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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원경으로 초점이 나간 장면을 본다고 해서 덜 보는 건 아니다.”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사진을 회화에 도입한,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회화라는 매체로 사진을 그린 최초의 화가들 중 한명이다. 하지만 리히터를 수많은 포토리얼리스트들과 구별시켜주는 것은 이른바 ‘리히터의 블러’(Richter’s blur)라 불리는 효과다. 사진을 그린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회화는 하나같이 초점이 나가 흐릿해 보인다. 미술평론가 할 포스터는 이 블러가 리히터의 작품의 ‘푼크툼’을 이룬다고 말한다. 왜 그는 사진을 흐리는 걸까?
사진과 회화의 차이를 넘어
‘리히터의 블러’에는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다. 하나는 매체에 대한 반성이다. 리히터가 작업을 시작했을 때, 매체의 순수성을 강조하는 그린버그의 모더니즘, 즉 잭슨 폴록에서 출발한 미국의 추상운동이 사실상 종말을 고한 상태였다. 모더니즘의 추상이 결국 사진이 던져준 충격에 대한 회화의 반응이었다면, 추상의 운동이 생명력을 다한 이상 사진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궤뚫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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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해 전까지만 해도 ‘올해의 음반 베스트100’이나 ‘올해의 영화 베스트10’ 같은 목록을, 아카데미 시상식이나 그래미 어워드 등을 빠뜨리지 않고 챙겨 보았다. 혹시 내가 모르고 지나친 음반이나 영화가 있으면 어쩌나, 엄청난 걸작을 모르고 지나쳤으면 어떡하나 걱정하곤 했다. 걱정도 참 팔자로 많을 때였다. 얼마 전부터 ‘걸작 따위 지나갈 테면 지나가버려’라는 심정으로 하루하루를 보내고있으므로 수많은 명작들이 나 모르게 세월의 뒤편으로 사라져버렸다. 모두들, 굿바이! 동시대 작품들을 부지런히 챙겨 읽고, 보고, 듣는 건 참 재미난 일이지만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다 건져낼 수는 없다. 그랬다간 허리 부러진다. 그물코를 널찍하게 만든 다음 큼지막한 것들만 챙겨야지 그물코를 너무 촘촘하게 만들어두면 걸리는 고기들이 너무 많아서 그물이 찢어질 수도 있다.
음반이나 책이나 미술작품을 만나는 데도 운명 같은 게 작용하는 것 같다. 예전 같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책이 어느 날 뒤통수를
[김중혁의 최신가요인가요] 흥을 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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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달 건강보험료 영수증을 받아볼 때마다 화가 치민다. 일년에 병원이라고 해봐야 겨우 두세번 갈까말까다. 그런데 매달 18만원에 가까운 건강보험료를 꼬박꼬박 내야 한다. 회사를 그만두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된 지 1년이 넘었는데도 보험료는 요지부동이다. 회사에서 내주는 게 없으니 그전보다 2배나 많이 내고 있는 셈이다. 예전에 비해 수입이 줄어들었는데 도대체 왜 이렇게 많은 보험료를 내야 하는 거냐고 담당 국가기관에 물어보니 집이 있어서 그렇단다. 대출 받아서 집 사게 만들어놓고, 그 월부금을 다 갚기 전까지는 사실상 내 집도 아닌 채 노예 생활을 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데, 집이 있다는 이유로 그렇게 많은 건강보험료까지 챙겨가는 국가가 밉다. 미워도 너무 미워서 어떻게 하면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사람’으로 살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도 해봤다.
그래서 이 영화 <남쪽으로 튀어>가 진심으로 잘되길 바랐다. 영화가 잘되면 국민연금, 건강보험, 전기세에 포함되어 나오는 공영
[SO WHAT] 최해갑과 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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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21일 일기에 <스토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에 등장했던 동네 슈퍼와 여관이 각각 편의점과 모텔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서울 시내치고 오래 한결같았던 두곳이 마치 영화에 담겼으니 이제 됐다는 듯 사라져버렸다. 거리는 변했지만 하굣길로 쏟아져 나온 여학생들은 다들 해원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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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씨에게.
해원아, 라고 불러보까 했지만 만약 홍상수 감독이라면 당신에게 존대를 할 것 같다는 짐작에 해원씨라고 쓰기로 합니다. “외롭고 슬프다가 무서워졌다”고 당신이 정리한 꿈과 산책을 따라가는 동안 해원씨가 여러 번 딱하고 예뻤습니다. 아니, 딱해서 예뻤고 예뻐서 딱했다고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맨 처음 예뻤던 건 ‘해원’이란 이름이었어요. 저처럼 흔한 ‘혜’자가 이름에 든 여자는 ‘해’자가 가진 의연함과 아득히 푸른 기운을 동경하곤 합니다. 그렇게 남다른 이름을 궁리해 붙여준 부모라면 딸에게 유난스러울 것도 같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소녀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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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 전 어느 밤에 서간체 형식의 짧은 칼럼 하나를 쓴 적이 있다. 양영희의 다큐 <디어 평양>에 관한 것이었는데 양영희가 아버지와 자신의 관계를 그려낸 방식에 대해 내가 느낀 감동을 적었고 그 표현 중에는, “당신의 영화가 보여준 만드는 자로서의 ‘나’와 카메라와 대상으로서의 존재 그 사이에서 뛰던 관계의 맥박을 나는 쉽게 잊기 힘듭니다”라는 감탄의 표현도 있었다.
