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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정히 짚고 가자. <부러진 화살>이 공개되기 전까지 정지영 감독은 과거에 머물렀다. <남부군>의 명성과 거장 감독이라는 타이틀은 유효했지만, 현재진행형 감독의 수식을 붙이긴 어려웠다. <부러진 화살>이 거둔 평단과 흥행의 성공 이후, 연이은 <남영동1985>의 문제제기로 정지영 감독은 궤도를 되찾았다. 정지영 감독의 부활은 그 개인의 성공에 그치지 않았고, 한국 영화사에 뜨겁고 중요한 질문을 남겼다. “한국 영화산업 최고의 전성기에 중견감독의 활동이 부진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지영 감독을 비롯해 같은 연배의 이두용, 이장호, 고(故) 박철수 감독이 뭉쳐 만든 네편의 옴니버스 단편영화 <마스터 클래스의 산책>은 그 질문에 대한 우회적인 답변의 영화다. 정지영 감독의 시장에서의 입지가 고무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이 영화를 네 감독은 대규모 자본의 도움 없이 감독으로서의 노련한 연출력과 현재의 고민을 접목해 완성했다.
이
한국 영화사에 바치는 질문 <마스터 클래스의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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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19일 안타까운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고 박철수 감독의 유작 <생생활활>은 <녹색의자>(2003) 이후 저예산 디지털영화로 맥을 이어온, 성(性)과 영화의 엄숙주의로부터 탈피를 주장했던 박철수 영화들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현대판 <데카메론>’이라는 카피답게 100여분의 상영시간 동안 자그마치 스무개의 에피소드를 선보이는 이 영화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간호사 이야기, 성매매 방지 특별법에 대한 토론, 페티시 산업 종사자와의 인터뷰, 성에 대한 학제간 논의 등을 통해 오늘날 성에 관련된 고정관념과 제도들이 어떻게 비틀리고 억압된 성의식을 창출하는지를 다양한 시각에서 조망한다. <붉은 바캉스 검은 웨딩>에 출연했던 오인혜가 배역을 바꿔가며 때로는 감독의 시선에서, 때로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시선에서 이 천태만상의 이야기 속을 유람한다.
<생생활활>은 각각의 에피소드들이 어떠한 구심점이나 일관된 맥락 없이 자유분방하게 연결
‘현대판 <데카메론>’ <생생활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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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디 앨런 감독이 관객에게 뉴욕을 꿈꾸게 만들었다면 오멸 감독은 보는 이가 제주를 앓게 만든다. 그의 제주는 늘 ‘웃프다’. 인물이 처한 상황의 비루함은 여유로운 삶의 리듬과 유머로 전도되고 그 누구도 일방적인 동정을 갈구하지 않는다.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는 제주 4.3 사건을 ‘제사’(祭祀) 형식을 빌려 스크린 위로 소환한다. 작품은 ‘신위-신묘-음복-소지’라는 소제목으로 분절된다. 하지만 영화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그들이 얼마나 비참하게 죽었는가’가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살고 싶었는가’이다. 감자의 제주 사투리인 ‘지슬’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숨죽이며, 달리고, 항거하고, 배반하면서까지 살아남고 싶었던 이들의 삶에 대한 열망을 응축하고 있는 상징물이다. 그들은 집을 떠나 캄캄한 동굴에 숨어서, 죽은 어미의 품에서 꺼내온 지슬을 먹는다. 그리고 삶의 고통이 무색하게 지슬은 늘 달다.
