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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글이 어렵다. 그래서 멋있다. 책을 펴보자. 엄청난 용어들이 다발로 튀어나온다. 분자, 역능(puissance), 욕망하는 기계, 횡단, 분열, 유목민, 무엇보다 소수. 이 단어들은 소위 후기 구조주의라 일컬어지는 라캉, 푸코, 알튀세르, 베냐민, 라이히(그렇다. 성적 에너지가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그 미친 정신분석학자!)의 개념들을 확장해서 극복하려는 의지가 담긴 개념이라고 한다. 그 어려운 책 <천개의 고원>으로 유명한 들뢰즈도 비슷한 단어들을 나열한다. 가타리는 그 책의 공동저자이기도 하다.
어려워서 멋있는 것도 있지만, 단어들만 모아놓고 자세히 살펴보면 혁명적으로 보인다. 전체가 아니라 부분, 인간이 아니라 기계(유물론적 관점에서), 정주행이 아니라 횡단, 정착민이 아니라 유목민, 다수가 아니라 소수. 뭔가 삐딱하다. 그렇다. 가타리가 들뢰즈와 함께 (혹은 따로) 주장하고 싶은 것은 미시정치학이다. 사회를 움직이는 힘을 거대한 전체로 사유하
오직 분열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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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오늘도 심각한 영화 몇편을 보았으며, 그에 부응하듯 심각한 고민을 몇번 했으며, 그에 근거해 언젠가 배운 몹시도 현학적인 개념 몇개를 떠올려보았으며, 그를 인용할 수 있는, 남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생각할 수 없는, 최소한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생각 좀 해볼 수 있는, 전대미문의 시나리오와 이미지를 생각해냈다. 그래, 이게 성장이다… 흡사 단세포생물에서 고등생물로, 그 뇌의 주름이 더욱 촘촘해지고 신경계가 더 복잡해지듯이, 난 오늘 하루 성장한 것이다.
…라고 페이크. 성장은 신화였을지도 모른다는 공허감이 갑자기 밀려온다. 어려운 길로 시나리오가 그려지고, 좀더 복잡한 그림으로 이미지가 진화해나갈 때, 그리고 그와 함께 공허가 밀려오는… 이러한 비상사태에 대비해서, 마침 난 몇권의 만화책을 비치해두었다, 주도면밀한 복화술 같으니라고. 기억을 더듬어보면 모두 다 빛을 발한다. 길창덕, 오원석, 박수동. 그래, 이 공허감을 달래기 위해 내가 돌아가봐야 할, 내 최초의 ‘영화’는 박
국딩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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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1786년 37살 때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떠났다기보다는 도피했다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당시 괴테는 삶의 첫 번째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 바이마르공국의 존경받는 공직자이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유명 작가, 그리고 여성들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던 사교계의 유명 남성이었다. 24시간도 모자랄 일정이 그의 하루를 다 채웠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당분간 놓고 싶었다. 시간의 억압에서 벗어나려고 간 곳이 바로 이탈리아이다.
지금도 유럽인들은 알프스만 넘어가면, 곧 이탈리아에 도착하면, 공기부터 다르다고 말한다. 자유롭다는 뜻이다. 과거에도 물론 그랬다. 괴테는 이탈리아의 북부 베로나에 도착한 뒤, 가르다 호수 주변 풍광의 장관에 넋을 잃었고, 무엇보다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밖에 나와 앉아 있는 태평한 사람들의 태도에 매혹됐다. ‘모범생’ 괴테는 도착하는 도시마다 미술관과 유적지들을 방문하여, 걸작들의 품위를 <이탈리아 기행>에
여행, 망각하고 탈주하고 회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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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작정하기로는 ‘문자가 중개해준 이미지와의 잊지 못할 첫 경험’이라는 면에서 나와 동세대의 유년 시절에 말 못할 실존적 고민과 죄의식을 함께 드리웠던 당대의 유명 도색 서적 한권을 추억하려 했지만 현재 구할 수 없는 책은 제외라는 조건이 붙어 그러지 못하게 되자 이상하게도 거의 정반대의 성격처럼 보이는 이 책이 문득 떠올랐다. 도색과 고독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 책의 제목은 <거대한 고독>이고 지은이는 프랑스 작가 프레데릭 파작이며 일종의 그림책이다.
