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객들, 한국영화에 등 돌리나.” 전국 극장 관객 수가 마이너스 성장세로 전환되고, 한국영화 점유율이 5년 만에 최저를 기록했던 2007년 말, <씨네21>이 썼던 기사의 제목이다. 기사에 대해 어느 독자가 올린 댓글이 뼈아프다. “‘한국’영화가 아니라 ‘재미없는’ 영화에 등 돌리는 거겠죠…,”(pp95xx님) 5년이 지난 2012년 상반기인 지금, 한국영화에 대한 관객의 호응은 10년 전을 떠올릴 만큼 폭발적이다. 한달에 한편 이상의 영화를 보고, 영화 뉴스를 눈여겨보는 이라면, 올해 1월부터 최근까지 화제에 오른 한국영화를 ‘꽤 많이’ 떠올릴 것이다. 5년 전, 재미없는 한국영화에 등 돌렸던 관객이 다시 돌아서고 있는 현상에 대해, 그리고 2012년 상반기에서 어떤 교훈을 찾을 수 있을지 살펴보았다.
기세당당, 한국영화(1)
-
안느라는 이름의 세 여인이 각자 한번씩 다른 이유로 모항이라는 작은 해변을 찾는 이야기를 옴니버스 형식으로 엮은 홍상수의 영화 <다른나라에서> 중에서 3부에 등장하는 안느는 인근의 통찰력 깊은 스님을 만나 인생 상담을 하다 말고 갑자기 엉뚱한 부탁을 한다. 스님이 안느의 얼굴을 그려주겠다며 꺼낸 만년필을 보더니 그녀는 무턱대고 자기에게 그걸 선물로 달라고 한다. 스님도 좀 놀라고 스님을 안느에게 소개 해준 민속학자는 더 놀라서, 그건 이상한 행동이라며 민속학자가 안느를 나무라지만 그녀는 물러설 기색이 없다. 왜 그 만년필이 필요하냐고 이유를 묻자 안느는 그것으로 무언가 (글을) 쓸 것이라고도 하고 그냥 자기가 원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기의 행동은 결국 “저분(스님)이 그렇게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스님은 결국 만년필을 안느에게 준다. 그게 언젠가 민속학자가 스님에게 주었던 선물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느가 해변으로 홀로 나갔을 때 펜션에 남은 스님과 민
[신 전영객잔] 나라는 나라와 당신이라는 나라의 국경
-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을 시작으로 <황해>와 <화차>까지, 조성하는 2010년부터 지금까지 숨가쁘게 달려왔다. “실질적으로 많은 분들한테 정확하게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였지만 개인적으로는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 시간이었다. <5백만불의 사나이> 촬영이 지난 3월에 끝났으니 세달 가까이 자신을 재정비하며 쉰 셈인데, 그에겐 이런 여유가 참으로 오랜만인 듯했다. 번잡한 스튜디오를 빠져나와 6월의 햇볕이 따갑게 내리쬐는 야외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 그는 도리어 여기자의 피부를 걱정했다. 배우의 피부가 상할까 걱정된다고 하니 “햇빛 볼 시간이 별로 없어서”라는 말을 돌려준다. 촬영장과 행사장과 집을 차로 오가는 게 대부분일 그의 동선을 생각하니 지금 이 순간의 공기, 햇빛, 바람, 풀과 벌레 소리들이 그에겐 그리움의 대상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인으로 돌아가면 한없이 소탈하고 귀여운 아저씨가 되고 마는 조성하지만, 그는 작품
[조성하] 부드러운 카리스마, 조성하
-
