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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2일 금요일 밤, 어느새 시간은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20여명 남짓한 스탭들이 옹기종기 들어선 일산서구 소재 어느 조각가의 작업실 겸 거처에도 스산한 밤공기가 스며들었다. 정적 속에 영화감독 동원(최덕문)이 크리스마스 선물 겸 신혼 집들이 선물을 사들고 미술감독 정수(박혁권)네를 찾았다. 두 남자는 곧 정수가 수일 밤을 지새우며 만든 여중생 시체(류혜린) 앞에 쪼그려 앉았다. 하지만 그들의 시선은 좀처럼 교차하는 법이 없었다. 숙제 검사를 받는 학생이라도 된 듯 초조한 정수, 백열전구 아래 묘한 화색을 발하는 시체, 진짜 같은 시체에 흠칫하는 동원, 순둥이 남편의 뒤통수를 답답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선 정수의 아내 영선(신동미)까지. “오늘 오후에 처음 모였고 리허설도 처음 했다”는 네 배우 사이에는 벌써 끈끈한 호의가 감돌았다. 그들끼리 ‘살아 있는 시체의 밤’이라도 찍고 있는 것 같았다. 기미를 감지한 박진성 감독은 모니터 뒤에서 “뭔가 함께 비밀 제의를 치르는 사람
시체에게도 담요를 덮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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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모텔일 거라 생각하고 갔는데 ‘매직하우스’라는 이름의 세트장이었다. 아뿔싸! 베드신을 공개한다는 제작진의 전갈을 제멋대로 오해한 것이다. 3월23일 경기도 남양주시 근처의 한 세트장에서 진행된 이상우 감독의 <비상구> 촬영현장. 색색의 조명이 칙칙한 모텔방 세트를 요란하게 비추고 있었다. 침대 위의 남자 우현(한주완)은 여자(조윤희)의 배꼽 아래 새겨진 화살표 모양의 문신을 핥고 있었다. 촌스러운 여관 조명 때문인지 그들의 벗은 몸은 유독 앙상해 보였고 앙상한 두 육체가 뒤섞이는 풍경은 그래서 더욱 쓸쓸해 보였다. 혹여 배우가 불편해할까봐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두리번거리던 중, 이상우 감독이 “컷!”을 외친 뒤 기자를 반갑게 맞이한다. “촬영 장소가 모텔일 거라 생각했다”는 어색한 농을 인사 대신 건넸다. 그는 웃으며 “섭외 가능한 모텔이 하나도 없었다. 세트를 짓는 바람에 제작비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들어갔다”고 아쉬움부터 털어놓았다.
<엄마는
벌거벗은 청춘들이 향하는 그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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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숏!숏!숏!’은 디지털 삼인삼색과 함께 전주국제영화제의 간판 메뉴. 매년 여러 명의 감독이 한 가지 주제를 가지고 영화를 만드는 프로젝트다. 올해는 ‘소설, 영화와 만나다!’라는 주제로 이상우, 박진성, 박진석, 이진우 감독 등 총 세팀이 소설가 김영하의 단편소설 <비상구> <마지막 손님> <피뢰침>을 각각 단편영화로 찍는다. <씨네21>은 이중 이상우 감독의 <비상구>와 박진성, 박진석 형제 감독의 <THE BODY>의 촬영현장을 찾았다. <비상구>와 <THE BODY>(원작은 <마지막 손님>), 그리고 이진우 감독의 <번개와 춤을>(원작은 <피뢰침>) 세편은 4월25일부터 5월3일까지 열리는 제14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된다.
텍스트에서 태어난 이미지를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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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네권의 책은 질문을 받고 가장 먼저 떠올랐던 목록이다. 그렇다고 매일 탐독하는 책들은 아니다. 들뢰즈의 말을 빌리자면 이 책들은 의미를 찾는 것과는 무관한 하나의 기계에 가깝다. 그러니 중요한 것은 이 책들이 내게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말하는 것일 터이다. 말하자면 영화에 대한 나의 생각들을 움직이게 만들었던 책들이다.