역자의 말에 의하면 지은이는 <고독의 발명가, 마틴 루터> <사랑의 슬픔, 아폴리네르> <유머, 제임스 조이스> 등도 펴냈다고 한다. 크고 깊은 추상적 문제를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의 세계를 면밀히 탐색하여 통찰해나가는 타입인가 보다.
<거대한 고독>에서는 두명의 작가 니체와 파베세와 이탈리아의 도시 토리노를 하나의 몸으로 보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니체에
자기만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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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책이라. 이것은 사실 오답이 없는 질문이다. 스크린은 네모난 저수지라서, 웬만한 지류는 그리로 흘러 들어간다. 차라리 영화 보기에 일생 도움이 안되는 책을 묻는 편이 쉽다. 원작 없는 흥행영화를 급히 소설로 개작한 ‘시네마 문학’이 즉각 떠오른다. 이 책들은 대개 해당 영화를 보기 전에 읽으면 스포일러고,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읽으면 “원래 영화라서 다행이야”라고 한숨을 내쉴 확률이 70%를 웃돈다.
우선 연표와 지도책은 항상 긴요한 영화 참고서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 역시 지구라는 행성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분명 나를 극장으로 밀어가는 힘은 어린 시절 질릴 줄도 모르고 지구본을 하염없이 돌려보던 호기심과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대학 진학 무렵 나는 역사를 전공으로 택했는데, 2, 3년이 흐른 뒤 내가 상상했던 역사학의 재미는 영화의 그것에 가깝다고 멋대로 결론짓고 영화 잡지에 이력서를 냈다. 그런데 최근 영화와 화법이 비슷한 역사서와 마주
시네마로 가는 백만 시점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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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이 책을 내게 권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아하다. 몇년 전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뒤적이다가 만난 콘라트 로렌츠(1903∼89)라는 동물학자의 이름에 갑자기 이끌렸고(이상한 일은 가라타니가 그를 칭송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이며 1949년에 첫 출간된 <솔로몬의 반지>를 샀다. 그 책을 읽는 동안의 행복감은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책을 사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것도 <솔로몬의 반지>가 처음이었다.
이 책을 사랑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그건 콘라트 로렌츠가 위대한 인간이어서도 아니고 이 책이 인류의 위대한 지혜를 담고 있어서도 아니다. 사실을 말하면 로렌츠는 한때 나치의 지지자였고 그 사실을 끝내 시원스레 해명하지 않은 채 그의 생을 면밀히 조사한 전기 작가들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로 남겨두었다. 그토록 동물을 사랑한 사람이 어떻게 나치즘에 동조할 수 있었을까, 라는 수수께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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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과 느긋함, 그 진귀한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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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가을 우리가 해온 영화책 특집이 영화로 가는 지름길을 알리는 일이었다면, 이번 봄에는 수많은 갈래의 우회로로 들어서보고 싶었다. 언뜻 영화로 귀착되지 않을 것 같은 그 미지의 행로 위에서 영화와 더 애틋한 만남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씨네21>의 주요 필진 8인에게 영화와 무관해 보이지만 실은 영화를 보거나 영화에 관한 글을 쓸 때 영화책보다 더 요긴하게 활용해온 ‘비’영화책을 공개해달라 청했고, 20여권의 책이 모였다. 그 목록을 붙여보니 하나의 무질서한 독서 노선도가 만들어졌다. 어느 역사가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동물원에서 내릴 수도, 박물관을 구경하다 생소한 철학자의 뇌구조도를 입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길을 잃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길을 잃기 위해 나선 여행이니까. 무언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잘 헤맬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믿는다면, 이 8인의 글을 지도 삼아 지금부터 조금은 무모한 지적 여정에 나서보자.