<써니>의 촬영장에서 민효린을 만난 적이 있다. 붓으로 그린 듯 오똑한 콧날 때문일까. 새침한 듯 무심한 표정에 틈틈이 끼어드는 천진한 웃음 때문일까. 그녀에겐 주위의 시선을 오래도록 붙잡아두는 매력이 있었다. <써니>의 수지가 그런 인물이었다. 민효린은 그저 강형철 감독이 시키는 대로 수지가 되었다. 그런데 그날 촬영장에서 민효린은 눈물을 흘렸다. 연기가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꼭 1년 반이 지나서, 그 울음의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써니>의 수지는 연기를 못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캐릭터였어요. 강형철 감독님은 수지에게서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게 너무 어려웠어요. 저도 모르게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울기도 했고. 그때 그 현장에서.” <써니>는 민효린의 첫 영화다. 첫 영화의 기억이 민효린에겐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써니>로 자신감을 얻은 그녀는 1년 반 동안
[민효린] 욕심쟁이 우후훗, 민효린
-
-
가장 혹독한 선생님. 오디션 프로그램 <일요일이 좋다-K팝스타> 속 박진영의 모습이다. 다른 심사위원들이 칭찬을 아끼지 않을 때에도, 박진영은 ‘진심’을 지적하고 ‘공기 반, 목소리 반’을 강조하며 지원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제는 상황이 달라졌다. 오는 7월이면 그는 <5백만불의 사나이>의 신인배우로서 관객의 거침없는 심사평을 듣게 될 거다. 문득 짓궂은 질문이 떠올랐다. 박진영은 스스로의 연기에 어떤 점수를 매기고 있을까. “음… 75점? 어떤 친구가 무대 위에 올라와서 아직 실력은 부족하지만 진심을 다해 불렀을 때 75점을 줄 것 같다. 나도 아직 (연기에 대한) 기술적인 부분은 하나도 모르지만 절실하게 감정을 실어 연기했다.”
<5백만불의 사나이>의 최영인은 박진영의 반대말 같은 캐릭터다. 직장 상사에게 충성하고, 로비를 위해 국회의원들과 기자를 ‘모시며’, 가끔은 친구와 조촐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스트레스를 푸는 대기업 회사원. 자유
[박진영] 딴따라의 순정, 박진영
-
박진영은 올해의 신인배우상을 탐내고 있었다. 가수이자 프로듀서인 박진영과 동명이인인 신인배우의 얘기냐고? 아니다. 드라마 <드림하이2>로 연기 신고식을 치른 박진영이 <5백만불의 사나이>의 최영인으로 돌아온다. <5백만불의 사나이>에서 영인은 로비자금 500만달러를 가지고 튄다. 영인과 함께 도망자 신세가 되는 날라리 고등학생 미리는 민효린이 연기한다. 그리고 영인을 필사적으로 뒤쫓는 영인의 직장 상사 한 상무는 조성하가 맡는다. <5백만불의 사나이> 속 세 배우는 마치 ‘지금까지의 제 모습은 깡그리 잊어주세요’라고 말하는 듯 낯설다. 물론 이 세 배우의 조합이 어떤 공기를 만들어낼지도 자못 궁금하다. 여기서 잠깐, 인터뷰 당일 세 배우의 모습을 공개해본다. 민효린이 몸매가 드러나는 드레스를 입고 나오자 박진영이 대뜸 말했다. “효린아, 나랑 사귈래?” 조성하도 거든다. “현장에서도 이렇게 입고 있지.” ‘이 음흉한 아저씨들~’ 싶었지만 민
[박진영, 민효린, 조성하] 기막힌 스캔들
-
언젠가 자기소개를 할 때 “지구 멸망과 부동산에 관심이 많다”고 한 적이 있다. 부동산쪽은 농담이었고 지구 멸망쪽은 진담이었다. 물론 그 종류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처럼 지구가 사라지거나, <혹성탈출>처럼 인류 문명만 소멸하거나, <12 몽키즈>처럼 모든 생명체가 멸종하는 것같이 여러 가지일 것이다. 지구가 쪼개지는 <멜랑콜리아>는 지구 생태계 절멸에 대한 ‘우주적 관점의 리포트’ 같기도 했는데, 우울증 환자라면 이 동시적 사멸이야말로 오히려 위안이었으리란 생각도 든다. ‘나만 죽는 게 아니’라는 진실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하지만 ‘모두 다 죽어버렸으면 좋겠어’란 망상은 탐미적인 영상으로 포장된다.
