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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13일부터 12월9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리는 ‘우리 시대의 프랑스영화 특별전’ 17편의 상영작 중 6편을 여기 소개한다. 비교적 그동안 상영 기회가 적었거나, 있었다 해도 조금 더 주목받았으면 하는 마음이 드는 작품들 위주로 골랐다. 2000년대 중반 이후부터 지금까지, 프랑스영화의 현재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고 말해도 될 것 같다(이번 특별전에서는 올해 타계한 크리스 마르케 감독의 작품 5편도 상영된다. 크리스 마르케에 관심있는 독자는 <씨네21> 867호의 추모기사를 참조하면 좋겠다).
<지방법원 제10호실> 10e Chambre, Instants d’Audience
감독 레이몽 드파르동 / 출연 미셸 베르나르 르퀴앙 / 2004년 / 105분 / 컬러
2003년 5월부터 7월까지, 기자 출신의 레이몽 드파르동은 ‘파리의 경범죄법원’ 내부의 촬영을 허가받는다. 그곳의 열 번째 법정에서 드파르동은 어느 여성 판사가 내리는 판결을 촬영하게 되었고
21세기의 프랑스영화를 조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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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뤽 고다르의 근작 <필름 소셜리즘>이 개봉할 예정이다. 자세한 논의는 아마 개봉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다(나는 이 영화를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보았고, 지난해 여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다시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러므로 우선 머릿속에 떠오르는 세 가지 다른 이야기를 통해 우회하고 싶다.
첫 번째 이야기. 올해 프랑스 대선에서 논란의 중심에 있었던 정책 중 하나는 ‘아도피법’이었다. 아도피법은 2009년에 도입된 일종의 ‘스리 스트라이크제’로 위법적인 다운로드 단속법을 말한다. 사르코지 대통령 시절에 만들어진 이 법은 다운로드 유저에게 인터넷상의 저작권 침해의 죄를 물어 형사 처벌을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최고 징역 3년에, 벌금 30만유로를 물리게 하고 덧붙여 최고 1년의 인터넷 접속 차단을 명할 수 있다. 대통령 선거 시에 올랑드 후보는 ‘아도피법’을 폐지할 것을 제창했고, 지난 세기에 논의됐던 ‘문화적 예외’와 관련한 내용을 디지털 시대에 적합하게 변용한 ‘프
필름의 소셜리즘은 소유권을 부정하는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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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알랭 레네의 그 영화들을 알고 있다. 레네의 어느 영화 제목을 잠시 빌려온다면 사정은 일단 그래 보인다. 그는 영화사의 위대한 작품으로 인정받은 <밤과 안개> <히로시마 내 사랑> <지난해 마리엥바드에서>를 만든 감독이고 그로써 각종 영화사 서적에서 이름이 빠지지 않는다. 그의 독창성은 이미 오래전부터 각 분야의 평자들에게 인정받았는데, “다른 누구보다 알랭 레네는 완전히 무(無)로부터 출발했다는 인상을 준다”(장 뤽 고다르)거나 “알랭 레네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우선적인 새로움이란 바로 중심, 고정점이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질 들뢰즈) 등의 호평을 받았다. 전통적 서사 기술을 해체하는 파편적 구성이 그가 영화로 새롭게 해낸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현대영화 혹은 모던영화의 창조자로도 불렸다. 그런데 이렇게 좀 교과서적인 생각을 바탕으로 레네의 신작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를 말하는 건 꺼려진다. 우리는 무언
비로소 만나는 알랭 레네라는 영화적 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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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겨울이 오고 있다. 아니 아직은 늦가을이 조금 남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사색을 할 시간도 아직은 남아 있다. 행복하게도 우리는 영화 사색의 기분에 젖어 가을에서 겨울로 옮겨갈 수 있게 됐다. 이 계절과 계절 사이에 프랑스영화, 라고 그냥 말하기에는 좀 아까운 특별한 프랑스영화들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90살을 넘긴 프랑스의 대감독 알랭 레네의 신작 <당신은 아직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는 말 그대로 쉽게 접하기 힘든 걸작이다. 이 영화를 통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창작자의 아름다운 사유의 결실을 보게 된다. 알랭 레네가 걸어온 창작의 궤적을 되돌아보는 동시에 무엇이 이 영화를 그토록 아름답게 만드는지 문득 생각해본다. 때마침 서울아트시네마에서는 ‘우리 시대의 프랑스영화 특별전’을 연다. 동시대에 우리와 호흡하는 17편의 영화를 상영한다. 그중 더이상 말하기를 늦추면 안된다는 마음에 장 뤽 고다르의 <필름 소셜리즘>에 관한 김성욱 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