영화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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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조한 성적과 호의적이지 않은 평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내게 영감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아름답고 우아하며 또한 삶과 죽음의 위협에도 영속성을 쟁취하는 사랑에 대한 영화. 아 그러니까, 사랑.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세계관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순환하는 삶, 거기에는 문이 하나 있을 뿐이라는 믿음, 우리는 어째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에 대한 질문. 그 각성이 영화를 밀고 나간다. 이때 음악은 그 주제이자 방법론이면서 내러티브의 일부로 자리한다.
워쇼스키 남매와 공동으로 연출한 톰 티크베어는 그가 속한 영화음악 집단인 페일3(Pale3)와 스코어를 완성시켰다. 비비언 에어스가 “바로 이거야! 내가 꿈에서 들은 음악!”이라 외치는 테마는 순환구조로 반복되며 우주의 경이로운 프로젝트를 떠받친다. 피아노가 만드는 아름다운 테마 뒤로 관악기와 현악기가 수줍게 끼어드는 구조는 긴장보다 이완에, 투쟁보다 평화에 가깝다. 사랑을 지키기 어려운 시대에 고난을 나누고 미래를 꿈꾸는
[차우진의 귀를 기울이면] 죽어도 사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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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베이컨의 TV 데뷔작이 된 <더 팔로잉>(<FOX>)을 보고 있으면, 과연 이 TV시리즈가 미국의 공중파 채널에서 방영되는 것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잔인하기 때문이다. 파일럿에서만 4번의 살인장면이 등장했고 대충 얼버무리기는커녕 어떤 흉기로 어떻게 살해하는지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HBO>나 <Showtime> 같은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되는 TV시리즈와 다르게 미국의 공중파 채널은 표현 수위를 엄격하게 지키며 언제나 법이 승리하는 그야말로 안전한 내용의 프로그램이 방영된다. 한데 그런 기준에서 보자면 <더 팔로잉>은 잔인한 것도 그러하거니와 에피소드 8편이 방영된 지금까지 계속해서 악인이 승리하는 것도 공중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전개가 아니기에 충격적이다. 더욱이 뱀파이어도 좀비도 아닌, 회계사, 교사, 아버지, 어머니 등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인정받고 싶다”는 바람에서 저지르는 살인이다보니 유혈이 낭자한
[안현진의 미드 크리에이터 열전] 폭력의 전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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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드라마에서 극적인 상황과 양식적인 표현을 걷어낸다면 뭐가 남아 있을까?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에서 추측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이나 맥락이 충분했던가? 같은 한국인이니까 읽어낼 수 있는 뉘앙스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JTBC 드라마 <세계의 끝>을 보면서 깨달았다. 극적인 상황의 일차적인 감정에 치중하다 보니 삭제되고 또 눈감게 되었던 리얼리티의 쾌감을. 배영익의 소설 <전염병>을 원작으로 한 <세계의 끝>은 북태평양 베링해에서 명태잡이 조업을 하던 원양어선 문양호가 귀환 도중 기관고장으로 인해 침몰하고 선원 어기영을 제외한 129명의 선원이 실종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 뒤 어기영과 접촉한 인물들이 차례차례 원인 모를 바이러스로 죽어가고, 질병관리본부는 월면을 닮은 괴바이러스를 ‘M바이러스’라 명명하고 감염자를 추적한다.
<세계의 끝>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바이러스 재난에 대응하는 절차와 시스템 안의 인간을 대단히 성실하게 짚는
[유선주의 TVIEW] 안판석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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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 때 아버지가 나를 국립중앙박물관에 데려간 적이 있다. 당시에 박물관은 덕수궁 석조전을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분위기가 한적했다는 것 빼고는 거기서 뭘 봤는지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단 하나의 기억이 있다. 그것은 박물관에 전시된 석조 불상의 무릎 위에 수북이 쌓여 있던 지폐와 동전이었다. 그 영상이 아직까지 머리에 생생한 것을 보면, 어린 나이에도 그것이 매우 기이하게 여겨졌던 모양이다.
