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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잠을 설칠 정도로 뭔가에 사로잡힌 적이 있었나. 언젠가는 나이키 운동화가 너무나 갖고 싶었다. 언젠가는 정말로 전학을 가는 게 싫었다. 언젠가는 그 여자애가 말이라도 걸어주길 간절히 바랐다. 언젠가는 매일 저녁 ‘아빠’가 술을 그만 마시길 바랐다. 그런데 소원이란 이뤄질 수도, 실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자애가 활짝 웃으며 말을 걸었을 때엔 놀라 도망쳤다. 바람과는 상관없이 아버지는 매일 술을 마셨다.
아이들은 각자의 소원을 품고 두개의 신칸센이 교차하는 ‘기적의 장소’를 찾아간다. 화산 폭발마냥 시끄러운 순간에 아이들은 저마다의 엄청난 소원을 외친다. 그때 흐르는 음악은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로 잘 알려진 쿠루리다. 이 소박하고 따뜻한 멜로디는 종종 지나간 시절의 한때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좋다. 주제곡 <기적>의 “아무도 몰래 피어난 꽃, 내년에 또 만나자”라는 별거 없는 가사도 좋다. 아이들의 소원이 이뤄졌는지 어떤지는 모르겠다. 남의
[차우진의 귀를 기울이면] 너희들을 응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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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36계단을 온몸으로 굴러떨어진 저는 일주일 남은 임용고시도 치르지 못하고 꼬리뼈와 손목 골절로 두달간 병원에 입원해야 했고, 그동안 그 남자가 저를 치료해줬어요. 그 사람이 의사였거든요. 깁스를 풀던 날 청혼을 받았고요. 한달 뒤에 그 사람과 결혼해요.” 버스에 앉아 자신이 보낸 라디오 사연을 청취하며 신혼살림 리스트에서 전기압력밥솥 항목을 지우는 행복한 예비신부 길다란(이민정). 저 사연이 밥솥을 타게 된 이유는 나열된 사건 사이의 비어 있는 인과관계가 청취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운명론이나 의사와 환자간의 불타는 로맨스를 떠올릴 수도, 누구는 조건 차이나는 결혼을 빈정거릴 수도 있겠지. 어쨌거나 꼬리뼈에 손목 골절이면 움직일 수조차 없었을 텐데…. 좋아하는 여자와 이런 짓 저런 짓도 해보지 않은 채 깁스 푸는 날 청혼하는 남자라니. 암만 다정해도 심란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하다. 사랑을 의심하면 결혼을 망칠까 겁먹었던 다란은 “내가 다란씨 인생 책임져
[유선주의 TVIEW] 속이 뭐가 됐든 공유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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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앨런은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 ‘길’을 빌려 자신이 사랑하는 황금시대가 ‘1920년대의 파리’라고 말한다. 영화를 보다 영화의 황금시대는 언제였을까, 생각해보았다. 유럽영화쪽에 비중을 두는 사람은 1920, 30년대의 어느 지점을 꼽을 테고, 할리우드영화를 우위에 둔다면 1930, 40년대의 어느 해를 기억할 것이다. 나는 딱히 어느 시기라고 주장하지 못하겠다. 부족한 내 눈에 1950년대 이전 작품은 모두 황금시대의 유산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대신 언제쯤 그 시대가 막을 내렸는지는 알 것 같다. 1950년대 중반 즈음이 아닐까 싶다. 한 예로, 1954년 칸영화제에 초대받은 사람들의 리스트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렌다.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길이 따라간 파티의 주인공인) 장 콕토가 심사위원장이었고 아벨 강스, 에드워드 G. 로빈슨 등이 심사위원으로 참가했다. 장편경쟁부문에서는 존 포드, 앨프리드 히치콕, 앙리 조르주 클루조, 자크 타티,
[이용철의 아주 사적인 클래식] 그리고 영화의 황금시대는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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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가 잘린 미시마 유키오의 신체는 ‘아세팔’을 연상시킨다. ‘아세팔’은 ‘머리 없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 ‘아케팔로스’에서 유래한 것으로, 조르주 바타유가 결성한 비밀결사의 이름이자, 이 단체에서 발행한 잡지의 이름이기도 하다. 앙드레 마송이 만든 잡지의 표지에는 머리가 잘린 사내가 그려져 있다. 사내는 왼손에는 칼을, 오른손에는 심장을 든 채 서 있다. 사내의 배는 해부된 시체처럼 내장을 드러내 보인다.
