 전영객잔] 코스튬 드라마가 옷을 벗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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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의 맛>에서 인상적인 대사는 ‘모욕’이다. 하지만 이 메시지는 너무 직설적이어서 영화적 장치들과 겉도는 것 같다. 임상수 감독은 <돈의 맛>을 “선동하는 영화”라고 했지만 내겐 어떻게 해도 ‘그들’을 이길 수 없다는 절망적인 패배감을 초현실적인 판타지로 승화(이를테면 ‘정신승리’)하려는 이야기 같았다. 이 간극은 오히려 영화의 위치를 환기한다. 감독의 바람과 달리 <돈의 맛>은 형식을 파괴하려는 욕망과 현실에 개입하려는 욕망이 뒤섞이면서 지나치게 예술적인 영화가 된 것 같다.
이 점에서 백현진이 타이틀 <그 맛>을 만들고 불렀다는 것도 꽤 상징적이다. 백현진은 관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대중음악’의 틀을 깨뜨리지만 이 파격 덕분에 다른 곳에서 다른 방식으로 소비된다. 임상수 감독도 그렇다. 요컨대 두 사람 모두 예술적 문제의식과 대중적 감각을 동시에 취하려는 욕망을 가졌다고 본다면, <돈의 맛>은 그 포물선이 비교적 선명하
[차우진의 귀를 기울이면] 예술과 대중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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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레이킹 배드>는 장수 TV시리즈가 되기 위한 황금률들을 거스르고도 성공한 희귀한 경우다. 제1황금률: 시청자로 하여금 주인공을 사랑하게 하라. 매주 같은 시간대에 시청자를 TV 앞으로 불러오려면 그건 당연하다. 한데 <브레이킹 배드>의 주인공 월터 화이트(브라이언 크랜스턴)는 좋아하기 힘든 인물이다. 소심하지만 착한 남자였던 주인공이 아무렇지 않게 폭력을 행사하고 합리화하는 악당으로 변모하는 걸 보고 있으면, 좋아하기보다 싫어하기가 쉽다. <브레이킹 배드>가 어긴 두 번째 황금률은 레퍼토리 구조를 포기하고 마지막 방영일자를 예고했다는 점이다. <ER> <로 앤 오더> 등의 TV시리즈가 20년 동안 시즌을 거듭하며 방영될 수 있었던 것은 레퍼토리 드라마가 가지는 반복 구조를 고수하고 캐릭터에 큰 변화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레이킹 배드>는 다르다. 주인공은 극적으로 변화했고, 해피엔딩은 애초에 배제되었으며
[안현진의 미드 크리에이터 열전] 바이어들은 열정을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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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분명 뭔가 믿는 구석이 있음이 틀림없어.” SBS <추적자>의 방송 일주일 전, 신작 드라마에 대한 기획 회의에서 나는 자못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물론 아는 구석은 개뿔도 없었지만, 어쨌든 뭔가 있어 보였다. 시청률 20%를 넘나드는 MBC <빛과 그림자>가 1위를 굳게 지키고 있고, KBS는 <최고의 사랑>의 홍정은-홍미란 작가에 로맨틱코미디의 황태자 공유는 물론 첫사랑 아이콘 수지까지 캐스팅한 <빅>을 들고 나오는 마당에 마흔을 훌쩍 넘긴 손현주-김상중 투톱의 드라마라니. 같은 40대라도 주말의 F4, SBS <신사의 품격> 미중년들과 달라도 너무 다르지 않나. 물론 연기신용등급으로는 별 다섯개가 모자라지 않은 배우들이지만, 수출용 기획드라마와 흥행용 무리수 캐스팅이 날로 판치는 마당에 연기력만 믿고 이 ‘아저씨’ 드라마를 편성할 수는 없었을 테니 아무래도 그것만은 아닐 터였다.
그런데 정말 뭔가 있었다. 사랑하는
[최지은의 TVIEW] 올해의 나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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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에 관해 검색하다가 그동안 보지 못했던 그의 사진 한장을 발견했다. 사진 속의 그는 이마에 ‘칠생보국’(七生報l國)이라 적힌 머리띠를 두르고 있다. 일곱번 태어나도 조국에 보답하겠다는 뜻이리라. 지그시 눈을 감고 입을 다문 사진 속의 미시마, 더 정확히 말하면 미시마의 잘려나간 머리가 놓인 받침대에는 ‘1’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다. 그것으로 보아, 아마 경찰에서 증거물로 촬영한 사진인 모양이다.