감독은 희생자의 범주를 제주도민으로 한정하지 않는다. 권력의 틈바구니에
삶에 대한 열망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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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케(오마 사이)는 심장에 문제가 생겼고, 지아니(가드 엘마레)는 심리치료를 받고 있다. 베르다(조이 스타르)는 상대팀 선수를 폭행해 수감 중이고, 레앙드리(프랑크 두보슥)는 실축의 트라우마를 못 이겨 삼류 배우가 되었으며, 마약과 유흥에 찌든 마란델라(람지 베디아)는 방탕한 생활을 그만두지 못한다. 도무지 답이 안 나오는 이들은 축구팀 ‘FC몰렌’의 대표선수들이다. 이 구제불능의 팀을 이끄는 감독, 오베라(호세 가르시아)도 만만치 않은 말썽꾼이다. 한때 국가대표로 잘나갔던 오베라지만 지금은 알코올 중독과 가난으로 점철된 시궁창 인생이다. 딸의 양육권을 얻기 위해 FC몰렌의 감독이 된 오베라는 구단주가 주는 압박 속에서 팀을 재정비하고 프랑스컵 대회에 나가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이자벨 위페르, 마리온 코티아르, 르네 젤위거, 니콜 키드먼 등 쟁쟁한 여배우들과 작업하며 우아한 연출을 특기로 삼아온 올리비에 다한 감독의 이력을 상기하면 <드림팀>은 다소 낯설고, 귀여워
구제불능 축구팀 <드림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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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란티노의 ‘역사 놀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을 통해 나치군에 피의 복수를 함으로써 유럽 역사를 재구성한 타란티노가 미국 노예제 역사에 메스를 들이댄 <장고: 분노의 추적자>(이하 <장고>)를 내놓았다. 영화명을 빌려온 세르지오 코르부치의 1966년작 <장고>처럼 흑인 노예 장고(제이미 폭스)가 주인공이긴 한데, 이 노예가 쇠고랑을 벗는 건 한순간이다. 장고는 착한 사마리아인 같은 독일인 현금사냥꾼 닥터 킹(크리스토프 왈츠)의 도움을 받아 금세 멋진 말을 타고 미국 평원을 달리며 헤어진 아내 브룸힐다를 찾아다니는 총잡이 낭만주의자로 변신한다. 말하자면 얼굴색만 다를 뿐 영락없는 미국 서부극의 주인공이다. 그는 브룸힐다가 미시시피에서 가장 악독한 농장 캔디랜드의 노예로 일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농장주 캔디(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를 찾아간다.
“(<장고>는) 사랑하는 여인을 구하기 위해 지옥의 불구덩
총잡이 낭만주의자 <장고: 분노의 추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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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과 국가는 인간을 보호하는 울타리인 동시에 억압하는 굴레가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선택의 대상이 될 수 없기에 더 폭력적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바바라>는 국가와 체제가 개인의 자유를 제한할 때 생기는 부조리에 초점을 맞추며 냉전시대 동독에서의 삶을 재현한다. 출국신청서를 냈다는 이유로 베를린에서 시골의 작은 병원으로 좌천당한 바바라(니나 호스)는 감시와 통제의 눈길 속에서 살고 있다. 그녀는 잠깐의 외출의 대가로 온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탐문과 알몸 수색을 받아야 한다. 서독에 있는 애인이 출장 올 때마다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긴장감 속에서 잠시밖에 볼 수 없다. 그녀에게 지금 여기의 삶은 사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것이며 여기 아닌 다른 곳에서의 삶을 위해 잠시 유보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그녀에게 이곳을 탈출하여 연인과 새 삶을 꾸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 삶으로 출발하기 직전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이 영
냉전시대 동독에서의 삶 <바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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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사랑만을 위해 모든 걸 던지는 비련의 여인. 영국 로맨틱코미디의 명가 워킹타이틀의 여주인공으로서 손색이 없는 조건이다. 하지만 그 주인공이 19세기 러시아 상류계층의 여인이라면 상황은 달라진다. 캐스팅부터 상영 언어, 로케이션까지 영화의 모든 요소들이 신중하게 결정해야 할 문제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오만과 편견> <어톤먼트>의 조 라이트가 <안나 카레니나>의 연출을 맡으며 직면했던 문제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제작비 3천만파운드를 두고 러시아에 촬영지를 예약했다 취소하기를 여러 번, 결국 조 라이트는 극약 처방을 내렸다. 촬영을 세달 앞두고 <안나 카레니나>의 주요 배경을 극장으로 바꾼 것이다(영화 속 대부분의 장면은 런던 근교의 셰퍼튼 스튜디오에서 촬영했다).