영화에 대한 나의 생각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영화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이 여전히 어렵다. 세르주 다네가 신문의 글쓰기에 대해 말하듯, 할 수 있는 말은 아직까지 이런 식이다. “내일은 영화에 대한 생각이 보다 정리되는 날들이 올 것이다.” 영화에 대한 일종의 기후학적 사유가 있다. 미셸 세르의 <헤르메스>의 첫 구절이 그렇게 내게 다가왔는데 그건 구름을 말하는 것이었다. “태초에 혼돈이 있었다. 폭풍우를 만난 것 같은 야단법석과 아우성들. 이른바 세계의 체계 바깥에서 커다란 무질서가 화려하게 다가왔다. 언제나 저기, 별이 총총한 바람층에 흩어진 구름
문장들로 이루어진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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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여자들을 욕먹을 걱정 없이 맘껏 훔쳐볼 때면 여자로 태어난 게 참 다행이다 싶다. 여성을 향한 시선 뒤에 숨은 욕망의 음험함에 대해,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관대한 해석을 내려주니 말이다. 하지만 역시나 가장 속편한 훔쳐보기는 스크린 앞이 최고다. 육체적 미학에 있어 이 시대의 정예부대가 성별을 가리지 않고 진열되어 있는 데다 영화란 본질적으로 훔쳐보기를 위한 매체가 아니던가? 어두운 곳에서 나를 노출시키지 않고 대상을 맘껏 응시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으니. 하지만 여성 관객으로서 영화를 본다는 것은 끊임없는 자아분열을 야기한다. 나도 그녀들을 즐겨 보지만 그녀들이 즐겨 보여지도록만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은 매우 불편하기 때문이다.
대중에 노출된 여성의 육체는 아름답지만 위험하고 한편으로는 전복적이다. 신현규의 <기생, 조선을 사로잡다>는 ‘근대’와 함께 도래한 조선의 대중사회에서 공공의 여성으로 소비되었던 ‘기생’들의 면면이 흥미롭게 기록되어 있다. 소리,
여자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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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글이 어렵다. 그래서 멋있다. 책을 펴보자. 엄청난 용어들이 다발로 튀어나온다. 분자, 역능(puissance), 욕망하는 기계, 횡단, 분열, 유목민, 무엇보다 소수. 이 단어들은 소위 후기 구조주의라 일컬어지는 라캉, 푸코, 알튀세르, 베냐민, 라이히(그렇다. 성적 에너지가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그 미친 정신분석학자!)의 개념들을 확장해서 극복하려는 의지가 담긴 개념이라고 한다. 그 어려운 책 <천개의 고원>으로 유명한 들뢰즈도 비슷한 단어들을 나열한다. 가타리는 그 책의 공동저자이기도 하다.
어려워서 멋있는 것도 있지만, 단어들만 모아놓고 자세히 살펴보면 혁명적으로 보인다. 전체가 아니라 부분, 인간이 아니라 기계(유물론적 관점에서), 정주행이 아니라 횡단, 정착민이 아니라 유목민, 다수가 아니라 소수. 뭔가 삐딱하다. 그렇다. 가타리가 들뢰즈와 함께 (혹은 따로) 주장하고 싶은 것은 미시정치학이다. 사회를 움직이는 힘을 거대한 전체로 사유하
오직 분열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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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오늘도 심각한 영화 몇편을 보았으며, 그에 부응하듯 심각한 고민을 몇번 했으며, 그에 근거해 언젠가 배운 몹시도 현학적인 개념 몇개를 떠올려보았으며, 그를 인용할 수 있는, 남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생각할 수 없는, 최소한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생각 좀 해볼 수 있는, 전대미문의 시나리오와 이미지를 생각해냈다. 그래, 이게 성장이다… 흡사 단세포생물에서 고등생물로, 그 뇌의 주름이 더욱 촘촘해지고 신경계가 더 복잡해지듯이, 난 오늘 하루 성장한 것이다.