냉소를 낳은 엽기 쿠데타
1970년 11월25일. 미시마 유키오는 자신이 조직한 사병조직 ‘방패회’(楯の) 멤버들과 함께 도쿄에 있는 자위대 사령부에 난입한다. 자위대 간부를 인질로 잡은 뒤, 그들은 인질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자위대 병사들을 모아달라는 요구를 한다. 요구대로 병사들이 모이자, 그는 난간 위로 올라가 건물 앞의 병사들을 향해 쿠데타로 천황제를 부활시키자고 선동한다. 이 황당한 요구에 자위대 병사들은 그저 야유와 냉소와 모욕으로 응답할 뿐이었다.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죽음 앞의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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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동안 여기저기서 들었던 최신가요 중 한곡을 고른 다음 내 얘기로 살을 (많이) 붙이고 이런저런 (잘못된) 개그로 양념을 가미하는 것이 ‘최신가요인가요’의 핵심인데, 지난 일주일 동안은 가요를 거의 듣지 못했다. 새 장편소설 쓰기에 돌입했고, 소설 속에 오페라 아리아가 자주 등장하는 바람에 일주일 내내 아리아만 듣고 살았다. 아리아만 듣고 살았더니 대화를 나눌 때도 노래로 말을 하고 싶어진다. ‘오, 편집자님이여, 마감의 경계는 어디까지오! 마감을 지키려 애쓰는 내 마음을 정녕 아시는지. 마감은 멀었건만 까닭도 없이 한숨짓고 가슴 조이는, 이 마음.’
‘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의 연재가 끝나면 ‘김중혁의 최신아리아리오!’로 연재를 이어가자고 제의해봐야겠다. 한주가 끝나갈 때쯤 텔레비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끝내주는 노래를 발견했다. 내가 오랫동안 꿈꾸던 프로그램을 Mnet에서 막 시작했는데, <Show Me the Money>라는 랩 오디션 프로그램이었다. 오
[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 아직은 없는 노래, 하지만 좋을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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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요원으로 살다 보면 대단히 호사스러운 순간이 찾아온다. 부호인 척 가장하는 임무를 맡을 때다.’ 이언 플레밍의 소설 <죽느냐 사느냐>의 첫 구절은 사람들이 제임스 본드에 열광하는 진짜 이유를 말해준다. 007 시리즈가 재미있는 것은- 특히 영화보다 소설이 더 그러한데- 그가 맡는 사건이 흥미로워서라기보다는 그의 라이프 스타일이 흥미롭기 때문이다. 여타의 다른 비밀 요원, 혹은 필립 말로 같은 탐정의 이야기가 재미있는 이유도 그와 비슷하다. 그들에게는 보통 사람들이 절대로 따라할 수 없지만 너무도 따라해보고 싶은 스타일이 있다. 그들은 대개 명석한 두뇌와 날렵한 육체를 동시에 지녔으며, 직업이 있지만 자유로이 여행을 다니고, 돈에 연연하지 않지만 거부들의 사건에 연루되기에 질 좋은 옷을 입고, 최고급 요리와 술을 즐기며, 최고의 미녀들과 얽힌다. <맨 인 블랙>의 비밀 요원들은 외계인, 특히 변태인 외계인들하고만 싸우는 것이 임무이니 그런 면에서 사정이 좀
[fashion+] 튀어야 제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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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백지영이 데이트 비용을 전부 자기보다 경제력이 허약한 9살 연하 애인 정석원에게 내게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더 잘 버는 자기가 낼 수도 있지만, “버릇 들이면 안되겠다” 싶어서 일부러 단 한번도 안 냈다나? 오, 놀랍다. 이것이 바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더 빡세게 새끼를 훈련시키는 어미 사자의 교육법이다. 그런데 웃기는 건 그게 남자 기를 살려주고, 남자를 더 남자답게 보일 수 있도록 하는 처사 아니겠냐고 은근 두둔하는 여자들의 반응이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다. 마음에 맞는 여자 셋, 남자 둘이 모여서 마음껏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이번에도 술값을 B가 냈다. 엥 또? 왠지 찜찜하다. 회사에 와서 그 얘기를 했더니 후배가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닌가? “그냥 놔둬요, 걘 후배지만 남자잖아요. 전 그래서 B가 좋은걸요. 걘 자기 애인이 아니래도 여자한테 돈을 쓰게 하지 않아요. 이번엔 내가 내겠다고 하면 막 화를 내는
[SO WHAT] 남자, 그까이 거 던져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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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1995 단편 <이중주>로 등단
1996 장편 <새의 선물> 발표, 소설집 <타인에게 말걸기> 발간
1998 단편 <아내의 상자>로 이상문학상 수상
장편 <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 발표
2000 <내가 살았던 집>으로 한국소설문학상 수상
2001~현재 소설집 <마이너리그> <상속>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장편 <비밀과 거짓말> <소년을 위로해줘>,
산문집 <생각의 일요일들> 발표
뙤약볕이 내리쬐던 주말 오후, 은희경의 일곱 번째 장편소설 <태연한 인생>의 마지막 장을 덮고 산책을 나섰다. 해를 피해 그늘로 걷는데, 서늘하게 식은 공기가 소설의 온도와 비슷했다. 초라한 비유를 동원하자면, 은희경의 소설은 이따금씩 걸어 들어가고 싶은 그늘 같다. 그곳에서 생의 뜨거운 불덩이들은 냉각작
[은희경] 고독을 입고 나는 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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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추적자'는 어린 딸이 교통사고로 죽고 그 충격에 아내까지 잃은 형사가 딸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파헤쳐가는 과정을 담은 드라마이다.