가을과 겨울 사이 프랑스영화의 계절이 도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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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년을 생각하면 만감이 교차한다. 그중 인상적인 건 사람들이 정치를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했다는 점이다. 삽질, 명박산성, <나는 꼼수다>와 ‘여의도 텔레토비’까지 실제론 되게 우울한 일들이 진짜 웃기는 뭔가로 둔갑했다. 그만큼 정치가 엉망진창이었단 얘기지만, 적어도 5년간 가장 정치적인 게 가장 재미있던 것도 사실이다. 김재환 감독의 <MB의 추억>은 그 결산이다. 뉴스에 안 나오는 후보들의 길거리 유세, 시민들의 기대, 열정적인 지지자들의 욕망이 마구 뒤섞인다. 5년간 수집한 조각들이 감각적으로 연결되는 동안 이 ‘다큐멘터리’는 정말 웃기고 우울하고 재미있고 무서워진다.
주제곡이라 할 만한 제리 K의 <MB의 추억>(올여름 믹스테이프로 공개되었다)은 수차례 등장하는데, 특히 쥐 가면을 뒤집어쓴 배우가 불도저를 몰 때는 “MB의 추억, 삽질의 추억, 우리가 만든 포클레인 불도저”란 랩에 집중하게 된다. 유일하게 연출된 장면이다. 이물감을 무릅쓰
[차우진의 귀를 기울이면] 주권 행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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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감시당하고 있다. 정부는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비밀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내가 이 사실을 아는 이유는 내가 그 ‘기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엄청난 비밀을 나긋나긋하게 폭로하는 한 남자의 내레이션이 오프닝을 대신하는 <퍼슨 오브 인터레스트>는 휴대기기에 내장된 카메라, 건물 처마 밑에, 신호등에, 엘리베이터에 설치된 CCTV, 신호를 추적해 위치를 찾아내는 GPS 등 어디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현대의 감시장비들이 위협하는 사생활 영역에 대한 불안을 소재로 해 만든 TV시리즈다. 2011년 10주년을 맞은 9•11 테러와 함께 시작해서 시즌2로 접어든 이 드라마의 중심에는 일견 어울리지 않지만 쑥떡처럼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호흡을 자랑하는 두 남자가 있다. 전직 CIA 요원 존 리스(짐 카비젤)와 억만장자이자 과학자인 해롤드 핀치(마이클 에머슨)가 그 주인공이다. 해롤드는 앞선 내레이션의 주인공이기도 한데, 9•11 이후 테러조직의 움직임을 감시하기
[안현진의 미드 크리에이터 열전] 슈퍼히어로 장르의 이상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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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심란하고 머리가 복잡한 날엔 <셜록 홈스>를 읽거나 김수현의 드라마를 본다. 무엇 하나 닮은 구석 없어 보이는 둘 사이의 공통점을 깨달은 것은 그리 오래지 않은 일이다. 용의자가 피운 담배의 종류부터 가족의 저녁식사에 들어갈 마늘의 양까지 작가가 하나하나 질서정연하게 다듬어낸 세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있다 보면, 주인공들이 전속력으로 달리는 마차에 몸을 싣고 있건 언성을 높여 싸우다 멱살잡이를 하건 어느덧 내 마음은 안식을 찾고 평온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일관성 없는 캐릭터와 개연성 없는 사건들이 우격다짐하듯 끌어가는 드라마들에 지쳐 있을수록 김수현의 새 작품을 기다리게 된다. 아무래도 <셜록 홈스>는 더이상 신간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JTBC <무자식 상팔자>는 이렇듯 김수현표 가족드라마를 사랑하는 내게 오랜만의 단비 같은 드라마다. 90년대 <목욕탕집 남자들> 시절부터 여전한 ‘3대가 한집에 살고 형제간이 지척에 모여 사사
[최지은의 TVIEW] 단비 같은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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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얼굴을 티셔츠 위에서 보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리라. 장관 자리를 내던지고 게릴라로 돌아간 게바라는 오염되지 않은 순결한 혁명의 화신이자, 젊은 날 가슴 뛰는 정의감의 분신이었다. 이 혁명의 아이콘이 어느새 그가 그토록 증오했던 자본주의 상품경제에 포섭되어 소비의 아이템이 되어버렸다. 그의 얼굴을 걸치고 다니는 이들은 그가 볼리비아의 산속에서 겪었던 굶주림을 알까? 그리고 고립된 자의 고독, 쫓기는 자의 공포, 가망없는 저항에 대한 회의를 가늠이라도 하는 걸까?