…라고 페이크. 성장은 신화였을지도 모른다는 공허감이 갑자기 밀려온다. 어려운 길로 시나리오가 그려지고, 좀더 복잡한 그림으로 이미지가 진화해나갈 때, 그리고 그와 함께 공허가 밀려오는… 이러한 비상사태에 대비해서, 마침 난 몇권의 만화책을 비치해두었다, 주도면밀한 복화술 같으니라고. 기억을 더듬어보면 모두 다 빛을 발한다. 길창덕, 오원석, 박수동. 그래, 이 공허감을 달래기 위해 내가 돌아가봐야 할, 내 최초의 ‘영화’는 박
국딩이여 영원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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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1786년 37살 때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떠났다기보다는 도피했다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당시 괴테는 삶의 첫 번째 절정에 도달해 있었다. 바이마르공국의 존경받는 공직자이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유명 작가, 그리고 여성들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던 사교계의 유명 남성이었다. 24시간도 모자랄 일정이 그의 하루를 다 채웠다. 그는 이 모든 것을 당분간 놓고 싶었다. 시간의 억압에서 벗어나려고 간 곳이 바로 이탈리아이다.
지금도 유럽인들은 알프스만 넘어가면, 곧 이탈리아에 도착하면, 공기부터 다르다고 말한다. 자유롭다는 뜻이다. 과거에도 물론 그랬다. 괴테는 이탈리아의 북부 베로나에 도착한 뒤, 가르다 호수 주변 풍광의 장관에 넋을 잃었고, 무엇보다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밖에 나와 앉아 있는 태평한 사람들의 태도에 매혹됐다. ‘모범생’ 괴테는 도착하는 도시마다 미술관과 유적지들을 방문하여, 걸작들의 품위를 <이탈리아 기행>에
여행, 망각하고 탈주하고 회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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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작정하기로는 ‘문자가 중개해준 이미지와의 잊지 못할 첫 경험’이라는 면에서 나와 동세대의 유년 시절에 말 못할 실존적 고민과 죄의식을 함께 드리웠던 당대의 유명 도색 서적 한권을 추억하려 했지만 현재 구할 수 없는 책은 제외라는 조건이 붙어 그러지 못하게 되자 이상하게도 거의 정반대의 성격처럼 보이는 이 책이 문득 떠올랐다. 도색과 고독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 책의 제목은 <거대한 고독>이고 지은이는 프랑스 작가 프레데릭 파작이며 일종의 그림책이다.
역자의 말에 의하면 지은이는 <고독의 발명가, 마틴 루터> <사랑의 슬픔, 아폴리네르> <유머, 제임스 조이스> 등도 펴냈다고 한다. 크고 깊은 추상적 문제를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의 세계를 면밀히 탐색하여 통찰해나가는 타입인가 보다.
<거대한 고독>에서는 두명의 작가 니체와 파베세와 이탈리아의 도시 토리노를 하나의 몸으로 보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니체에
자기만의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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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책이라. 이것은 사실 오답이 없는 질문이다. 스크린은 네모난 저수지라서, 웬만한 지류는 그리로 흘러 들어간다. 차라리 영화 보기에 일생 도움이 안되는 책을 묻는 편이 쉽다. 원작 없는 흥행영화를 급히 소설로 개작한 ‘시네마 문학’이 즉각 떠오른다. 이 책들은 대개 해당 영화를 보기 전에 읽으면 스포일러고,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읽으면 “원래 영화라서 다행이야”라고 한숨을 내쉴 확률이 70%를 웃돈다.
우선 연표와 지도책은 항상 긴요한 영화 참고서다. 이유는 간단하다. 영화 역시 지구라는 행성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분명 나를 극장으로 밀어가는 힘은 어린 시절 질릴 줄도 모르고 지구본을 하염없이 돌려보던 호기심과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대학 진학 무렵 나는 역사를 전공으로 택했는데, 2, 3년이 흐른 뒤 내가 상상했던 역사학의 재미는 영화의 그것에 가깝다고 멋대로 결론짓고 영화 잡지에 이력서를 냈다. 그런데 최근 영화와 화법이 비슷한 역사서와 마주
시네마로 가는 백만 시점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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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이 책을 내게 권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의아하다. 몇년 전 가라타니 고진의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을 뒤적이다가 만난 콘라트 로렌츠(1903∼89)라는 동물학자의 이름에 갑자기 이끌렸고(이상한 일은 가라타니가 그를 칭송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이며 1949년에 첫 출간된 <솔로몬의 반지>를 샀다. 그 책을 읽는 동안의 행복감은 아직 잊혀지지 않는다. 책을 사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누어준 것도 <솔로몬의 반지>가 처음이었다.
