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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라 스탠윅은 ‘나쁜 여자’다. 빌리 와일더의 <이중배상>(1944)에서 보인 독한 여성의 이미지가 워낙 강렬했다. 돈을 위해 남편과 애인을 이중으로 배신하는 금발의 요부로 나와 남자들의 순진한 환상을 무참하게 깼다. 나이 많고 돈 많은 남편이 집을 비웠을 때, 젊은 안주인과의 스릴있는 모험이라는 남성의 백일몽은 결과적으로 목숨을 요구하는 메두사의 공포였다. 스탠윅이 연기한 필리스라는 여성은 방금 전 샤워한 젖은 금발에, 몸에 끼는 치마를 입고, 발찌 낀 다리를 까닥거리며 처음 본 세일즈맨을 유혹하는 태도로, 필름 누아르 시대의 못된 요부의 전형으로 각인됐다.
‘나쁜 여자’를 누가 발명했나
‘못된 여성’ 스탠윅의 이미지는 프랭크 카프라의 발명품이다. 사운드 시대의 도래를 맞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배우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스탠윅은 브로드웨이의 댄스걸 경력밖에 없었지만 발성을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선배 배우들의 빈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스탠윅의 허스키한
[한창호의 오! 마돈나] 욕망하라 대낮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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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요즘 태일과 자주 영화를 보게 된다. 평일 낮에 극장을 어슬렁거릴 수 있는 한심한 친구가 드물기 때문이다. 태일은 아직도 인디밴드에서 베이스를 연주하는 동갑내기다. 당연히 음악으로 먹고살기는 불가능해 틈틈이 인맥을 동원해 작은 행사- 예를 들면 지방 도시의 소규모 축제 무대- 같은 것을 기획하기도 하는데, 역시 넉넉한 벌이가 되진 못한다. 하여 늘 돈에 쪼들리나 어찌된 일인지 나에게 빈대 붙을 때만은 미안한 기색 하나 없다. 다른 곳에선 그 잘난 자존심 때문에 다 된 일도 그르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친구를 알게 된 지 이십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아직 그 말투에 익숙해지질 않는다. 상대에 대한 배려가 거의 없고, 하고픈 말은 무조건 내뱉고 본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게 워낙 많아서 말싸움을 하려 해도 쉬이 상대가 되질 않는다. 결국 둘이 얘기하다 보면 나는 주로 듣는 편이 되고 만다. 혹은 목소리 좀 낮추라며, 남들이 듣겠다며 주위를 둘러보는 난처한 상황에 빠지거나.
[이적표현물] 섹스엔 포르노, 인생엔 영화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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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이 창간한 해. 아무것도 모르고 취재하러 간 칸영화제에서 정신을 추스르려 책방에 들어갔다가, 칸에 관한 로저 에버트의 에세이 <한낮의 태양 아래서 2주일>(Two Weeks in the Midday Sun)을 집었다. 저자 사인회라도 했는지 친필서명도 있다. 에버트는 이 책의 삽화도 직접 그렸는데, 당시 평론가들 사이에 유행했던 조명 들어오는 펜을 향한 울화통이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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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 결혼기념일에 공교롭게도 <안나 카레니나> 시사를 놓치고 <호프 스프링즈> 시사에 출석했다는 사실에 의미를 부여해볼까 했으나, 역시 억지스러워서 그만두기로 한다. 세 자녀를 다 키워 독립시킨 결혼 30년차 케이(메릴 스트립)는 결혼의 낭만을 회복하고자 시도하지만 남편 아놀드(토미 리 존스)의 반응은 한마디로 “이 여편네가 뭘 새삼스럽게!”다. 케이는 온화하지만 결코 물렁한 여자가 아니다. 극히 비협조적인 남편을 한사코 카운슬링 여행에 끌고 가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태엽 감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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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창간 18주년 축하 영상’ 유준상 황정민 윤제문
‘씨네21 창간 18주년 축하 영상’ 유준상 황정민 윤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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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 재석과 달리 되게 평범했다. 조용하고. 나중에 뭘 하며 살아야 하나 고민도 많이 했다. 고민의 결론이 연기를 하는 것이었다.
막무가내도 이런 막무가내가 없다. 한대 맞았다고 남의 학교 복도에 쳐들어가 자신을 때린 사람 나오라고 외치질 않나, 그마저도 성이 안 찼는지 소풍 가는 데까지 쫓아가 맞은 거 되갚으려고 하질 않나. ‘남서울고 독종 미친개’라는 별명답게 <전설의 주먹>의 재석(박두식. 윤제문의 아역)은 앞뒤 안 가리는 친구이자 빚지고는 못 사는 친구다. 대개 이런 부류의 친구들 중에 의리 하나는 칼같이 지키는 친구가 많다. 덕규(박정민. 황정민의 아역)와 상훈(구원. 유준상의 아역)이 으르릉거릴 때마다 재석은 둘 사이에 끼어들어 “<영웅본색>의 주윤발과 적룡이 싸우는 거 봤냐”며 화해를 종용하는데, 단순무식한 그 모습이 전혀 얄밉지가 않다.