하지만 조 라이트의 이 대담한 시도는 <안나 카레니나>의 영화화에 새로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보는 이가 되새겨볼 새도 없이 숨가쁘게 무대의 막이 오르고 내리며,
19세기 러시아 귀족들의 사회 <안나 카레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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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소프틀리> Killing Them Softly
감독 앤드루 도미닉 / 출연 브래드 피트, 레이 리오타, 제임스 갠돌피니 / 수입, 배급 쇼박스(주)미디어플렉스 / 개봉예정 4월4일
범죄 조직이 관리하는 도박판이 털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용의자로는 중간 관리인 마키(레이 리오타)가 지목된다. 상부에서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잔혹한 킬러 잭키 코건(브래드 피트)을 파견한다. 잭키의 등장과 함께 영화는 피와 살이 튀는 하드보일드 범죄극의 소용돌이 안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전작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로 단번에 주목할 만한 신예로 떠오른 앤드루 도미닉이 연출했고, 전작에 이어 다시 한번 브래드 피트가 주인공으로 출연하였으며, 제작까지 맡았다. 영화는 1974년 출간된 조지 V. 히긴스의 소설 <코건의 거래>를 원작으로 하였으나 오바마 시대의 어떤 초상화가 되기를 원하는 것 같다.
[Coming Soon] 피와 살이 튀는 하드보일드 범죄극 <킬링 소프틀리> Killing Them Soft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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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영화의 전당에서 ‘월드 시네마’ 기획전이 열린다. 3월21일부터 4월25일까지 총 13편의 영화가 상영되는데 1930년대부터 2000년까지 동서양의 걸작들이 선보인다. 상영 목록을 보면 공통된 기준이 있는 게 아니라 기존 영화제에서 거의 상영되지 않았던 작품들이 선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윌리엄 와일러, 존 포드처럼 할리우드 고전영화의 유명 감독에서부터 인도의 샤트야지트 레이, 일본의 미조구치 겐지,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프랑스의 알랭 레네, 독일의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영국의 마이크 파웰 등 세계 거장들의 작품을 모았다.
<벤허> <로마의 휴일>로 유명한 윌리엄 와일러지만 이번에 상영하는 <작은 여우들>은 낯선 편이다. 이 영화는 20세기 초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형제간의 재산싸움을 그린 실내극이다. 팝음악 가사에도 등장한 눈이 큰 여배우 베티 데이비스가 악녀로 등장한다. <분홍신>으로 유명한 마이클 파웰과
[영화제] 낯선 걸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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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에 보면 주민들이 학살을 피하기 위해 깊은 동굴에 숨는데요. 산소가 부족하진 않을까요?
A. 현지인의 견해를 들어보고자 <씨네21> 디자인팀 강지효씨에게 물어봤습니다. 현재는 서울 시민인 강지효씨는 20여년간 제주도에 거주한 바 있습니다. 어렸을 적 종종 동굴에서 놀기도 했다는 강지효씨는 “구멍이 숭숭 뚫린 현무암 동굴이라면 숨쉬기에 불편하지 않을 것 같다”고 답변해주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점성이 낮은 용암으로 구성된 현무암과 <지슬>의 동굴은 관련이 없었습니다. 4.3항쟁 당시인 1948년 11월, 주민들이 숨었던 ‘큰넓궤’ 동굴은 곶자왈 잡목으로 뒤덮인 곳입니다. 점성이 높은 용암이 굳은 뒤 식물과 뒤섞여 숲을 이룬 곳을 제주 고유어로 곶자왈이라고 부릅니다. 곶자왈은 지하수가 풍부하고 보온, 보습 효과가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죠. 하지만 동굴 내부는 지하수에 포함된 철분의 산화작용으로 산소가 결핍될 가능성이
[cinepedia] <지슬: 끝나지 않은 세월2>에 보면 주민들이 학살을 피하기 위해 깊은 동굴에 숨는데요. 산소가 부족하진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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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결혼 준비로 바쁠 텐데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슨 그런 말씀을, 바쁘긴요. 어머니가 캐나다로 가신 다음에는 한가해요. 그런데 제가 결혼한다는 얘기는 어디서 들으셨어요? 한번도 주변에 결혼한다고 얘기한 적 없는데. 아무튼 미국에서 교수한다고 하고요, 지난해에 이혼했대요. 보기 드물게 참 맑은 사람이에요. 저한테 힘이 되는 사람일 거 같아요.