양영희는 왜 아들들을 북송시킨 아버지의 과오를 역사의 자리에서 냉정하게 다시 생각하지 않는가. 그건 일종의 회피가 아닌가, 하고 비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위의 칼럼을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웬만한 영화평론가보다 뛰어나고 날카로운 영화적 안목을 갖춘 유명감독 한분이 사석에서 내게 위의 칼럼을 언급하며 그와 같이 <디어 평양>을 비판했다. 내게는 그 영화의 어떤 결여된 객관성을 지적하는 말로 들렸는데, 그 비판이 일견 정당하다고는 생각했어도 공감은 끝내 못했던 것 같다. 그 영화의
[신 전영객잔] 슬픔은 어디서 보아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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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눈을 더 크게 뜨고 ‘아니, 이 상황이 이해가 되세요?’라고 되묻는 표정. 이민기를 생각하면 자연스레 연상되는 얼굴이다. 어리둥절한 표정 연기에 있어서 이민기는 독보적이다. <해운대> <퀵> <오싹한 연애>에서 철딱서니 없거나 범상치 않은 여자들과 관계를 맺을 때의 그 얼굴들을 떠올려보자. <연애의 온도>에서도 이민기는 곧잘 그런 표정을 짓는다. 그리고 그 표정이 이민기를 아니, 이동희를 결코 미워할 수 없게 만든다.
<연애의 온도>에서 이민기는 여자친구 영(김민희)과 엮이기만 하면 감정 컨트롤이 제대로 되지않는 남자 동희를 연기한다. 동희는 3년 동안 사귄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통보받고 해방감을 느끼지만 금세 보고 싶다고 징징댄다. 관계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쪼잔하게 복수를 감행하고, “홧김에”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는 충동적인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그게 다 영이를 정말 좋아하기 때문”이다. 이민기는 자기감정에 충실한 동
[이민기] 나를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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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보면 김민희 없는 <화차>(2012)를 상상할 수 있을까. 그가 연기한 강선영은 비밀을 간직한 위태로운 여자였고, 위태로운 만큼 감싸주고 싶은 여자였다. 김민희의 얼굴은 강선영의 아슬아슬함이었고, 그것이 곧 <화차>의 긴장감이었다. 김민희도 <화차>가 자신의 경력에서 의미있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래서 강선영을 선뜻 내려놓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화차>가 끝난 뒤 세고 어려운 영화를 다시 하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그러나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저마다 인연이 있다고 생각하니 어느 순간 <화차>를 떠나보낼 수 있었어요.” 마침 <화차>와 전혀 다른, 말랑말랑한 연애담 <연애의 온도>의 ‘영’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은행원 영은 사내연애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중이다. 직장 동료들 몰래 3년간 사귄 남자친구 동희(이민기)와 헤어졌기 때문이다. 다시는 그의 얼굴
[김민희] 나를 훔쳐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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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수 부대인 '지 아이 조'가 테러리스트 '코브라' 군단의 음모로 인해 최대 위기에 처하게 되고, 이에 살아남은 요원들이 팀의 명예를 회복하고 세계를 구하기 위해 거대한 반격에 나서는 과정을 그린 작품 '지 아이 조 2'는 오는 3월 28일 개봉 예정이다.
[이병헌]"복면 벗으니 감정 연기 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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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마지막 날, 이민기와 김민희가 봄기운을 몰고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연애의 온도>에서 3년 사귄 사내커플 영(김민희)과 동희(이민기)를 연기한 두 배우는 서로 특별히 반가운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영화 속 영과 동희처럼 오래 알고 사귄 벗 같았다. 영화에서 워낙 싸우는 신이 많아서 두 사람 사이가 더 자연스러워졌는지도 모른다. “어릴 때 제일 처음 좋아한 연예인이 김민희였다”고 고백한 이민기도 “사랑해서 드는 정보다 싸우면서 드는 정이 더 큰 것 같다”고 말했다. 특출난 캐릭터가 아니라 일상에서 언제든 부딪힐 것만 같은 평범한 캐릭터로 만난 두 배우. 이들이 보여줄 보통의 연애는 과연 어떤 향기를 품고 있을까.
[연애의 온도] 봄의 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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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YG엔터테인먼트 양현석 대표는 소속 가수의 새 앨범 음원을 인터넷에 무료로 배포하며 이렇게 말했다. “음악은 팔기 위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를 함께 공유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기사 댓글들뿐만 아니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에서 일제히 배부른 소리라는 평이 쏟아졌다. 음악이든 그 무엇이든 일단 배를 굶지 않아야 지속 가능한 것이고, 그러기 위해선 창작품을 파는 게 중요하다는 지적이었다. 돈푼깨나 만지는 국내 굴지의 기획사에서 할 소리가 아니라는 것.