아세팔, 무기물로 돌아가려는 죽음의 충동
마송의 그림은 다소 섬뜩한 방식으로 다빈치가 그린 <비트루비우스의 인간>을 반복하고 있다. <비트루비우스의 인간>은 완전한 도형(원과 정사각형) 안에 담긴 완벽한 인체비례로 르네상스의 인간적 이상을 표현한다. 방향은 뒤집혔지만 ‘아세팔’ 역시 바타유 그룹의 욕망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비트루비우스의 인간>이 신적 완성을 향해 상승하는 에로스의 충동을 대표한다면, ‘아세팔’은 죽어서 무기물로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에로티즘의 성(聖)과 속(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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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여행을 준비할 때 제일 먼저 아이팟 한가득 음악을 챙긴다. 라디오헤드도 있어야겠고,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도 빼놓을 수 없고, 벤 폴즈도 있으면 좋지 않을까, 낯선 도시로의 여행이라면 재즈나 클래식을 들어야겠지, 라고 수선을 떨다가 결국엔 가요를 가장 많이 채워간다. 낯선 곳에서 오랜 시간 지내다보면 한국말이 그리워지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는 건데 (이보게, 자네 여행은 대부분 일주일 이내가 아니던가!) 가장 큰 문제는 여행 가서는 아이팟을 거의 꺼내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비행기에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듣다가 극심한 두통이 온 이후로는- 이게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한 건지는 모르겠다- 절대 하늘 위에서 음악을 듣지 않는다. 외국의 도시를 다닐 때에는 눈과 귀와 코를 모두 열어두어야 하기 때문에, 낯선 도시의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아야 하기 때문에,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을 시간이 없다.
여행 중 아주 짧은 순간 음악을 듣게 된다. 마음에 드는 카페를 발견한 다음 여
[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 다른 나라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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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 전 신문에서 중국집 ‘철가방’을 한국의 대표적인 디자인으로 언급한 걸 본 적 있다. 1960년대 후반부터 화교들이 운영하던 중국집을 중심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 배달용 통은 모양새가 투박했지만 가볍고 위생적이었고, 그 덕분에 이후 전국 중국집의 필수품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세상이 살 만해지니 이런 고물들도 다 대접을 받는구나 싶으면서도, 삶에 치여 그동안 잊고 살았던 30년 전 기억이 떠올랐다. 그 시절, 나는 서울 변두리의 중국집에서 일하고 있었다.
서울로 올라온 지 2년 정도 지났을까?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형편에 겨우 중학교를 마치고 소작농 부모님을 도와 농사를 짓다가 이렇게는 도저히 못 살겠다는 생각에 새벽 기차를 타고 무작정 상경했었다. 하지만 머리에 든 것도 없고 손에 밴 기술도 없이 맨 몸뚱이 하나로 서울에서 버티는 건 쉽지 않았다. 그저 세끼 고봉밥 먹여주고 비 새지 않는 골방에 잠만 재워주면 무조건 오케이하고 달려갈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서러
[design+] 철가방과 포니 블루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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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용산에서는 제11회 미쟝센단편영화제가 열렸다. 900여편의 작품이 출품되었고 예심을 거쳐 60여편의 작품이 다섯개의 장르로 나뉘어 본선에서 상영되었다. 나는 이 영화제에 심사위원장으로 참여하였고 대상과 각 장르의 최우수 작품상, 그리고 심사위원 특별상 등을 선별하였다. 올해 본선에서 상영된 작품 중에는 학교폭력 문제와 영화에 관한 영화가 두드러지게 많은 점이 인상적이었다.
