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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드라마에서 극적인 상황과 양식적인 표현을 걷어낸다면 뭐가 남아 있을까?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에서 추측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이나 맥락이 충분했던가? 같은 한국인이니까 읽어낼 수 있는 뉘앙스는? 까맣게 잊고 있다가 JTBC 드라마 <세계의 끝>을 보면서 깨달았다. 극적인 상황의 일차적인 감정에 치중하다 보니 삭제되고 또 눈감게 되었던 리얼리티의 쾌감을. 배영익의 소설 <전염병>을 원작으로 한 <세계의 끝>은 북태평양 베링해에서 명태잡이 조업을 하던 원양어선 문양호가 귀환 도중 기관고장으로 인해 침몰하고 선원 어기영을 제외한 129명의 선원이 실종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 뒤 어기영과 접촉한 인물들이 차례차례 원인 모를 바이러스로 죽어가고, 질병관리본부는 월면을 닮은 괴바이러스를 ‘M바이러스’라 명명하고 감염자를 추적한다.
<세계의 끝>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바이러스 재난에 대응하는 절차와 시스템 안의 인간을 대단히 성실하게 짚는
[유선주의 TVIEW] 안판석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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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살 때 아버지가 나를 국립중앙박물관에 데려간 적이 있다. 당시에 박물관은 덕수궁 석조전을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분위기가 한적했다는 것 빼고는 거기서 뭘 봤는지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단 하나의 기억이 있다. 그것은 박물관에 전시된 석조 불상의 무릎 위에 수북이 쌓여 있던 지폐와 동전이었다. 그 영상이 아직까지 머리에 생생한 것을 보면, 어린 나이에도 그것이 매우 기이하게 여겨졌던 모양이다.
세계의 개시와 붕괴
오늘날 우리가 ‘작품’으로 감상하는 조각들은 대부분 과거에는 종교적 기능을 갖고 있었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신전이나 사원과 같은 건축의 일부가 되어 그 안에서 종교적 기능이 요구하는 장소의 ‘아우라’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근대 이후 한편으로는 보존의 필요에 따라, 다른 한편으로는 교육의 목적으로 신상들이 박물관으로 옮겨지면서, 조각들은 ‘지금, 여기’라
[진중권의 미학 에세이] 신이 없는 신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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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한 트레일러’(honest trailers)는 영화의 단점과 놀림거리까지 망라한 예고편 패러디로 ‘스크린정키스’ (이용자명 screenjunkies, www.screenjunkies.com) 사이트와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표를 산 다음에야 대사가 없다는 걸 알게 되리라”고 시작하는 <레미제라블> 예고편은 아예 노래로 이뤄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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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희 감독의 자전적 영화 <가족의 나라>를 보고 종로 거리를 걸으며, 우리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는 삶이라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얼마나 속절없이 흘러가버릴 수 있는지 생각한다. 1950년대 북한으로 이주한 재일동포 성호(아라타)와 일본에 남은 가족은 그들의 선택이 어긋났다는 사실을 진즉에 깨닫지만, 그것을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가져올 본인의 행복보다 주변 사람들에게 초래할 불행의 총합이 크다고 판단한다. 그래서 제자리에 멈춘 채 더 나빠지지만 않길 바란다. 수술해야 하지만 북한으로 돌아간 뒤의 부작용이 염려되어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먼 나라 이웃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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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이후 빈 라덴을 사살하기까지 CIA의 비밀활동을 다루며 여전히 첨예한 정치적 쟁점을 건드린 탓에 <제로 다크 서티>는 비교적 고른 지지를 얻은 <허트 로커>에 비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들에 따라오기 마련인 불평들, 이를테면 실제로 일어난 일을 왜곡했다며 온갖 증거들을 나열하는, 대개의 경우 영화 자체와 별 관계가 없는 비평들은 열외로 두자. <제로 다크 서티>에 대한 대부분의 비평들이 문제를 삼는 지점은 영화에 등장하는 고문장면에 대한 영화의 태도이다. 