하긴 그도 그럴 것이 요즘 내 주변 풍경만 봐도 그렇다. 신산하기 짝이 없다. 장편영화를 두편이나 만들었지만 제작비도 못 건진 모 독립영화 감독은 먹고살 길도 막막하고 제작비도 마련해야겠다며 거제 조선소로 일하러 떠났다. 또 요즘 부쩍 몸이 아파 아르바이트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모 감독은 간에 좋다는 조개 사먹을 돈도 없어 주변 사람들 속을 쓰리게 하고 있다. 어디 그뿐
[이송희일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스러진 약속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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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경우가 또 있을까. 자신이 참여한 두편의 영화가 같은 시기 극장가에서 맞붙는 경우 말이다. 프로듀서로 참여한 <베를린>의 흥행을 지켜보며 <신세계>의 제작자로서 한재덕이 느꼈을 법한 딜레마가 그런 것이었다. <베를린>이 700만 고지를, <신세계>가 250만 고지를 넘기며 승승장구하는 중이니 한숨 돌렸을 법도 하지만, 사나이픽쳐스 한재덕 대표는 윤종빈 감독의 신작 <군도>의 프로듀서로, 사나이픽쳐스의 차기작 <남자가 사랑할 때>의 제작자로 벌써 다음 고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올드보이> <주먹이 운다> <부당거래>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이하 <범죄와의 전쟁>), 그리고 <베를린>과 <신세계>까지, 충무로에서 제작되는 ‘사나이 영화’의 한복판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이 남자를 만나기에는 바로 지금이 적기라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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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덕] 사나이 영화, 나한테 맡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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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공유 SNS인 인스타그램 앱을 똑 닮은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트위터와 페이스북, 그리고 인스타그램에 수시로 출몰했던 건 지난해였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지만 정작 실제 제작이나 판매 계획은 들려오질 않았다. ADR 디자인이라는 디자인 그룹이 나름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한 시제품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폴라로이드사가 최근 ADR 디자인과 소셜매틱(Socialmatic) 카메라 개발을 위한 정식 계약을 체결한 것. 아직까지 구체적인 사양이 발표되지는 않았지만 인스타그램처럼 다양한 필터 효과를 즐길 수 있는 즉석 카메라가 될 것이라 예상하는 이들이 많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인스타그램은 아날로그 카메라를 흉내내는 카메라 앱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이제는 아날로그 카메라를 흉내내는 카메라 앱을 흉내내는 아날로그 카메라가 만들어지게 된 셈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는 이렇게도 끈질기고 복잡한 관계다.
[gadget] 인스타그램과 폴라로이드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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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1. 케이블 연결 없이 스마트폰을 패드에 접촉하기만 하면 충전이 된다. LG 옵티머스 G프로, 삼성 갤럭시 S4 등 자기유도방식 국제표준인증 QI를 충족시키는 모델이라면 무엇이든 호환 가능.
2. 자기유도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에 전자파 발생 위험이 상대적으로 낮다. 건강까지 고려한 친환경 제품.
3. 유선방식 대비 90%까지의 충전 속도를 기대할 수 있다. 편리함과 만족스러운 충전 기능까지 두루 갖춘 셈.
스마트폰 덕분에 사지 않게 된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MP3 플레이어나 디지털카메라에 대한 욕심은 전에 비해 크게 줄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마트폰 때문에 사야 하는 것들도 점점 늘어난다. 보조 배터리팩과 여분의 충전기는 2G 휴대폰 시절까지는 딱히 필요하지 않던 물건이었다. 이제는 사정이 달라졌다. 대충 반나절이면 충전된 배터리를 탕진해버리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비를 늘 해둬야 한다. 비슷한 번거로움에 시달리는 사람이 적지 않은 모양이다. 더 새롭고, 더 편리한 액세
[gadget] 케이블 없어도 충전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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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중/단편은 경제적인 이야기 진행으로 따지면 갑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촘촘함은 현대의 독자에게 무겁게 느껴질 성질의 것이다. 예컨대 요즘 TV드라마가 1회 만에 예전 4회 분량의 이야기를 속도감있게 보여준다면, 클라이스트의 소설에서는 한 문장이 거인의 발걸음처럼 몇년의 세월을 가뿐하게 쿵 건너뛰는 일이 예사로 발생한다. 다섯 페이지짜리 장중한 묘사가 그의 무기는 아니다. 게다가 한 문장에 중요한 정보들이 예사롭게 배치되어 ‘줄거리’ 중심으로 흘려 읽으면 재미라고는 맛보기 힘들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O. 후작부인>은 “그러고선 (장교는) 이 모든 소동에 말을 잃은 부인을 불길이 미치지 않은 성의 다른 쪽 곁채로 데리고 갔고, 여기서 부인은 까무러쳐 쓰러졌다. 그런 뒤-하녀들이 깜짝 놀란 얼굴로 곧바로 몰려오자, 장교는 의사를 불러오게 했다”라는 문장에서 장교의 기사도 이면의 이것과 저것을 고작 ‘그런 뒤-’라고 슬쩍 뭉개는데 생각할수록 이 한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중/단편의 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