학교폭력과 왕따 문제는 사실 장·단편, 상업·독립영화를 가릴 것 없이 지난 몇년간 꾸준히 한국영화의 주요한 테마로 자리잡아왔다. 올해 영화제에서는 이 테마에 대한 단편영화인의 고민이 더욱 확대되고 다양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예전에는 학교폭력 문제는 관계의 비정함과 집단적 죄책감을 고발하는 사회파 영화 계열로 수렴되는 것이 대부분이었으나 올해는 코미디, 멜로, 호러, 판타지, 뮤지컬, 히어로물 등 다양한 장르적 특성을 살린 영화 충동으로 확장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영화에 관한 영화들이 많아졌
[SO WHAT] 불안은 희망을 증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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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학살에 관한 클로드 란츠만의 기념비적 다큐멘터리 <쇼아>가 개봉했을 때 이 영화에 가차없는 비난을 던진 건 장 뤽 고다르였다. “이 영화는 보여준 것이 아무것도 없다.” 고다르는 그렇게 비난했다. 고다르에게는 한 가지 확신이 있었다. 학살이 이뤄졌던 가스실의 바로 그 순간의 현장이 독일군의 영화 카메라에 찍혔으며 그것이 세상 어딘가의 기록보관소에 존재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아우슈비츠의 기록물이라고 자처하는 <쇼아>가 그 이미지들을 보여주지도 않고 찾으려 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고다르는 힐난했다. 고다르는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쇼아> 옹호론자 마르그리트 뒤라스와의 논쟁도 불사했다. 훗날 한 평자는 그것이 경험적인 검토와 무관하게 그의 유죄의식에서 기인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20세기의 매체인 영화가 20세기의 가장 끔찍한 역사적 사건을 기록해내지 못했으므로, 혹은 기록했다 하더라도 사실상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므로 그에
[신 전영객잔] <두 개의 문>은 어떻게 빨간 잉크가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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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의 강형철 감독이 그녀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박진주는 연기 천재다.” 이제 막 영화 한편에 출연한 신인에게 그리고 같은 또래의 여자 배우들이 유독 많았던 촬영현장에서 편애라는 오해를 무릅쓰고 감독이 그녀를 칭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를 묻자 박진주의 대답이 당차다. “제가 신인이니까 북돋워주려고 장난처럼 하신 말씀이라 생각해요. 연예계가 삭막하다는 말 많이 들었는데 아직까지 좋은 사람들만 만나서인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써니>에서 욕쟁이 진희로 이름을 알린 박진주에 대한 인상은 강렬할 수밖에 없었다. 들어본 적도 없는 욕을 속사포로 내뱉지만 그 상스러움이 어딘가 귀여워서 영화가 끝난 뒤에도 오래 잔상이 남았다. 그리고 강형철 감독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다는 듯 박진주는 <써니> 멤버 중 가장 바쁜 한해를 보냈다. 시트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 드라마 <프로포즈 대작전> 그리고 뮤지컬 <연탄길>
[박진주] 하이킥! 욕쟁이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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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자가 보면, 제대 뒤 첫 작품이니 굉장히 노심초사하고 고심한 것 같잖아요? 그냥 모든 게 잘 맞아떨어졌어요. 로케이션도 가까운 편이고, 제작기간도 짧고, 한 공간에서만 사건이 일어나는 거라 (연기) 감 익히기에도 좋을 것 같고, 새로운 장르에 안 해본 캐릭터고.” 물론 홍콩 여행 중에 접한 <두개의 달> 시나리오는 여행을 방해할 정도로 흥미로웠고, 2년 동안 못한 연기를 다시 하려니 현장에선 가슴이 벅찰 정도로 행복했다. 김지석은 솔직했다. 그리고 청산유수였다. 군대에서 대화의 기술이라도 연마한 건지, 그의 얘기는 청자를 춤추게 했다. 김지석은 말하길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리액션이 좋은 대화 상대였다.