빈 라덴에 대한 정보를 얻는 과정에서 수감자들에 대한 고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보여주고 있으므로 결국은 고문을 옹호하는 것이라는 비판적 견해가 한편에, 오히려 현실의 고문을 폭로하는 것이라는 견해가 다른 한편에 있다(“악은 어디에 있는가?”, <씨네 21> 894호). 캐스린 비글로는 이런 논쟁에 대해 <제로 다크 서티>
[신 전영객잔] 이런 무력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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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이 이름을 적고 있네. 누구를 풀어주고 누구를 벌할 것인지. 모두 같은 취급을 받을 수 없을 것이네. 황금 사다리가 내려올 것이다. 그분이 오시는 날.” 너무나 절묘한 선곡인 조니 캐시의 <The Man Comes Around>에 맞춰 브래드 피트가 등장한다.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담배를 피워대며 오직 옆, 뒷모습으로만 등장하는 킬러 잭키 코건(브래드 피트)은 도박장을 턴 멍청한 도둑들을 처리하기 위해 고용된 ‘집행자’다. 등장과 동시에 작업을 의뢰한 드라이버(<번 애프터 리딩>에서 같은 헬스클럽 동료였던 리처드 젠킨스)와 그저 미동도 없이 오직 차 안에서 긴 얘기만 나눌 뿐이지만 여전히 그는 섹시하고 매력적이다. 이제껏 보기 드물었던 색다른 킬러의 모습이랄까. 차 안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는 얘기에도 아랑곳없이 한번 상대를 무심히 째려보고는 연기를 길게 내뿜는다. 아무도 그를 건드릴 수 없다. 이제 올해로 그의 나이 딱 쉰살이다. 하지만 브래드 피트의 시간
[브래드 피트] 야심만만 냉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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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제 신상에 몇 가지 변화가 있었습니다. tbs 교통방송에서 제가 진행하던 <김남훈의 SNS쇼>가 봄 개편을 맞이해 하차를 했습니다.
지난해 이맘때 새로 생긴 프로그램이었는데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소재로 삼는 매우 혁신적인 라디오 프로그램이었죠. 매일 생방송으로 진행을 하다보니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재미도 만만치 않았던 프로그램인데 참 많이 아쉽더군요. 마침 그때 야간대학원에 입학을 한 상태였는데 출연 결정이 너무 갑작스럽게 나는 바람에 휴학도 하지 못하고 대학원 전 과목 F를 맞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학비는 학비대로 날아갔고요.
방송가에서는 3월에 봄 개편을 합니다. 이 시기에는 여기저기에서 한숨이 나기 마련이지요. 저는 라디오 진행을 하면서 다른 프로그램에 게스트로도 출연하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오래했던 것이, 2년 넘게 했던 MBC 라디오 <손에 잡히는 경제>입니다. 토요일 코너인 ‘주간 이슈 뒤집기 한판’인데 이번에 아예 토요일 방송이 없
[김남훈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진짜 디스토피아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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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콤의 신티크(Cintiq)는 풀 HD 화면을 가진 13인치 액정 태블릿이다. 다만 아이패드류의 범용 제품은 아니다. 디자인이나 이미지 편집 전문가들을 위한 제품이다. 복잡한 그래픽 작업에 유용하도록 178도의 넓은 시야각과 1920x1080의 해상도를 지원한다. 화면 크기에 비해 모양이 날씬한 편이라 책상 위 어디에 놔둬도 적절한 미관을 발휘하는 건 장점이다.
정작 돋보이는 건 펜이다. 종이 위에 연필로 그리는 것과 비슷한 2048 압력레벨로 미세한 작업은 물론이고 기울기도 민감하게 감지해 정밀 작업에는 그만이다. 단축키 명령은 4개의 사용자 설정이 가능해 신속하게 작업할 수 있다. 키보드에 대한 의존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말이니까. 평범한 직장인이나 학생을 위한 제품은 아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고성능이다. 예비 웹툰 작가들 혹은 그래픽 디자이너들에게 필요한 제품이다. 제품을 구입하면 케이스가 함께 제공된다. 가격 미정.