불가항력적인 종말을 미리 보여주는 오프닝이 특히 강렬한데,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흐르는 첫 8분은 ‘신비롭고 아름다운 과학 다큐멘터리’와도 같은 감흥을 주기도 한다. 지구 멸망에 대한 이 반역적인
[차우진의 귀를 기울이면] 반역적인 괴상한 감각
-
딸이 죽고 정신을 놓아버린 아내가 평화롭던 일상의 환영 속에서 차려둔 세 사람 몫의 식탁. 아내마저 떠나보낸 빈집에서 백홍석(손현주)은 안쪽에 생활 흠집이 가득한 숟가락 두개를 들고 오열한다. 만약 이 숟가락이 반짝거리는 새 소품이라면, 매일 입속을 들락날락하며 끼니를 함께하고 씻고 닦던 가족의 시간도 증발할 테지. 몹시 꼼꼼한 드라마인 SBS <추적자>는 막후인물인 강동윤(김상중)이 대선 출마 선언 뒤 현충원에 참배를 하고 방명록에 글을 남기는 장면의 필체나 카메라의 각도까지 보도화면을 떠올리게 할 정도다. 디테일에 감탄하다 보니 다시 숟가락의 주인, 홍석의 딸 수정에게 생각이 미친다.
같은 차에 연달아 치이는 사고를 당하고 병원에서 의식을 찾는가 싶더니 아버지 친구인 의사가 누군가의 사주를 받고 수정에게 약물을 주입한다. 죽은 수정은 세상을 떠날 수도 없다. 강력계 형사 홍석이 뺑소니범을 법정에 세웠지만 사고를 인지하지 못한 경우에는 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판례와
[유선주의 TVIEW] 선택할 수 있었다
-
새 전셋집을 구해야 했다. 전세가가 너무 올라 대출을 받는 일이 벌어졌다. 가진 게 적을수록 은행에 가면 설움이 깊어진다. 몇 군데 은행을 들러 어렵사리 돈을 구한 날, 하필 <돈의 맛>의 시사에 갔다. 돈다발의 탑이 어지러움을 유발한 첫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감상적이고 싶진 않았다. 그냥 울분이 치밀었던 것 같다. 그 돈다발 중 단 몇개만 필요한 내게, 거기 누군가는 비웃음을 날리고 있었다. 요즘 몇몇 영화제에서 관객과 만나는 중인 김곡, 김선의 <코미디: 다 웃자고 하는 얘기>에는 <돈의 맛>과 정반대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에겐 없는 것투성이다. 일하고 싶은데 한물간 개그맨이 돈 벌 곳은 없고, 니코틴을 흡입하고 싶은데 담배가 없고, 아이를 보육원에 보내야 하는데 돈이 없고, 아이를 달래야 하는데 아내가 없다. 2012년 6월. 한국에는 너무 많이 가진 자와 너무 없는 자가 산다. 이상한 사실은 다수인 후자가 목소리를 죽인 채 산다
[이용철의 아주 사적인 클래식] 프롤레타리아 블루스
-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 사람도 인기척이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문,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했다.”(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배흘림기둥’이라는 용어가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아마 혜곡 선생의 이 구절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왜 우리 조상들은 기둥에 배흘림(entasis)을 주었을까? 유홍준씨는 곰브리치의 말을 인용한다. “(엔타시스 형식을 취한) 기둥들은 탄력성있게 보이며, 기둥모양이 짓눌려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지 않은 채 지붕 무게가 기둥을 가볍게 누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마치 살아 있는 물체가 힘 안 들이고 짐을 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들이 있다. 길을 걷다가, 버스를 기다리다가, 버스를 타고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 무심코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멜로디가 있다. 집을 나서기 전에 들었던 노래이거나 누군가의 휴대전화 벨소리로 들려왔던 노래를 따라 부를 때가 많지만 가끔은 아무런 이유없이 흥얼거리게 되는 노래가 있다. 갑자기 내가 이 노래를 왜 부르고 있지? 싶은, 어쩜 이렇게 정확하게 가사를 기억하고 있지? 싶은, 노래들. 고찬용의 새 앨범(이자 두 번째 솔로 앨범인) <<Look Back>>이 발매됐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내 입은 자동 반사적으로 <거리 풍경>을 흥얼거리고 있다.