세계의 개시와 붕괴
오늘날 우리가 ‘작품’으로 감상하는 조각들은 대부분 과거에는 종교적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신전이나 사원과 같은 건축의 일부가 되어 그 안에서 종교적 기능이 요구하는 장소의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근대 이후 한편으로는 보존의 필요에 따라,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의 목적으로 신상들이 박물관으로 옮겨지면서, 조각들은 ‘지금, 여기’라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신이 없는 신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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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트레일러’(honest trailers)는 영화의 단점과 놀림거리까지 망라한 예고편 패러디로 ‘스크린정키스’ (이용자명 screenjunkies, www.screenjunkies.com) 사이트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표를 산 다음에야 대사가 없다는 걸 알게 되리라”고 시작하는 <레미제라블> 예고편은 아예 노래로 이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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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희 감독의 자전적 영화 <가족의 나라>를 보고 종로 거리를 걸으며, 우리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삶이라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나 속절없이 흘러가버릴 수 있는지 생각한다. 1950년대 북한으로 이주한 재일동포 성호(아라타)와 일본에 남은 가족은 그들의 선택이 어긋났다는 사실을 진즉에 깨닫지만,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가져올 본인의 행복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초래할 불행의 총합이 크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제자리에 멈춘 채 더 나빠지지만 않길 바란다. 수술해야 하지만 북한으로 돌아간 뒤의 부작용이 염려되어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먼 나라 이웃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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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이후 빈 라덴을 사살하기까지 CIA의 비밀활동을 다루며 여전히 첨예한 정치적 쟁점을 건드린 탓에 <제로 다크 서티>는 비교적 고른 지지를 얻은 <허트 로커>에 비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들에 따라오기 마련인 불평들, 이를테면 실제로 일어난 일을 왜곡했다며 온갖 증거들을 나열하는, 대개의 경우 영화 자체와 별 관계가 없는 비평들은 열외로 두자. <제로 다크 서티>에 대한 대부분의 비평들이 문제를 삼는 지점은 영화에 등장하는 고문장면에 대한 영화의 태도이다. 빈 라덴에 대한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 수감자들에 대한 고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보여주고 있으므로 결국은 고문을 옹호하는 것이라는 비판적 견해가 한편에, 오히려 현실의 고문을 폭로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다른 한편에 있다(“악은 어디에 있는가?”, <씨네 21> 894호). 캐스린 비글로는 이런 논쟁에 대해 <제로 다크 서티>
[신 전영객잔] 이런 무력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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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이름을 적고 있네. 누구를 풀어주고 누구를 벌할 것인지. 모두 같은 취급을 받을 수 없을 것이네. 황금 사다리가 내려올 것이다. 그분이 오시는 날.” 너무나 절묘한 선곡인 조니 캐시의 <The Man Comes Around>에 맞춰 브래드 피트가 등장한다.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담배를 피워대며 오직 옆, 뒷모습으로만 등장하는 킬러 잭키 코건(브래드 피트)은 도박장을 턴 멍청한 도둑들을 처리하기 위해 고용된 ‘집행자’다. 등장과 동시에 작업을 의뢰한 드라이버(<번 애프터 리딩>에서 같은 헬스클럽 동료였던 리처드 젠킨스)와 그저 미동도 없이 오직 차 안에서 긴 얘기만 나눌 뿐이지만 여전히 그는 섹시하고 매력적이다. 이제껏 보기 드물었던 색다른 킬러의 모습이랄까. 차 안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는 얘기에도 아랑곳없이 한번 상대를 무심히 째려보고는 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아무도 그를 건드릴 수 없다. 이제 올해로 그의 나이 딱 쉰살이다. 하지만 브래드 피트의 시간
[브래드 피트] 야심만만 냉혈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