[gadget] 웹툰 혹은 그래픽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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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
116.8 × 90.7 × 69.4mm, 무게 407g(메모리 카드, 배터리 포함
특징
1. 세계 최소, 최경량 DSLR.
2. 컨버터나 미러리스 전용렌즈는 필요없다. DSLR에서 쓰던 캐논 렌즈 그대로.
3. 지금은 여성시대. 기계치인 여성들을 배려한 다양한 장면 기능.
4. 확연히 줄어든 오토 포커스 시의 구동 소음.
요즘 카메라 시장의 대세는 미러리스 카메라다. 어찌보면 당연한 결과다. 미러리스 카메라는 (뷰파인더가 전자식이라는 것 정도를 제외하고는) DSLR과 기능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게다가 상대적으로 휴대가 쉽고, 무게도 가볍다. 몇년 전만 해도 자기 얼굴만 한 크기의 DSLR에 거대한 망원렌즈를 장착해 다니며 셔터를 누르던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요즘은 아니다. 휴대의 중요도를 절절하게 느껴서다. 올림푸스의 PEN, 후지의 X-Pro, 소니 NEX 등은 미러리스 카메라 열풍을 타고 판매량이 급증했다. DSLR의 봄날은 그리 길지 않았다.
[gadget] DSLR의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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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file
1985년 학생운동 시절 구속되면서 <항소이유서>를 통해 필력을 알리기 시작했다. <거꾸로 읽는 세계사>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 등의 베스트셀러를 내며 시사평론가, 토론진행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다 2003년 정계에 입문, 최근 10년간의 정치활동을 끝내며 지식소매상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환한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팬이라며 사인을 부탁하는 사람도 있고 꼭 만나고 싶었다며 편지를 남기고 간 사람도 있다. 대부분 책 잘 보겠다는 말로 인사를 마무리한다. 자연인 유시민이 있는 풍경은 정치인 유시민이 머물던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필요한 정치인을 잃었다는 아쉬움도 잠시, 환하게 밝아져 있는 그의 표정을 마주하니 어느새 그의 선택을 지지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인다. 하긴 대신 좋은 글쟁이 한명을 얻었으니 그리 나쁘지 않은 거래다. 10년 만에 지식소매상으로 돌아온 유시민 전 의원을 만났다.
-정치하다 그만두면
[유시민] 출발은 ‘어떻게 죽을 것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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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달간 지하철에서 읽은 일본 미스터리 소설들에 대한 총정리 시간.
“여자를 찾아라”(Cherchez la femme)라는 해묵은 문장. 누아르영화에서 특히 그러하지만 대개의 미스터리/스릴러 소설에서 통용되는 이야기다. ‘예뻐서 팔자 사나운’ 인상의 여자는 클리셰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은 긴다이치 고이스케 시리즈인데, 이런 당부의 말이 실려 있다. 요코미조 세이시가 소설을 쓰던 때에는 상상도 못해봤음직한 말이다. “이 작품에는 오늘날 인권 보호의 견지에 비추어 부당하거나 부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어구나 표현이 있습니다만, 작품 발표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문학성에 비춰볼 때 저작권 계승자의 양해를 얻어 일부를 편집부의 책임하에 고치는 것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아름다운 여자는 절대 사연없이 등장하지 않는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세계에서 여자의 색기란 핏줄로 이어진 남자들조차 유혹하고 파멸에 이르게 하는 치명적인 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
[다혜리의 요즘 뭐 읽어?] 여자, 여자,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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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4월1일로 10년이 되었다. 나이를 영원히 먹지 않을 것 같다고 농담삼아 말했던 그의 아름다움은 그 말 그대로의 의미를 갖게 되어버렸다. 우리는 늙은 장국영의 얼굴을 볼 수 없다.
책을 쓴 주성철 기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장국영>을 받아들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정신없이 책을 뒤적거리며 사진 구경하기였다. 그의 대표작 스틸컷들과 더불어 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기록, 그와 연관된 장소들이나 세계문학전집 두께인 옛 비디오테이프 표지들, 방한 사진들이 한가득이다. 그가 나온 초콜릿 CF 사진도 있다.