[영상인터뷰] 추적자 ‘손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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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의사의 딸인 조세핀(이실드 르 베스코)은 결혼을 앞두고 있다. 어느 날 그녀가 사는 마을에 떠돌이 청년 티모데(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가 나타난다. 그는 조세핀을 보고 한눈에 반해 귀머거리 행세를 하며 그녀의 집에 찾아간다. 조세핀의 아버지는 그를 불쌍히 여겨 잠자리를 제공하며 돌봐주지만 조세핀은 티모데를 수상하게 생각하며 거리를 둔다. 티모데는 그런 조세핀에게 최면을 걸고 그녀를 강간한 뒤 납치한다. 조세핀은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에 공포를 느끼지만 티모데와의 동행이 계속될수록 자신들의 관계가 단순히 최면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사랑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결국 티모데는 경찰에 붙잡혀 법정에 서게 되고 티모데는 무죄를, 조세핀은 유죄를 주장하며 대립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경찰, 그리고 가족조차 둘의 증언을 쉽사리 믿지 못한다.
납치범과 인질 사이에서 사랑이 싹튼다는 이야기는 그다지 신선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감독 브누아 자콥은 최면이라는
사랑과 최면의 관계도 <딥 인 더 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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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애니메이션의 대표 소녀들은 대부분 마녀다. 그들은 시간을 뛰어넘고 신들의 세계를 여행하며 하루아침에 노파가 되기도 하고 숲의 정령이기도 하다. <모모와 다락방의 수상한 요괴들>의 모모(이선) 또한 그들의 연대기에 기록될 법한 소녀다. 아버지를 여의고 엄마를 따라 친적들이 사는 외딴섬으로 이사 온 모모는 다락방에서 한권의 그림책을 발견한다. 책을 봉인한 끈을 풀어놓자 어느 날부터 다락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섬 밖으로 나가는 엄마를 따라나서는 이상한 형체가 보이기도 하고, 모모가 먹을 간식도 없어지고, 마을에서는 밭에 심어놓은 작물들이 서리를 맞는다. 드디어 모모 앞에 정체를 드러낸 이들은 세명의 요괴다. 모모가 봉인을 풀어준 덕분에 그림책에서 탈출했다는 이들은 모모의 눈에만 보인다.
<모모와 다락방의 수상한 요괴들>은 이들의 좌충우돌 동거담이다. 우스꽝스러운 형체의 요괴들이 벌이는 갖가지 사고와 사건, 이를 무마하려는 모모의 활약이 웃음의 포인트다
요괴들과의 좌충우돌 동거담 <모모와 다락방의 수상한 요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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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꿈꾸는 가장 아름다운 시대는 언제인가. 약혼녀와 함께 파리에 여행 온 할리우드 작가 길(오언 윌슨)은 스콧 피츠제럴드, 어니스트 헤밍웨이, 살바도르 달리 등이 살던 1920년대가 바로 그런 시대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길은 지금 좀 답답한 현실 속에 살고 있다. 파리에 여행을 오긴 했지만 사사건건 취향이 다른 약혼녀와 그를 좀 무시하는 약혼녀의 부모와 그리고 재수없는 약혼녀의 친구들을 상대하는 것이 피곤하기만 하다. 그러던 어느 밤 자정에 파리의 골목길을 헤매던 길은 놀랍게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자신이 사랑하는 그 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거기에서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등을 만나게 된다. 그런 시간여행이 매일 밤 계속되고 길은 아드리아나(마리온 코티아르)라는 1920년대의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미드나잇 인 파리>는 ‘파리를 사랑하세요’라고 노래하는 우디 앨런의 파리 예찬이다. 노을을 따라 파리 곳곳의 건물과 골목을 비추며 시작하는 영화는 얼치기
파리에 흠뻑 빠지다 <미드나잇 인 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