게스트와 호스트 자리를 자유자재로 오가는 김지석의 대화법은 그의 연기와도 닮아 있다. <두개의 달>에서 김지석이 맡은 대학생 석호는 소희와 인정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는 중심추 역할을 한다. 영문도 모른 채 숲속 낯선 집의 지하실에서 눈을 뜨는 세 사람은 각
[김지석] 평범함과 광기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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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하려고 소파에 자리를 잡자마자 박한별은 신발을 벗고 양반다리를 했다. 다소곳함, 섹시함, 도도함의 범주를 넘어서는 좌식법이었다. 이내 박한별은 말했다. “버릇없… 나요?” 털털하고 솔직하고 귀여운 박한별의 일면을 엿본 순간이었다. 신기하게도 박한별은 일상에서의 풀어진 모습을 작품에서 보여준 적이 거의 없다. <여고괴담 세번째 이야기: 여우계단> <숙명> <요가학원>을 거친 그녀는 늘 새장에 갇힌 관상용 새의 인상을 풍겼다. 물론 그 새는 창공을 날게 될 날을 고대했다. “데뷔하고 인지도는 높아졌는데 연기 못한다는 소리를 엄청 들었잖아요. 저도 제가 하고 싶은 거, 제가 잘할 수 있는 거 하고 싶었어요. 예를 들면 <환상의 커플>의 나상실 같은 역할. 제가 연기한 오유경보다 나상실이 제 성격에 더 잘 맞거든요. 그런데 늘 청순하고 차분한 역할만 들어왔어요. 그땐 진짜 불행했어요.” 어느 순간 박한별은 쓸데없는 고민으로 자신을 몰아세우
[박한별] 다시, 깨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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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두개의 달>의 세 주인공 소희(박한별), 석호(김지석), 인정(박진주)은 이 질문의 답을 구하려고 애쓴다. 이들은 죽은 자들이 깨어나는 집에 갇혔다. 석호와 인정은 필사적으로 해답찾기에 달려들고, 소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이 질문을 세 배우에게 던져보면 어떨까. 난 누군가, 지금 난 어디쯤 와 있나. 박한별은 “여우 같은 이미지”를 버리고 미스터리한 인물 소희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그리고 더이상 공포영화의 마리오네트 인형이길 거부한다. 군 제대 뒤 첫 작품으로 <두개의 달>을 택한 김지석은 석호의 옷을 입고 평범함과 광기 사이를 오간다. 현장에서 연기할 날을 벼르고 별렀을 그의 모습이 짐작되고도 남는다. <써니>의 욕쟁이 그녀, 박진주는 두 번째 영화에서 당당히 주연 자리를 꿰찬다. 그리고 <두개의 달>을 통해 ‘기분 좋은 주연의 중압감’을 맛본다. 지나온 길도, 걸어갈 길도 달라
[박한별, 김지석, 박진주] 미스터리를 품은 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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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독의 영화노트]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청춘이로다!
[올드독의 영화노트]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청춘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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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엔틴 타란티노나 코언 형제를 흉내낸 가장 나쁜 예를 보고 싶다면 주저없이 이 영화를 권하겠다. 내용은 간단하다. 캣이란 가명을 쓰는 콜걸 카탈리나(파즈 베가)가 우연히 정치권 파티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목격자가 된다. 파티를 주최한 무기 딜러가 고용한 전문 암살자 헬렌(재닛 맥티어), 그리고 마침 탐정사무소를 차린 앤소니(스콧 메크로위즈)와 줄리안(알폰소 맥올리)의 출현. 이들과 함께 얽히고설킨 캣의 도주가 시작이다.
<캣 런>은 코믹스릴러다. 쫓고 쫓기는 기본 얼개를 유지하기 위해서 감독은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한다. 별 필요도 없어 보이는 잦은 분할화면, 다종다양한 캐릭터의 나열, 과도한 욕설과 잔인한 폭력의 사용이 버라이어티하게 전개된다. 진중한 앤소니와 에디 머피를 카피한 줄리안의 조합이 버디무비의 구성까지 더해준다. 전반적으로 어떤 식의 진지한 시도를 기대하는 건 불가능하다. 유치함 일색의 상황과 대사들이 되레 고도로 의도한 결과가 아닐까 의심해야 할 정도다.
거침없이 쫓고 쫓기다 <캣 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