-사실 어디서 들은 얘기는 아닙니다. 홍상수 감독님 영화에 나오는 사람들에게는 대충 “뭐 하셨죠?”라고 그냥 때려 물으면 대개 맞아요. 또 한번 여쭤볼까요, 학교에서 친구들한테 왕따 당하시죠?
=어머 어머 너무 신기해요. 아니 어떻게 아셨어요? 와, 정말 너무 신기하다.
-제가 하나 더 해볼까요. 잠깐 눈 좀 감아보실래요. 이제 신호가 바뀌면 창밖 건널목에 택시들이 설 텐데요, 분명 회색 택시일 겁니다. 자, 이제 눈을 떠보시죠.
=어머 정말이네, 어쩜 이럴 수가 있죠? 이유없이 일어난 일들이 모여서 생각의 라인을
[주성철의 가상인터뷰] 악마의 딸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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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가 지척인 LA에 살지만 보통은 왜 이 도시가 ‘영화의 도시’라고 불리는지 체감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연히 길에서 말을 건 남자가 “오늘 내가 일하는 방송사에서 레드카펫 행사를 하는데 혹시 오고 싶니?”라고 물어올 때면, 그제야 LA의 커피전문점에서 노트북을 켜고 무언가를 쓰고 있는 사람들의 90%는 시나리오작가 지망생이라는 도시괴담이 실감난다. 얼마 전 버스에서 만난 스티브는 초면에 다짜고짜 멋진 걸(!) 보여주겠다며 휴대폰으로 ‘에브리바디 라이스’(Everybody Lies)를 검색해보라고 했다. 알고보니 그와 친구들이 직접 만드는 웨비소드였다. 작가도 연출도 출연도 모두 그 안에서 해결하는 원소스 멀티유스의 전형이었는데, 자신은 트렌드에 맞춰 다양성을 존중하고 싶기에 아프리칸 아메리칸, 히스패닉, 아시안 등 다양한 인종을 캐스팅한다는 부연 설명이 친절하게 따라붙었다. 웹시리즈는 TV 혹은 케이블의 2차적 플랫폼이라는 생각이 컸기에 요즘 이런 게 대세냐고 물었더니, “당연
[LA] 들어봤나, ‘웨비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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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훈이 만화] <웜 바디스> '로또' 1등
[정훈이 만화] <웜 바디스> '로또' 1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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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배우 김보성과 이종격투기계의 황제 에밀리아넨코 표도르가 출연하는 <영웅: 샐러멘더의 비밀>이 개봉 확정되자, 인터넷은 형님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는 이들의 열기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동준과 스티븐 시걸 이후 최고의 조합’, ‘기저귀 챙겨 가서 봐야 할 영화’ 등의 찬사(?)를 받으며 일부 관객층에 나름대로 높은 기대감을 얻었던 이 영화는 수정작업을 거쳐 근 3년 만인 3월14일, 한국 관객을 만나게 되었다. 김보성은 종래의 다소 코믹했던 이미지를 벗고, 치명적 바이러스로부터 인류를 구하기 위해 분투하는 한국의 국정원 요원 장현우 역을 소화해냈다. 힘든 3년 동안의 촬영 뒤 약간은 차분해지지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카메라 앞에 선 그는 여전히 파이팅이 넘쳤다.
-어떻게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나.
=우연히 이종격투기 경기장에서 표도르 한국쪽 매니저를 만났는데, 영화를 한편 준비하고 있다고 하더라. 한국 첩보원이 세계의 평화를 위해 희생하는 내용도 있다고 해서 시나리
[클로즈 업] 표도르, 마이 프렌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