대학을 휴학하고 이리저리 놀러다니던 시절, 얼마나 이 노래를 흥얼거렸는지 모른다. ‘회색빛 구름에 싸인 푸른 하늘, 그 속엔 초록색 나무가 보이고 새소리 아름답지요. 하나둘 별이 내리네 눈부시게, 그 속엔 사람들 웃음도 보이고 거리는 밤을 만나네.’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
[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 흥얼흥얼
-
니키(애시튼 커처)는 자타가 공인하는 ‘선수’다. 잘생긴 얼굴에 스타일이 좋은 것은 물론이고, 여자를 유혹하는 법을 꿰뚫고 있어서 노소를 불문한 여자들이 그에게 빠져든다. 하지만 그런 그도 끝내 할 수 없었던 일이 있었으니 정작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 여자를 얻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 그가 할 수 없었던 일이 한 가지 더 있다. 바로 청바지를 멋있게 입는 일이다.
이렇게 말하니 청바지 잘 입는 대단한 비법이라도 소개할 것 같지만, 수많은 청바지를 입어보고 절망하며 깨달은 건 가장 만만히 입을 수 있는 옷인 청바지가 실은 가장 까다롭고 복잡한 옷이라는 것이다.
니키가 영화 내내 입고 나오는 진(Jeans)은 웨이스트라인이 짧아서 멜빵을 풀면 바지가 엉덩이 한가운데에 걸쳐지고, 바짓단은 복사뼈가 살짝 드러나게 접어놓은 스타일이다. 보통 남자들이 흔히 입는 모델도 아니고 웬만큼 키가 크고 다리가 길지 않고서는 소화할 수 없는 디자인이라서 그의 스타일을 여러모로 ‘한수
[fashion+] 청바지는 어쩌다가 까다로운 옷이 됐을까
-
영국의 한국문화원이 올 한해 내내 주최하는 12인의 감독전에 참석차 런던으로 향했다. 한국영화에 관심이 많은 현지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고 런던 시내에 자리한 아폴로 극장에서 <러브픽션>을 상영했다. 상영 전 <러브픽션>의 유머를 영국인들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하는 걱정도 있었는데 의외로 많이 웃고 진심으로 즐겁게 보는 듯해 가슴을 쓸어내렸다. 상영 뒤에는 오랫동안 아시아영화 전문가로 명성이 높았던 토니 레인즈의 사회로 질의 응답하는 시간도 가졌다. 영국 관객은 배우 하정우와의 작업이 어땠는지 궁금해했고 영국에서 촬영한다면 어떤 배우를 쓰고 싶은지, 한국에서 영화는 어떤 과정으로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물어왔다.
주말에 두번 다시 보기 힘든 행사가 열린다는 말에 런던에 며칠 더 머물기로 했다.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 60주년을 축하하는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가 시내 곳곳에서 벌어졌다. 거리에는 수십만장의 영국 국기가 내걸리고 상점들은 할인 행사를 하고 크
[SO WHAT] 여왕 만세?
-
요즘 제작 중인 다큐멘터리는 40년대 해방 전후의 내용을 주제로 하고 있다. 그 덕에 때늦은 역사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이게 정말 보통 일이 아니다. 워낙 배경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어떤 자료든 한줄 읽어내려가다 보면 새롭게 찾아야 할 인물이나 사건이 꼭 하나둘씩 등장하는 식이다. 정규교육과정에서 내가 근현대사에 대한 정보를 얼마나 접하지 못했는지 피부로, 아니 뼛속 깊이 체감하고 있다.
하지만 나를 서글프게 하는 건 단지 나의 무식함만은 아니다. 오히려 조금씩 더 유식(?)해질수록 해방 전후의 대한민국의 상황이 지금의 현실과 너무나 닮아 있다는 바로 그 점이 나를 가장 서글프게 만든다. 아니 어디 지금의 현실만 그렇겠는가? 해방 이후 60여년간의 우리나라 사회는 당시의 모순과 굴레를 그대로 간직한 채 계속 같은 상황을 반복하고 있다. 도대체 몇 번째 매트릭스이고 몇 번째 네오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매트릭스>를 떠올리니 ‘스미스’가 생각이 났다. 모든 대
[김진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오래된 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