복구
1960년대에 유럽의 상황주의자들은 이런 현상을 ‘회복’(recuperation)이라 불렀다. ‘회복’이란 한마디로 체제의 궤도에서 벗어난 정치적 일탈들을 바로잡아 원위치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위키피디아는 ‘회복’을 이렇게 정의한다.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사상이나 형상이 미디어 문화와 부르주아 사회 내에서 뒤틀리고, 포섭되고, 흡수되고, 병합되고, 상품화되어, 중립화하고, 무해하고, 사회적으로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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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주 전 이 칼럼에서 1990년대와 2000년대 가요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 김현식의 <내 사랑 내 곁에>를 아주 짧게 얘기하고 지나갔는데, 그러면 안되는 거였다. 나는 이 노래에 대해 할 말이 훨씬 많다(아무렴, 한회 분량은 충분히 뽑고도 남을 노래지).
김현식의 6집 앨범이 발매된 것은 1991년 1월이었고, 1991년 1월에 나는 정상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휴학한 상태였고, 매일 술에 절어 있었고, 심지어 입대를 앞두고 있었다. 정상인 게 오히려 비정상인 시기였다. 그 무렵의 나는 겉멋이 잔뜩 들어서 (겉이라도 멋있으면 좋았겠지만 그건 또 아니었던 것 같고) 머리를 어깨까지 기르고 트렌치코트를 입은 채 거리를 활보했었다. 누구나 인생에 한번쯤 그런 시기가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정신으로 그러고 다녔는지 이해할 수 없는 시기.
폼 잡고 다니던 시절의 배경음악은 당연히 김현식이었다. 일단, 반항 좀 하려면 김현식을 들어야 했고, 폼 좀 잡으려면 김현식
[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 부르고, 또 부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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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아이 엠 샘>을 보고 나서 숀 펜이라는 배우가 앞으로 이보다 더 내 가슴을 아프게 할 수는 없으리라 생각했었다. 물론 그처럼 늘 진지하고 심오한 배우가 나를 웃길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고. <아버지를 위한 노래>에서 그 두 예감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쉰이 넘은 숀 펜- 솔직히 난 그가 예순도 넘은 줄 알았다- 은 파마머리에다가 립스틱을 바르는 늙은 로커로 변신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나를 울리고 웃겼다.