윤제문은 원작인 동명 웹툰을 읽자마자 자신이 재석을 연기하게 될 거라 직감했다. “강우석 감독님이 출
[윤제문] 못 말리는 막무가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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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친 다음에 모든 과정을 일기에 다 적어놨다. 나중에 봐야지. 경험하지 않았다면 더 좋았을 순간들이지만, 내가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구나, 스스로 도닥거려준 계기도 됐다.
웬만해선 그를 막을 수 없다. 끝까지 “괜찮습니다. 괜찮다니까요”다. 불혹을 넘긴 과거 고교 싸움‘짱’들의 서바이벌 쇼 <전설의 주먹> ‘전설대전’ 4강전에서 ‘샐러리맨의 우상’ 이상훈(유준상)은 쉽게 무릎을 꿇지 않는다. 적어도 링 위에서는 그렇다. 다리가 부러지는 고통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오기로 악으로 버틴다. 그렇게 결승행 티켓을 따낸 뒤에야, 링에서 내려간 뒤에야, 카메라의 고개가 돌아간 뒤에야, 자신에게 무너질 여유를 허락한다.
‘스크린’이란 링 위에 오른 배우 유준상도 다르지 않았다. 현실법칙에 굴복한 대기업 홍보부장에서 전설의 파이터가 된 사내 이상훈은, 말 그대로 ‘사투’를 벌여서 얻어낸 결과물이다. 리허설 중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부상을 당하고도 그는 “무조건 끝내야 한다”는 일념
[유준상] 목숨걸고 혼연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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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션 연기가 너무 힘들어서 다시는 안 할 거다 했다. 그런데 몸으로 익힌 게 무섭더라. 정두홍 감독님한테 며칠 지나고 ‘액션 재밌는 거 같아요’ 했더니 막 웃더라. 그 재미에 자기도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고. (웃음)
대한민국에서 슈트발 최고인 배우를 꼽으라면 단연 황정민이다. 이병헌의 연기력을 뒷받침하는 든든한 지원군이 저항할 수 없는 그의 목소리라면, 황정민의 몸은 그런 의미에서 마찬가지로 절대 우위를 차지한다. 팔다리가 길고, 몸집이 탄탄한 황정민은 감상을 위함이 아닌, 살아 있는 풍채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몸의 리듬이 곧장 캐릭터가 가진 멋스러움을 완성하는 진귀한 소품이 되는 것이다.
<전설의 주먹> 로커룸 장면에서 상의를 탈의한 황정민이 걸어나올 때, <아저씨>의 원빈을 향했던 탄성(원빈쪽이 좀 길긴 했다)이 관객석에서 새어나왔다. 고등학생 때 권투로 다져진 몸, 마흔이 넘어 이종격투기 대회에 참가하는 영화 속 전설의 주먹 덕규의 몸은 특별히 지
[황정민] 여유롭게 저벅저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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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디오에 미리 가 있던 후배 기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배우들이 이미 도착했단다. 어라,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간으로부터 아직 한 시간이나 넘게 남았는데. 어쩌랴. 배우들이 기다리고 있다는데. 그것도 <전설의 주먹>에서 격투기로 단련된 배우들 아니던가. 부랴부랴 도착한 스튜디오 안은 동창회 분위기였다. 영화에서 덕규 역을 맡은 황정민은 스튜디오 벽에 붙어 있는 사진을 보며 수다를 떨었고, 상훈 역의 유준상은 맏형답게 분위기를 주도했다. 재석 역의 윤제문은 특유의 무심함으로 동생 황정민과 형님 유준상을 받쳤다. 다음 장부터 세 배우의 <전설의 주먹>도전기가 펼쳐진다. 참, 예정보다 촬영이 일찍 끝나자 윤제문이 유준상을 향해 외친다. “형님, 술먹으러 가야죠!” 이 말을 들은 유준상의 한마디. “어, 난 한잔만 할 거야.”
[전설의 주먹] 친구야! 한잔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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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꽃의 계절이다. 봄꽃들이 까르륵대며 올라오는 중이다. 이맘때면 꽃을 사랑한 화가들이 떠오른다. 꽃을 사랑한 화가들은 꽃이 사랑한 화가들이기도 하다. 봄볕 속에 나른하고 비스듬히 앉은 채 뒤적거리게 되는 화집은 주로 조지아 오키프. 생명력 가득한 우아함과 힘, 관능적인 해방감, 건강한 욕망과 자유. 그녀가 그린 꽃들은 하나씩의 생생한 우주로 존재한다. 개화와 낙화로 대변되는 생로병사의 일반론에 파묻히지 않고 저마다의 고유한 에너지 파동으로 퍼덕거린다. 조지아 오키프는 자연의 존재방식이 인간의 모든 예술창조 행위의 근원임을 증명하는 탁월한 예술가 중 하나다. 꽃, 조개껍질, 돌멩이, 나뭇조각 등에서 그녀가 발견해내는 새로운 우주는 한없이 매혹적이다. 평생토록 일관되게 그녀가 말해온 것처럼 “세상의 광활함과 경이로움을 가장 잘 깨닫게 해주는 것은 바로 자연이다.”