이 책을 사랑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그건 콘라트 로렌츠가 위대한 인간이어서도 아니고 이 책이 인류의 위대한 지혜를 담고 있어서도 아니다. 사실을 말하면 로렌츠는 한때 나치의 지지자였고 그 사실을 끝내 시원스레 해명하지 않은 채 그의 생을 면밀히 조사한 전기 작가들도 풀지 못한 수수께끼로 남겨두었다. 그토록 동물을 사랑한 사람이 어떻게 나치즘에 동조할 수 있었을까, 라는 수수께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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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과 느긋함, 그 진귀한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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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가을 우리가 해온 영화책 특집이 영화로 가는 지름길을 알리는 일이었다면, 이번 봄에는 수많은 갈래의 우회로로 들어서보고 싶었다. 언뜻 영화로 귀착되지 않을 것 같은 그 미지의 행로 위에서 영화와 더 애틋한 만남이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씨네21>의 주요 필진 8인에게 영화와 무관해 보이지만 실은 영화를 보거나 영화에 관한 글을 쓸 때 영화책보다 더 요긴하게 활용해온 ‘비’영화책을 공개해달라 청했고, 20여권의 책이 모였다. 그 목록을 붙여보니 하나의 무질서한 독서 노선도가 만들어졌다. 어느 역사가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동물원에서 내릴 수도, 박물관을 구경하다 생소한 철학자의 뇌구조도를 입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길을 잃을까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길을 잃기 위해 나선 여행이니까. 무언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 잘 헤맬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을 믿는다면, 이 8인의 글을 지도 삼아 지금부터 조금은 무모한 지적 여정에 나서보자.
영화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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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조한 성적과 호의적이지 않은 평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내게 영감으로 가득한 작품이다. 아름답고 우아하며 또한 삶과 죽음의 위협에도 영속성을 쟁취하는 사랑에 대한 영화. 아 그러니까, 사랑. <클라우드 아틀라스>의 세계관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순환하는 삶, 거기에는 문이 하나 있을 뿐이라는 믿음, 우리는 어째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가에 대한 질문. 그 각성이 영화를 밀고 나간다. 이때 음악은 그 주제이자 방법론이면서 내러티브의 일부로 자리한다.
워쇼스키 남매와 공동으로 연출한 톰 티크베어는 그가 속한 영화음악 집단인 페일3(Pale3)와 스코어를 완성시켰다. 비비언 에어스가 “바로 이거야! 내가 꿈에서 들은 음악!”이라 외치는 테마는 순환구조로 반복되며 우주의 경이로운 프로젝트를 떠받친다. 피아노가 만드는 아름다운 테마 뒤로 관악기와 현악기가 수줍게 끼어드는 구조는 긴장보다 이완에, 투쟁보다 평화에 가깝다. 사랑을 지키기 어려운 시대에 고난을 나누고 미래를 꿈꾸는
[차우진의 귀를 기울이면] 죽어도 사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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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베이컨의 TV 데뷔작이 된 <더 팔로잉>(<FOX>)을 보고 있으면, 과연 이 TV시리즈가 미국의 공중파 채널에서 방영되는 것이 맞는지 의심스럽다. 잔인하기 때문이다. 파일럿에서만 4번의 살인장면이 등장했고 대충 얼버무리기는커녕 어떤 흉기로 어떻게 살해하는지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HBO>나 <Showtime> 같은 케이블 채널에서 방영되는 TV시리즈와 다르게 미국의 공중파 채널은 표현 수위를 엄격하게 지키며 언제나 법이 승리하는 그야말로 안전한 내용의 프로그램이 방영된다. 한데 그런 기준에서 보자면 <더 팔로잉>은 잔인한 것도 그러하거니와 에피소드 8편이 방영된 지금까지 계속해서 악인이 승리하는 것도 공중파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전개가 아니기에 충격적이다. 더욱이 뱀파이어도 좀비도 아닌, 회계사, 교사, 아버지, 어머니 등 주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인정받고 싶다”는 바람에서 저지르는 살인이다보니 유혈이 낭자한
[안현진의 미드 크리에이터 열전] 폭력의 전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