숀 펜이 연기한 셰이앤은 삶의 의욕을 완전히 상실해버린 왕년의 록스타다. 아침에는 습관적으로 화장을 하고, 오후에는 무료한 얼굴로 벌어놓은 재산을 주식으로 불리며, 가끔 자신의 우울한 노래로 인해 자살했던 청년들의 묘소에 찾아가 속죄하며 시간을 보낸다. 음악과는 담을 쌓았음에도, 화려한 치장만은 여전히 고수하고 있어서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하고, 영원히 나이 들지 못하는 인간이라고 은근히 멸시를 당하기도 한다.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fashion+] 가방은 우리를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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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는 이웃들과 섞이지 않고도 그럭저럭 살 수 있다. 그러는 편이 낫다고들 한다. 형식적인 인사 정도는 하되 서로 본체만체하거나 있는 듯 없는 듯하고 사는 게 도시 생활의 기본 매뉴얼이라고. 하지만 시골에서는 곤란하다. 그냥 곤란한 정도가 아니라 당장 살길이 막막해질 수도 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물이 안 나오는 거다. 그때그때 맛있는 지하수를 컵으로 직접 받아 마시는 기쁨에 이제 막 들떠 있던 때라 세수는커녕 커피 내릴 물도 따로 없었다. “어쩌지?” “아랫집 할아버지한테 가봐야지. 업자가 돈 아끼려고 그 집에서 판 지하수를 서너집이 나누어 쓰도록 만들었다니….” “혹시 이사 온 지 사나흘이나 됐는데 아직까지 인사 안 왔다고 노인네가 물을 일부러 끊어버린 거 아냐?” “설마?” 우라질, 불길한 예감은 항상 틀린 적이 없다. 물이 안 나와서 왔다고 하니,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노기 어린 눈으로 다짜고짜 화를 냈다. “그런데 왜 나한테 왔냐? 내가 너네
[SO WHAT] ‘성질 더러운 영감’ 다루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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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남영동1985>(이하 <남영동>)가 상영된 직후 열린 관객과의 대화에는 고 김근태 의원의 부인인 인재근 의원이 참석해 무대에 올랐고, 그 옆에 함께했던 이경영은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연신 눈물을 흘렸다. 정지영 감독의 <남영동>은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자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었던 고 김근태 의원의 자전적 수기 <남영동>을 바탕으로,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벌어진 22일간의 잔인한 고문의 기록을 날짜별로 담아낸 작품이다. 박원상이 고문 피해자인 김종태, 이경영이 ‘장의사’로 불리는 고문기술자 이두한을 연기했다. 김근태와 이근안이라는 실명을 쓰지 않은 것에 대해 정지영 감독은 “고문 피해에 대한 이야기는 김근태 의원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 시절 수많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존재했고, 어느 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닌 그들 모두가 영화에 담겨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물론 ‘김종태는 박종철과 김근태이고
[남영동 1985] 거의 반 미친 채로,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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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가장 재밌게 본 미국 드라마가 <뉴스룸>이다. 우리나라 상황으로 바꾸면 <9시 뉴스데스크> 정도 되는 내용인데, 재밌을 거 하나 없는 소재를 가지고 그처럼 다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점에 감탄을 하면서 봤다. 매 편이 모두 인상적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 토론회 편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드라마에 등장하는 뉴스 제작진은 기존의 뻔한 토론 대신 그야말로 후보의 가슴을 후벼파는(?) 날카로운 질문들로만 이루어진 토론회를 준비한다. 이유는 단순했다. 기존의 TV토론이 신변잡기 위주인 연예토크 프로그램처럼 연성화되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토론으로는 유권자가 어떤 후보를 선정해야 하는지에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하기에 제작진은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토론회를 마련했던 것.
재밌는 건 (비록 드라마라는 픽션이긴 하지만) 그 토론을 진행하는 사회자인 앵커가 공화당 지지자였다는 점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새누리당 지지자인 앵커가 새
[김진혁의 디스토피아로부터] TV토론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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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까지 뼛속까지 시인이겠지만, 김선우는 산문의 혁명적 힘을 믿는다. 글로 만났을 때만큼이나 발화되는 그녀의 언어는 명료하지만, 마치 책을 암송하듯 비문이 없는 문장 사이로 한숨이 섞일 때 웃음이 새어들 때 말은 말 이상의 울림을 갖는다. 읽는 이를 주먹 꼭 쥐고 울게 만드는 사랑이야기 <물의 연인들>은 그녀를 닮았다. 인터뷰를 위해 날 맑은 주말의 시내로 나가는 길, 전경들은 사신처럼 줄지어 무표정한 얼굴로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았고, 인터뷰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 닭장차 때문에 공연인지 집회인지조차 분간할 수 없는 서울광장의 대낮 같은 조명으로부터는 앰프 소리만이 크게 울리고 있었다. 이러고도 우리가 아름다움을 믿을 수 있을까. 그 질문을 위해 김선우를 만나봐야 했다. 정말, 언어로 혁명이 가능합니까, 묻기 위해서.
Profile
1996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내 혀가 입 속에 갇혀있길 거부한다면> <도화 아래 잠들다>
[김선우] 다시, 사랑의 말에 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