봄의 꽃 폭풍 속에서 조지아 오키프의 꽃들을 즐기고 있을 때, 나는 감사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낀다. 봄이면 어쩔
[김선우의 디스토피아로부터] 안녕하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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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위해 찾은 삼청동 카페 안에는 이미 그가 <통증>(2011) 홍보 때 남긴 사인이 걸려 있었다. 모르긴 해도 최근 그가 새 출연작을 알리며 남긴 사인이 삼청동 곳곳을 장식하고 있을 터였다. 지난해 출연작이 우정출연작을 포함해 8편, 올해도 벌써 3편째다. 하지만 그는 “나한테 책(시나리오)을 주시는 분들은 그냥 다 고맙다”며 멋쩍게 웃었다. 그와 작업해본 이들이 재차 러브콜을 보내는 이유도 그 우직함 때문 아닐까. 그 인연을 시험이라도 하듯 친분이 깊은 이지승 PD의 연출 데뷔작 <공정사회>와 김태훈 PD의 <노리개>(최승호 감독)가 4월18일 나란히 개봉한다. <공정사회>에서 아동 성폭행 사건을 묵인하는 막장 형사 마동철과 <노리개>에서 연예인 성상납 사건을 파고드는 열혈기자 이장호가 맞붙는 것이다. 손오공처럼 분신술을 선보인 배우 마동석은 한몸에서 태어난 마동철과 이장호 중 누구를 응원할까.
-자신이 출연한 두 영
[마동석] 브레이크 없는 폭주기관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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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도 만난 적 없는 고등학생 페이스북 친구로부터 날아온 메시지.
“변호사님! ㅎㅎ 뭐 하나 여쭙습니다. 좋아하는 여자아이 생일 때 선물할 만한 소설책에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책을 좋아하시는 분이니 조금만 도와주세요!! 감사합니다. *^^*”
하, 기특하면서도 한편으로 애잔한 마음이 들게 하는 녀석. 내가 해봐서 아는데, 18살 때 좋아하는 여자아이 생일에 책 선물 같은 거나 하고 있다가는 덕후 소리 듣고 차이기 십상이란다. 하지만 의뢰인의 질문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것이 변호사의 본분. 즉답을 보낸다.
“고등학생이군요.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권해드립니다.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나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도 선물하기 좋습니다. 여자 친구 생일 즐겁게 지내세요.^^”
질문을 한 학생처럼 나도 어린 시절 어떻게 좀 잘되기를 바라면서 교회누나와 책을 주고받던 기억이 있다. 책을 선물할 때는 누구나 어떤 의미
[금태섭의 서재에서 잠들다] 책 선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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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미권 장르소설 비평가와 편집자들이 추려 뽑은 단편 컬렉션.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의 마이클 코넬리, <좀비>의 조이스 캐롤 오츠, 미국 드라마 <트루 블러드>의 원작인 ‘수키 스택하우스 시리즈’의 샬레인 해리스 등 영미권 장르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들의 단편소설이 <밤과 낮 사이1, 2>에 모였다. 다소 이름이 낯선 작가들의 작품으로 가는 흥미로운 문이 되어줄 작품들도 함께 만날 수 있다.
[도서] 영미권 장르문학 단편 컬렉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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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작가, 라는 말에서 가능성의 울림을 느끼는 독자에게 권한다. 이장욱, 황정은, 김미월처럼 이름만으로도 책을 들춰보고 싶게 만드는 작가들의 단편들을 만날 수 있다. 신춘문예 등단작 <거리의 마술사>로 젊은작가상 대상까지 수상한 김종옥은 앞으로 주목해야 할 작가. 집단따돌림에 시달리던 학생의 죽음을 재구성하는 과정을 따라가다보면, 한편의 소설이 현실의 아픔에 해줄 수 있는 위안을 믿게 된다.
[도서] 젊은 작가들의 단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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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지금, 여수 영취산에는 진달래가 산등성을 붉게 물들인다. <신동엽 시전집> 맨 앞에 실린 <진달래 산천>은, 그 호화로운 붉음이 피의 붉음이었던 시간을 잊지 말라는 청에 다름 아니다. “잔디밭엔 담뱃갑 버려 던진 채/ 당신은 피/ 흘리고 있었어요”라고 끝나는 시 옆에 이 시의 첫 수록 지면이 <조선일보> 1959년 3월24일자라는 게 농담처럼 들린다. <껍데기는 가라>처럼 수없이 읽고 들은 시가 여전히 새롭게 정신을 일깨운다는 감동도 느껴보시길.
[도서] 수없이 읽고 들은 시