그러고 나서야 글이 보인다. 홍콩영화 전문가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게 장국영이라는 배우의 개인사를 기록하는 일부터 시작해 그를 추억하는 많은 홍콩 영화인들과의 대화, 한국을 방문했던 장국영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만일 당신이 장국영의 팬이고, 홍콩을 찾아 그의 흔적을 더듬고 싶다면 이 책은 최고의 가이드북이다. 하지
[도서] 哀而不悲(애이불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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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6월23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문의: moca.go.kr
흩어진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모처럼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기회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리는 <젊은 모색 2013>은 추천과 심사를 통해 선발된 9명의 ‘젊은’ 작가 작업을 망라하는 전시다. 미술관 학예연구사들은 ‘젊은’ 작가들의 범위를 30대 중반으로 제한한 과거의 제도 방식에서 벗어나 ‘작품의 태도와 내용’에 방점을 찍고 전시를 구성했다고 밝힌다. <젊은 모색전>은 1981년에 처음 기획되어 30년 넘게 이어져온, 국내 미술계에서 보기 힘들게 지속적으로 진행되는 전시 프로그램이다.
전시장에서 이 젊은 작가들의 공통점을 찾으려는 관객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9명의 작가들은 자기 작업을 하고 보여줄 뿐이다. 눈도 코도 입도 없는 음험한 인물 초상화를 그리는 유현경의 그림이나 대만 타이베이 거리 한복판에서 구직 활동을 벌이는 구민자의 프로젝트, 새로운 어법의 설치 작업을 연구하는 김민애,
[전시] 아홉 가지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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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간: 4월20일까지
장소: 313 아트프로젝트
문의: www.313artproject.com
소피 칼(Sophie Calle)의 작업은 아주 작은 단서에서 시작한다.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남자나 누군가에게 받은 쪽지, 호텔 방에서 주운 물건, 어제 오후의 기분 따위가 그가 작업하는 이유다. 미술 작가이기 이전에 우연과 소문을 수집하는 한 사람으로서 소피 칼의 작업을 보는 것은 ‘다른’ 이야기를 만나는 일이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하루에 작가는 스스로 탐정, 여행가, 시인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어도 상관없는 제3의 존재를 동행하게 한다. 소설가 폴 오스터와의 협업이나 탐정을 고용해 자신의 뒤를 추적하게 했던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1970년대부터 활동한 작가는 ‘개념미술’(conceptual art) 교과서의 한 페이지에 쓰여 있지만 오늘날 작가가 벌이는 이야기의 게임은 여전히 질문투성이다.
전시된 작품 <잘 지내기를 바라요>(Take Care of
[전시] 일상이 사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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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선/ 음악웹진 ‘보다’ 편집장 ★★★☆
긴 시간이었다. 무려 7년 만의 새 앨범이지만 ≪FutureSex/Love-Sounds≫(2006)의 성취와 영광에 기대지 않아도 될, 그 자체로 탁월한 메인스트림 팝 앨범을 만들어냈다. 세월의 흐름만큼 물리적인 나이뿐 아니라 음악까지 어른의 것이 되었다. 적당한 그루브와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는 센스있는 장치들. 어른이 되었어도 섹시한 건 여전하다. 친숙하되 안주하지는 않는다.
이민희/ 음악웹진 ‘백비트’ 편집인 ★★★☆
전작이 급진적으로 미래지향적이었다면 ≪The 20/20 Experience≫는 온건하게 과거를 지향하면서 시작한다. 클럽의 지배자였던 그가 우아하고 품격있는 디너 파티로 이동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근본적으로 ‘올드’한 캐릭터가 아니기에 무려 7~8분짜리 노래를 들고 다시 날뛰는 클럽으로 돌아간다. 그만큼 창의성이 소실됐지만 수준에 대한 신뢰가 무너질 정도는 아니다. 즉 전작만 한 깜짝쇼는 없다. 하지만 브랜드 가치에
[MUSIC] 오! 저스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